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5. 남의 떡이 더 맛있어.-25- >
***
"실은 나 범죄 신고 하나 하려고."
목소리를 깔면서 분위기를 잡자 빛나의 표정이 단숨에 진지해져싿.
"범죄라고? 무슨 얘기야 뜬금없이?"
확실히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빛나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최대한 웃음기를 뺀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혹시 관련인이야?"
"관련인?"
"도훈이 너도 연루된 거냐고."
빛나의 표정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마치 내가 죄를 자수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낸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위기여싿.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나의 부정에 그제야 빛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난 또, 깜짝 놀랐네."
"왜?"
"지금 너를 체포해야 하는지 엄청 고민했단 말이야. 갑자기 신고한다고 하니까."
"내가 자수라도 하는 줄 알았어?"
"혹시나 했지."
"만약 내가 진짜로 죄를 저질렀다면?"
빛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사사로운 인연으로 범죄자를 감싸주는 타입은 절대로 아니야."
"설마 진짜 체포하려고?"
"당연하지. 말이라고."
[캬, 빛나양의 직업의식은 참으로 본받을만 하군요.]
'은근히 생긴 것 답지않게 고지식한 타입이랄까? 몸매는 꼴리게 생겨놓고선.'
[근데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지어낼 작정입니까?]
'살살 빌드업 해봐야지. 분위기 봐가면서.'
"어이코. 그럼 나 지금 바로 수갑 채워."
"뭐야? 진짜야?"
"그래. 절도죄."
"뭐, 뭘 훔쳤는데?"
"빛나 네 마음?"
"…아, 아니!"
[주인님!]
'이건 아닌가?'
[어휴….]
뜬금없는 아재개그에 빛나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훈이 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미안. 너무 표정이 심각한 것 같길래 농담 좀 했어."
"그게 무슨 농담이야. 우리서 서장님도 그런 농담은 안 해."
"미안."
"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다행히 되지도 않는 아재 개그에 경직되어 있던 빛나가 살짝 풀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은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애가 있거든."
"어.
"여자야."
"여자? 혹시…."
"아니. 여사친."
여사친이라는 말에 은근히 안도하는 빛나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근데?"
"나도 사실 게임 하다가 알게 된 애라서 자세히는 모르거든.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게임상에서만 얘기하는 사이야."
"아하. 근데 게임? 도훈이 네가 게임도 해?"
"어. 나도 대학생이니까."
"아…. 그런 쪽으로 전혀 안 어울려서 몰랐어."
하긴 나도 급하게 둘러대긴 햇찌만 안 어울리는 말이긴 했다. 신체 건강한 사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는 모습이 잘 연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암튼 며칠 전엔가? 같이 게임 하는 사람들 다 나가고 새벽에 둘이 얘기를 하는 데 갑자기 이상한 얘길 하는 거야."
"무슨 얘기?"
빛나가 몸을 내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경청했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본론이 나올거라는 생각에 집중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보조석에서 몸을 옆으로 확 돌리자 안전 벨트가 가슴골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에 펑퍼짐한 티에 감추어있던 가슴이 불룩 튀어나왔다.
본인은 의식 못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시선을 잡아끄는 모양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어후, 저 빨통 보소.'
[아니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왜 가슴을….]
'저렇게 가슴골 사이 갈라져서 미사일처럼 튀어나와 잇는데 시선이 안가겠냐. 그건 사내도 아니지.'
나는 것짓말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정면을 보며 가슴을 외면했다. 자꾸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것처럼 매혹적인 빨통이었다.
"자기가 협박받고 있다더라고."
"협박? 그 여자애가?"
"어."
"누구한테?"
"흠, 근데 이거 내가 멋대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빛나가 차분하게 나를 설득했다.
"도훈아. 범죄 사실을 인지하거나, 범죄 모의를 우연히 엿들엇을 땐 신고하는 게 시민의 의무야."
"아니 근데 이게 좀 민감한 얘기라…."
"걱정 마. 신고자에겐 절대 피해가 안 가도록 할 테니까."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애한테 피해가 갈까봐 그렇지."
"그것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처리할게. 너는 그냥 사실대로만 말해주면 돼."
빛나의 태도가 워낙에 진지했으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업정신에 투철한 그녀를 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음, 생각했던 이상으로 빛나는 좋은 경찰이었군."
[처음 봤을 때도 굉장히 열심히였죠.]
'하긴. 경찰복 입고 나랑 카섹스 한 것 빼곤 나무랄 데 없는 민중의 지팡이긴 하지.'
