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4. 회장의 자격-2- >
깜짝파티를 준비한 것은 우선의 2학년 동기들이었다. 그와 함께 입학한 동갑내기 친구들. 함께 대학생활을 즈릭며 우정을 쌓아온 그들은 우선을 위해 마지막 파티를 계획했다.
우선이 가게로 들어오자 미리 말을 맞춘 알바생이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게 조명을 껐다.
"어, 뭐야?"
조명이 꺼지자 당황한 우선을 향해 누군가 미리 준비한 케익을 들고 걸어 나왔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선창을 시작으로 남자 대학생 십수명이 떼창을 시작했다.
"우선의 입대를 축하합니다!"
그 순간 우선이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아씨, 뭔데 이건."
말을 그렇게 했지만, 눈 시울이 빨개진 게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지자 2학년 남자 동기 대부분과 1학년 후배들까지 자신을 환영하고 있었다.
"뭔데 진짜!"
"새끼야. 잘 다녀와라!"
"우선이, 몸만 건강하게 전역해."
"너 가면 다음 타자는 나야!"
"와아아아!"
깜짝파티는 왜 치는지도 모르는 박수로 마무리 되었다. 도훈도 함께 박수를 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새끼들. 그래도 의리는 있네.'
그때 우선의 뒤에 서 있던 태영도 동기들의 축하를 받았다.
"정태영! 너도 잘 다녀와!"
"니가 우리 동기중에선 일빠다."
"입영열차까지 배웅해 줄게!"
"머리부터 밀자."
우선과 함께 온 태영 역시 감동의 눈믈을 흘렸다.
"크흑, 너희들!"
"자자, 더 떠들면 민폐니까 그만하고. 이만 밥먹자."
"넵!"
성수가 상황을 종결시키며 우선과 태영 두 사람을 테이블로 불렀다. 도훈과 마주 앉은 그들은 허리를 크게 숙이며 인사했다.
"도훈이형도 오셨어요?"
"회장님이 계획하신 거예요?"
"아니, 아니."
도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다 너희 동기들이 준비한 거야. 나는 뒤늦게 연락받았어."
"아…."
"그래도 나름 학과 생활 열심히 했나보다. 군대 간다고 이렇게 챙겨주는 거 보면."
도훈은 곧바로 선물을 꺼내들었다.
"회장으로서 줄건 없고. 이거라도. 하니씩 받아."
고급 포장지에 쌓인 선물을 받아든 우선이 감동하며 말했다.
"형은 무슨 이런 걸 다."
"와, 여기서 풀어봐도 돼요?"
"어어."
태영은 도훈의 선물을 풀어보더니 내용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그래도 전자시계를 하나 살까 했는데, 딱 봐도 값비싼 메이커의 시계였기 때문이었다.
"우아 이건 비싼 거 아니에요?"
우선도 같은 내용의 선물을 확인하고는 도훈에게 말했다.
"아니 형, 뭐하러 이렇게 비싼걸…. 그냥 인터넷에서 만원짜리 사도 충분한데…."
"기왕 쓰는 거 좋은 거 쓰라고. 군 생활 하면서 고장 안나게 튼튼한 걸로 골랐어."
"와, 이도훈이. 회장 되더니 후배들한테 돈 팍팍 쓰는 구나. 사람 기죽게."
미처 선물까지는 생각 못 한 성수가 민망했는지 갑자기 후배들을 향해 선언했다.
"야, 오늘 저녁은 전임 부회장이 쏜다! 실컷 먹어!"
족발 20인분.
성수로서도 굉장히 버거운 금액이었지만, 도훈의 값비싼 선물을 본 성수로서는 체면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도훈에게 받은 선물을 태영이 동기들에게 자랑하는 사이 도훈이 은근슬쩍 말했다.
"형, 혼자 내면 부담스러우니까 같이 내요."
"인마. 나도 가오가 있지. 괜찮아 이 정도는."
"아니 그게 아니라 형 인강 끊고 교재 사려면 돈 많이 들잖아요."
"아니 그래도…. "
도훈이 정곡을 찌르자 성수도 한발 물러섰다.
그의 말대로 회식비를 홀로 쐈다가는 이번 달 용돈이 한 순간에 거덜날 판이었다.
"형, 저 요새 돈 많아요."
"어쩌다?"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용돈 부쳐 주셨거든요."
"아…. 맞다. 혜은이도 잘 있지?"
"혜은이요?"
도훈은 한참 오래전에 까먹고 있떤 여동생을 떠올리며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 놀러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혜은이 몇 달째 연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들어 도통 연락이 없네?'
[먼저 연락을 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출생의 비밀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할 까봐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거였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 잘 살겠거니 했는데….'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친오빠니까 어쨌든 먼저 연락을 보시는 게 맞죠. 물론 주인님 입장에서야 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만요.]
'그러게. 다음에 한 번 전화해봐야 겠다.'
도훈이 속으로 미국에 있는 여동생을 생각하는 사이 선물받은 시계를 자랑하고 온 태영이 도훈에게 말했다.
"형, 진짜 고마워요. 애들이 엄청 부러워해요!"
