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9. 별이 쏟아 지는-69- >
"음료수 한 잔 사드릴까요, 조교 선생님?"
"좋지. 근데 왜 애들도 없는데 존댓말을…."
"어디서 누가 튀어나올 줄 알고요? 성수형이 우리과 애들 사방에 풀어놔서 누가 어디있는 지도 모르잖아요. 방금도 나연이 숙소에 있는 줄도 모르고 찾아다니고."
"하긴 그렇겠네."
'젠장, 완전 무슨 숨바꼭질 하는 것 같네.'
[이번 미션의 컨셉이 그렇습니다만.]
'연두는 어떻게 하지? 한참 기다렸을 텐데….'
그때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연두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이연두 : 오늘 제가 커버 친 거 잊지 말아요?
-이도훈 : 알았어. 일단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으니 저녁에 봐.
-이연두 : 네. 근데 나연이랑은 좋았어요?
-이도훈 : 지금 조교샘이랑 같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해.
"…누구랑 문자 해?"
"성수형이랑요."
"성수랑?"
"오늘 밤 저한테 회장직 인수인계 할 테니 준비하라네요."
"아…. 받기로 했어?"
"아까 배구 끝나고 커피숍에서 성수형이랑 유미가 둘이서 엄청 설득 하더라고요. 계속 고사했는데…. 그냥 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을 것도 같고."
"잘됐다. 아니, 고생하겠구나 앞으로."
민주는 도훈이 내년 학회장을 맡는다는 소식에 몹시 기뻤다.
내년까지 조교 계약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도훈이 학회장이 된다면 자주 얼굴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교 선생님도 많이 도와주세요."
"응, 그럴게."
그 사이 음료수 판매점에 도착한 도훈이 민주에게 말했다.
"음료 뭐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니야. 어떻게 너한테 얻어먹니. 내가 살게."
민주가 가방에서 지갑을 찾아보았지만, 차에 놔두고 내린 기억이 떠올랐다.
'아차. 아까 교수님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지갑을 못 챙겼네.'
민주가 난처해지자 도훈이 곧바로 민주의 상황을 깨닫고 대신 지갑을 꺼냈다.
"제가 낼게요. 맨날 얻어먹을 수도 없잖아요."
"그, 그럴래? 미안. 아까 차에서 내릴 때 하도 정신이 없어서…."
두 사람은 음료를 시킨 뒤 가게 바깥 파라솔 벤치에 걸터앉았다.
"근데 왜 정신이 없어요?"
"으음…. 그게."
민주는 도훈에게 말을 할까 망설였다. 괜히 창피하기도 하고, 도훈이 신경 쓸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추근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줌으로써 도훈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음…. 아까 배구 끝나고 교수님이 아침을 거르셨다고 같이 점심 먹자 하시더라고."
"배구 끝나고요? 조교샘은 드시지 않았어요?"
"난 오전 강습 끝나고 애들이랑 같이 먹었지. 근데 어제 과음했다면서 그때 일어나서는…."
"거참, 밥 좀 혼자 먹으면 뭔 일 나나? 그래서요?"
"그래서 근처에 맛집이 있다면서 같이 나가자고 해서 내 차로 모셨거든."
"조교 선생님이 무슨 기사도 아니고."
"암튼, 근데 먹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민주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대화가 이쯤되자 도훈도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차에서요?"
"응, 단둘이 있는데 차에서…"
"모히또랑 오렌지 에이드 나왔습니다!"
눈치없는 음료수 가게 알바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예, 주세요."
도훈이 건성으로 잔을 받아들더니 민주에게 다시 물었다.
"차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냥. 별일은 아닌데…."
"말해봐요. 설마."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좀 색드립을 심하게 치시길래."
민주가 차에서 교수가 성희롱한 사실을 말하자 도훈이 격분했다.
"뭐라고요? 완전 미친 새끼 아니예요?"
"도, 도훈아. 누가 들어."
"들으면 들으라지. 아니 교수라는 양반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도훈아, 진정해. 사과도 받아내고 다신 안 그렇겠다고 했어."
도훈이 모히또를 마시며 열을 식혔다.
"어으! 진짜 성질 같아선 확 그냥 교수고 뭐고."
도훈이 일부러 열을 내자 민주가 감동했다.
'아! 역시 주인님은 안 그런 척 하면서 나한테 이렇게나 자상하시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님을 의심까지 하고….'
민주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자 도훈이 속으로 안도했다.
'이 정도면 의심은 싹 걷혔겠지?'
[혹시 일부러 열받은 척 하신 겁니까? 아까 연두양 일 때문에?]
'살짝 오버하긴 했지. 들어보니까 엄청 심각한 건 아니네.'
[아아, 어찌나 영악한지. 주인님은 정말 간사함을 패시브로 달고 태어나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민주도 내 여자야. 누가 내 여자 건드리면 당연히 열 받지.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고.'
