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1. 남의 떡이 더 맛있어.-1- >
'더워도 너무 덥구만, 이번 여름은.'
땡볕에 서 있기기다 두려울 정도였다. 가만있어도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아스팔트는 달궈놓은 불판처럼 아지랑이이가 피워 올랐다.
"어우, 진짜 사람 죽일 날씨네."
도훈이 차량에 시동을 켜둔 채 그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캐리어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바퀴 하나가 빠진 듯 제대로 구르지도 못하는 걸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챙이 넓은 밀집 모자를 쓰고 있어 누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짧은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각선미 하나는 끝내주게 예뻤다.
'오, 제법 공격적인 몸맨데? 누구지?'
도훈이 슬쩍 쳐다보자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도훈을 마주 보더니 움찔 놀랐다. 도훈은 그제야 모자를 쓴 사람의 정체를 깨달았다.
"…박아영?"
그녀는 바로 버스에서 해산한 뒤 집으로 귀가하던 아영이었다.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도훈이 뒤늦게 후회했다.
'아씨, 하필이면. 그냥 못 본 척할걸.'
하지만 이미 서로 눈을 마주친 후라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불편한 사이라도 공식적으로 도훈은 학과의 회장이었고, 아영 또한 집행부의 일원이었다. 대놓고 안면몰수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행동이었다. 도훈은 곧 담배를 비벼 끄고는 아영에게 다가갔다.
"더운데 고생하네. 내가 도와줄까?"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러다 나머지 바퀴마저 빠지면 집까지 내내 들고 가야 할텐데?"
"……."
"그냥 줘."
아영은 한사코 도움을 거절했지만, 도훈이 번쩍 캐리어를 들어주자 한결 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실은 소형 캐리어가 보이질 않아 기내반입도 안되는 대형을 끌고 왔는데, 하필 바퀴마저 고장 나면서 몹시 난처하던 차였다.
도훈이 캐리어를 들다 물었다.
"집이 어느쪽인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세요?"
아영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에게 있어 도훈은 위험한 사내였다. 집을 알려줬다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두려웠다. 어쩌면 그는 늘 이런식으로 여자들에게 접근했던 것일까?
"가는 길이면 태워 주려고. 이거 가지고 지하철 내려가기도 벅찰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택시 탈거니까."
"그럼 택시 정류장까지라도."
"……."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피로도는 극에 달한 상태.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 찬물에 샤워하고 하루종일 에어컨 바람 밑에서 뒹굴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통때라면 불편한 관계인 도훈의 제안을 거절했을 테지만, 그렇긴엔 내리쬐는 태양이 너무나 뜨거웠다.
'…그냥 마지 못해 타고 갈까? 정류장까지 끌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것 같은데.'
아영이 자존심 때문에 고민하는 사이 도훈은 이미 아영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는 중이엉ㅆ다. 아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나도 더워. 얼른 타 그냥."
도훈의 박력에 아영이 군소리 없이 차량에 올랐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도훈이 먼저 나서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어컨으로 뜨거운 공기를 밀어낸 도훈의 차는 시원했다. 아영은 살것 같다는 표정으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 붙어있었다.
"많이 더웠나 보네."
"……."
아영은 갑자기 호의를 보이는 도훈의 태도를 경계했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을 덮칠 수 있는 사내였다. 긴장을 풀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늑대같은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군말없이 차에 오른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은 말리는데 자꾸 본능이 그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아영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최대한 가까운 택시 승강장에 내려주세요."
아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때 도훈이 말없이 손수건을 건냈다.
"이마에 땀이라도 닦어."
아영은 도훈이 내밀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건 대체 또 무슨 수작일가?
"…저한테 잘해주셔도 어림 없어요."
"뭐가 어림없는데?"
"저는 오빠가 어떤 사람인 줄 똑똑히 봤으니까요. 이제와서 착한 척 해봐야 소용 없다고요."
듣고 있던 도훈은 어의가 없었다. 그녀의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해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꼴에 자존심을 세우며 계속 츤츤거리는 태도가 자못 우습게 느껴졌다.
'하여간 자존심만 세가지고는.'
