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1. 별이 쏟아 지는-71- >
아영이 소름돋는 얼굴로 도훈을 노려보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훈이 태연하게 여학생들을 설득했다.
"음,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년에 3학년 올라갈 애들 중엔 학과일에 헌신할 친구들이 거의 없어. 해가 갈수록 임용이 어려워지니 3학년 때부터는 다들 맘잡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기적이라고 탓할 일도 아니고."
"맞아요."
"그건 인정."
"그래서 회장은 3학년에서 뽑더라도 집행부의 실무진들은 1학년에서 뽑기로 한 거야."
"저희 1학년들 중에서요?"
"근데 남학생들은…."
도훈이 난처해 하며 물었다.
"너네 남자 동기 중에 추천할만한 애들 있어?"
도훈의 질문에 여학생들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서현이 대표격으로 말했다.
"없어요. 애들 맨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축구하고 농구하고, 그러다 어두워지면 피씨방가서 롤하고 배그하고, 새벽되면 술이나 처먹고. 공부도 안 할거면 뭐하러 비싼 등록금내고 학교 다니는 줄 모르겠어요."
날을 세운 비판에 나연이 딴지를 걸었다.
"박서현. 그건 너무 남학생들 싸잡아 비난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솔직히 걔들이 그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 어차피 좀 있으면 군대가야 하는데, 공부가 손에 잡히겠니?"
"맞아, 맞아."
"아니야. 난 서현이 의견에 동의해. 우리과 동기 남자애들 솔직히 못 미더워. 나이만 20살이지 아직도 철도 안 든 고등학교 4학년들 같아."
"음, 듣고 보니 진짜 할만한 애들이 없네."
여러 의견이 분분해지자 도훈이 정리했다.
"나도 사실 집행부를 선발하는 데 많이 고민했어. 일부러 남학생을 배제한 것은 아닌데, 너희들 말대로 과행사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는지, 또 중간에 군대를 가버리진 않을지. 등을 고려하니까 너희들 여덟명이 딱 남더라고."
"맞아요. 오빠가 사람 잘 봤네요. 솔직히 우리가 젤 열심히잖아."
"동감동감."
아영은 도훈의 의견에 동조하는 동기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좆집들 싹 다 데려다 놓고 핑계대는 거 봐. 가만, 근데 나는 왜 불렀지? 설마 나도 이 무리에 포함시킬 예정인가?'
아영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했다.
실제로 자신을 제외한 전부가 이도훈의 노리갯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몇몇은 아직 공략을 못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집행부로 끌어와 공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전략일거라고 보았다.
뭐가 됐건, 도훈의 의도는 불순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공적인 학회장 자리를 이용해, 주변의 집행부들을 자신의 섹스 파트너들ㄹ로 채울 심산인 것이다.
'완전 소름.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신박한 발상을 할 수 있지? 지가 무슨 아랍 왕자야? 대학이 무슨 현대판 하렘이야?'
아영은 상식밖의 일을 꾸미고 있는 도훈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도훈의 말에 껌뻑 죽으며 동조하고 있는 나머지 7명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이중 절반 이상은 이도훈에게 농락당했을 거야. 대부분 호감을 갖고 있는 건 당연한 사실이고.'
아영은 도훈의 본질에 한 발자국 더 접근했다.
완벽남, 엄친아. 모든 걸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가, 실은 변태 색마에 타고난 호색한이라는 사실을.
'아주 여자가 우습게 보이겠구나? 그러니 나한테 어제 들키고도 일언반구도 없지. 보통사람 같으면 오늘 밥도 안 넘어갈 정도로 벌벌 떨 텐데 내 앞에서 태연한 척 행동하는 것 좀 봐. 이런 일이 아니란 말이야.'
아영은 도훈이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느꼈다. 치부를 들켜놓고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에서 분노가 끌어 올랐다.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나 박아영을?'
아영이 이를 부득 갈았다.
***
아영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우선 예뻤다.
아역배우 섭외가 들어올 만큼 깜찍하게 생겨서 귀가 닳도록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학생들이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다.
자연스럽게 아영의 콧대는 높아져 갔다. 어지간한 사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도도해졌다. 자신의 미모에 헤벌쭉대는 사내들을 볼 때면 한심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유치해. 따분하기 짝이 없어.'
사내를 우습게 여기는 아영은 당연히 남자를 사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좋아하는 감정이 들기 위해선 우선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고등학생에 이른 아영은 더욱 성격이 꼬이기 시작했다.
