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80화 (1,047/2,000)

< 1063. 회장의 자격-1- >

[결과가 만족스러우십니까?]

'당연히.'

[주인님도 가만 보면 모략가 기질이 있습니다.]

'모략가라니?'

[뒤에서 몰래 음모를 꾸미는 것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목표를 이룬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람이 좀 음험하달까?]

'왠지 악당에게 어울리는 말인데, 그거.'

도훈은 스스로 생각해도 악당 같은 구석이 있다고 자평했다.

특히 용서보다 복수를 택하는 기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민주를 위험에 빠뜨리고자 했던 그녀의 외삼촌과 김변 모두에게 통쾌한 복수를 이룸으로써 그는 희열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복수가 떠올랐다.

자신의 여자를 건드린 자들에 대한 복수도 이렇게 통쾌할 진데, 전생의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두 년 놈들에게 복수한다면 얼마나 짜릿할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전생의 인연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희생자의 룰 때문에 꾹꾹 가슴속에 억누르고 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기필코 복수하리라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다만 인공지능인 로시가 눈치가 빠르니 평소엔 내색조차 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이번 일은 일단락 된것 같군. 나중에 조사 끝나면 소연이에게 잔금만 챙겨주면 되겠어."

돟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2학년 찬열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군대를 안가 나이는 동생인 동기였다.

"응? 찬열이가 무슨 일이지?"

평소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도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도훈이형 맞죠?

"어, 찬열아. 무슨 일이야?"

-아네, 단톡방에서 말씀이 없으셔가지고요.

"무슨?"

아마도 자신이 김변이 일로 정신이 팔린 사이 단톡방에서 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건 아니고요. 우선이 곧 군대 가는 것 때문에 남자들끼리 한번 뭉치는 게 어떻냐는 얘기가 나와서요. 형은 오늘 시간 되세요?

"남자들끼리?"

쉽게 말해 학과 남자들끼리 송별회를 열자는 소리였다.

-네, 마침 1학년에 태영인가? 걔도 간다고 해서 겸사겸사 같이요.

군입대를 앞둔 체육교육과 학생은 모두 2명.

입대가 예정되어 있던 2학년 과대 우선과 여름 캠프 때 느닷없이 군대를 가겠다고 선언한 태영이었다.

두 사람과 모두 연이 있었기에 도훈은 별다른 고민없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아, 그러시면 오늘 저녁 상대 쪽문 족발집에서….

약속을 잡은 도훈은 곧바로 차에 올랐다. 그리곤 네비에서 근방 백화점을 찍었다.

[갑자기 백화점은 왜요? 쇼핑하실게 있으신가요?]

'아니. 내거 말고. 그래도 나름 1학기 친하게 보낸 동생들인데 입영 선물 하나씩 줄까 해서.'

[이런 면에선 의외로 섬세하시단 말이죠? 여자들 선물은 잘 안 챙기시면서.]

'여자랑 남자랑 같냐?'

[뭐가 다른가요?]

도훈이 백화점으로 차를 출발시키며 로시와 대화룰 나누었다.

그는 혼자 있어도 늘 로시와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원래 보빨에 미친놈들이 어렸을 때 멋모르고 여자에게 올인한단 말이지. 잘 보이려고 온갖 선물 다 사주고, 원하는 거 다 들어주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그런 노력과 투자는 당연히 필요한 거 아닐까요?]

'그거 다 부질없다니까? 잠깐의 관심은 끌 수 있어도, 여자들은 어차피 그런 것에 혹하지 않거든.'

[그럼요?]

'백날 천날 선물 사다 바쳐봐. 결국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 가버린다고. 그게 다 매몰비용이 되는 거지.'

[남자는 뭐가 다른가요?]

'남자들은 그래도 의리라도 있지. 힘들 때 잘해주는 사람, 어려울 때 도움 주는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하거든.'[너무나 차별적인 발언입니다. 어찌 보은을 생각하는 마음에 남녀의 차이가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른 거죠.]

'뭐, 그럴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여자보단 남자가 의리가 있다는 소리야. 대학 때 아무리 여자들하고 친하게 지내봐야 시집가면 쌩판 남 되는 거라고. 끝까지 가는 건 남자들 뿐이지.'

[그건 주인님이 남자라서 갖게 되는 선입견일 뿐입니다.]

'뭐, 내가 여자가 되어 본 적 없으니 그럴지도. 암튼 여자들 선물 사주는 것보다 남자 후배들 챙겨주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엔 여전히 변함없어.'

백화점에 도착한 도훈은 1층의 시계 코너를 찾았다.

피혁, 구두, 시계, 화장품 등의 매장이 즐비한 그곳에서 도훈이 찾는 곳은 스포츠 용품으로 유명한 시계샵이었다.

