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31화 (998/2,000)

< 1014. 별이 쏟아 지는-74- >

***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니 한창 임용 준비할 때 아냐?"

수정이 호탕하게 웃었다.

"우린 뭐 밥 먹고 공부만 하니?"

"고시 준비하는 데 당연히 그래야지."

"고시 아니거든? 임용고사라고 고사.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허구헌날 공부만 하니? 먹고 자고 싸고, 다른 것도 해야지."

왠지 음탕한 농담 같았지만, 다가오는 선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어, 이도후니! 너 이번에 회장 됐다며? 축하한다."

"얘가 회장이예요? 헐?"

수정이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놀랐다.

가만, 잘 생각해 보니까 이 사람들….

"드디어 남자 회장이 다시 바통을 이어 받는구먼. 체육과 회장은 역시 남자가 짜세지."

"오빠. 그거 굉장히 성차별적 발언인거 아시죠? 유미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들은 유미와 성수 이전. 그러니까 내가 군대가 있을 동안 전전년도 집행부를 했던 인원들이었다.

"깜짝 놀랐지? 원래 회장 이취임식 때 전임 집행부가 격려 방문하는 게 우리과 전통이거든."

"야, 난 솔직히 직강 들을 거 있었는데 수정이가 하도 졸라서 끌려왔다."

"제가 언제요? 술 먹고 싶다고 노랠 부른 게 누군데 그래?"

방문한 전임 집행부는 모두 3명.

예비역 출신으로 나이가 많은 남자 둘과 오수정이었다. 아마 기억이 맞다면, 남자 둘이서 회장과 부회장을 역임하고 오수정이 당시 총무를 했었을 것이다.

"근데 도훈이 왜 너 혼자 나와 있냐?"

"설마 달밤에 혼자 회장의 무게감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던 건 아니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아이고, 지랄들을 하세요. 그만 놀려요. 도훈이 부담되게."

"어쭈. 수정이 오빠한테 말이 짧다?"

세 사람은 유독 친해보였다.

아마도 같은 기수 집행부 출신이다 보니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지내는 느낌이었다.

"성수한테는 간다고 말하긴했는데…. 이 자식 또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있었나 보네."

"이러지들 말고 얼른 들어가자."

"두 분 먼저 들어가세요. 전 도훈이랑 잠깐 얘기 좀 하다 갈게요."

"오, 썸이야?"

"쌈이겠지."

"뭔데뭔데? 두 사람 원래부터 친했어?"

"저희 이래뵈도 같은 학번이거든요? 제가 좀 동안이라 모르셨겠지만."

"그래. 간만에 회포나 풀고와."

"도훈아 수정이 조심해라. 요새 욕구불만이라 갑자기 덮칠지도 몰라."

"아우씨, 진짜 오빠만 아니면!"

수정이 주먹을 쥐고 패려고 하자 졸업반 두 명이 후다닥 민박집으로 도망쳤다. 난데없는 등장에, 한편의 꽁트를 보는 듯한 세 사람의 케미에 잠깐 얼이 빠졌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전년도 집행부의 방문이라지 않았습니까? 이취임식 전통이라면서.]

'아니, 나도 들어서 아는데 여기서 오수정까지 등장하면 완전 개판 오분 전인데….'

수정은 나와 섹파 사이다.

시험공부마저 중단하고 멀리 태안까지 내려온 걸 보니 아마도 반대급부를 생각하고 왔으리라.

평소 같으면 반가운 방문이지만, 미션 때문에 순번표까지 뽑아놓고 오늘밤을 지새워야 하는 나에게 있어선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수정이 덮썩 손을 잡더니 나에게 말했다.

"우리 좀 걸을까? 간만에."

수정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나의 공식적인 섹파였고, 임용 준비로 잠적하기 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크흠. 다른 목적이면 곤란해."

"안 따먹어 짜샤! 덩치는 산만한 게 쫄아가지곤."

수정과 함께 달밤에 해변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었다.

"후아! 살 것 같다. 진짜 도서관에 처박혀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던지."

수정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들이켰다. 들숨을 마실 때 튀어나오는 봉긋한 가슴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말았다.

'어째 더 예뻐진 것 같네. 피부도 뽀얗고.'

[수정양이 원래 미인이긴 했죠. 게다가 여름 내 도서관에 있었으니 당연히 타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런가?'

"공부는 좀 어때? 잘 되가?"

"열심히 하고 있어. 근데 뭐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나. TO가 잘 떠줘야지."

TO란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 한 해에 국가에서 뽑는 교육공무원의 총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통상 교원 TO는 여름에서 가을 넘어가는 시기에 발표하는데, 과목마다 충원이 달라지기 때문에 임용 합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편이었다.

"올핸 좀 많이 뽑지 않을까?"

