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5. 별이 쏟아 지는-75- >
"그럼 너도 만지면 되잖아?"
수정이 쿨하게 답했다.
"이런 걸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그러냐?"
"뭐래? 유식한 척? 4학년 앞에서 문자 쓰냐?"
"지금 쌍방과실로 유도하려는 거잖아."
"쳇, 됐거든? 치사해서 안 만진다. 비싸게 굴긴."
수정이 또 토라진 말투로 툴툴거렸다. 정말이지, 임용만 아니었으면 최고의 여사친이 되지 않았을까? 통통 튕기는 저 성격 너무 좋다.
수정이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혹시 여자 생겼냐?"
"엉?"
"낌새가 영 수상한데? 눈가 만져주면 발딱발딱 할 것 같았는데, 피하기나 하고."
"뭐래. 내가 무슨 여자야."
"맞다. 넌 여친 안 만드는 스타일이지? 누군데 이번 섹파는?"
"없어 그런거
"나도 들은 귀가 있거든? 도서관에 처박혀 있다고 학과 소식에 무지할 거로 생각하면 곤란해. 진짜로 누군데? 혹시 정음이?"
뜨끔.
난데없이 정음이가 튀어나오더니. 확실히 뭔가 소문이 돌긴 도는 모양이다.
"아니면 희주? 걔 요새 완전 물올랐던데?"
"희주는 그냥 후배야."
"근데 걔 혹시 혼혈이야? 살짝 이국적인 티가 나던데."
"어. 내가 알기론. 외조모께서 동양인 같지 않더라니."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우연히 들었어."
"희주도 아니면 또 누가 있지? 서현이? 그 똘똘하게 생긴 애. 슴가 빵빵하고."
"아니라니까 자꾸 그래."
수정이 갑자기 소리쳤다.
"혹시 전부 다는 아니지?"
"뭐래? 내가 무슨 의자왕이야?"
확실히 여자들은 촉이 좋다.
수정이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다.
"왜? 의자왕 노릇할 수도 있지. 우리과에 달리 경쟁자도 없잖아. 내가 후배라도 너밖에 안보이겠더만."
"아니라니까, 그러냐."
수정이 여전히 쿨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난, 사실이래도."
"엉?"
"도훈이 네가 의자왕 놀이하고 다녀도 신경 안 쓴다고. 내가 무슨 바가지 긁는 여편네도 아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확실히 수정은 뭔가 남달랐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구속하지 않는 편안함이 있었다.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연예관의 소유자였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해변을 걷던 수정이 팽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뒷걸음질 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엉. 그게 어때서? 4학년 되고 나서 내가 가장 후회한 일이 뭔 줄 알아?"
"뭔데?"
그녀는 여전히 뒷걸음을 치며 나와 거리를 유지했다. 왠지 그 모습이 풋풋한 여고생처럼 발랄하게 느껴졌다.
"대학 끝날 때까지 연애 많이 못 한 거."
"공부를 더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고?"
"아니라니까? 할 때 되면 다 하게 돼 있어. 어차피 해야 하는 거라면 최대한 뒤로 미루고, 그 전까지 최대한 즐기란 소리지."
"4학년 선배님의 조언이니 경청해야 겠는데."
"또 있어."
"뭐?"
"…널 너무 늦게 만난 거."
"음?"
"너랑은 4년 전에 동기로 만났었잖아. 그때 너를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하더라고."
"방금 그 말은 칭찬이야? 아님 고백이야?"
수정이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옆구리를 푹 찔렀다.
"너무 깊이 들어오진 말지?"
"윽."
"암튼 마음껏 즐겨. 청춘도 한때야. 나이 들면 꼬추도 안 선다 너."
"뭐래? 나 겨우 20대야. 30대, 아니 40대까지도 거뜬해."
"풉-. 마흔살 까지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크크크."
아니다. 수정은 절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전생에 불혹까지 살았던 몸이다.
남성의 성욕과 정력이 20대에 절정을 이룬다곤 하지만, 30, 40대가 된다고 확연히 줄어드는 게 아니다. 나이가 먹어서 성욕이 감퇴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매력적인 상대를 만날 확률이 줄어서 그런 것 뿐.
아무리 고자같던 40대라도 눈앞에서 색기발랄한 여자가 등장한다면 언제든 불타오를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언제든 타오른다.
[그건 주인님 경험담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수정이 같은 애를 전생에 알았어 봐. 40대건 뭐던 볼때마다 쥬지 폭발했을 듯.'
[그땐 수정양이 안 만나줬겠죠. 전생의 주인님이라면.]
'그, 그런가?'
그때 수정이 폰으로 톡이 날아왔다.
그녀는 내용을 확인하더니 나에거 보여줬다.
"야. 봐봐. 크크. 나보고 너 덮치지 말고 얼른 오라는데"
톡은 전임회장에게서 온 것이었다. 도훈이랑 데이트 그만하고 그만 술먹게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생각해보니 그녀와 단둘이 오래 있을수록 괜한 오해를 살 가능성이 컸다.