"받고 싶으면 지들도 군대가라 그래."
"크크크. 군대냐 시계냐 선택이냐?"
우선도 거듭 도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형, 정말로 잘 쓸게요. 시계 볼 때마다 형 생각날 것 같아요."
"군대가서 시간 낭비한다고 안 좋은 생각말고 뭐든 열심히 해. 몸만 건강해져서 돌아와도 남는 게 많을 거야."
"그래. 나처럼 의병제대 하지 말고. 난 거기서 허리 다쳐서 지금까지 고생했잖아."
성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때 태영이 말했다.
"전 군대가서 도훈이형처럼 돼서 오는 게 목표에요."
"도훈이처럼?"
"무슨 소리야?"
"도훈이 형이 원래 군대 가기전에는…."
태영은 송별파티와 시계 선물에 흥분해서 떠들다가 불쑥 또 도훈의 비밀을 발설할까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전에는?"
"아, 아니 그게."
"뭐야? 얘기를 왜 하다말어?"
우선이 궁금해하자 성수가 대신 대답했다.
"아, 노래?"
"노래요?"
"이 새끼 원래 노래 좆도 음치였는데 군대 노래방에서 엄청 실력 늘어서 왔잖아."
군대가기 전의 도훈을 기억하는 성수가 대신 답변했다. 또 말실수를 할 뻔한 태영이 급히 거들었다.
"맞아요! 노래. 노래 연습 열심히 하려고요."
잠자코 듣고 있던 도훈이 태영에게 주의를 준다는 의미로 한마디 했다.
"노래 연습도 좋지만, 태영이 넌 좀 더 진중해져 올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항상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들여봐. 말하고 생각하지 말고."
따끔한 지적에 태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말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훈에게 전혀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태영은 도훈의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넵! 더 진중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참, 근데 너희들 여자친구도 없이 가서 어쩌냐. 편지 써줄 사람도 없겠네."
성수가 무심코 꺼낸 말에 우선과 태영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성수는 그 모습을 보자 미안했는지 갑자기 말을 돌렸다.
"야 씨. 어차피 있어도 고무신 거꾸로 신고 헤어지는 게 대부분이야. 있으면 뭐하냐, 금방 헤어질 거. 차라리 잘 됐어."
"여친은 사귄 적이 있냐고 묻는 게 우선 아닙니까?"
우선이 농담삼아 드립을 날렸다.
그는 자타공인 21년 모태 솔로로 진짜로 섹스는 커녕 여자손도 한 번 못 잡아본 쑥맥이었다.
"아 맞다. 너 모솔이지?"
"혼자가 편합니다."
"웃기고 있네."
"아, 그러고보니 그 멤버네요?"
"무슨 멤버?"
"아니, 우리 그때 같이 단체로 소개팅 했잖아요. 아이돌 지망생들이랑."
"아아아! 맞네!"
우연히 당시 소개팅 멤버가 모이자 과거 이야기로 한창 또 떠들었다. 서로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엔 도훈 혼자 다 따먹고 끝나버린.
하지만 후일담을 모르는 각자에겐 그냥 재밌었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야, 그때 진짜 웃겼는데."
"그때 우선이형 막 택시 태워준다고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어요?"
태영의 물음에 우선의 흑역사가 떠올랐다.
떠나버린 택시를 향해 보보가를 외치던 그날의 기억을
우선이 부끄러웠는지 말을 돌렸다.
"술 만땅 취해서 기억도 잘 안나."
"그때 성수형 완전히 꽐라 되가지고 진짜."
도훈은 묵묵히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승자의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쯧쯧. 결국 내가 그룹 다 따먹은 건 아무도 모르는 구나.'
[기쁘십니까?]
'아니 뭐. 안타깝기도 하고. 약간의 미안함 같은?'
[왠지 승자의 여유 같아 보이는데요?]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여자애들이 들이대는 걸 어쩌냐 그럼.'
[이 멤버 중에서 주인님이 군계 일학이긴 했죠.]
'그런가?'
여자 얘기를 하다보니 성수가 은근 슬쩍 운을 띄웠다.
"야, 근데 우선이 너 월요일 입소식이지?"
"네. 부모님이랑 내일 오후에 같이 올라가기로 했어요. 숙소에서 하루 자고 아침 같이 먹고 보내신다고."
"아…. 그럼 오늘밤이 진짜 마지막이네?"
"그렇죠."
"너 진짜 괜찮겠냐?"
"뭘요?"
"뭐기는 인마. 군대 가기 전에 여자 경험은 해보고 가야 되는 거 아냐?"
"아…. 괘, 괜찮아요."
"별로 괜찮지 않을텐데…. 가면 선임들이 그것부터 물어볼걸?"
우선 역시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성수의 말을 이해했다.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첫 경험을 그렇게 추억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냥 여자친구 사겨서 할래요."
"허이고. 2년 뒤에?"
"1년 반이에요. 요샌."
"알았다. 태영이 너는 그래도 경험은 있지?"
"저요?"
태영이 들고 있던 족발 뼈다귀를 내려 놓았다.
물론 태영은 어린 시절부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의 추억이었다.
