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82화 (1,049/2,000)

< 1065. 회장의 자격-3- >

물론 도훈이 먼저 계산을 치른 걸 모르는 성수는 화장실에허 혼자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아씨, 너무 기분 냈나. 주머니 사정 진짜로 빠듯한데.'

하지만 이제와 도로 물리자니 가오가 살질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체육과의 맏 형. 후배 둘이 군대를 가는데 돈이 없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 한동안 컵밥 좀 먹고 여친한테 빌붙으면 되겠지, 뭐.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 성수가 화장실에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과 태영을 향해 물었다.

"야. 군대 가는 마당에 남자들끼리 술 마시면 너무 우울하지 않냐?"

"네? 갑자기 왜…."

"어쩔 수 없죠. 저희들 같이 술마셔 줄 여사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없어? 1학년들 있잖아?"

우선이 1학년이라는 말에 살짝 귀가 쫑긋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솔인 그에겐 너무나 높은 벽이었다.

"에이, 됐어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염치라니."

"방학인데 뜬금포로 술 마시자 부르면 나오겠어요? 다들 대학가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몇 명 있긴 하잖아."

"제가 1학년 들하곤 별로 친한 것도 아니고…."

숫기가 없는 우선을 뒤로 하고 이번엔 성수가 태영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뭐요?"

"아니 기왕 군대 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여자 동기들 얼굴이나 보고 가면 좋잖아. 방학중이라 오늘 아니면 영영 못 볼텐데."

태영도 성수의 제안에 솔깃했지만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자신의 안 좋은 평판을 떠올리며 금새 미련을 접었다.

"걔들은 저 군대 가도 신경 1도 안 쓸걸요? 절대 안와요."

"그래? 도훈이가 불러 준데도?"

"예예?"

"도, 도훈이 형이요?"

성수가 은근슬쩍 가만히 앉아있는 도훈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야. 이 기회에 회장의 힘을 보여봐."

"형, 이건 너무 갑질 같은데."

회장의 권위란 당연히 이런 곳에 쓰는 것이 아니었다. 도훈이 완곡히 거절하자 성수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다음 멘트를 날렸다. 어차피 밖에서 담배 피울 때 이미 말을 맞춘 두사람이었다.

"아니. 오기 싫은 애들 말고. 집 먼 애들도 말고. 근처에 사는 후배들 중에 공짜 술 마시고 싶은 애들 있을 거 아냐? 날도 더운데 저녁에 맥주 한 잔 같이 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게 무슨 갑질이라고."

"흐음."

도훈이 고민했다. 물론 성수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후배들 코는 못 풀어줄 망정, 군대 가기 전 마지막으로 여자 동기들과 술 한잔 마시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쓰읍, 대체 누굴 부르지?'

[주인님 의견보다 저 두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둘?'

[네, 어쨌든 오늘의 주인공이니까요.]

도훈은 로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결심했다.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곧 군대가는 불쌍한 동생들 마지막 소원도 못 들어주겠냐? 부르자.'

성수가 한껏 바람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도훈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둘 다 부르고 싶은 애들 말해봐."

"저, 정말요?"

"도훈이 형이 진짜로 부르시게요?"

성수가 연신 거들었다.

"얀마. 도훈이가 부르면 여자애들 자다가도 튀어 나올 걸? 얘 여자애들한테 인기 쩔잖아."

"그게 아니라, 형 말대로 의사는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바쁘면 못 오는 거고. 그러니 한번 말해봐. 일단은 불러볼게."

도훈이 몸소 보고 싶은 후배들을 불러 준다는 소리에 우선과 태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학과 내에서 그의 인길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누구든 부르기만 하면 냉큼 달려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선이 먼저 말했다.

"전 그럼 희주…."

"엥? 양희주?"

"네."

"너 희주 좋아했냐?"

"아, 아뇨!"

우선이 강하게 부정했다.

"근데 갑자기 웬 희주야?"

우선이 맥주를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말했다.

"솔직히 저도 희주 처음 봤을 땐 별로였거든요. 다들 아시잖아요? 학기 초에 희주 와꾸."

"하긴."

"음, 걔도 완전 대학물 먹고 용 된 케이스지."

"암튼 최근에 많이 예뻐진걸 보니까 갑자기 궁금하기도 하고…. 또 성격도 화통하잖아요. 잘 놀기로 유명한데."

"맞아. 희주가 잘 놀긴 해."

"이도훈이, 희주 가능? 소환술 가능?"

도훈이 속으로 코웃음 쳤다.

'걔는 완전 내 좆집이구만 뭘.'

[아니, 멀쩡한 사람보고 좆집이 뭡니까 좆집이?]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노브라에 노빤스로 오라고 해도 당장 튀어 나올 걸?'

[아, 아니…. 주인님 성향이 좀….]

