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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30화 (997/2,000)

< 1013. 별이 쏟아 지는-73- >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곶은 성수가 나무 평상 위에 올랐다. 덩치가 큰 그가 높은 곳에 오르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다.

"자자, 다들 배는 좀 채웠나?"

"아직 부족합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술 배가 남았습니다요!"

"죽을 때까지 먹자면서요?"

얼큰히 술이 오른 체육과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캠프가 끝나면서 적당히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성수가 다시 임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거 좀 적당히 처드시고요, 암튼 중대 발표가 있다."

"부회장님 결혼하세요?"

"혹시 사고 친 거?"

"임용은 어쩌려고요?"

"야! 뒤질래? 나이가 몇 살이라고 벌써."

"와하하!"

모처럼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다. 캠프 내내 유격 조교처럼 깐깐하게 굴던 성수였지만, 캠프의 마지막 밤이니만큼 후배들을 마음껏 풀어주고 있었다.

"오늘부로 현 집행부는 일선에서 물러난다."

"아!"

"맞네. 임기가 여름 방학까지였죠?"

"그럼 차기 회장은 누가해요?"

"부회장님께서 물려받으시죠?"

"부회장에서 회장되면 승진이네?"

"야, 성수 오빠도 이제 공부해야지."

"4학년 하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부회장님이라면."

서운해하는 학생들, 고생 많았다는 학생들이 대부분. 성수는 1년간의 집행부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말을 이었다.

"연임하라는 놈들은 양심도 없냐? 나도 임용은 봐야 할 거 아녀?"

"형은 회장 하면서도 붙으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요?"

"떨어지면 네가 내 재수비용 댈래?"

"……."

"농담은 그쯤하고, 아무튼 그래서 차기 회장 발표가 있겠다."

"오오! 누구지?"

"누가 됐건 고생 좀 하겠는데. 현 집행부가 워낙에 막강했느니."

회장 마유미.

부회장 박성수.

얼굴마담을 자처한 대학 배구 선수 유미와, 꼼꼼하게 실무를 담당했던 성수의 조합은 최고였다. 두 사람은 1년간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학과를 이끌었다. 이는 사범대 다른 과에서도 부러워하는 부분이었으므로, 체육교육과 학생들도 두 사람의 공을 잊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결코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다. 2학년들 다수의 추천과 현 집행부의 검증을 거쳐 단독 후보로 나서게 됐다. 본인도 벌써 수락했고, 나와라 이도훈."

"도훈 오빠였어?"

"오오! 역시 도훈이형!"

"이도훈, 이도훈!"

"배구천재 이도훈!"

"씨름최강 이도훈!"

"잘생겼다 이도훈!"

도훈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장내가 술렁이며 격렬한 파장이 일었다. 막강했던 전임자들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완벽한 차기 후보. 성수는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매우 흡족해했다.

'내가 후임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구나. 도훈이 이름 나오자마자 애들 열광하는 것 좀 봐.'

여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과 내 최고의 인기 스타인 도훈의 위상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건 남학생들도 딱히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열등감과 시기심에서 비롯되는데 도훈의 경우엔 너무나 월등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열등감이 발휘될 틈도 없었던 것.

운동 천재.

훈남 몸짱.

단대 수석.

심지어 대학생 신분으로 오너 드라이버라는 금수저 소문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감히 비벼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또한 도훈 역시 잘난 척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굴었기 때문에 더 인정받는 부분도 있었다. 만약 도훈이 정말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면, 제 잘만 맛에 우쭐대기도 했을 텐데 연륜을 갖춘 40대의 나이로 다시 20대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생각의 깊이가 달랐던 부분도 장점으로 돌아왔다. 어린 몸에 나이든 영혼의 시너지가 철든 도훈을 만들었던 것이다.

도훈이 쑥쓰럽게 성수 옆에 서자 학생들의 연호는 더욱 커져갔다.

"우아, 차기 회장 너무 잘생겼다!"

"얼굴로 선발했냐! 부정 선발이다!"

"저 형은 대체 못 하는 게 뭘까?"

"무결점의 사나이!"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영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결점 좋아하시네. 내가 볼 땐 겉과 속이 다른 호색한에 불과하구만.'

