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4. 별이 쏟아 지는-84- >
아영은 도훈이 내민 포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발하는 구나. 아주, 지능적으로.'
노르노릇 구워진 소지의 겉면이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애엑에 쩔어있던 대물을 연상시켰다. 수정을 들어 박을 때 내보이던 그의 불기둥.
"…고마워요, 회장님."
아영이 소시지를 받아 들더니 말했다.
"두툼한 게 맛도 좋게 생겼네요."
"?"
"이런 건 한입에 그냥!"
아영이 일부러 과장되게 소시지를 깨물었다.
끝부분은 유선형은 다듬어져 귀두와 흡사했다.
아그작!
대물을 깨물 듯 소시지 머리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아영이 도훈을 노려보았다. 입가에 묻은 케첩이 붉은 정액처럼 입가에 번져나갔다. 도훈 역시 도전적인 모습에 사뭇 놀랐다.
'어쭈?'
[와, 주인님께 족므도 밀리지 않겠다는 각온데요?]
'흥. 꼴에 자존심은 세 가지고. 아주 혼비백산해서 도망칠 땐 언제고.'
"잘 익었네요. 소시지가 아주."
"그치?"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를 보고 있던 다른 후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술 안주랍시고 소시지를 통째로 건네는 도훈이나, 그걸 받자마자 눈앞에서 질겅질겅 씹어대는 아영의 모습이 뭔가 이질감을 준 것이다.
도훈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재밌게들 놀아. 나는 이제 전임 집행부에게 인수인계 좀 받으러 갈게ㅐ."
"네, 선배."
"도훈이형 화이팅!"
아영의 입에 소시지를 물린 도훈은 그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함게 갔던 도훈이 혼자 돌아오자 민주가 의아하게 물었다.
"어? 수정이랑 같이 가지 않았어? 왜 혼자 와?"
도훈에게 신나게 따먹힌 수정은 그 후유증으로 먼저 방으로 들어가 뻗은 상태였다. 오랜만이라 무리를 하는 바람에 마지막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아…. 아까 토할 것 같다더라고요. 방으로 들어가 자는 것 같던데."
"저런."
"오수정 많이 죽었구만! 작년만 해도 먼저 쓰러지는 법이 없었는데. 세월이 무상하다!"
"오늘 너무 달리긴 하더라."
사람들이 수정에 대해 떠드는 사이 도훈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에 성수가 물었다.
"그래, 총무 후보는 정했어? 수정이가 도와준다면서?"
"네. 계속 얘기해 봤는데 서현이가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범생이? 과 수석으로 들어왔다던?"
"맞아요."
"잘 됐네. 잘 할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중요한 보직은 또 뭐있죠?"
"내가 했던 일은 하나씩 쪼개야 할 것 같아. 야, 그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셔. 뭔 부임하자마자 인수인계야? 얼마나 열심히 하려고."
"내일부터 바로 임기 시작이라면서요?"
"인마. 이번 행사는 어찌됐건 내가 마무리 해야지. 다음에 시간 날 때 도와줄 테니 오늘은 그만 쉬어."
"네."
어느새 자정을 넘어선 시각.
드문드문 빈 자리가 생겨나고, 술이 약한 학생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도훈은 아영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미션에 대해 떠올렸다.
'아영이가 귀찮게 구는 바람에 괜히 시간 낭비 했군. 이제 두 사람 남았나?'
[네. 강민주 조교와 육정음 양입니다. 어쩌다보니 두사람이 마지막에 남았군요.]
'계획대로 민주 먼저 끝내야겠다.'
민주는 술자리 시작부터 계속 전 현직 집행부들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나이차가 많이나는 후배들보다는, 그래도 캠퍼스를 함께 누볐던 후배들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슬쩍 눈치를 주자 잘 놀고 있던 민주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하암~ 안 되겠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겠네. 나는 여기까지만."
"에이, 조교선생님이랑 저희랑 몇 살 차이난다고 그래요?"
"누나. 이러기 있긔 없긔?"
"너희도 내 나이 돼봐. 하루하루가 다르다야."
"와, 거짓말."
"조교 선생님 많이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세요. 어차피 저희도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야 박성수. 오늘 밤 아주 그냥 찢어 버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 우리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형. 저희들도 서울서 왔어요. 낼 아침 먹자마자 버스기사님 칼같이 올 거예요. 귀경길 버스 안에서 오바이트 쇼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마무리해야죠."
"그럼 상관없네. 난 자차로 갈 거니까!"
졸업반 남자 선배가 껄껄 웃는 사이 민주가 먼저 자리를 떴다. 민주는 방으로 향하는 와중에 도훈을 향해 씽긋 웃어 보이며 사인을 보냈다. 도훈은 핸드폰을 확인하는 척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방에 먼저 들어가 있어. 정리되면 뒤따라 갈 테니까.