미모가 나날이 물이 오르자, 이제는 또래들 뿐만 아니라 대학생이고 직장인이고 할 것 없이 그녀를 보고 수작을 부려댔다.
그저 귀찮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어떻게든 한 번 자빠뜨려 보려는 사내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성욕의 노예들 같으니.'
아영은 점점 남성 혐오에 빠져들었다. 딱히 남자들이 그녀에게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특유의 삐딱한 기질 덕분인지 점점 더 혐오감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녀라고 성욕이 없는 것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조금 과한 편이었다. 남자는 싫었지만 섹스가 궁금해 졌다. 호기심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여고생 아영은 그날 처음 보는 남자와 섹스를 했다. 예쁜 아영에게 섹스할 상대를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다. 서적과 영화에서 묘사한 들끓는 정욕과 벅찬 감격은 없었다. 오히려 시시했다.
'이런게 섹스라고? 고작 이것을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 쳐왔던 거야? 남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라리 혼자 자위를 하는 게 훨씬 좋았다. 그 일 이후로 아영은 더욱 남자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사교성도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가 없는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과감하게 시도했다.
아랫배에 문신을 한 것은 고3 졸업하고서 일이었다.
갑자기 문신을 너무 하고 싶었고,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곳에 간직하고 싶었다.
'흐, 이러니까 좀 쌔 보이는데.'
야구를 좋아했던 아영은 체육과 관련된 전공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공무원을 원하시는 부모님의 기대와 절충하여 사범대 체육교육과로 진학했다.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체육이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처음 참여한 새내기 배움터.
여전히 사내들은 한심해 보였고, 말수가 없고 사교적이지 못한 그녀에게 다가오는 여자들 또한 없었다. 아영은 스스로 외로운 섬을 자처했다.
'역시 생각대로 재밌는 일은 없구나. 앞으론 행사 같은 건 참여하지 말아야겠다.'
대학에 와서도 아영은 외톨이였다.
그녀가 아싸가 된 건 눈에 띄게 예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불나방처럼 남자들을 끌어들였으나, 그녀는 남자를 싫어했다. 또한 그녀의 미모는 뭇 여학생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아영은 그 모든 게 싫어 그냥 혼자 다녔다.
밥도 혼자 먹고, 과제도 혼자 하고, 그리곤 저녁에 혼자 야구를 시청했다. 이따금 성욕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었지만,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섹스는 자위만도 못한 것이었으니까.
***
설명를 마친 도훈이 말했다.
"일단 그래서 내가 평소에 봤을 때 가장 학과 일에 적극적이고 집행부를 맡기면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거야."
"고마워요, 선배. 좋게 봐주셔서."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수가 말했다.
"자자, 이제 모은 이유는 설명했고 혹시나 해서 그런데 지금이라도 내키지 않으면 거부 해도 돼. 집행부는 의무가 아니야. 나도 해봐서 알지만, 남들보다 더 고생스러운 길이거든."
현직 부회장인 성수의 말이 무게감있게 느껴졌다.
어쨌든 한 자리 차지하는 것엔 그만큼 책임이 따를 수 밖에.
성수가 연이어 제안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사람들 다 모인 곳에서 의사표시를 하는 게 껄끄러울 테니, 한 명씩 차기 회장이 될 도훈이랑 1대1로 의사표시를 하는 거야. 분명히 말해두지만, 자신의 사정에 따라서 집행부를 거부해도 괜찮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럼 누구부터 해요?"
성수가 빙 둘러앉은 여학생들을 확인하더니 고스톱 방향으로 순서를 정했다.
"희주부터 돌자."
"넵."
순서가 정해지자 희주만 제외하고 여학생들이 우르르 방을 나갔다. 밖에서 성수가 대기열을 세운 사이 단둘이 남게 된 희주가 도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오빠, 저는 면담할 필요도 없어요."
"응?"
"그냥 오빠랑 둘이 얘기하려고 남았다고요. 전 오빠가 하는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도울게요."
"고맙다."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맙죠. 요새 오빠 덕에 예뻐졌다는 얘기 자주 듣거든요. 헤헤."
"그게 왜 내덕이야?"
"오빠가 그랬잖아요. 오빠꺼 피부에 바르면 예뻐질 거라고. 근데 그게 진짠가 봐요. 저 많이 예뻐지지 않았어요?"
도훈은 희주를 보며 씩 웃었다.
"젖살이 빠져서 그렇겠지. 원래 이맘때쯤 그렇거든."