"그래. 이만 돌아가자."
"아쉽네. 도훈이 너 따 먹으러 왔는데, 딴사람들 눈치나 봐야되고."
"얼씨구."
"나도 술이나 진탕 마시고 그냥 낼 아침에 돌아갈까? 너 어디서 자?"
"남자방."
"남자방?"
"응. 민박집에 방이 몇 개 없어서 남자, 여자 따로 우르르 몰아서 자고 있어."
"크! 아쉽네. 밤에 덮치러 갈랬는데."
"허튼 짓마. 남자들 30명 우르르 자고 있는 방에서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왜? 스릴 있지 않아? 남자들 밖에 없는 방에서 둘이서 몰래 떡치고 있으면. 어우, 생각만 해도 쫄깃해 진 다야."
"변태냐?"
"그러지 말고. 새벽에 잠깐 봐."
"새벽에?"
"응. 몰래 나와."
"진심?"
"왜?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아니 지금 민박집 구조에선 도저히…."
"흐흐. 그건 걱정마. 차 키 나한테 있어."
"엉? 차 키?"
"돌아가는 길에 내가 운전하기로 했거든. 오빠들 둘 다 술 많이 마실 거라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그럼 밤늦게 서울로 돌아가려는 게획이었어?"
"일단은 그랬는데, 내가 마셔버릴거까 상관없어. 셋 다 취하면 어차피 대리 부를수도 없을 테니."
확실히 수정은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차 키를 건네며 말했다.
"일단 도훈이 네가 가지고 있어."
"이걸 왜 날 줘?"
"그래야 안 잊어버릴 거 아냐? 기억해. 새벽까지 안 자고 있을 테니까."
"참나…."
나는 수정과 새벽에 몰래 차에서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이것으로 미션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10명을 확보했다. 문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다른 사람 눈을 피해 하나씩 몰래 자빠뜨리냐 하는 점이다.
***
수정과 도훈이 돌아오자 성수가 말했다.
"엇, 저기 온다. 차기 회장."
"형, 벌써부터 무슨 회장이예요. 임기는 캠프 끝나고부터 잖아요."
"내일이면 끝이잖아. 그러니 오늘 자정 넘어가면 임기 시작이라고 봐야지."
"와, 그런계산이. 그럼 몇 시간 안 남았잖아요."
"한시라도 빨리 털어내고 싶다야. 너도 해보면 내 맘 알 거야."
"크하하. 성수가 유미 밑에서 고생이 많았나 보네. 자, 도훈이랑 수정이도 왔으니 다시 한잔 하자."
"근데 두 사람은 뭔 얘길 그렇게 하고 온 거야?"
전임 현임, 그리고 차기 회장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아무리 동기라곤 해도 접점이 없었으니 만큼, 둘 사리을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수정이 술잔을 내밀며 뻔뻔하게 말했다.
"간만에 동기랑 오붓하게 데이트 했지요. 그지 도훈아?"
"어, 어?"
오히려 수정이 앞서 나가며 오버를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도 장난스럽게 생각했다. 다만 유미만 혼자 수정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도훈 오빠는 수정 언니랑도 친한 사이였나? 대체 아는 여자가 몇 명이지?'
"야. 근데 오수정. 돌아갈 때 니가 운전한다고 술 안 먹기로 하지 않았냐?"
"너무하시네. 저도 입가심은 해야죠. 살짝 목만 축일 거예요. 자자 짠해요."
"어허. 그러다 취하면 오늘 못 돌아가는데."
"형님들. 그냥 자고 가시죠. 누추하지만, 자리는 마련해 드릴게요."
"아까 다 봤어 인마. 아무리 돈 아껴도 민박집에 큰 방 두 개가 뭐냐? 와, 라떼는 말이야…."
전임 회장이 라떼 드립을 날리며 술자리가 화기애애하게 전개되었다. 그 와중에도 도훈은 계속 머리를 굴려가며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몇 명 남았지? 절반 헤치웠나?'
[그렇습니다.]
도훈은 황혼에서 새벽까지 공략해야 할 남은 멤버들을 하나식 떠올렸다.
어제 첫 코로 희주를 헛간(?)에서 자빠뜨린 후, 연달아 경희, 유미 그리고 급발진으로 효민까지는 어찌어찌 공략해낸 상황. 그리고 오늘 오후에 나연까지 공략했으니 딱 절반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럼 앞으로 남은 대상이 연두, 민주, 수정, 정음, 서현인가?'
[넵.]
'민주는 새벽에 자기 방에서 보기로 했고, 수정이는 나중에 차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남은 세 명만 정하면 되겠군.'
[먼저 연두양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 불발된 것도 있으니.]
'문제는 자연스럽게 몸을 빼기가 쉽지 않겠다는 거야. 뭔가 구실이 있으면 좋겠는데….'
[구실이라면….]
'민박집 내부는 보는 눈이 많아서 위험해. 다들 팔팔하게 깨어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저녁을 먹고 시작된 술자리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국성대 체육과 학생들은 캠프의 마지막 밤을 찢어 버리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도훈과 아직 회포를 풀지 못한 여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기회만 엿봤다.
