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58화 (1,025/2,000)

< 1041. 남의 떡이 더 맛있어.-11- >

"진작 그럴 것이지."

협상에서 완승을 거둔 나는 남은 돈 가방을 따로 치웠다. 소연이 그나마 1억이라도 건졌다는 생각에 돈을 집으려 들자 다시 그녀를 막아섰다.

"잠깐."

"왜요? 시키는 대로 하겠다잖아요!"

"1억이 걸린 계약을 구두로 때우는 경우가 어딨어? 나랑 장난해?"

"그런ㅁ요?"

"네가 현금만 받고 싹 입 닦으면?"

"아, 안 그런다고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빼액 소리치는 소연을 가소롭게 쳐다보았다.

사람을 어찌 보냐고?

그녀가 걸친 옷을 눈으로 훑고, 그녀의 진한 화장을 보며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창녀 말을 어떻게 믿겠냐는 모멸적 표정.

그녀도 분명한 멸시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원래 사람 잘 안 믿어."

"그럼요?"

"서류를 신뢰하지. 법적 구속력을 가진 계약서 같은."

"그러니까 저보고 지금 계약서를 쓰라는 소리예요?"

"그래."

"써요, 까짓거.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눈앞의 거금에 눈이 돌아갔는지 소연이 자꾸 보챘다. 이미 눈앞에서 1억을 날린 상황에, 나머지 1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건지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같았다.

"종이 있어?"

"잠시만요."

소연이 방 어딘가에서 이면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뒷면에 시답지 않은 광고문구가 적혀있었다.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상관없어. 그리고 볼펜도."

"볼펜? 아, 있어요."

소연이 종이와 펜을 대령하자 나는 자세를 잡고 계약서를 갈기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중간 협박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신체포기각서라고 들어봤어?"

"시, 신체포기각서요? 설마 장기…."

"무슨 소리야? 내가 나쁜 놈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토막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위협적인 말투로 소연에게 겁을 주었다. 전문용어가 등장하자 소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보라고. 신체 포기각서."

소연은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계약서에 뚫어지게 집중했다. 과연 저기에 어떤 내용이 담기는지 똑똑히 확인하겠다는 모습이었다.

"나 조소연은, 정해진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나의 신체를 포기함을 인정합니다."

"시, 신체를 포기하다뇨?"

"문자 그대로야. 네 몸뚱이를 나한테 맡기는 거지."

"제 몸을 어디다 쓰시게요?"

"뻔하지 않아? 와꾸 반반한 20대 초반 아가씨가 하룻밤 빡세게 구르면 얼마를 벌어 들일 수 있는지 말이야. 너도 해봐서 알 거 아냐?"

"서, 설마 저를…."

"그래. 계약 실패하면 지금 받은 돈은 몸으로 때우라는 거지.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그래도 삼시 세끼 밥을 주고 재워는 드릴게. 남자였음 저 멀리 원양어선 태워 보내버린다고. 몇 년 동안 땅도 못 밟게 말이야. 한국에 남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암."

"자, 잠시만요. 이런 얘긴 처음에 없었잖아요!"

신체포기각서 설명을 들은 소연이 질겁하며 도리질 쳤다.

[주인님 이건 애초에 위법적 계약이라 법적 효력이 없을 텐데요?]

'알아.'

[그런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시죠?]

'순전히 겁주는 거야. 솔직히 난 소연이라는 애한테 믿음이 하나도 없거든. 돈만 밝히는 어린 창년에게 뭘보고 1억을 덜컥 주겠어? 그것도 현찰로.'

[그래서 협박하는 겁니까? 딴마음 먹지 못하게? 주인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마음을 빼앗아서 김변을 배신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요?]

'물론 그것도 가능하지. 오랫동안 공을 들인다면. 하지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뭔데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돈으로 때우는 게 가장 편하다는.'

[아….]

'계약서는 순전 협박용이지만, 솔직히 윈윈하는 조건이야. 소연이는 자기가 그토록 바라던 돈을 받고, 나는 김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잖아. 어쨌든 현행범으로 잡히고 나면 한동안 그 잘난 변호사 자격도 정지될 테니까.'

[소연양도 범법자가 되는 건데요? 그럼 본인에게도 피해가 가는 부분 아닌가요?]

'솔직히 말하면 소연이한텐 별 타격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죠?]

'이 나라는 웃기게도 성매매 여성이 피해자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거든.'

[피해자라고요? 아니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진해서 쉽게 돈 벌려고 몸을 파는데 어째서….]

'슬프게도 그게 우리나라 법이야. 여자에겐 관대하고, 남자에겐 한없이 준엄하지. 어쩌면 감빵은 커녕 정서치료에다 아마 취업 보조금도 얹어 줄 지 모르지. 초범에 나이도 아직 어리다 보니 판사가 아량을 베푼다면.'

[그럼 소연양도 거기까지 다 계산했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저 정도 빠꼼이가 그걸 모르고 덥썩 미끼를 물었을까 봐. 자긴 걸려도 별 타격 없는 걸 아는 거야. 혹시나 학교에 소문나고 짤리게 되도 그깟 똥통 학교 자퇴하면 그만이지.'

