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47화 (1,014/2,000)

< 1030. 별이 쏟아 지는-90- >

***

"어? 진짜네? 이도훈이, 너 왜 여기서 자고 있냐?"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다. 잠결에 난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아씨, 누구야."

"아씨? 씨? 이 자식 회장 되더니 하늘 같은 선배도 몰라보고?"

"선… 엥?"

순간 벌떡 눈이 떠졌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싱글 침대에 대자로 뻗어있더 나는 팬티 바람으로 이불까지 걷어찬 채 늘어져 자고 있었다.

그리고 내 주위로 졸업반 선배 둘과 전임 부회장인 성수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절래절래 고개를 가로 젓고 있다.

'뭐, 뭔 상황이냐 이건.'

[예상하시는 그대로이비낟.]

'설마 나 좆 된 거냐?'

[정확한 진단이군요.]

막 잠에서 깨어나 머리가 빨리 돌지 않았다.

하지만 까딱 잘못 대답했다간 오해를 살 게 분명했다. 특히 육정음과 뜨거운 한 판을 벌였기 때문에 방안에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저, 정음이는? 설마 같이 자다가 들킨 건 아니겠지?'

[정음양은 기절한 주인님을 깨우다 포기하고 주변 정리를 하고 나갔습니다.]

'휴, 천만다행이네. 팬티도 그럼 정음이가 입힌 거?'

[넵. 걱정마십시오. 남은 흔적은 정음양이 모두 정리했으니까요.]

'일단은 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비행의 증거는 모두 소거되었다. 오로지 남은 팩트는 내가 새벽에 빈 교수방에 들어와 아침까지 혼자 자고 있다는 사실 뿐.

나는 당황한 얼굴로 둘러댔다.

"여, 여기가 어디죠?"

"그걸 왜 우리한테 물으세요, 신임 회장님?"

선배 하나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말투가 틱틱거리는 스타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저, 저도 기억이 잘…."

내가 난처해하자 한심하게 쳐다보던 성수가 나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형, 도훈이 점마 저거 원래 술 약해요."

"약해? 덩치는 산만한데?"

다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어이없을 만큼 본주인은 술이 약했다. 하지만 어제는 아이템을 이용해 알콜효소를 분해했기 때문에 조금도 취하지 않고 엄청나게 마셔댔다.

"어쩐지 오래 버틴다 싶더니만…. 도훈이 쟤 저번에 새터에서 사발주 한 잔 먹고 기절해 버렸잖아요."

"그랬어?"

"어젠 엄청 잘 마시던데?"

"그니까요. 나름 선배들 앞이라고 긴장하고 버텼나 보네. 야. 이도훈. 너 여기가 무슨 방인 줄은 알고 들어온 거야?"

성수의 커버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역시 성수는 언제나 내 편이다.

"아뇨. 분명 어제 화장실 간다고 나왔다가…. 아, 어쩐지 뭔가 방에 사람이 없는 것 같긴 했는데…."

흔들리는 동공.

떨리는 목소리.

실수를 자책하며 뉘우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다들 상황을 짐작하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완벽한 연기력의 승리군.

"너 그럼 술 처먹고 아무 방이나 들어가 잔 거야?"

"교수님 계셨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조교 선생님 방 아닌게 어디에요."

"아이고야. 그럼 신문에 낫지."

나는 숨을 꾹 참으며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창피함, 쪽팔림.

부끄러운 심정을 표현하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정말 죄송하빈다. 저도 제가 어떻게 여기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아냐. 그럴 수 있어. 예전에 누구는 엘리베이터가 자기 집인 줄 알고 밖에다 신발 벗어놓고 들어가 잤다더라."

"술이 막판에 늦게 올라옸나 보네. 어제 파할때만 해도 멀쩡해 보이더니."

대강 상황이 정리되자 성수가 일단락했다.

"얀마.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지, 후밷르이 먼저 알았어봐. 임기 첫날부터 쪽팔릴뻔 했네. 얼른 바지부터 입어."

"네, 넵!"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지 속에 황급히 발을 밀어 넣었다. 성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2학년들ㅇ 아침 준비하고 있어. 아까 누가 도훈이 네가 안 보인다고 해서 형들이랑 같이 한참 찾아 다녔잖아."

"아…."

"난 또 도망간 줄?"

"그러게. 회장하기 싫어서."

나는 한 번 더 4학년 선배들에게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사과했다.

"면목 없습니다, 선배님."

"됐어. 뭘 그런 걸로 정색하고 사과까지?"

"그러게. 사고만 안쳤으면 그만이지. 난 진짜 실종된 줄 알아서 그랬지."

"도훈이 너 얼른 세수부터 하고 와. 애들 챙겨서 밥 먹이고 곧 떠날 준비 해야 돼."

"네, 성수형."