-강민주 : 네, 주인님. 이부자리 펴놓고 기다릴게요.
그 뒤로 술자리가 계속 이어졌지만, 어젯밤과 달리 새벽 늦게 달리려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다들 내일의 일정에 부담을 느낀 탓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성수가 일어서서 말했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이쯤에서 마무리 한다. 더 마시고 싶은 사람만 따로 모일 수 있도록."
"야. 다른 사람은 다 가도 넌 가지마라."
"에이, 형님들. 저 내일 애들 아침 챙겨줘야 돼요."
"그럼 저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차기 회장되?"
도훈이 일어서자 다들 만류했다. 도훈이 피곤한 척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오늘 배구 하느라 무리 했나봐요. 눈이 막 감기네요."
"나참, 이것들 진짜 약해 빠져가지고. 야. 오늘 더 마실 사람 모여. 캠프를 왔으면 그냥 밤을 찢어버려야지."
"적당히 하자. 애들 잔대잖아. 우리가 여기서 떠들면 어떻게 자냐?"
"그럼 바다로 나갈가?"
"이 밤에?"
"왜? 바닷바람 쐬고 좋지. 2년전에 기억나? 그때 해변에서 모닥불 피우다가 단속 걸려서 존나게 튄 거 크크크."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대체?"
졸업반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끝까지 달릴 사람들을 긁어모았다. 대략 10여명의 인원이 모이자 그들은 술병과 안주 쪼가리를 챙겨 바다로 나간다고 했다.
"바닷가 왔는데 바다도 보면서 운치있게 마셔야지."
"형님들. 조심하세요. 저번처럼 불 피우다 걸리지 마시고."
"짜샤, 나 올해 임용쳐야 되거든? 떨어지는 낙엽도 무섭다 인마."
그렇게 술자리가 일단락되었다. 먼저 잠자리에 든 이들은 아무데나 구겨져 쓰러졌고, 2차를 바닷가로 떠난 원정대가 마당을 비우자 왁자지껄하던 민박집이 금세 고요해졌다.
방구석에 누워있던 도훈은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도훈 : 설마 자는 거 아니지?
-강민주 : 말똥말똥 눈 뜨고 있어요.
-이도훈 : 적당히 정리된 거 같아. 담배 피우러 가는 척 나갈 테니 문 열어 두고 있어.
-강민주 : 문 안 잠갔어요. 주인님 언제 오실 줄 몰라서.
-이도훈 : 학과장 그 영감탱이 몰래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강민주 : 걱정 마세요. 아까 창피 당하고선 저 보기가 민망했는지 저녁 먹고 혼자 올라갔더라고요. 그래서 옆방도 비어있어요.
희소식에 도훈이 씩 웃었다. 학생들이 자는 남자방과 여자방과 달리 조교와 교수가 쓰는 독방은 별채로 따로 떨어져 있었다.
도훈은 혹시라도 옆방에 소리가 새어 나갈까 아이템을 이용해 방음 처리를 하려고 했는데, 교수가 꽁무니를 빼고 사라졌다니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아주 좋군. 딱 좋아.'
눈치를 살피던 도훈이 모두 곤히 잠든 방을 빠져나왔다. 슬금슬금 도둑 걸음으로 몰래 나가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도훈아."
"?!"
어둠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훈이 흠칫 놀라 잡았던 문고리를 놓았다. 돌아보니 누워있던 성수가 상체를 일으켜 앉아있었다.
"어디 가냐. 밤도둑처럼 조심스럽게?"
"깼어요, 형?"
"어디 가냐니까?"
잠이 덜 깼는지 성수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왔다.
도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잠이 잘 안와서 담배 좀 태우려고요. 다른 사람 깰까봐 조용히 빠져나가라고 했는데 형을 깨웠나 보네."
"나도 같이 가자."
성수가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따라나왔다.
도훈은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느끼며 민주에게 몰래 문자를 날렸다.
-이도훈 : 잠시 대기.
곧 답장이 날아왔지만 도훈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성수가 어둠속에서 담배를 찾아 헤매고 있자 도훈이 말했다.
"형, 그냥 제 거 피세요."
"그러자. 아까 어디다 뒀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성수와 함께 밖으로 나온 도훈은 마당 테이블에 앉았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반팔만 입고 나온 성수가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다.
"아씨,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그럼 개보다 더한 건가요, 개만도 못 한 건가요?"
도훈이 담배를 주며 농을 건네자 성수가 솥뚜껑 같은 주먹을 쥐며 위협했다.
"어쭈? 회장 달았다고 이제 위아래도 없냐?"
"농담이죠 형. 그리고 저처럼 위아래 깍듯한 동생이 어딨다고."
그 말을 듣던 성수가 피식 웃었다.
전임 부회장과 현임 회장이 나란히 앉아 마주보며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위로 뿜던 성수가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참, 퇴임하기 딱 좋은 날씨네."