[주인님은 실컷 바람비우고, 다른 여자들은 안된다고요?]
'너무 내로남불인가? 암튼, 난 누가 내 여자 눈독 들이는 거 못 참아.'
[모두를 안고 갈 순 없습니다. 진짜로 하렘 왕국을 꿈꾸시나 본데, 여자에 집착할수록 미션이나 업적을 달성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고. 아무튼 민주는 안 돼.'
[언제부터 그렇게 민주양을 아끼셨다고….]
"나… 어젯밤 한숨도 못 잤어."
도훈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주가 불쑥 어제 일을 꺼냈다.
"왜요?"
"새벽에 너 올 줄 알고 내내 기다렸거든. 혼자서."
"아…. 죄송해요. 어젠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겠더라고요 . 성수형이 계속 달리는 바람에. 나중에 무슨 정신으로 방에 들어갔는지 기억도 안 나요."
"치…."
"삐진 거 아니죠?"
"괜찮아. 혼자 해결했으니까."
"해결? 어떻게요?"
민주는 하마터면 문고리로 자위를 했다는 얘기를 꺼내려다 그건 너무 천박해 보이는 것 같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여자는 뭐 혼자 못하나?"
"그랬구나. 그럼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 방으로 갈게요."
"진짜?"
"네."
"피. 말만 그렇게 하고 어제처럼 날 내버려 두려고?"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방문할 테니까, 꼭 기다리고 계세요."
"…혹시 지금은 안 돼?"
"지금요?"
민주가 도훈의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응, 지금."
도훈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자유시간 끝나면 애들 숙소로 싹 몰려들 거예요. 너무 위험해요."
"내 방이 꼭 아니어도 괜찮지 않아? 차타고 잠까 교외로 나가도 되느데."
민주가 어떻게든 도훈을 따먹고 싶었는지 계속 졸랐다. 도훈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안돼요. 자유시간 끝나면 애들 숙소로 싹 몰려들 거예요. 너무 위험해요."
"내 방이 꼭 아니어도 괜찮지 않아? 차타고 잠깐 교외로 나가도 되는데."
민주가 어떻게든 도훈을 따먹고 싶었는지 계속 졸랐다. 도훈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일찍 말하셨음 몰라도 지금은 곤란할 것 같아요. 성수형이 저녁 시간에 회장 이취임식 한다고 했거든요. 저를 중간에 찾을지도 몰라요."
"아…."
"대신 오늘 새벽에는 꼭 방문할테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으, 응"
민주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설득당했다. 너무 보채면 그 또한 매력 없을 것 같았다. 도훈을 원하긴 하지만, 매달리는 여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알겠어. 나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네?"
"아까 교수님이 수작부리는 데 솔직히 너무 역겹더라고. 난 남자가 고픈 게 아니라, 도훈이 너가 고픈 거야. 그걸 알아줬음 해."
도훈이 피식 웃었다.
"…알죠."
도훈이 민주와 야외 파라솔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무렵.
숙소에 도착한 연두는 나연이부터 찾았다. 방구석에 혼자 누워있는 나연을 보자, 연두가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어이구? 쳐 자냐!"
연두가 나연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일어나 이년아!"
연두의 발길질에 쓰러져있던 나연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으으, 시비털지 마. 나 지금 힘들어서 쉬는 거니까."
연두가 누워있던 나연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야. 내가 너랑 오빠 커버치려고 민주샘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긴 해?"
나연이 몸을 반대로 뒤집으며 물었다.
"시달렸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연두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중간에 민주가 갑자기 숙소로 돌아 온 이야기부터, 기지를 발휘해 그녀를 해변으로 끌고 나간 일. 마지막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달한 일까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전혀 몰랐어. 도훈 오빠가 갑자기 나가봐야 한다고 해서…."
"나 걱정도 안 되던? 죽다 살다 오니까 아주 쳐 자고 있네. 친구라는 년이."
"미안. 난 그런 줄 몰랐잖아. 그리고 오빠한테 하도 시달려서 지금 끙끙 앓아누운 상태야."
시달렸다는 말에 연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뭐? 그게 나한테 할 소리니?"
"어떻게 해 그럼. 사실인 걸."
"하~. 진짜."
연두가 더 따지려고 했지만, 어쨌든 가위바위보를 이기고도 나연을 먼저 밀어 넣은 건 자신이었다. 아마 서로 반대 입장이었어도 나연이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다소화가 누그러들었다.
"쳇, 좋았냐?"
"당연하지."
"아직 승부 안 끝난 거 알지?"
"알아. 근데 오빠는?"
"조교 샘이랑 같이 있어. 아마 당분간 힘들거야."