성수가 나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명심해. 오늘부턴 네가 회장이야. 앞으로는 실수하는 모습 보이지 말고. 잘 할수 있지?"

"넵!"

***

도훈이 잠결에 사라진 얘기는 몇몇 학생들만 아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아침으로 나온 만둣국을 무성의하게 떠먹던 아영은 잔뜩 신경질이 난 표정이었다.

'아오, 그걸 못 참고 잠들다니. 내가 미쳤지.'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하려고 벼르고 있던 아영은, 정음의 눈치를 보다 깜빡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집념이 대단한 편이긴 했지만, 체력적으로 받쳐주지 못한 탓이다.

아영이 분개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정음이 숟가락을 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음아?"

"어, 어?"

정음이 화들짝 놀라 눈을 비볐다.

설마하니 식탁 앞에서 깜짝 잠이 들 줄이야.

"어제 날 샜니? 어쩐지 계속 안 자고 있더니."

"아니 날을 샌 건 아니고…."

물론 날을 샌 건 아니었다.

교수 바엥서 기절한 도훈을 어떻게든 구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결국 방 정리를 혼자 마치고 돌아와 잠을 청하긴 했다.

'어휴, 1시간 밖에 못자서 너무 피곤하네.'

차라리 안 자느니만 못한 시간이었다.

오히려 컨디션이 떨어지고 비몽사몽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더 졸음이 밀려왔다. 식욕도 없고, 어디 기댈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너 어젠 왜 그렇게 늦게 잔 거야?"

정음을 의식하느라 오히려 본인이 먼저 잠들어 버린 아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 내가 원래 환경이 바뀌면 잘 적응을 못하거든. 그래서 여행 가면 꼭 잠을 설치는 편이야."

"그렇구나. 어쩐지 계속 안자고 폰만 보고 있더니…."

아영은 정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잠자리가 예민한 사람에겐 이런 단체 활도이 참으로 곤욕스러울 터.

"버스타고 올라가면서 눈이라도 좀 붙여. 내가 옆에서 어깨 받쳐줄게."

"고마워, 아영아."

"뭘, 그정도 가지고."

아영은 정음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평소라면 전혀 하지도 않을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도훈을 응징하지 못했다는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이도훈. 넌 두고 봐. 내가 너의 위선적인 가면을 꼭 벗기고 말 테니까.'

아영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도훈이 식사를 하던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식사들 적당히 했지? 얼른 얼른 마무리하고 10시까지 모두 짐 싸서 마당으로 집합할 수 있도록."

"네, 도훈 선배!"

"야, 선백가 뭐야? 이제 회장님이라고 해야지."

"오늘부터 바로 회장님이야?"

"그렇지. 임기가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새롭게 회장에 취임한 도훈은 좌중을 향해 말하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군대에서도 분대장 한 번 달아본 적이 없고, 회사에 근무할 때도 연구직에 속해 있다보니 소규모 팀으로만 움직였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으, 이게 뭐라고 벌써부터 힘드네.'

[잘하고 계십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그래. 하다 보면 익숙해 지겠지.'

물론 과거의 이정우와는 차이가 있었다.

외모가 자신감의 원천이랄까? 거기다 체육과 내에서도 발군인 운동신경에 공부까지 잘하니 그를 우러러 보는 후배들이 많았다.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리더가 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도훈은 어젯밤의 일을 복기했다.

'흠, 정음이가 엄청 고생했겠는데.'

[어떻게 해도 주인님이 못 깨어나더라고요. 정음양이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했는데, 정 안되서 흔적만 정리하고 혼자 돌아갔습니다.]

'괜히 미안하네. 정음이는 나 때문에 날까지 샜는데.'

도훈이 힐끔 뒤를 돌아보니 중간 쯤 앉은 정음이 아영의 어깨에 기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영은 혼자 폰을 보고 있어서 도훈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근데 저 둘은 언제 저렇게 친해졌데?'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인데 특이하군요.]

'흐음, 괜히 아영이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시면 지금이라도 입막음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야. 그럼 청개구리 신의 돌발 미션 조건에 위배되잖아. 당분간은 지켜봐야지.'

다시 고개를 돌린 도훈은 문득 궁금한 마음에 슬쩍 대물을 어루만졌다. 놀랍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현자타임이 길게 온 것처럼 조금의 성욕도 올라오지 않았다.

'뭐야 이건?'

[말씀드렸다시피 정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로 무리하게 스킬을 사용한 후유증입니다.]

'진짜? 나 그럼 좆도 못 세우는 거야?'

[그리 길진 않을 겁니다. 아마 하루 이틀이면 회복 되겠지요.]

'허-. 아영이 저거 자빠뜨려야 되는데.'

도훈은 이번 캠프에서 아영을 공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2박 3일이라는 시간동안 10명을 차례로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시간과 자원 모든게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집행부에 속한 이상 얼굴 볼 기회도 많을 테고, 분명 기회가 오리라 믿었다.