아영은 평소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학과 생활이나 선후배들의 평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본래 평판이라는 것은 좋으면 좋은 쪽으로, 나쁘면 나쁜 쪽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아영은 같은 체육과 소속이면서도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 냉정한 관찰자적 입장에서 도훈을 평가할 수 있었다.

'남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속이지. 이도훈. 너는 그저 여자만 밝히는 변태 바람둥이에 불과해.'

아영은 왜 자신이 도훈에게 열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고, 과 활동을 접는 순간 점점 하나 없이 스쳐 가는 사람에 불과한 데 괜히 눈에 밟히고 거슬렸다.

'왠지 재수 없어. 저 위선적이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싶어. 싹 다 벗겨서 창피를 주고 싶어.'

벗긴다는 생각을 하던 아영은 문득 도훈의 탄탄한 복근이 연상되었다.

비치발리볼 경기를 할 때 상의 탈의 규칙 때문에 게임 내내 벗고 있던 그의 상체는, 바라만 보는 것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아영 역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경기 관람 내내 꿈틀 거리는 그의 근육에 시선을 뺏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쳇. 쓸데없이 몸만 좋아 가지고….'

본래 아영은 남자의 외모나 체격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남자라는 생물 자체에 대한 흥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는 성가신 존재, 혹은 죽을 때까지 철들지 않는 미숙한 인격체일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도 남자들에게 시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남혐의 감정이 자라났고, 결정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인 섹스마저도 안좋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에 아영은 남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도훈은 뭔가 달랐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여자를 끌리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아영은 그것이 궁금했다.

'…왜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거야. 짜증나게.'

"자자, 날 새겄다. 그쯤하고 차기 회장이 된 도훈이 소감 좀 들어보자."

성수가 숟가락을 꽂은 소주병를 넘겼다. 도훈이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선후배 동기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차기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임기 동안 체육교육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아아아아아!"

"말도 잘 해!"

"진심이 느껴졌다!"

"게스티버그 이후 최고의 연설이라고!"

별다른 내용도 없었지만, 학생들은 도훈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훈에겐 호감도를 상승시키는 수많은 버프가 걸려 있었다. 누구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열광할수록 아영의 짜증은 점점 더해갔다.

'왜 저래 다들? 미쳤어? 별말도 안 했는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람?'

아영은 도훈의 높은 인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됐다고 하더라도 자신마저 그에 편승하여 휩쓸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타고난 반골기질이 강했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Yes라고 할 때, 기어코 No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도훈의 짧은 소감이 끝나고 성수가 다시 이취임식을 이어갔다.

"차기 회장인 도훈이랑 상의 결과 이번 집행부 부회장은 집단체계로 가기로 했다."

"집단 체계요?"

"그게 뭐예요?"

성수는 여러 가지 사정상 한 명의 부회장이 학과 일 전반을 떠맡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했다.

"내가 해봐서 하는 말인데, 부회장 일 혼자 하기 벅차더라. 그래서 집행부 전체를 간부화시켜서 함께 운영하는 방식이랄까? 나중에 세부적으로 역할을 나누겠지만, 일단 새로 집행부에 뽑힌 인원들을 소개하겠다. 잠시 무대로 오르도록."

"오오! 누구지?"

"집단이면 한 명이 아니라는 소린데?"

성수의 말이 끝나자 1학년 8선녀들이 하나 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희주?"

"오오, 정음이도 있어!"

"나연이랑 연두?"

"우아 몇 명이야 대체?"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던 아영을 향해 앞으로 나가던 정음이 물었다.

"뭐해? 인사하러 나가자."

"……."

아영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정음의 말을 듣고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평상 위에는 성수와 도훈이, 그리고 자리가 비좁았기 때문에 평상 아래로 8명의 팔선녀가 나란히 섰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우앗, 걸그룹 같아!"

"진짜네?"

"이건 진짜 얼굴보고 뽑은 거 아님?"

"왜 남자는 하나도 없어요?"

몇몇이 새롭게 뽑힌 집행부 구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성수가 부연했다.

"부회장은 현 1학년 중에 선발했다. 중간에 군대 갈 남자들이 많아 일부러 여학생들 위주로 뽑았고."

우선이 성수의 의견을 뒷받침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중간에 나처럼 군대 갈 거면 시작을 안 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성수의 설명과 우선의 지원사격으로 멤버 구성에 대한 불만은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현 1학년 남학생 중에 집행부에 뜻이 있는 학생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의 제기도 없었다.