[그게 아영양의 매력이 아닐까요?]
'매력이고 뭐고, 스킬 후유증 때문에 이미 좆도 안 서는 구만.'
도훈은 현 상황은 현자타임을 쓴것과 비슷했다. 한마디로 좆도 꼴리지 않아서 줘도 못먹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영이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누가 뭐래냐? 근데 너 좀 웃기다?"
"제가 뭘요?"
"너한테 잘해주는 게 딴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럼요?"
도훈이 보란듯이 콧방귀를 꼈다.
"내가 널 도와주는 건 내가 체육과 회장이고 네가 집행부원이기 때문이야. 다른 뜻 조금도 없으니까 안심해."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아영이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하지만 현재의 도훈은 거세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영이 비록 에쁘긴 했지만, 현재로선 그저 지나가는 행인1에 불과했다. 도훈은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아영을 향해 몸을 바짝 기울였다.
지나치게 다가오는 느낌에 아영이 움찔 놀라며 물러났다.
그러다 떠올렸다. 비좁은 차안.
도훈이 어젯밤 4학년 오수정을 맛깔나게 따먹었던 공간이라는 걸.
'나, 나를 덮칠 생각인가?'
아영은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제압당해 강제로 범해지는 상황. 그리고 그 상대가 도훈이라니.
하지만 도훈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박아영. 너는 네가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뭐, 뭐라고요?"
"어떤 남자든 너를 보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 그거 심각한 공주병인 거 알지?"
도훈은 그 말을 마치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선 정차되어 있던 차를 출발시켰다.
노골적인 무시에 아영은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수치심을 느꼈다. 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모멸감이었다. 도훈은 무심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안심하라고. 나는 너를 건드릴 생각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
[진심이십니까? 신들과의 미션이 걸려있는데도요?]
'당장은 그렇다는 소리야. 진짜 1도 꼴리지 않는데 어쩌냐 그럼?'
[거참, 부작용이 심각하긴 하군요. 미션 대상이 눈 앞에 있는데도 미동조차 없다니.]
'나는 아주 평안해. 지금 딱 좋아.'
도훈이 말없이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무릎위에 올린 아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 내가 공주병이라고? 하-. 무슨 거지같은.'
자존심이 센 아영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보통 때라면 뺨이라도 시원하게 올려붙이고 싶지만, 도훈이 순순히 맞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인지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근데 왜 내가 저런 사람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거지? 나도 똑같이 무시하면 그만이잖아? 나한테 응큼한 생각 절대 안한다는 건 오히려 잘 된일 아닌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쌩큐였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는 학과 내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건드렸다. 그 중에는 자신보다 객관적으로 떨어지는 여자도 있었다. 막말로 효민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아도 자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얼굴이든 몸매든. 심지어 지적인 능력이든.
그런데 어떻게….
아영이 계속 속으로 곱씹고 있는데 도훈이 차를 멈추더니 말했다.
"다 왔다. 내려."
"…예?"
"가까운 승강장에 내려달라며. 도착햇다고."
위치를 보니 어느덧 대학 정문 앞 택시 승강장이었다. 도보로는 제법 먼 거리지만 차를 타고 오느라 3분도 안되는 사이 도착한 것이었다.
차에서 내리려던 아영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정말 도훈의 말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바로 집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와서?"
"네. 날씨가 더워서 택시 기다리기 힘들잖아요."
"참나."
도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알겠다면서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으로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영이 귀찮아진 도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집이 어딘데."
"그냥 직진하시면 돼요. 그보다."
아영이 말을 멈추더니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빠는 제가 우습죠?"
"기분 상했어?"
"제가 정말로 오빠의 비밀을 끝까지 입 다물거라고 보시나 봐요?"
도훈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아냥 섞인 웃음.
"그건 어제 이미 대답한 걸로 아는데. 맘대로 하라고. 난 신경 안쓰니까."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저도…."
아영이 계속 협박의 수위를 높이자 도훈이 딱 잘라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 짖는 개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
"박아영. 내 앞에서 짖는 거. 나는 조금도 관심 없어. 똑똑하니까 말 뜻은 알아 들었을거라고 생각해."