'왜?'

[생각해 보니 관계된 업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업적이라고?'

[every body 구멍 동서라고….]

'야 씨! 내가 내 여자를 왜 돌려 미친!'

[아, 아니 당연히 안 하실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여쭸습니다.]

'됐고. 한 가지 확실히 해둘게. 희주가 자진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나도 뭐라고 안해. 원래부터 걔근 그런 애고, 내가 구속할 권리는 없으니까.'

[네.]

'그래도 무슨 네토 성향도 아닌데, 내가 먹은 여자를 다른 놈한테 일부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알겠습니다.]

'그 업적 얘기는 다신 꺼내지도 마. 구멍동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넵.]

'아, 그리고 게이 업적도!'

[취향 하난 확고하신 분.]

"희주…. 일단 연락은 해 볼게요. 다행히 집도 멀지 않으니 시간 되면 올 것 같은데."

"우선이는 희주, 태영이 넌 누구 보고 싶은데?"

"저는…."

태영이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군대 가는 마당에 위문편지라도 ?써줄 만한 착한 여자 동기를 떠올렸다.

'효민이가 살짝 맹한데가 있어서 간절히 부탁하면 편지라도 써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막상 효민은 부르자니 너무 기회가 아까웠다. 다들 한 미모하는 동기들이지만 그래도 8선녀 서열상 효민은 상위권보다는 하위권에 위치해 있던 것.

'차라리 이럴바에야 원탑 정음이를….'

태영은 누구나 좋아하는 정음을 부를까 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선배들에겐 깍듯하지지만 동기들에겐 가차없는 정음이 나중에 자길 부른 사실을 알고 헥토파스칼 킥을 날려버릴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아씨,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진자 존나 쳐 맞을지도 몰라.'

"뭐하냐? 도훈이가 불러 준다잖아. 이런 기회 두번 없다?"

"정태영? 너 진짜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냐? 나도 그냥 희주 불렀잖아. 형, 이 새끼 갑분 고백같은 거 하는 거 아니겠죠. 너 그럼 완전 흑역사 찍고 가는 거야 인마."

머뭇거리는 태영을 향해 우선이 놀렸다. 별뜻없이 여자 후배들과 함?께 술이나 마시자는 분위기치곤 태여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건."

"그럼 뭔데 인마."

"아니 저는…."

태영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도훈이형 혹시 아영이 되나요?"

"박아영?"

"헐? 아영이?"

"아니 걔는, 도훈이도 좀…."

박아영.

체육과의 아웃사이더.

이번 여름 캠프 전까지는 있는지도 모를 그녀였지만, 등장하는 순간 센세이션한 존재감을 일으킨 이슈 메이커.

최근 남자들 사이에선 청순한 타입인 아영의 미모를 부동의 원탑이던 정음에 견줄 정도로 화제의 인물이었다.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와 지나치게 차분한 성격 때문에 더욱 이목을 끌었다. 성수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도훈에게 우려를 표했다.

"아영이 걔, 말수 없는 걔 맞지? 얼굴 예쁘장하게 생겨 가지고. 되겠냐? 아무리 도훈이 너라도 걔는 안될 것 같은데…."

"도훈이형. 그냥 태영이 이 새낀 무시해요. 하여간 새끼가 호강에 겨워가지고 도훈이 형이 대신 총대 메고 불러준다니까 되지도 않는 애를 고르고 있어."

성수와 우선 모두 고개를 가로젓자 그 모습을 보던 도훈이 갑자기 오기가 끌어올랐다.

'뭐야? 이 반응 대체?'

[천하의 주인님도 박아영 양은 힘들거라는 반응이죠.]

'아니. 알겠는데, 내가 이 정도 취급이었다고?'

[다들 주인님과 아영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주인님도 아영양은 껄끄럽지 않습니까?]

'나참…. 아영이 따위가 뭐라고.'

주변에서 만류하자 도훈은 더욱 도전정신이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면 아영은 유일하게 자신이 못 따먹은 8선녀 멤버이기도 했다. 마지막 퍼즐. 갑자기 그 퍼즐을 끼워 맞추고 싶어졌다.

"오케이 콜! 불러 볼게."

"지, 진짜로요?"

"어. 너 근데 아영이 부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도훈이 호기심에 물었다.

"아, 아니. 제가 저번에 아영이한테 실수한 게 있어가지고요. 그래도 군대 가기 전에 풀고 가려고."

"아…. 난 또."

"태영이 너 이 새끼 뭔 실수했어? 솔직히 불어."

성수가 우락부락한 팔뚝으로 태영에게 헤드락을 거는 사이 도훈이 잠시 통화를 한다면서 조용한 곳으로 빠져 나왔다.

'후우-. 희주랑 아영이랑 이거지?'