"전자시계 좀 보러 왔는데요."

"네, 손님. 직접 착용하실 건가요?"

"아뇨. 동생들 좀 주려고요. 군대 갈 건데 고장 안 나고 튼튼한 놈으로 골라주세요."

"넵 그럼 이모델은 어떻습니까?"

도훈은 매장 직원이 추천한 시계를 살폈다. 가격표를 보니 50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전자시계였다. 디자인도 좋고 기능도 우수한 제품이었다. 도훈은 망설임 없이 직원에게 말했다.

"이걸로 두 개 주세요."

"두개요?"

"입대할 동생들이 두명이라서요."

"아, 넵."

순식간에 쇼핑을 마친 도훈을 보며 로시가 물었다.

[아니, 이렇게 빨리 선물을 고른다고요?]

'전자시계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너무 고가 제품이 아닌지.]

'기왕 선물을 할 거면 쩨쩨하게 굴어선 안 돼. 하나를 주더라도 받은 사람이 감동하게끔 만들어야지.'

[그래도 좀 과한감이 있습니다. 대학생에게 50만원짜리 시계 선물이라니….]

'그만큼 두 사람 다 나에게 소중한 동생들이니까. 환생 후에 대학생활 적응하는데 도움도 많이 줬고.'

[우선 군이야 학년 과대로 고생했으니 그렇다 쳐도 태영군은 좀….]

도훈도 태영을 생각하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미워할 수도 없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애매한 캐릭터였다.

특히 이번 여름 방학 때 아영에게 자신의 비밀을 실토함으로써 일을 꼬이게 만들 뻔 했었다. 그땐 배빵을 날릴만큼 화가 났지만, 막상 군대가서 1년 반 넘게 못 본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정이 있어야지. 둘다 안주면 몰라도 같은 걸 사줘야 안 삐지지.'

[주인님도 참도….]

"할부는 몇 개월로 끊어 드릴까요?"

"현금으로 살게요."

"아, 현금. 여기 핸드폰 번호 남겨주시면 현금 영수증 끊어드리겠습니다."

100만원이 넘는 돈을 현금으로 결제한다는 말에 매장직원이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도훈은 귀찮은 마음에 현금 영수증도 굳이 끊지 않았다.

"괜찮아요. 포장 잘해주세요."

"넵."

[돈 많다고 너무 막 쓰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언제 쓸데없이 낭비하는 거 봤냐? 간만에 돈 좀 쓴건데.'

[그래도 입대 선물에 50만원 짜리 고가 시계는 좀….]

'아까도 말했잖아. 하나를 주더라도 감동을 줘야 한다고. 이 정도는 줘야 평생 못 잊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먹힌 거야.'

[주인님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도훈은 피식 웃었다. 물론 수중에 가진 현금이 많아 쉽게 쓰는 것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는 것은 주변의 평판이었다.

'잘 봐. 앞으로 남자 후배들이 나한테 충성하게 될 테니까.'

[무슨 말입니까?]

'오늘 송별식에 남학생들 대부분 올 거 아니야. 우선이는 학년 과대였고, 태영이는 1학년 중에선 제일 빨리 가는 편이니까.'

[그렇겠죠?]

'거기서 내가 선물 준 거 딱 열어보면 반응이 어떻겠어?'

[아아! 설마!]

'도훈이형은 친하게 지낸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대한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돈이 곧 진심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대학생에겐 작은 선물이 아니니까.'

[설마 그것까지 염두해둔 포석입니까?]

'겸사겸사. 이제 학회장이니까 남학생들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기도 하고.'

도훈은 여학생에겐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남학생에겐 발언력이 떨어졌다. 카리스마를 보인 전임 부회장 성수에 비하면 남자 후배들의 충성도가 다소 약한 편이었다.

'지금 군대 가는 우선이나 태영이나 어차피 나 졸업할 때 쯤에나 돌아온단 말이야.'

[그렇겠죠? 4학년 1학기 때나?]

'나중에 덕 볼 사람에게 잘하는 건 아첨이고 뇌물이지. 하지만 다시 못 볼수도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 건 진심어린 선물이 되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건 두 사람에 대한 내 의리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과 남학생들의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란 말이지. 아, 도훈이형이 여자들만 챙기는 게 아니었구나. 도훈이형에게 잘 보이면 나도 저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캬…. 정말이지 주인님의 두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사람들은 늘 가진자를 동경하면서도 질투하기 마련이야. 여자들이 따르는 나는 학과 남자들에겐 어떤면에선 꼴보기 싫은 대상일 수도 있어. 그 감정을 희석시키지 않으면 학과회장 노릇도 피곤해 질테니까.'

[대단하십니다. 역시 음험한 전략가.]

'듣기 좋은 별명이군.'