[말씀이 심하십니다. 누군가에겐 꿈일 수도 있는데 똥통 학교라니.]

'오케이. 그건 내가 실언했어. 그리고 가진 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지'

[하여간 주인님은 정말 크리미널 마인드입니다. 칼만 안든 강도랄까?]

나는 망설이는 소연을 재촉했다.

"뭐야? 계약서 지장 안 찍을 거야?"

"잠시만요. 보채지 마세요. 고민 중이니까."

"뭐가 고민인데? 왜? 정말로 돈만 먹고 튀려고 했어?"

"아, 아뇨!"

"근데 뭐가 문제야? 지장만 찍으면 이 돈 다 준다니까?"

나는 다시 소연을 부추겼다.

숫자로 떠도는 돈이 아니다. 실물로 존재하는 5만원권 묶음이다. 실제로 테이블 위에 깔린 돈을 보면 욕망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그, 그래도 저보고 이런…."

나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악당처럼 변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진짜 웃기고 앉아 있네. 오피나 뛰는 년이."

"뭐, 뭐라고요?"

"왜? 니 봊이는 금테 둘렀어? 돈만 주면 바로 가랑이 벌리는 년이 신체포기각서 정도로 우물쭈물거려? 이게 안 웃겨?"

"마, 말 함부로 마요!"

소연이 버럭했다. 돈에 찌든 노예긴 하지만 자존심이 센 아이다. 속물적인 걸 인정하면서도 끝내 한 가닥 자존심을 붙잡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다.

"함부로? 팩트로 조지니까 할 말이 없죠? 야. 막말로 여기서 몸 파나 저기서 몸 파나 뭐가 다른데?"

"저, 전 알바라고요!"

"아하, 그러셨어요? 그럼 전업 뛰면 정규직 창녀고, 대타 뛰면 일용직이니까 창녀가 아닌 거야?"

"마, 말끝마다 자꾸!"

"그러니까 주제 파악 똑바로 하라고!"

눈알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이자 대들던 소연이 깨갱하고 물러섰다. 확실히 아이템으로 변한 내 얼굴은 거울로 봐도 깜짝깜짝 놀랄만큼 무섭다. 게다가 덩치도 오죽 좋은가?

훈남 오빠 얼굴일 땐 건장한 스포츠맨의 상징같았던 근육질 바디가, 지금은 조폭이 개사료 먹고 키운 몸처럼 우락부락 다부져 보인다. 역시 인상을 좌우하는 건 몸이 아니라 얼굴이다.

"씨발, 좋게좋게 말할 때 고분고분 들을 것이지 꼭 성질 나오게 만드네 좆 같은 년이!"

"죄,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지 모르지만 소연이 바짝 엎드렸다.

강약약강.

그녀는 정형적인 약육강식의 논리의 신봉자다.

상대가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틈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으려 하고, 범접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선 깨갱하고 꼬리를 말아 내린다.

나쁘게 말하면 간사하고, 좋게 말해 처세에 능하다.

아주 신박한 년이다.

이런 여시같은 계집애는 또 처음보는 군.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약아 빠졌어.

"내가 너 아니면 그 김변 새끼 보낼 방법이 없어서 그래?"

"…네? 그게 무슨."

"김변 새끼 여자 좋아하는 건 알지?"

"아, 알죠."

"예날에 사귀던 여친도 지방에 있고, 유부녀랑도 붙어먹고, 그것도 모자라 대학생인 너를 스폰으로 두고 있는 것도."

"알아요."

"그런 김변한테 꽃뱀 하나 붙여서 털어먹는 거 우습지도 않아. 하기 싫음 관 둬.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널렸으니까. 야, 이 오프스텔에만 너같은 오피년이 수십명이야, 수십명."

나는 계약서를 치워버리고 돈가방을 다시 열었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한 소연이 황급히 나를 막아섰다.

"오, 오빠 잠깐만요!"

"놔. 너랑 안 할라니까. 어차피 나는 그 변호사 새끼만 조지면 그만이야. 너 없어도 상관없어."

"잠시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오빠."

"……."

소연이 하도 완강하게 붙잡는 통에 못 이긴 척 동작을 멈추었다.

"왜? 또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기만 해."

"오빠 말이 맞아요. 그래요, 저 오피 뛰는 창녀고 이놈 저놈 다 대주는 걸래에요."

"그래서?"

"그래도 괜히 무섭다고요. 신체 포기각서라고 하니까…. 막 섬에 팔아 버리면 어쩌나 싶고…."

"너를 섬에 왜 넘겨? 아직 한창인데."

"정말요? 저는 그게 무서웠단 말이에요. 솔직히 제가 몸도 파고 스폰도 받긴 해도 진짜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하루종일 손님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말을 하던 소연이 울먹거렸다. 순진한 사람이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가증스러운 연기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본색을 알고 있다. 저 또한 다 철저한 위장이란 걸.

"그게 더 무서워서 그런 거였어요. 싫다는 게 아니라요."