'하여간 아영이 저 속을 알 수 없는 계집애는 다음 기회에 콧대를 확 꺾고 말겠어.'

그때 도훈이 무심결에 잦이를 만지는 것을 본 성수가 농을 걸었다.

"왜? 거기가 근질근질 하냐?"

"예?"

도훈은 설마 성수가 봤을거라고 생각못하고 황급히 손을 치웠다.

"괜찮아 인마. 남자끼리 뭐 어때서. 나도 가끔 불알 냄새 맡는다."

"아…, 그게 아니고."

"왜, 유명한 외국에 유명한 축구감독도 경기 중에 거기 냄새 맡는 거 찍혔잖아. 남자들은 다 그렇지."

"모기가 물려서 간지러워서 그랬어요."

"새끼. 핑게대기는."

성수가 도훈을 놀리는 데 재미를 붙였는지 이죽거렸다.

"인마. 그러니까 그런것도 적당히 써 줘야 모기도 안 달려 드는 거야."

"아, 네."

도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성수는 전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자신이 짧은 캠프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와 섹스를 했는지를.

"도훈아, 남은 방학 기간에는 뭐 할거야?"

"저요?"

"어. 나는 뭐 이제 인강 끊고 도서관에 처박히겠지만, 너는 아직 자유잖아."

"그냥 뭐….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하려고요."

"여행? 외국?"

"네."

"저번에 황금연휴 때도 혼자 일본 다녀 왔다며?"

"네."

"혹시 이번에도 혼자야?"

도훈은 필라테스 원장이 미나와 함께 싸이판을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굳이 학과 사람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 뭐."

"혹시 필리핀?"

"네?"

"아님 태국? 베트남?"

"갑자기 왠 동남아요?"

"하-. 이 자식 아무것도 모르네. 동남아 남자 혼자 가면 뻔하잖아."

도훈은 대충 알아들었으나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싸이판 가요."

"왠 싸이판?"

"음, 스킨 스쿠버 체험해 보려고요. 유명한 포인트가 많다고 해서."

"허-. 참 별걸 다하러 다니네. 운동이랑 운동은 다 섭렵해볼 생각이야?"

"그냥저냥 체험해 보는 거죠."

"난 혼자 동남아 다녀오면 좋은 곳 추천해 주려고 했는데."

"형 그런데도 알아요?"

"아니 나도 들었어. 초등학교 친구 중에 방학만 되면 거기서 한 달씩 살고오는 놈이 있는데 진짜 별의 별 얘기 다 해주더라고."

"전 별로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외롭게 잦이나 벅벅 긁지 말고 좀 풀고 살아 인마."

"진짜 모기 물려서 그렇다니까요."

"됐고. 암튼 몸 조심히 다녀와라."

"네 형.'

성수는 혼자서 신나게 떠들더니 다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성수는 정말 내가 순진한 줄 아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주인님과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주인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만큼 내가 철저하게 본색을 숨겼다는 얘기가 되겠지. 여자들 입막음도 잘했고. 아니 좆막음인가?'

[그렇군요.]

어쨌든 이미지 관리는 계속 해주는 편이 좋을 거야. 난봉꾼 바람둥이 학회장보는 운동밖에 모르는 순진남이 더 이미지는 좋잖아?'

[주인님에겐 정말 아영양의 일침이 딱 어울립니다.]

'뭐?'

[이중인격자.]

'크. 이중인격인진 모르겠고, 다른 사람 몸에 영혼만 깃들었으니 이중인간이긴 하지.'

[그나저나 미나양과의 여행에 앞서 해결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뭐?'

[저번에 그 흥신소 최번개 의뢰한 건 말입니다.]

'아, 그 변호사?'

도훈은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미션에 너무 몰두하느라 캠핑 출발 전 최번개에게 의뢰를 맡긴 사실을 잊어 버린 것이었다.

'서울 도착하자마자 확인해 봐야겠군.'

[네.]

'차라리 잘 됐네.'

[뭐가 말입니까?]

'지금은 누가 공짜로 대줘도 안 먹을 것 같거든.'

[그게 왜 잘된 일이죠?]

'몰라? 현자가 된 남자는 누구보다 똑똑해지거든. 냉철하게 일 처리 하긴엔 최적의 조건이라 이 말씀이야.'

[난 또 뭐라고….]

긴 시간을 달려 서울로 도착한 도훈은, 체육과 학생들을 해산시킨 뒤 곧바로 차에 올랐다.

그러나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던 차량 내부가 너무 뜨거워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틀어놓고 잠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 1030. 별이 쏟아지는-90-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내일부터는 새로운 에피소드로 만나겠습니다.

2박3일의 일정이 90편으로 마무리될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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