쇼핑을 마친 도훈은 저녁에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우선과 태영의 군입대 송별식에는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스무 명 넘는 학생들이 나와 있었다. 걔중에는 정말로 친한 사이라 마지막으로 배웅을 위해 나온 학생들도 있었고, 몇몇은 심심한데 술이나 먹자는 마음으로 나온 학생들도 있었다.

도훈이 등장하자 상석에 앉아있던 성수가 손을 번쩍 들며 그를 반겼다.

"어!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성수가 과장스럽게 도훈을 맞이했다.

"야, 뭣들 하냐. 회장님한테 인사 안 올리고?"

미리 짜두었는지 체육과 남학생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조폭처럼 크게 허리를 숙이며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했다. 가게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깜짝 놀라 도훈을 쳐다보자 민망해진 도훈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씨, 이거 백퍼 성수 작품인데.'

도훈이 머쓱하게 인사를 받더니 성수 옆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뭐하시는 거에요. 임용공부 한다고 일선에서 물러 나셨으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셔야지. 사람 민망하게."

"크크크. 재밌었냐? 너 기분 좋으라고 애들 좀 시켰어."

"하나도 안 재밌거든요? 우리과 애들이 무슨 조폭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 등빨 좀 있지 않아?"

운동을 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대부분은 평균을 상회하는 신장과 체중들이었다. 그런 학생들이 단체로 모여 식사를 하고 있으니 남들이 볼 땐 오해를 살법 했다.

"됐고요. 다신 이런 장난 시키지 마요. 쪽팔리니까."

"알았어 인마. 더럽게 뭐러 그러네. 뒷방 늙은이 됏다고 이렇게 괄시해도 되냐?"

"뭔 늙은이 드립이에요. 임용 붙을라고 공부하러 간 거지."

"아 몰라. 날도 더워 그런지 도저히 집중이 안 되더라. 오늘은 그냥 맥주 한 잔 빨고 잘라고 나왔어."

도훈이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우선과 태영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이랑 태영이는요?"

"몰랐냐? 이거 서프라이즈야."

"서프라이즈라죠?"

"우선이가 다음 주 수요일. 태영이가 다음주 월요일 입대거든. 근데 아직까지 아무도 불러주지도 않고 신경도 써주지 않아서 속으로 엄청 삐져 있었나 보더라고."

"설마 애들한테 송별식 한다고 말 안 한 거에요?"

"그런가 보던데?"

"헐."

"좀 있다 별일 아닌 것처럼 찬열이가 둘 데리고 여기로 올거야. 그때 확 그냥!"

알고 보니 송별회 자체가 깜짝 파티였던 모양.

한창 혼자 떠들던 성수가 도훈에게 말했다.

"암튼, 니가 회장이니까 이제부터 니가 진행해라."

"제가요?"

"그램마. 원래 회장이 하는 거야. 학과 학생들 대소사 챙기는 것도 기본덕목이지."

"근데 진행까지 할 게 있어요? 밥먹고 술먹는 거 아니에요?"

성수가 씩 웃었다.

"야. 그래도 군대 가는데 마지막에 한 번은 보내줘야 하지 않겠냐?"

"어딜 보내요?"

"만원씩만 갹출해서 보태면 둘 다 좋은 데 구경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아니 형. 설마."

듣고 있던 도훈이 당황했다.

특히 방금 전 성매매 단속으로 김변을 경찰에 넘기고 온 터라 더욱 이상했다.

도훈이 당황하는 모습에 성수가 껄껄 웃었다.

"하여간 고자 새끼. 인마, 넌 몰라도 다 한 번 씩 가고 그러는 거야. 특히 우선이는 모태 솔로급이라 이대로 군대가면 진짜 병신 취급 받는단 말이야."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도훈은 자신이 오늘 벌인 일이 있으므로 주저했지만, 성수는 그가 순진해서 그렇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말았다.

"아놔, 이 씹선비 새끼 진짜. 괜히 말했네. 그럼 넌 그냥 모른 척이나 해. 난 애들 코 풀어줄라니까."

"아니, 형도 참…."

[성수군은 여전히 주인님을 고자 취급이군요.]

'어쩌다 보니 그런 오해가 쌓이게 됐네. 전혀 아닌데.'

[근데 원래 남자들은 군대가기 전에 다 한 번씩 가는 건가요?]

'뭐 꼭 그건 아닌데, 기왕이면 경험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 가서 맨날 여자 얘기만 할 텐데…. 그렇다고 과회장 입장에서 성매매하러 가라고 돈을 쥐어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이건 그냥 성수한테 넘겨야 겠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로 연락을 받은 누군가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애들 지금 여기로 오고 있데요. 2분 전!"

"2분? 야아, 다들 준비해."

준비해라는 말에 다들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1063. 회장의 자격-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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