"최근 몇 년 간 예체능 과목을 좀 많이 뽑긴 했어. 근데 갑자기 줄여도 할 말 없는 거니까."

체육교사 티오는 대체로 박한 편에 속했다.

국영수로 지칭되는 주요과목은 워낙에 수요도 많고, 과목 시수가 많은 편이라 인원이 널널했지만 체육이나 음악, 미술 등의 예체능 쪽은 항상 팍팍했다.

"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 마."

"걱정 안하거든? 앞일은 나보다 네가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생각으로 회장을 받은 거야?"

"왜? 하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얼마나 고생하는데. 나야 총무라서 견딜만 했지만, 아까 두 오빠들 진짜 공부도 못하고 1년간 죽어나갔어. 근데 그렇게 해봐야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대충은 알고 있어.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너 그러다 연애할 시간도 없다?"

"연애?"

"그럼. 언제까지 솔로로 지낼 참인데?"

수정은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아, 하긴 뭐. 굳이 사귀지 않아도 몰래 잘 드시고 다닐테지만."

"야! 넌 무슨 말을 해도…."

"ㅋㅋ. 미안. 농담이야. 나 미쳤나봐. 아까 오빠들 말처럼 욕구불만인가?"

수정이 그 말을 하면서 은근슬쩍 팔꿈치에 젖가슴을 문질렀다.

말캉한 가슴이 팔꿈치에 닫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아, 이것 참. 작정하고 덤벼드네.'

[주인님 생각해보니 수정양이 구세줍니다.]

'엥? 갑자기 뭔 소리야?'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 미션의 룰에 대해서요.]

'룰이라니? 그냥 몰래 따먹는 미션 아냐? 현장을 안 들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헛갈리시나 본데 다시 한번 스크린에 띄워 드리겠습니다.]

-몰래 먹는 게 제일 맛있어!-

*거미줄 같은 관계망 속에서 여자를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동일 집단 내 8명 이상의 관련인이 모여있을 때 활성화됩니다.

*성공 보상은 여자 한 명당 1,000포인트며 공략 대상이 늘어날수록 누적됩니다. 또한 공략 대상이 10명을 넘을 경우 1만 포인트가 추가 지급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대상자에게 타인과의 관계 사실을 들킬 경우, 누적된 포인트가 모두 소멸 되며 관련된 사람들의 호감도가 일제히 하락합니다.

*정신조작류 스킬은 일제 금지됩니다.

*남은 시간 : 캠프 종료 시점까지.

스마트 워치에 띄워진 스크린을 다시 읽어도 로시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알고 있다고. 동일 집단, 그러니까 체육교육과랑 관계된 사람 10명을 하나씩 몰래 따먹으면 포인트 추가 보상.'

[첫 번째 줄이 핵심입니다.]

'거미줄 같은 관계망? 이게 뭔데?'

[즉, 기존부터 주인님과 연이 있는 경우에 미션이 활성화 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장 안에 있는 여자들로 국한된다는 뜻이죠.]

'어장? 그러면….'

[네. 주인님을 벼르고 있는 아영양의 경우는 애초에 어장에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미션조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가만. 그러면 체육과 조교 강민주에 회장 마유미, 그리고 8선녀를 더해도 열 명이 안되는 거네? 8선녀가 아니라 7선녀라서?'

[그렇죠. 아영양은 기존의 관계망에 없던 뉴 페이스니까요.]

'아뿔싸!'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만약 오수정양이 지금 등장하지 않았다면 주인님은 미션을 성공시켜도 10명을 채우지 못해 추가 보너스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수정양이 구세주죠.]

'세상에! 이걸 몰랐네. 난 왜 아영이를 공략대상으로 생각했지?'

[8선녀라고 같이 묶어 버린 거겠죠. 하지만 앞선 전제 조건 때문에 아영양은 애초에 이번 미션의 공략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수정이가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거구나!'

[그렇습니다.]

"뭔데? 사람 얘기하는 데 시계만 쳐다보고."

수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내비췄다. 달밤에 새하얀 그녀의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음심이 솟구쳤다.

"그렇게 입술 내밀지 마. 뽀뽀하고 싶어지니까."

"헐! 크크. 야, 웃기지도 않거든?"

수정이 어처구니 없어하며 웃더니 갑자기 내 팔뚝을 세게 때렸다.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들이대?"

"선배는 무슨. 학년만 4학년이지 나랑 동기잖아 너."

"흥. 어쨌든 선배지. 누난 올해 졸업반이고. 넌 아직도 2학년이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국가의 부름을 받느라 그랬지."

"하-. 그러게. 같이 입학했던 남자 동기들 하나 둘씩 군대 가버리고, 졸업할 때 되니 예비역 오빠들만 주변에 남더라."

수정이 나를 보더니 갑자기 씩 웃었다.