"협박을 한다는 사람이 누군데? 스토커?"
"아니 좀 복잡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봐."
"그러니까…. 사실 그 여자애도 잘못하긴 한건데…."
나는 김변과 소연의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했다.
김변이 소연에게 스폰을 제안했고, 소연이 그 계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실화였다.
"…스폰서라고?"
"어."
"와, 어의가 없에. 너 그 애랑 만나지 마. 질 나쁜 애네."
"아니 나도 별로 친한 건 아냐. 그냥 게임으로 만났을 뿐이니가."
"어쨌든. 여자애가 얼마나 할짓이 없으면 그런 걸…."
빛나가 스폰 이야기를 듣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경찰공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 시험해 합격하고, 박봉을 모아 꾸준히 저축을 하는 바른 생활의 빛나에게 있어서 대학생 스폰녀 소연은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두 사람은 쉽게 말해 전혀 상극인 가치관이었다.
"나도 그건 이번에 알게 된 거라서. 암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처음엔 스폰으로 시작하긴 했나보더라고. 용돈도 주고 그 대가로 몰래 데이트하고."
"그런데?"
"그 남자가 동영상을 촬영했나 봐."
"동영상?"
빛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데이트 폭력이니, 그루밍 성범죄니. 혹은 영상 유출 협박이니.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하는 각종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모양이었다.
"어. 합의없이. 그냥 몰카처럼."
"그러니까 둘이 스폰으로 시작했는데, 몰래 동영상을 찍었단 말이지? 관계하는 영상을?"
"응."
"계속해봐."
"그리고 그걸로 협박 했나 보더라고. 앞으로 안 만나주면 그 여자애가 스폰받은 사실이랑 섹스 동영상을 유출시켜 버리겠다고."
"아…."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만나기 싫어도 억지로 끌려다니는 모양이야."
"성착취 범죄로군."
"뭐 그런 비슷한 거겠지."
"알았어. 일단 내용은 인지했으니 이건 내가 형사부에 정식으로…."
"잠깐만."
"ㅇ으?"
"상대가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사람인가 보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이어서 연락을 위해 대포폰만 쓴다는 것고, 이제껏 스폰 비용을 현금으로 지급한 이야기, 그리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알렸다.
"벼, 변호사라고?"
"어."
"그 여자애가 그렇게 얘길했어?"
"응. 상대가 변호사라 법에 대해선 누구보다 빠삭하데. 도망칠 구멍은 다 만들어놨으니 신고해도 필요없을 거란 얘기였어."
빛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를 거 아냐?"
"아니야. 정말로 변호사라고 했어."
"명함 같은 것으로는 어차피 입증 안 돼. 그리고 딱 보니까 처음부터 성착취를 목적으로 스폰 제의를 건낸 것 같은데, 놈이 실제로 변호사인지 박사인지 어떻게 알 거야?"
빛나의 합리적인 의문에 나도 모르게 납득당하고 말았다.
'하긴 빛나 말도 맞네.'
[변호사인건 그냥 빼시죠.]
'오케이.'
"어쨌든 그래서 당사자도 무서운데 신고를 꺼리는 것 같더라고. 어차피 상대가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버리고 나중에 보복 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음…."
"거기다 동영상까지 찍혔잖아. 괜히 증거불충분 같은 걸로 풀려난 뒤에 괘씸죄로 영상을 인터넷에 몰래 풀기라도 하면 이게 겨우 스무살 짜리 여자애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
"아…. 스무 살이야?"
"어. 고등학교 졸업한 지 반년도 안 지났다고. 물론 스폰서 제의를 덜컥 받은 건 자기도 잘못이긴 한데, 그것도 처음부터 놈이 미끼를 던진 걸 수도 있잖아."
나는 최대한 소연을 포장했다.
실은 중학교 때부터 섹스에 눈을 떴고, 자발적으로 OP를 찾은 색정녀라는 진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으흠,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정말로 변호사라면 신고가 들어가면 범죄 증거부터 없애지 않겠어? 법을 누구보다 잘아니까, 무조건 빠져나갈 구멍부터 만들 거 아니야."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돈 받고 섹스하면 성매매 특별법 같은 걸로 걸리는 거 아냐?"
"성매매 특별법?"
"어. 원래 그거 불법이잖아."
"그렇지."
"그 여자애가 그러더라고. 이렇게 협박받고 사느니 차라리 경찰한테 잡혀갔으면 좋겠다고. 현장에서 적발되면 빼도 박도 못할 테니까."
"잠깐만 그러면 지금 나한테 부탁한다는 게…. "
"어. 현장 단속으로 현행범으로 잡아 넣어줄 수 있어?"