"흐흐. 어차피 결과는 뻔할 것 같으니 이쯤에서 포기하지?"
"포기 같은 소리하네. 오빠가 너로 만족할리 없거든?"
"아니던데? 엄청 좋아하던데?"
"이게 확!"
연두가 나연을 위에서 덮쳤다. 다른 여학생들도 몇 있었지만, 평소 워낙에 둘이 잘 놀아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연을 위에서 덮친 연두가 속삭였다.
"오빠가 이렇게 해줬어? 이렇게?"
연두가 손가락으로 팬티 위를 간지럽히자 나연이 비명을 질렀다.
"하, 하학. 하지말라고. 지금 민감하니까."
"대체 얼마나 해댄 거야? 오빠 절대 빈유취향은 아니었을 텐데?"
"흠. 그게 실은…."
나연은 도훈이 자신의 구멍이 좁아서 좋다고 전했다.
"그렇더라고…. 가슴은 거들뿐이라면서."
"풉-. 너 상처받을까봐 한 얘기잖아."
"아니거든?"
"나중에 두고 봐. 진짜 여자가 어떤 맛인지 보여줄테니."
"쉿-. 애들 더 들어온다."
나연이 새롭게 숙소로 돌아오는 여학생들을 보고 떠들기를 멈췄다. 자유시간이 끝나갈 무렵인지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다 온 학생들이 복귀하고 있었다.
나연은 새롭게 들어온 여학생을 보고 연두에게 말했다.
"쟤 아영이 아니니?"
"정음이 옆에 꼭 붙어있는 애?"
"어. 둘이 언제 저렇게 친했데?"
"여기 와서 친해 졌을 걸?"
"정음이가 착해빠져서 그래. 말 걸어도 잘 대꾸도 안하던데, 쟤."
"그래? 난 너무 인상이 차가워 보여서 말도 안 걸었어. 살짝 재수없는 타입인 듯?"
"하여간 얼굴값 하는 애들치고 성격 좋은 애 못봤다니까?"
"그럼 난 예외네?"
"미쳤나?"
"죽을래?"
두 사람이 다시 투닥거렸다.
숙소로 들어오던 아영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연두는 나연을 보고는 한심하는 듯 혀를 찼다.
'숙소가 무슨 안방도 아니고….'
"쟤들은 누구야?"
"연두랑 나연이? 소개시켜 줄까?"
"…아냐 됐어. 별로 친할 일 없을 듯."
정음과 아영은 짐을 풀어둔 쪽으로 이동했다. 연두와 나연이 있는 곳과는 완전히 대각선 반대였기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정음이 가방에서 샤워 용품을 꺼내며 물었다.
"소금물에 너무 절었나 봐. 같이 씻을래?"
"아니. 난 됐어."
"아. 물에 안들어 갔었지?"
아영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 지 다시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땀을 많이 흘려서 씻어야겠다."
두 사람은 갈아입을 옷과 수건, 샤워용품을 챙겨 여자 샤워실로 향했다. 야외에 설치된 남자 샤워실과 달리, 여자 샤워실은 여자방에서 연결된 실내에 있었다.
샤워실에 도착한 정음이 서슴없이 옷을 벗었다. 자유 놀이 동안 바닷가에서 신나게 뛰어놀았기 때문인지 갑갑한 전신수영복을 얼른 탈피하고 싶었다.
정음이 수영복을 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영이 살짝 놀랐다.
'뭐야? 몸매가 저렇게 좋았어?'
정음의 알몸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부러 노출이 심한 비키니를 입은 친구들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다년간의 운동으로 탄탄한 몸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와, 너…."
"응?"
"왜 비키니 안 입었어?"
"나? 그냥."
정음은 남들에게 속살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서라는 얘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도훈 뿐이라는 것도.
"너 남자친구는 있어?"
"어? …아니."
"남자들이 대쉬도 안 해?"
"무슨 대쉬?"
정음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묻자 아영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긴, 정음이는 순진하니까 누가 들이대도 작업거는 줄도 모르겠지.'
어느새 정음과 친분을 쌓은 아영은 불쑥 정음이 걱정되었다. 학과 내 난봉꾼인 도훈이 예쁜 정음을 언제고 노릴 거라는 우려가 든 것이다.
"음, 너 도훈 오빠 조심해야 겠다."
"…응?"
정음은 아영의 입에서 도훈의 얘기가 나오자 놀라서 쳐다보았다. 과내에 친구라곤 전무한 아영이 도훈을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오빠 좀 수상해."
"어디가?"
정음은 도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집중했다. 아영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영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입을 다물었다.
"씻고 나서 알려줄게."
"으, 응."
정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속으로는 아영이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한 건지 걱정이 들었다.
'도훈 오빠가 뭘 어쨌길래 아영이가 저런 말을….'
< 1009. 별이 쏟아지는-6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