"누가 보면 은퇴하고 뒷방 늙은이 되는 줄 알겠네요."
"왜 인마. 어쨌든 퇴임은 퇴임이지. 그래도 너한테 물려주고 가니 든든하다. 잘 할 거지?"
"혼자서만 용 쓴다고 되겠어요? 후배들이 많이 도와줘야죠."
"잘 할 거야. 난 너 믿는다 이도훈."
"네, 형."
성수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또 실패했네."
"뭐가요? 이번 주 로또요?"
"뭔 소리야? 너 여자애랑 엮어 주는 거 말이야. 이번엔 제대로 밀어 주려고 했는데."
"이 형이 갑자기 뚜쟁이 귀신이 붙었나. 왜 그렇게 나를 못 밀어줘서 안달이에요?"
"인마. 군대 전역한지 한 학기가 됐는데 아직도 여자 손도 못 잡고 있느데 그럼 걱정이 안 되겠냐? 하, 이번이 딱 기회였는데."
성수의 기우에 도훈이 겨우 웃음을 참았다.
이번 캠프에서만 벌써 8명째 공략 중인 도훈의 정체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도훈은 성수의 무딘 눈치를 실감했다.
'평소엔 곰같은 여우같다가도, 이럴때는 정말 여우같은 곰이구만 그래.'
[주인님이 워낙에 몸을 사리니까요. 교제하시는 여성분들도 주인님의 ㅂ고잡한 여자관계를 모르지 않습니까?]
'거의 그렇지. 몇몇은 자기 말고 다른 여자도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는 정도고. 정음이 같은 경우엔 정말 껌뻑 속고 있는 것 같고. 아, 서현이가 나에 대해선 좀 알지.'
[서현양도 전부를 파악하진 못했죠.]
'그리고 아영이. 사실 걔가 제일 위험해.'
[아영양이 주인님의 뒤를 캐는 느낌이 있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다음번엔 한 번 시원하고 돌려주고 나면 나한테 빠져 헤어나지 못할테니까. 오늘도 봐. 섹스하는 거 보고 놀라 자빠진 거. 걔는 절대 소문 못 내.'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인님이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 가끔 외줄 타기를 지켜 보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습니다.]
'당연하지. 잘 할 거야. 누구도 상처주지 않게.'
"됐어요.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나나타겠죠."
그때 성수가 뜬금없이 물었다.
"실은 아까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네?"
"너 수정이랑 썸 있는 거 아니지?"
"오수정이요?"
"어. 오늘 보니까 둘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에이, 수정이는 저희 동기잖아요. 형도 수정이 잘 아시면서."
"알지. 오수정. 근데 걔가 너랑 그렇게 친한 줄은 나도 몰랐거든."
성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부터 그 질문을 하려고 따라 나온 것 같았다.
"수정이도 괜찮은 얘야. 과 활동도 열심히 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예요."
"그렇구만. 나도 이제 모르겠다. 널 도와주고 싶어도 내 앞가림이 바빠져서."
"여름방학부터 임용 준비하시는 거예요?"
"어. 슬슬 인강부터 끊어 보려고. 들어보니까 다른 과얘들은 저자직강반 신청해서 노량진 다니는 얘들도 있더라."
"3학년 여름방학부터요? 좀 오버 아닌가?"
"반년 일찍 시작해서 1년 재수 피할 수 있으면 그게 더 이득이니까 그렇지. 나도 솔직히 집행부만 아니었으면 이미 노량진 갔을 듯."
"형이 정말 고생하셨어요. 유미도 그렇고."
"빈말이라도 고맙다. 이제 너에게 맡기고 갈테니, 잘 이끌어 주라."
"네, 형"
"하아암~~."
성수가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들어가자. 쌀쌀해지네."
"전 바람 좀 더 쐬다 갈게요."
"안자?"
"몸은 피곤하긴 한데, 오늘따라 잠이 안오네요. 회장직이 부담스러워서 그런가."
"하하. 그래라. 난 내일 아침 차려야 해서 먼저 잔다."
"네, 형. 들어가 쉬세요."
성수를 먼저 보낸 도훈은 천천히 민주의 독채로 향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민주가 잠들었을까 걱정이었다.
문 앞에 선 도훈이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똑똑똑-
"…조교 선생님? 주무시나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닫혀있던 문이 확 열리며 민주가 도훈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방 가운데 은은한 조명효과를 내는 아로마 향초가 타고 있었다. 창문에 있는 커튼을 닫아 밖에서 볼 땐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미안, 좀 늦었지?"
도훈이 사과하자 슬립을 걸치고 있던 민주가 가운 끈을 스르륵 당기며 말했다.
"괜찮아요, 서방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허물처럼 벗겨진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헐벗은 민주의 나신이 드러났다.
< 1024. 별이 쏟아지는-8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