"와, 근데 이거 술 너무 부족한 거 아냐? 우리 대면식 할 때는 소주 궤짝으로 사서 인당 한 병씩 세팅해 놓고 시작했는데."
"부족해요? 최대한 많이 사놓긴 했는데."
"부족햄마. 내가 볼 땐 이거 백퍼 자정 넘기기 전에 술 떨어진다. 뒤풀이에 술 떨어지면 나가린 거 알지? 아, 끔찍하다."
전임 회장의 경고에 성수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럼 더 사올까요?"
"그래. 안주는 몰라도 술은 남으면 나중에 챙겨갈 수도 있잔항. 무조건 많은 게 좋아."
도훈이 이쯤에서 꾀를 냈다.
"형. 그럼 제가 사서 사올 게요."
"어? 도훈이 니가 왜?"
"아니 아까 배구대회 우승하고 찬조금 남은 거 있잖아요. 그걸로 더 사면 되죠."
"아, 그건 좀 미안한데…."
성수는 미안하긴 했지만, 후임 집행부에게 적자 예산을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미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도 찬성이예요. 어차피 배구부 상금 찬조하기 했잖아요. 그냥 다 해버려요."
"흐음, 그래도 되겠어?"
"제가 후딱 다녀올게요. 지금이면 가게 열었을 거예요."
"어. 그래라. 같이 갈래?"
"후배들 몇 명 데리고 갈게요."
"그럴래? 야 우선아."
성수가 우선을 부르더니 도훈을 도와 술을 구입해 올 원정대를 꾸렸다. 우선은 힘 좋은 남자애들을 추렸지만, 도훈이 반대했다.
"그러지 말고 차기 집행부 애들 데리고 갈게."
"여자애들로만요? 무거울 텐데."
"어차피 멀지 않으니 상관없어. 내가 들면 되지."
"흐음. 그러시면."
우선이 빠지자 내가 후배들을 찾았다.
공식적으로 빠질 수 있는 기회였다.
'나연이랑 연두로 해야겠다.'
[두 사람을요?]
'한 명만 부르면 더 이상하잖아. 대결이 남아있으니 나연이는 이해해 줄거야.'
"나연, 연두. 잠깐 보자."
나는 술을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을 불렀다. 둘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넵, 회장님."
"아직 회장아니거든. 술 떨어질 것 같다고 더 사러가야할 것 같아."
"저희 셋이서요?"
"엉. 셋이면 충분하지."
두 사람을 데리고 민박집 밖으로 나가 연두가 물었다.
"오빠, 진짜 머리 좋다. 이렇게 빼내실 줄은 몰랐어요."
"운이 좋았지. 나갈 명분이 생겼으니."
"근데 나연이는 왜 같이 가요?"
"둘 이만 가면 오해살까 봐서."
"아하."
"그럼 전 빠져요?"
나연이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나연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응. 미안한데 이건 대결이니까."
"맞아. 아간 내가 커버쳤으니 이번엔 니가 알리바이 만들어."
"와, 나쁘다. 나만 빼고 둘이…."
나연은 자신이 구실이 된 것이 섭섭한 듯 했지만, 아까 전 연두의 희생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알았어요. 근데 어디로 가실 건데요? 어쨌든 술은 사러가야 하지 않아요?"
도훈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차타고 시내쪽으로 나갈거야."
"억! 오빠 차 어디서 났어요?"
"차 안가져오시지 않았어요?"
도훈이 사정을 설명했다.
"어. 전임 집행부 형 차야. 잠시 빌렸어."
주차장으로 가니 오래된 중형 세단이 보였다. 아마도 집에서 안쓰던 차를 물려받은 것 같았다. 차키로 문을 연 도훈이 나연에게 말했다.
"연두랑 둘이 잠깐 다녀올테니 안 들키게 잘 짱박혀 있어."
"헐, 진짜 둘이서만…. 저도 같이 가면 안 되요?"
연두가 발끈했다.
"야. 나도 너 오빠랑 있을 때 밖에서 망봤 거든?"
"나도 그럼 구경만 할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쓰리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연은 자기만 빼고 둘이 가는 걸 못 마땅해 했다. 하지만 미션 조건을 생각한 도훈이 단호히 거절했다. 물론 명분은 대결이었다.
"그건 별로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 어쨌든 공정한 조건에서 해야지."
"힝…."
"암튼,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고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어. 오는 길에 연락할테니."
"너무해요. 둘 다."
"히힛, 그럼 난 오빠랑 오붓하게 둘이 드라이브 다녀올게?"
나연을 두고 두 사람이 차를 타고 시내로 나섰다. 나연은 들러리가 된 기분에 섭섭했지만, 어쨌든 앞선 연두의 희생이 있었으니 이번엔 자기가 감당하기로 했다.
연두는 단둘이 차에 오르자마자 도훈에게 물었다.
"일단 빨까요?"
< 1015. 별이 쏟아지는-7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