"그래도 너랑은 다시 만났네? 이도훈. 기분이다. 뽀뽀해라."

수정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감았다.

이 뜬금없는 감정기복은 대체 뭘까?

내가 한참 쳐다보고 있자 수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야. 내가 기회를 줬는데 안 해?"

"아니, 길거리에서 어떻게 해.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데."

"알게 뭐야.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다른 사람 볼까봐 그러지."

내가 몸을 사리자 수정이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뭐, 너랑 나야 몰래 만난 사이니까."

"왜 그래 또."

"아니야. 내가 좀 오버했어. 우리 사이가 뭐라고."

토라진 수정이 갑자기 혼자 걷기 시작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하는 태도가 여우 같은 구석이 있었다.

"야, 삐졌냐?"

"됐거든?"

뒤따라가는데 수정이 갑자기 발걸음을 빨리하며 나를 뿌리쳤다.

"같이 가자고."

"흥. 됐어. 몇 달 안 봤다고 이렇게 애정이 식다니. 동기애도 없냐, 너는."

듣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방금 전에는 선후배 사이라고 선 그은 게 누군데?"

"학년이 달라져도 동기는 동기지 그럼."

"동기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수정이 발걸음을 딱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그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휘영청 비추는데, 달빛을 조명삼은 수정의 얼굴이 몹시도 예뻐 보였다. 아씨, 사람 설레게.

"동기끼리 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동기끼리 좀 하면 어때서?"

"야, 다 들어."

"들으라지 뭐. 우아아! 내가 이도훈이랑 섹스했다.!"

"미, 미쳤냐?"

"캬하하하하하!"

수정은 조증이 온 사람처럼 굴었다. 들떠있고, 흥분된 기분이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래. 넌 원래 그런 애였지.

늘 쾌활하고, 쿨한.

나의 섹파

"야, 오수정."

"왜?"

"너 솔직히 말해. 뭐하러 여기 시골까지 내려온 거야?"

"말했잖아. 전임 집행부가 이취임식에 참여하는 게 관례라고."

"엄밀히 따지면 넌 회장부회장도 아니잖아. 굳이 올 필요는 없지 않았어?"

"흥. 기껏 생각나서 와줬더니, 불만이야? 진짜 섭섭하게 말하네."

"그게 아니라 진짜 목적을 말하라고. 명분 말고."

실망한 척 하던 수정이 다시 배시시 웃었다.

"히히. 당연히 도훈이 너 보러 왔지. 내 파트너 보러."

"참나."

"됐냐? 나 솔직히 말했다."

어느새 해변에 당도한 나는 과감하게 수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바닷바람 밤에는 쌀쌀해 옷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그랬어."

"피-."

수정이 내 가슴에 폭 안겼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수정은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질척거리지 않고, 선을 넘는 법이 없다. 만나면 기분 좋고, 떨어져 있어도 달리 신경 쓸 필요가 없던 최고의 섹파다.

"공부하는데 너 가끔 생각나더라."

"내가?"

"엉. 너는 전혀 안 그랬겠지만."

"아니거든. 나도 생각했어."

"왜? 딸칠 때 허전하던?"

"아우씨, 말을 해도."

"그냥. 그냥 보고 싶었어. 임용만 아니면 집에서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그랬을텐데."

"그러고 보니까 너가 나 꼬셨네. 라면 먹고 가라면서."

"그걸 이제 알았냐?"

"응큼해."

"맞아. 나 응큼해. 그래서 나 좋아하는 거 아냐?"

"말이나 못하면."

수정의 머리에서 기분 좋은 샴푸향이 났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수정은 더더욱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엔, 혹시나 다른 곳으로 발령 나 버린다면 진짜로 얼굴보기 힘들겠지.

그 생각을 하자 왠지 아쉬움이 밀려왔다.

유미도 그렇고, 성수도 그렇고. 그리고 수정이까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알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살면서 몇 번을 경험한 이별과 만남이지만, 늘 아쉽고 섭섭하다. 시간을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차타고 오면서 그 얘기 했어. 너가 회장 받을 것 같다고."

"그랬어?"

"솔직히 지금 2학년에 인물이 없긴 없잖아. 이런 말하기 뭐한데 우리 집행부 할 때 지금 2학년들이 제일 별로였어. 의욕도 없고 이기적이고, 행사 참여도 잘 안하고."

"다행히 올해 새내기들은 괜찬항. 이번에 부회장 안 뽑고 1학년 여자애들로 집행부 구성했거든."

"정말?"

"어."

수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딴 속셈 있는건 아니고? 요기 요기?"

수정이 갑자기 손등으로 대물을 툭툭 건드렸다.

약간 발기되어 있던 대물이 그녀의 손등에 닿자 더욱 부풀어 올랐다.

"어, 어딜만져?"

< 1014. 별이 쏟아지는-7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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