[주인님. 굳이 무리하실 필욘 없습니다. 희주양이면 몰라도 송별회에 부르기엔 적절치 않은 멤버같은데요. 뭐하면 연두양이나 나연양도 있고….]

'뭐야? 로시 너까지 그래? 나 누군지 몰라? 대물 플레이어라고!'

[알죠. 그냥 주인님이 난처할까 그렇죠. 아영양이 주인님의 비밀을 알고 있잖습니까.]

'흥, 제까짓 게 알면 어쩔 건데?'

도훈도 뱉은 말이 있다 보니 이제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특히 회장이 된 지금은 사소한 발언에도 무게가 실렸다.

곧 군대 가는 두 사람의 마지막 부탁도 못 들어준다면, 권위가 실추됨을 떠나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훈이 곧바로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양희주."

-어머, 오라버니가 웬일로 전화를 먼저 하시고? 오늘 심심하세요?

"잔말 말고 30분 내로 장충동 왕족발 알지? 걸루 튀어와."

-네?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와보면 알아."

-자, 잠시만요. 나갈 채비를 해야 하는데….

"채비는 무슨 채비. 당장 튀어와, 30분 준다."

-아, 앗! 오빠! 도훈 옵….

뚝-

도훈은 상남자처럼 전화를 확 끊었다.

[와, 희주양 의견은 묻지도 않으시고….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희주는 어차피 내가 부르면 올 수 밖에 없어.'

[그 자신감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나 보겠습니다.]

희주를 부른 도훈은 이번엔 아영의 전화번호를 뒤졌다.

박아영.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자신도 모르게 살짝 멈칫했다.

'아씨, 근데 뭔 핑계를 대고 부르지?'

[역시…. 주인님도 아영양은 어려우신가 보군요.]

'어렵긴 뭐가? 부르면 부르는 거지. 회장이 튀어 오라는데 집행부가 안오고 배겨?'

[갑자기 밤에 부르는데 아영 양이 과연 올지….]

'음…. 그것도 그렇네. 뭔가 핑계를….'

도훈은 불쑥 태영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아, 태영이 핑계대면 되겠네.'

생각을 마친 도훈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꺼두었나 싶을 정도로 한참 통화음이 흐른후에 수신이 연결되었다.

"박아영… 번호 맞아요?"

-왜요?

다행히 아영은 자신의 번호를 저장해 둔 상태였다.

"아, 나 도훈인데."

-그런데요?

'와씨, 말투 싸가지 없는 거봐. 그래도 오빠고 직속 선밴데.'

도훈은 흥분을 가라앉고 아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아직 공략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앞선 희주에 비해 굉장히 공손한 태도였다.

"혹시 지금 뭐해?"

-뭐하면요?

"응?"

-뭐하고 있으면요?

'아니 무슨 대화가 이래?'

[크으, 역시 아영양은 쉽지 않네요. 천하의 주인님도.]

[좆까. 아직 안 눌러 줘서 그래.'

"뭐 하고 있어?"

-야구보는 데요.

"아…."

도훈은 그녀가 야구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도 그냥 경기를 즐겨보는 정도가 아니라, 2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선수의 데이터까지 줄줄 외우는 광팬.

"아… 야구보는 구나."

-그거 궁금해서 전화하셨어요?

아영이 당장이라도 끊을 기세였기 때문에 도훈이 급히 의사를 전했다.

"아, 아니 혹시 시간 되나 해서."

-시간이요?

"어. 그러니까…."

도훈이 태영이 군대가기 전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구질구질 늘어놓으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태영을 팔아서 부를 정도로 꿀리는 관계가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얘한테 쩔쩔매야해?'

[그럴 필욘 전혀 없죠.]

생각을 고쳐먹은 도훈이 아영에게 말했다.

"나랑 술 한잔 할래?"

-…….

난데없는 제안에 아영이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로 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이었는지 수화기 사이로 중계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나왔다.

도훈은 아영이 잘못들은 줄 알고 다시 말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나랑 술…."

-어딘데요?

[아니, 이걸?]

'봤냐? 바로 콜 때리는 거?'

[아영양이 뭔가 작심한 느낌이 있는데요?]

'그건 모르겠고, 일단 나온다는 게 중요하지.'

"어, 여기 상대 쪽문 근처 족발집인데…."

-족발 안 좋아하는데.

"아니 족발집에서 어차피 나갈 거야."

-혼자 아니세요?

도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뭉뚱그렸다.

"아직은."

-…알았어요. 출발할 때 전화 할게요.

"어, 어 그래."

도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아영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혼자 횡설수설하던 도훈은 통화가 끊어진 걸 뒤는게 깨닫고 중얼거렸다.

"아니 씹,회장이 말하고 있는데 먼저 끊고 지랄이야!"

[…주인님, 추하십니다.]

< 1065. 회장의 자격-3-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추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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