"흐흐, 암튼 다 오빠 덕이예요. 전 오빠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요. 아무거나 막 시키세요."
"말만으로도 고맙다."
희주를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연두가 들어왔다.
연두는 집행부 제의에는 관심이 없는지 다짜고짜 아까 불발된 대결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저는 그럼 언제해요?"
"아, 아니 연두야 일단 이것부터."
"할거예요. 오빠랑 자주 볼 수 있는 기횐데 왜 마다하겠어요? 그러니까 언제 할 거냐고요."
연두가 자꾸 징징 거리자 도훈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 이마를 짚었다.
'어휴, 아까 끝내버렸어야 했는데….'
[민주양이 갑자기 난입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러게. 민주도 새벽에 예약 잡혀 있는데 연두는 또 언제 한담?'
[정말 곤욕스럽겠군요. 대기표 받아놓고 줄 세워야 하는 입장이시니.]
'미션이니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내가 기회봐서 사인 줄테니까, 그때 바로 달려와."
"전 언제나 준비 되있다고요. 제가 나연이보다 맛있다는 걸 오늘 꼭 증명해 보겠어요."
"그래, 그래."
연두 이후 계속 후배들이 번갈아 들어왔다.
대부분 차기 집행부 일을 돕겠다고 했다. 다들 도훈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인지, 앞으로 함께 할 집행부 생활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휴, 이제 마지막인가.'
[박아영 양입니다. 긴장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오케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영이었다. 아영이 대뜸 물었다.
"다른 애들은 다 수락했다더군요."
"응. 너는 어때?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아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말 진심이세요?"
"응?"
아영은 뒤를 돌아 밖을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문이 단단히 닫힌걸 확인한 후 말했다.
"제가 오빠 속셈 모를 줄 알아요?"
"소, 속셈이라니?"
다소 공격적인 말투에 도훈이 당황했다.
예상은 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자신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모인 멤버들 말이예요. 우연 아니죠?"
"그게 무슨 뜻이야?"
"전 오빠에 대해,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아요. 아주 화려하시더만요?"
'뭐야?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왠지 협박당하시는 거 같은데요?]
'협박? 지 까짓게? 나를? 풉-.'
[조심하셔야 합니다. 만만한 타입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재밌네. 어디 한번 해 보라지. 그 협박이라는 거.'
도훈은 아영의 당돌한 태도에 불쑥 호승심이 솟구쳤다.
이제껏 여자에게 늘 강한 남자이기만 했던 그에게, 이처럼 도발적인 멘트를 날린 사람은 몇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에게 자박꼼을 당하는 순간 다들 암컷으로 전락하기 일 수 였다.
여자를 쉽게 생각하는 남자와, 남자를 혐오하는 여자가 마침내 맞부딪쳤다. 도훈이 팔짱을 끼며 물끄러미 아영을 쳐다보았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중인격자."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겉으론 훈훈한 선배인 척 가식을 떨면서 뒤로는 순진한 후배들 홀랑 자빠뜨리는 천하의 호색한."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어제 효민이랑은…."
"오해는 무슨. 젖은 팬티를 내 손으로 찾았는데?"
"……."
"효민이 하나가 아니죠? 맞죠?"
"지금 유도심문 하는 거야?"
"말 돌리지 마요. 펙트 체크 중이니까."
"내가 왜 너한테 내 개인적인 연애사까지 다 알려줘야 하지?"
"안 알려주면 곤란해지겠죠. 아주."
"지금 이거 협박 맞지?"
"협박이라고 느낀다면야, 뭐."
도훈은 당돌한 아영의 태도가 어딘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의 치부를 폭로하겠다며 협박해온 여자는 아영이 처음이었다.
'웃긴 계집애네? 얼굴은 청순미인처럼 생겼는데, 하는 짓은 완전 양아치잖아?'
[엇, 그거 주인님 이야기 아닙니까?]
'뭐?'
[주인님도 교회 오빠처럼 훈훈하게 생기시고서 하는 짓은 바람둥이 잖습니까.]
'너도 내가 이중인격이라는 거야?'
[내로남불인 건 확실하죠.]
'끄응.'
도훈은 한 번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툭 터놓고 물었다.
"나한테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뭘 딱히 정한 건 아니예요. 오빠가 그렇게 난봉꾼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게 신기한 거지."
"흠."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아영의 태도에 도훈은 스킬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독심술이나 다름없는 초능력을 가진 그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영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가 그렇게 섹스를 잘해요?"
< 1011. 별이 쏟아지는-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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