"이젠 기억도 안나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 이 새끼들 진짜 눈물나게 만드네. 야, 말만해. 형이 애들한테 만원씩 걷어서라도…."
"아이고 전 사양합니다."
우선은 정말로 생각이 없는지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태영은 그 말에 귀가 솔깃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그건 불법 아니에요?"
"이 새끼 안 간다는 말은 안 하네. 불법은 맞지. 다 알음알음 하는 거지."
"와, 부회장님 그런 것도 잘 아세요?"
"나?"
사실 성수도 듣기만 했지 그런쪽으로 무식하긴 똑같았다.
그는 당황해서 도훈을 쳐다 보았다.
"도훈이 너 좀 아는데 있냐?"
"제가 어떻게 알아요?"
마사지에 OP, 텐프로까지 섭렵한 도훈이었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냥 각자 알아서 하려고 행.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지들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런가?"
결국 성수의 코 풀어주기 게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야,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네."
우선과 태영은 비흡연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만 잠깐 가게 밖으로 나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웠다. 성수가 도훈에게 말했다.
"아니 그냥 해본 말이었어. 애들이 좀 불쌍해서."
"불쌍하긴 하죠. 근데 제가 생각해도 첫 경험이 그러면 별로일 거 같아요. 평생 기억에 남을 건데."
"그러게. 너무 오지랖이었나. 근데 이상하지 않냐?"
"뭐가요?"
"솔직히 2학년 까진 물이 별로였다고 쳐도 이번 신입생들 역대급이잖아. 사범대 통 틀어서도."
현 2학년은 유난히 남초가 심했다.
그나마 있는 여학생 둘도 상태가 별로라서 한때는 저주받은 학번으로 불렸다. 하지만 태영과 함께 들어온 여학생들은 숫자도 숫자지만 8선녀라 불릴정도로 예븐 여학생들이 많이 입학했었다.
"근데요?"
"괜찮은 애들이 그렇게 많은데 과내에 씨씨가 하나도 안 생기는게 말이야."
성수가 궁금한 것은 그 부분이었다.
본인은 이미 수학과에 여친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이례적이라 할만큼 체육과 씨씨가 탄생하지 않고 있었다.
술김에라도 몇 커플 생길만도 하건만, 1학년 여학생들은 단합이라도 한 것처럼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도훈은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성수말을 들으니 살짝 죄책감이 드는데.'
[주인님이 왜요?]
'왠지 나 때문에 학과내 연애전선이 비정상적으로 꼬인 것 같아서.'
도훈의 논리는 이랬다.
고만고만한 사람만 있으면 적당히 알아서 흩어지고 찢어질 텐데 솔로로 있는 자신이 워낙 존재감을 발휘하는 바람에, 여학생들이 계속 남자친구를 안 사귄 상태로 버티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어쨌든 도훈에게 여친이 생기지 않는 이상 기회가 있다는 소리니까.
[허어. 약간 재수없긴 하지만 정확한 분석으로 보입니다. 여학생들이 주인님에 대한 호감도가 너무 커지다 보니 다른 남학생에게 관심조차 사라져 버린 것 같군요.]
'그렇다고 하나씩 쳐내고 방생할 수도 없잖아. 학가를 구멍동서로 채울 생각 아니면.'
[이러나 저러나 문제로군요.]
"사람 사귀는 게 인위적으로 되나요. 알아서 각자 하는 거지."
"야. 그러지 말고 이러는 건 어떨까?"
"뭘요?"
"너 1학년 여자애들하고 친하잖아. 몇 명만 불러."
"여자애들요?"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솔직히 남학생들끼리 우르르 술만 먹는 게 뭔 재미가 있겄냐. 그래도 군대 가기 전에 여자 동기들도 좀 와서 위로해주면 좋을 거 아냐."
"그럼 우선이는요?"
"우선이도 2학년 여자애들보단 1학년이 더 좋을 걸?"
"흐음. 누굴 부르지? 근데 여자애들끼리 오면 완전 개강총회 분위기 될 것 같은데요?"
성수가 생각해도 인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은 마당에 여학생들끼리 더 불렀다간 외상을 달아야 할 판이었다.
"음, 그럼 1차 끝나고 적당히 흩어 보낸 다음에 소수로 뭉치자. 오케이? 너랑 나는 ㅇ파트너 없어도 되니까 시간 남아도는 애들 적당히 둘만 불러봐."
"일단 물어는 볼게요."
"그래. 난 잠깐 화장실 좀."
맥주를 많이 마신 성수가 화장실로 향하는 사이 도훈이 가게로 들어가 카운터를 찾았다.
"저기 체육과 팀 얼마 나왔어요?"
"어? 다 드신 거에요?"
"아닝. 미리 좀 계산해 놀려고요."
"테이블당 6만원씩에 술까지 하면…. 지금까지 40만원 좀 안됩니다."
"그럼 제가 50만원 미리 끊어놓고 나중에 부족한 건 따로 계산할게요."
"아, 그러실래요?"
도훈은 성수의 빈약한 주머니늘 걱정해 먼저 계산을 마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 1064. 회장의 자격-2-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이도훈, 너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