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71화 (1,038/2,000)

< 1054. 남의 떡이 더 맛있어.-24- >

***

다음 날 아침.

도훈이 간만에 치장을 했다. 빛나에게 청탁을 넣기 위해 미남계를 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각종 미용 아이템을 이용해 피부를 촉촉하게 만들고, 왁스보다 강력한 마법의 드라이기로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 얼굴이 완성되자 옷은 거들 뿐. 흰 반팔 티 위에 평범한 여름 남방, 시원한 슬랙스 바지만 걸쳤음에도 거울을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존 멋! 씹!"

[으음, 가끔 이럴 때면 주인님이 창피합니다.]

'혼잣말인데 뭘? 나도 꾸미면 솔직히 잘생겼지 않냐?'

[안 꾸미셔도 매력이야 철철 넘치죠.]

'하여간 내가 두 번 살아보니까 공부 잘하는 것보다 얼굴 잘 생긴 게 최고더라고.'

[인생을 두 번 산 사람치곤 굉장히 얄팍한 교훈을 얻으셨군요.]

'까놓고 말해서 공부 잘하는 것도 좋은 재능이긴 해. 학창 시절 모범생 소리 들어, 학벌 가지고 평생 유세 부려, 나중에 직장 구할 때 괜찮은 직장 꿰찰 수도 있으니.'

[듣고 보니 장점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근데 결과적으로 보면 공부 잘해서 얻을 수 있는 건 그냥 부모 잘 만나면 다 해결되는 부분이거든.'

[어째서죠?]

'공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는 연봉을 받기 위해 몸부림 치는 거잖아. 내가 이렇게 성실하다, 내가 이렇게 똑똑하다, 그러니 나를 써달라. 뭐 이런 자기 피알이랄까?'

[그런데요?]

'근데 결국 그렇게 좋은 직장 얻어서 한다는 짓이 평생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거거든.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시원찮은 대로, 잘 벌면 잘 버는 대로. 결국엔 노예 신세지. 고급 노예냐 싼 노예냐의 차이만 있을 뿐.'

[너무 극단적인 주장입닏. 직업 선택이 꼭 돈벌이만 국한된 것은 아닐텐데요.]

'어쨌든 돈 벌려고 하는 건 맞잖아. 현실적으로 말이야. 근데 집에 돈이 많다고 쳐. 뭐하러 일을 하겠어? 그냥 가진 재산 지키기만 해도 끝인걸. 일할 필요가 없으니 공부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게 공부 잘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아? 상위호환이지.'

[주인님은 가끔 보면 너무 속물적입니다.]

'인정. 내가 좀 속물적이긴 하지. 암튼 근데 공부 잘하고 돈이 많아도 젊은 날엔 얼굴 잘 생긴 것만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건 또 어째서죠?]

'인간은 어쨌든 동물이고, 본능에 충실하거든. 남자 세명이 소개팅을 나갔다고 쳐. 한놈은 공부를 무지 잘하고, 한 놈은 집에 돈이 엄청 많아. 근데 한 놈은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존잘이야. 셋 중에 누가 제일 인기 많을 것 같아?'

[음, 그거야 취향에 따라….]

'아니. 내심 다 존잘을 원하다고. 막말로 공부를 잘해봐야 사축 노예밖에 더 돼? 집에 돈이 많으면 어쩔 건데? 그 돈이 오롯이 자기 거야? 결혼까지 못 가면 쥐뿔도 없는 거잖아. 근데 존잘은 당장 눈에 보이는 메리트거든.'

[눈에 보이다뇨?]

'옆에 끼고 같이 다니기만 해도 자부심이 팍팍 올라간다고. 이런 남자가 내 옆에 있다. 이 사람이 내 남자다.'

[아니 무슨 트로피도 아니고….]

'하지만 여자라면 그런 허영심은 누구나 조금씩 있는 거라고.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데 남자 친구의 외모만큼 어필하는 건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아침부터 꾸미신 이유가 왕빛나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뜻이죠?]

'그렇지. 원래 배갯머리 송사만큼 잘 통하는 게 없으니.'

[그건 보통 여자들이 쓰는 비유 같은데요.]

'나는 미남계가 가능하니까. 자, 이제 청탁. 아니 좆탁하러 가보자.'

한창 꾸미고 나온 도훈이 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빛나를 만날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순경 가슴 하나는 진퉁이었는데….'

유난히 큰 가슴 덕에 지금도 빛나를 생각하면 왕가슴만 떠오르는 도훈이었다. 사람을 추억하는데 얼굴이 아니라 가슴부터 떠오르다니 참으로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학창 시절의 별명도 왕가슴이 아니었을까?

도훈은 약속장소에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빛나를 찾았다. 집 근처 근린공원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주변이 넓어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다.

"혹시 내가 먼저 도착한 건가?"

시각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까지 아직 3분 가량 남아있었다.