성수가 평상 밑에 8선녀를 한꺼번에 소개했다.

"다들 아는 사이니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앞으로 차기 회장인 도훈이를 도와 1년간 학과를 잘 이끌어줄 사람들이니, 모두 성심성의껏 도와주도록."

"넵!"

"그럼, 다 같이 인사하고 마치자. 차렷. 절."

성수의 말에 차기 집행부 일원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들 허리를 숙이는데 구석에 있던 아영은 이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뻣뻣한 자세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아영에게는 대중들 앞에서 서 있는다는 자체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으으, 내가 왜 이런 꼴을…. 오늘 자정까지 비밀을 안 알려주기만 해봐. 절대 가만 안둘 거야.'

아영이 이를 바득 갈았다.

차기 집행부 소개가 끝나고 전임 회장이었던 마유미가 대표로 소회를 밝혔다. 유미의 고별사에 몇몇 학생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성수가 그 모습을 보며 도훈에게 말했다.

"잘해라, 도훈아. 고생스럽긴 하겠지만, 1년 임기 마치고 나면 보람도 있을 거야. 유미 보니까 나도 좀 울컥한다."

"고생 많으셨어요. 형."

"고생은 무슨. 네가 많이 도와줬잖아."

"저보단 우선이가 고생했죠. 태영이도 그렇고."

"아무튼, 조그만 행사 하나를 해도 회장 혼자 다 할 순 없어. 집행부 애들 잘 다독여서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해."

"네, 조언 감사합니다."

유미의 고별사를 끝으로 이취임식이 끝이 났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술판의 시작이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체육과! 먹고!"

"죽자!"

***

술판은 끝없이 이어졌다. 안주도 많았고 술은 더 많았다. 기존에 마트에서 장을 본 것도 있었지만, 도훈과 유미가 비치발리볼에서 딴 상금을 찬조하여 양이 더 늘었다.

여름 밤, 무더위를 날려버릴 만큼 바닷바람이 청량하게 불어왔다. 이윽고 밤이 되자 구름한 점 없는 하늘에 별이 눈부시게 빛났다.

문자 그대로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민박집을 통째로 빌린 대학생들은 오늘밤이 지구 최후의 날이라도 되는 냥 축배를 즐겼다.

차기회장으로 작점 된 도훈은 인사를 하러 오는 후배들의 술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 전 형이 회장되실 줄 알았어요."

"고맙다."

이렇게 한 잔.

"오빠.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아무거나 막 시켜 주세요."

저렇게 한 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축하 인사를 받고 있자니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휴-. 알콜 분해 아이템 안 먹었으면 먹다가 뒈졌을 듯.'

[잘하셨습니다. 원 주인분의 몸이 술이 원체 약해서 말이죠.]

'근데 물배가 너무 많이 찬 거 같아. 속 좀 비우고 와야지.'

도훈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나 야외에 있는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도훈은 밖에서 한참 기다렸지만, 큰일을 보는 중인 듯 먼저 들어간 사람은 나올 줄을 몰랐다.

'아씨, 오줌보 터지겠는데.'

도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벼락으로 달려들더니 훌쩍 담을 뛰어 넘었다. 민박집 안에서 노상방뇨를 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 숨어서 갈기고 오겠다는 심산이었다.

으슥한 나무를 찾아 몸을 숨기고 노상방뇨를 하자 방광에 가득 차올랐던 오줌이 콸콸 쏟아졌다.

'흐으, 살 것 같네.'

"거 오줌발 하난 여전하구만!"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거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찔끔 손을 적시고 말았다.

"으읏, 누, 누구야?"

뒤를 돌아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도착해 있었다. 지금 이 자린엔 절대 올 수 없는 인물, 아니 와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오, 오수정? 네가 여길 어떻게?"

양 손 가득 양주를 챙겨 온 이는 국성대 체육과 4학년 오수정이었다. 수정은 도훈의 대물을 먹음직스럽게 쳐다보다가 급히 말했다.

"얼른 집어넣어라. 내 동기들 지금 주차하고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내가 먼저 보길 천만다행이지."

"아, 아니 이게 무슨…."

수정의 말대로 체육과 4학년 학생 몇 명이 민박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훈은 서둘러 지퍼를 잠그고는 깜짝 방문한 4학년을 맞이했다.

< 1013. 별이 쏟아지는-7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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