나는 다시 목소리 톤을 다운시키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번 윽박 질렀으니 이번엔 타이틀 차례다.

"그러니까…. 너만 약속 지키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계약서에도 써 놨고."

"정말이죠?"

그녀가 거의 넘어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양념만 치면 된다.

"그렇다니까. 별거 아니야. 너는 그냥 평소처럼 김변 만나서 섹스만 하고 있으면 돼. 경찰이 쳐들어오면 고개 팍 숙이고 경찰서 가서 사실대로 진술만 해주면 된다고."

"그럼 저도 감옥 가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성매매 특별법 어겼다고 여자가 감옥가는 거 봤어? 그리고 너 처음 걸리는 거잖아."

"네."

"나이도 고작 스무사링고."

"네."

"그럼 무조건 집유 떨어져. 아니, 징역도 안나올지 모르지."

"그럼 김변호사님은 어떻게 되는 데요?"

"걔도 별거 없어. 변호사 자격이나 몇 년 정지되고 말겠지. 그쪽 놈들이 얼마나 자기편 감싸는데? 그래도 현행범이니 처벌은 피할 수 없겠지."

"그…."

"뭐?"

"근데 이런 일을 왜 하시는 거예요?"

"이유를 말해주면 지장 찍을 거야?"

"너무 궁금하잖아요. 오빠가 변호사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는 표정을 싹 굳히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걸 건드렸거든."

"예?"

"그 새끼가 내 껄 건드렸다고."

"그게 무슨…."

"나는 누가 내꺼 건드리면 빡돌아. 이유는 충분하지?"

"아… 예 뭐…."

소연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머릿속으론 대충 계산이 끝난 눈치였다.

"근데 지장은 뭘로 찍어요? 인주 같은 것도 없는데."

"인주가 무슨 필요야?"

[로시, 칼 보내.]

'칼을요?'

[아무 칼이나 좋으니 바로 아이템 전송시켜.]

'아니 무슨….'

[그냥 아이템 마켓에 파는 싸구려 칼도 괜찮으니까 아무거나 보내라고.]

'알겠습니다.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로시가 주머니로 아이템을 전송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던 빈 주머니로 잭나이프가 도착했다. 나는 칼을 꺼내 접혀 있던 날을 세웠다. 로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칼은 껍질을 최대한 얇게 깎아주는 '영양 만점의 과도'라는 아이템이었다. 쉽게 말해 과일 칼이다.

물론 조그만 칼이긴 하지만 칼을 보는 순간 소연이 놀라 주춤주춤 물러섰다. 나를 조폭이나 악덕 사채업자 쯤으로 여기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 오빠 지금 무슨…."

"인주 필요하다면?'

나는 날카로운 과도 끝으로 내 손가락 끝을 살짝 찔렀다.

'윽, 존나 따갑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 자해로 위협하는 거지.'

손 끝에 핏방울이 맺히자 오른손 엄지에 묻힌 후 그대로 혈지장을 박았다. 핏물에 번진 지장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나, 너도 발라."

나는 피가 떨어진 손가락을 내밀었다. 소연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조심스럽게 손끝에 피를 묻히더니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찌, 찍었어요. 괜찮아요? 피가…."

"상관없어. 피 보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와, 거짓말. 주인님이 언제 칼에 찔려 보셨다고.]

'몰랐어? 나 칼빵맞아 뒤진거.'

[아…. 죄송합니다.]

'신경쓰지마. 이미 지난 일이니까.'

나는 완성되니 계약서를 소연에게 보여주고 그녀의 핸드폰 카메라로 촬여하게 했다.

"원본은 내가 가질테니 사진으로 가지고 있어."

"아, 알겠어요. 이제 이 돈 가져가도 돼죠?"

"얼마든지."

소연은 바짝 쫄아있는 와중에도 구석에 숨겨둔 자기 빽에 돈 무더기를 쓸어담기 시작했다. 명품처럼 보이는 가방은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입구까지 돈 다발이 밀어 올라왔지만 소연은 꾹꾹 눌러 담았다.

1억과 전과를 맞바꾸다니.

아무리 스무살이라고 해도 정말이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다 챙겼어?"

"네. 그럼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면 돼요?"

"그냥 평소처럼. 의심 사지 않게 김변을 만나."

"보통 변호사님이랑은 주말에 만나요."

"그럼 이번 주에 작업 들어가면 되겠군."

"알겠어요. 오빠랑은 뭘로 연락해요?"

"폰 있지?"

"네."

"내 번호 찍어줄게."

나는 대포폰 번호를 남겼다. 통화를 걸자 소연의 번호가 떴다. 번호를 저장하고 있는데 소연이 물었다.

"오빠 근데 피가 안 멈추는 거 같은데."

"엉?"

"잠시만요."

소연이 갑자기 칼에 찔린 내 손가락을 입으로 빨았다. 따뜻하고 눅눅한 혓바닥이 마치 질처럼 느껴졌다.

'얘 지금 뭐하냐?'

나는 손가락을 빨고 있는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못 찍은 지장 하나가 떠올랐다.

< 1041. 남의 떡이 더 맛있어.-1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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