나의 제안에 빛나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범죄 제보라기보다 수사 청탁에 가까운 느낌에 속으로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한참 혼자 생각하던 빛나가 신중하게 말했다.
"도훈아. 이건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왜?"
"만약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쳐도 이건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야. 감당하기 힘들어 질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혹시 함정수사라는 말 들어봤어?"
"함정수사라니?"
"경찰이 일부러 함정을 파놓고 범죄 행위를 방조하면 그 자체로 위법이 된다는 소리야. 소송으로 가면 기각사유지."
"근데 이건 함정 같은 게 아니잖아. 실제로 협박을 당하는 사람이 신고한다는 건데…."
"그건 그 여자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잖아.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수사에 착수할 순 없는 거야. 그리고 실제로 신고가 들어온다고 해도 강력 성범죄를 나같은 말단이 맡긴 어려워. 이런 일은 형사들이 붙겠지."
"아…."
"일단 내가 윗선에 보고를 해서 어떤 식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지…."
"…아니야. 관두자."
나는 빛나를 향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빛나가 놀래 물었다.
"왜, 왜 그래 도훈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경찰에 신고를 할거였음 그 여자애가 진작 했을거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아니 도훈아. 그래도…."
"아니야. 누나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잘 몰라서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 모르겠어서 물어본 거야. 근데 들어보니까 괜히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서."
"아니 그게 아니고 절차라는 게…."
"이해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내 제보만 듣고 무리하게 현장 진입했다가 일 꼬이면 누난만 곤란해질 거 아니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빛나가 계속 난처해했다.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빛나 양의 말이 사실 맞지 않습니까?]
'맞지.'
[그런데 왜 알만한 분이 고집을 피우십니까?]
'그 새끼 좆되게 하려면 현장에서 적발되는 게 최선이니까. 정식 수사절차 밟았다간 영장심사도 못 받고 흐지부지 될 걸.'
[상대가 변호사라서요?]
'그렇지. 법꾸라지 새끼. 그걸 아니까 멋대로 설쳐대는 거잖아.'
[하아. 빛나양이 워낙에 고지식한 타입이라 FM대로 행동하는 거군요.]
'물론 아직 설득이 끝난 건 아니야.'
[네? 달리 방법이 있으십니까?]
'더 미안하게 만들어야. 그리고 결정적일 때 한 번 더 찔러야지.'
"도훈아, 혹시 실망했어?"
"아니야, 누나."
"미안해. 근데 나로서도…."
"그 얘긴 그만하자. 간만에 얼굴 보려고 만난 건데 괜히 심각해 지는 것 같아서. 난 괜찮아."
"…으, 응."
"어차피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누나한테 조언을 구한 거였어."
"도움이 되지 못했네. 그래도 만약 그 여자애 말이 사실이라면 하루 빨리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응, 그렇게 말할게. 정식으로 신고 넣으라고."
"으, 응."
빛나가 의기소침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차창밖을 보며 얘기했다.
"근데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
"응? 그냥 드라이브하는 거 아니었어?"
"누나 오늘 오후 출근한다면서."
"어. 어제 야근해서 지참 받았어."
"그럼 앞으로 2시간 정도는 여유 있겠네?"
일부러 시간을 강조했다. 모텔 대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 그렇지?"
"하암, 근데 아침부터 운전했더니 영 피곤하네."
"왜? 어제 늦게 잤어?"
"누나 만난다고 설레서 잠이 와야 말이지."
"풉- 야. 웃기지 마."
"진짜라니까?"
"거짓말 하네. 어제까지 연락한 번 없었으면서."
"암튼 운전대 잡고 있는데 졸려서 큰일이다. 잠깐 졸음 쉼터라도 들어야 하나?"
"여긴 고속도로가 아니라 없을 텐데…."
빛나가 네비 화면을 축소시켜 쉴 곳을 찾았다. 그러나 한 동안은 쭉 이어지는 길 뿐이었다. 나는 네비에 나타난 지점 하나를 가리켰다.
"어. 저기서 쉬면 되겠네."
"어디? 수, 숲속 모텔?"
길가에 덩그러니 달랑 있는 모텔 지명을 가리키자 빛나의 얼굴이 빨개졋다. 위치를 보아하니 교외에 즐비하게 자리한 러브 호텔의 일종으로 보였다.
"한 숨 자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슬쩍 운을 띄우자 빛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 이럴려고 나 보자고 했어?"
< 1055. 남의 떡이 더 맛있어.-2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