일침.
도훈의 한마디에 아영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아영의 공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진짜 발설할 생각이라면 협박을 협상카드로 이용하지도 않을 거라는 말.
아영은 도훈 앞에서 냉정을 잃었고, 결국 모든 패를 까보인 셈이 됐다.
'나, 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어.'
아영은 그것이 너무나 분했다. 갑자기 서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도훈이 너무나 미워보였다.
"…내려줘요."
"여기서?"
"기분 상했으니까 내려 달라고요."
"도로 한 가운데서 어떻게 내려?"
"몰라요. 그냥 내려 달라고요! 내려줘요!"
이성을 잃은 아영이 애처럼 때를 썼다.
숫제 발광이었다.
도훈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아영이도 무너지니까 볼품 없구만.'
[주인님이 너무 심하게 말한 것도 있습니다. 짖는 개라뇨.]
'좀 그랬나? 현타 와서 그런지 영 까칠하게 나오네.'
도훈은 자신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영에게 말했다.
"알았어. 미안해. 방금 그 말은 사과할게."
"……."
"네가 자꾸 그 일을 언급해서 나도 모르게 신경적으로 받아 쳤나보다."
"어쩜 그래도 저한테 그런 말을…."
"그건 내가 좀 심했어. 하지만 너도 계속 사람 협박하는 거,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이야."
"……."
"솔직히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것도 없잖아? 너한테 수작부리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고."
"그건…."
"박아영. 앞으로 좋든 싫든 1년간 서로 얼굴 맞대고 지내야 하는데, 좀 편하게 지내면 안 되겠냐? 내가 부탁할게."
도훈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자 아영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데 고수였다. 그의 화술에 농락당하며 완전히 말리고 있었다.
'싫다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훈의 한마디에 속상했던 기분이 싹 풀렸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도훈이 '박아영'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데,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 거렸다.
"응? 좀 좋게좋게 지내면 안 될까?"
도훈의 계속된 설득에 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그래. 좋아. 이제 서로 상하게 하지 않는걸로."
"……."
도훈은 다시 대화를 마치고 차를 몰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내였다.
자신이 카섹스 장면을 훔쳐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영은 오히려 그게 더 분했다. 다른 여자들은 다 건드리면서 자신에게는 터치 한 번 없는 그이 차별이.
"저기서 좌회전…."
"오케이."
"저기 보이는 아파트에요."
도훈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사는 구나.'
[좋은 곳입니까?]
'어. 1군 건설사 브랜드에 입지도 괜찮네. 억소리나는 아파틀 걸.'
[아영양도 생각보다 배경이 좋군요.]
'그래봐야 중산층이지 무슨.'
정문에 도착한 도훈이 차를 멈추었다.
"도착했어."
"……."
"짐 내려줄게."
도훈이 차를 정차시키고 트렁크를 열더니 커다란 캐리어를 끄집어 냈다. 아영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자, 여긴 길이 고르니까 끌고 갈 수 있지? 난 그럼 먼저 간다."
"저… 고마…."
아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훈은 차를 타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덩그러니 짐과 함께 남겨진 아영의 인상이 구겨졌다.
"진짜 저 싸가지…."
하지만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아영은 도훈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영은 왜 자신이 도훈에게 그리도 집착하는 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차를 타고 가던 도훈은 곧바로 최번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시간이 흐른것 같지만 2박 3일의 캠프가 끝나고 난 뒤라 3일 만에 연락을 취한 셈이었다.
통화가 연결이 되자 도훈이 목소리를 착 깔았다.
"번개야, 나다."
-행님, 안 그래도 막 전화 걸려던 참인데 말입니다요.
"그래? 어떻게 됐는데?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어?"
-네, 행님. 혹시 지금 어디십니까? 사진도 구해왔는데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겠는데 말입니다. 제가 튀어 가겠습니다요.
"아니야. 지금 운전중이라 내가 거기로 갈게."
-네, 행님.
< 1031. 남의 떡이 더 맛있어.-1-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새로운 에피소드 시작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