도훈은 텅 빈 벤치에 앉아 잠시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그의 메신저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읽지도 않은 채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여자 후배들이 보낸 깨톡이었다.

-서현 : 오빠,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이번 캠프 때 넘 좋았어요.

-경희 : 어후, 오빠 때문에 저 아직도 다리가 후들리는 거 같아요. 이제 어떡하실 거에요.

-희주 : 둘이 몰래 한 번 더 ㄱㄱ?

캠프를 끝마치고 집으로 귀가해 보낸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었다. 도훈이 답장을 안 했음에도 몇 개씩 연달아 보낸 후배들도 있었다.

그 중에 일부는 자동으로 답장이 되어 있었는데, 도훈도 자신이 쓴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바로 어장관리 어프에서 자동 관리하는 멤버들이었다.

"이야, 이 어플 생각보다 쓸만한데? 내가 보내놓고 깜빡한 줄 알았네."

[인공지능의 놀라운 혁신이지요. 주인님의 평소 말투와 대상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완벽한 답변을 제시하니까요.]

'이거 보면 유료 전환을 하고 싶기도 하네. 한 달에 천포인트 정도면.'

[관리 인원을 더 늘리시려고요?]

'아니. 것보단 여자들에게 자주 연락오는데 일일이 답변하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무작정 쌩 까자니 또 서운해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연락이 많이 옵니까?]

'한 번 보여줘?'

도훈이 대화목록 창을 스르륵 내렸다.

프로필로 보아 대부분 여자들이었는데, 도훈이 답장을 하던 말던 별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와 속이 보이는 질문, 좋은 하루 되라는 쓸데없는 내용까지 각양 각색의 메시지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확인도 안 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이렇게나 많이 온다고요?]

'나도 놀랐다니까? 심지어 이게 이틀 전에 쌓인 거야. 봐서 한 번 싹 정리하니까. 난 원래 여자들 깨톡 안 쓰는 줄 알았잖아.'

[언제 말입니까?]

'이정우 때.'

[그 당시에도 깨톡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땐 문자로 주로 했지. 암튼 먼저 연락 안하면 여자들한테 연락 온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이도훈으로 다시 살아보니까 바로 내가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지.'

[역시 얼굴이 전부인가요?]

'잘생긴 놈에겐 이 세상은 이지모드라고 하잖아. 못 생긴 놈에겐 헬 난이도고. 둘 다 살아보니 참으로 맞는 말이었어.'

"앗, 미안. 내가 좀 늦었지?"

도훈이 한창 폰을 뒤적이는데 빛나가 도착했다. 도훈은 얼른 폰을 숨기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빛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셨어요?"

경찰 유니폼이 유독 기억에 남던 빛나였지만, 사복은 생각외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특히 펑퍼즘한 티를 입어 특유의 왕가슴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

'뭐지? 왜 장점을 숨기고 왔지?'

도훈이 실망한 데 반해 빛나는 도훈을 간만에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와…. 얘가 이렇게 잘 생겼었나?'

도훈과의 만남이 짧았기 때문에 훈남 정도로 기억하던 빛나였기에, 존잘로 변한 도훈의 모습은 놀라기 충분했다. 그녀가 실물로 본 어떤 남자보다 잘 생겨 보였다.

"어…. 너 좀 변했네?"

"저요?"

도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 이번에 학교에서 캠프 다녀왔거든요."

"캠프?"

"잠시 앉을래요?"

"어, 그래."

빛나가 살짝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아직 가까이 있기엔 어딘가 서먹하고 민망했다.

"저희 과에서 하는 수영 캠프요. 해변에서 2박 3일 있었더니 얼굴이 많이 탔어요. 좀 까맣죠?"

"아…. 그렇구나."

그의 말대로 피부가 살짝 태닝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성적인 매력을 더욱 부각시켰다. 특히 옷을 걸쳤음에도 밖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형태가 잘 잡힌 모델처럼 새끈했다.

'어우…. 뭐야 얘는. 사람 설레게. 내 기억보다 더 잘 생겨보이네….'

빛나는 도훈이 부담스러워 눈을 못 마주치고 쭈뼛거렷다. 도훈이 긴장을 풀기 우해 농을 건넸다.

"누난 근데 사복입으니까 전혀 달라 보이네요?"

"어디가?"

"네. 순찰복 입을 때는 옷이 꽉 끼었던 것 같은데."

"뭐가 끼어? …야이씨!"

그제야 도훈이 가슴을 희롱하는 걸 깨달은 빛나가 도훈의 어깨를 세게 후렸다. 여경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매운 펀치였지만, 도훈의 근육이 갑옷처럼 단단해 타격감이 일도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단단해?"

"제가 좀 근육질이라."

"어휴, 진짜. 능글맞은 건 여전하네."

"암튼 반가워요. 간만에 누나 보니까 좋네."

"누나는 무슨. 야 하던대로 해. 반말 잘하더만?"

"그럴까?"

격한 스킨십 이후 긴장이 풀렸는지 빛나의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마주치면 감정을 들킬까봐 쉽게 도훈을 못 쳐다보고 물었다.

"나한테 무슨 부탁할 거 있다면서?"

"여기서 말해?"

"그럼 어디서 말할 건데?"

"너무 공개된 장소라…."

"참나. 어디 커피숍이라도 갈까?"

"아님 가볍게 드라이브 어때?"

"드라이브?"

"나 차가지고 나왔거든."

"…그럴래?"

차를 탄다는 말에 빛나가 살짝 긴장했다.

그와 마지막에 벌인 섹스가 주차장에서의 카섹스였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비좁은 공간에서 온갖 체위를 시도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차에 오른 도훈이 무작정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근데 우리 어디갈 건데?"

"강남대로 한 번 달릴까?"

"이 시간에 막힐 걸? 나 교통지원 자주 나가잖아. 어디가 언제 막히는지 너보다 잘 알지."

"그럼 어디가 좋아."

"교외로 나가자. 외곽순환은 안 막힐거야."

"오키."

차를 출발시키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도훈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경찰서에서 벌어진 술주정 같은 시덥잖은 얘기들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말문이 트이니 긴장은 조금은 풀렷다.

어느 정도 뚫린 도로로 나가면서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빛나가 도훈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나한테 부탁할 게 뭔데?"

"진짜로 통장 가져왔어?"

도훈이 농담삼아 묻자 빛나가 갑자기 가방을 열어보이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니가 갑자기 연락하는 걸 보고 돈 필요하겠구나 싶더라니."

도훈은 일부러 아무말 안 하면서 빛나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무릎 위에 통장 두 개를 꺼내 올렸다.

"하나는 자유 예금 통장이고 오백 정도 들어 있어. 다른 하나는 적금 통장인데 천 정도 있고. 얼마나 필요한데? 적금도 깨줘?"

농담으로 한 소리에 빛나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자 오히려 도훈이 당황했다.

"정말로 적금 깨려고?"

"너 대체 무슨 사골 친건데?"

"아니, 그걸 떠나서 누나가 나한테 왜 돈을 주는데?"

"그것 때문에 나한테 연락 한 거 아냐?"

"내가?"

도훈이 되묻자 빛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뻔하잖아. 평소에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야밤에 전화하는 거면…. 깊이 안 물어 볼 테니끼 필요한 만큼 말해. 솔직히 나도 박봉이라서 많이는 못 모았어. 서울살이가 워낙에 팍팍해야지."

빛나가 주저리주저리 넋두리를 늘어놓는데 도훈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무슨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피같은 적금까지 깨준다는 거지?'

[그러게요? 빛나양이 주인님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먹튀라도 하면 어쩌려고?'

도훈은 하도 이상해 빛나에게 물었다.

"누나. 빌려주는 건 좋은데 제가 돈 받고 쌩까면 어쩌려고?"

"뭐? 나 생깔 거야?"

빛나가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했다.

"후-.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 내 눈이 삔 거겠지. 너 그런 놈으로 안 봤는데."

"아니, 혹시 평소에도 누가 돈 빌려 달라면 막 빌려주고 그래? 적금 깨서?"

"아니, 그 정돈 아닌데…. 뭐 빌려준 적은 많지."

"혹시 못 돌려 받은 적은?"

"음…. 몇 번 있긴 해.":

"하-. 나참."

도훈이 허탈함에 한숨부터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원래부터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격이구나.'

[빛나양이요?]

'원래 저런애들 있거든. 무골호인이라고 부르는 부류들. 겉보기엔 강직하고 철두철미할 것 같은데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끝없이 퍼주는 애들.'

[그럼 빛나양이 주인님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런가 보지. 그래도 나랑 살도 섞고 이것저것 다 했으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무슨 적금까지 들고오냐?'

"아니 그렇다고 적금은 또 뭔데?"

"니가 금액을 정확히 얘기 안 해서 그랬지."

"난 돈 빌려 달라고 안 했는데?"

"어? 아니었어?"

도훈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빛나가 생각외로 정에 약하고, 자기 사람에게 마구 퍼주는 스타일인걸 알았으니 청탁도 쉬울 것 같았다.

"나를 뭘로 보고. 나 사고 안쳐. 설사 쳤다고 해도, 내가 몸으로 때우고 말지, 누날 알면 얼마나 알았다고 성큼 돈을 빌리겠어?"

도훈의 말에 빛나가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렇구나. 내가 너무 성급했네."

"통장은 넣어둬. 그리고 그렇게 쉽게 사람한테 돈 빌려주는 거 아니야."

"아니, 너니까 도와주려고 한 거지."

"내가 뭐라고?"

"…뭐 그냥. 아는 사이?"

빛나가 괜히 감정을 들킬까봐 말을 돌렸다. 그때 도훈이 말했다.

"실은 나 범죄 신고 하나 하려고."

< 1054. 남의 떡이 더 맛있어.-2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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