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2 별이 쏟아 지는-62- >
성수는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뭐야, 이건…?'
성수가 의문에 휩싸였다.
도훈이 각종 스포츠에 능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겨울만 되면 보드를 타러 스키장을 다녔고, 여름에는 수영과 싸이클에 취미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배구 분과에 소속된 이유도, 구기 중 배구를 가장 잘하기 때문이라는 것역시.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성수는 전문적으로 운동을 배웠던 사람이다.
체육교육과에 많은 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긴 했지만, 프로를 고민한 만큼 탁월한 기량을 가진 이들은 많지 않았다. 끽해야 대학 배구팀에 소속된 유미와, 테니스 선수 강경희, 태권도 국대 선발전까지 나갔던 육정음, 그리고 고교 시절까지 유도 선수로 활약했던 자신 정도.
운동 특기생으로 뽑힌 이들은 소위 싹수부터 달랐다. 해당 분야에선 거의 상대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갖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전혀 그쪽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근 -정확히는 군 전역 후- 도훈이 보여준 능력은 일반인의 범주를 월등히 벗어나 있었다. 체육 특기생 격으로 들어온 자신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녀석의 서전트 점프가 저렇게 높았어?'
특히 성수를 놀라게 했던 건 2M에 육박하는 독일 선수의 공격을 틀어막는 도훈의 미친 점프력이었다. 마치 흑인의 그것을 보는 것처럼 동양인의 탄력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점프에 입이 쩍 벌어졌다.
'말도 안 돼! 가만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되는 것 투성이잖아?'
일전에 실기 수업 교수가 도훈의 100M 달리기 실력이 전국급 수준이라고 칭찬했다. 또 어제 이벤트성으로 씨름을 붙었을 때 그가 보인 힘은 자신과 맞먹을 정도. 게다가 지금은 15cm라는 키차이마저 극복하는 미친 점프력을 선보인 것이다.
'…이도훈, 대체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도훈의 달라진 능력에 의문을 표한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육정음.
"응? 아까란 달라진 것 같은데?"
"뭐가?"
옆에 있던 아영이 묻자 정음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르겠어? 점프력이 확 달라졌잖아?"
몸 천재 정음은 도훈의 변화를 곧바로 캐치했다. 남들보다 예민한 안목을 가진 그녀에게 도훈의 달라진 모습은 너무 크게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두 번째 경기랑은 너무 다르잖아?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그래? 아깐 대충 한 게 아닐까?"
아영의 말에 정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근데 신기하다. 넌 그런 변화가 바로 보이니? 아까도 회장 언니 부상 입은 거 같다는 둥 그랬잖아."
"응. 왜?"
"아니. 신기해서. 어떻게 그렇게 곧바로 캐치하나 싶어서."
"모르겠어. 어려서부터 바로 보였어. 그래서 난 다른 사람도 다 나 같은 줄 알았어."
"타고 났네."
아영의 칭찬에 정음이 쑥쓰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는 건 아닌데…."
"괜찮아. 그게 어때서? 사람마다 타고나 재능은 엄연히 다른 법인데."
"그럼 아영이 넌 무슨 쪽에 재능이 있어?"
"나는, 분석하는 걸 잘해."
"분석이라고?"
"쉽게 말하면 데이터를 모아 해석하는 거야. 예를 들면 야구에는 타율이이라는 개념이 있잖아."
"타율?"
"응. 타자가 투수의 공을 얼마나 잘치나 확률로 표시하는 거지. 가령 3할 타자는 10번 타석에 서면 3번 정도 안타를 쳐낼 수 있다는 의미지."
"아하."
"난 여기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어떻게?"
"타자가 좌투수 우투수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또 어떤지. 몸쪽 공과 바깥쪽 공을 얼마나 잘 대처하는 지. 특정 변화구에 따른 볼카운트까지. 그런 것들을 꼼꼼히 분석해서 좀 더 정확한 확률을 계산해 내는 편이야."
"으,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머리 아프지 않아. 난 너처럼 그런 게 바로 보이거든. 데이터를 보고 일정한 경향성을 찾아내는 거. 어쩌면 그게 내 재능인 거 같아."
"신기하다. 아영이 넌 참 똑똑하구나. 난 숫자 엔 정말 약한데."
"정음이 넌 운동을 무척 잘하니까."
"그런가? 헤헤."
정음이 다시 해맑게 웃었다. 순수한 그녀를 보며 아영도 어느새 경계가 풀어져 있었다.
'정말 좋은 아이야, 정음이는. 반면 우리 과에는 저런 호색한도 있지만.'
아영이 다시 도훈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게임은 도훈의 맹활약으로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혼자 수비와 공격을 다 해내며 종횡무진 날뛴덕에 1세트는 거의 승기를 잡은 상태. 아영은 서브라인에 붕 몸을 띄워 스파이크 서브를 때리는 도훈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도훈, 캐면 캘수록 신기한 사람이긴 해. 조금만 더 데이터를 수집 해 봐야겠어. 그럼 그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
"오빠, 바로!"
유미가 공을 받자마자 짧게 띄웠다. 속공 사인을 미리 감지하고 있던 도훈은 반 박자 빠르게 공을 후려쳐 상대가 블록을 세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팡!
빠르게 날아간 공이 빈틈을 기가 막히게 구석을 찔렀다.
"15:6! 1세트 국성대 체교과 승!"
1세트를 따낸 두 사람은 심판의 지시에 따라 네트를 교대했다. 코트로 넘어오는 흑누나와 게르만 전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Unbelievable, man!"
"What the f…."
도훈은 그들을 가볍게 무시한 뒤 유미에게 말했다.
"2세트에서 마무리 짓자."
"할 수 있겠어요?"
"어, 붙어보니 별거 없네."
하지만 유미는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상대가 못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고, 오빠가 제 예상보다도 엄청 잘 하시는데요?"
"그래?"
"네. 저, 솔직히 놀랬어요. 왜 남자 배구부에 안 들어가셨어요?"
"안 들어가긴. 아직도 후보잖아."
"아니, 농담하지 말고요. 오빠도 아시잖아요. 오빠 정도면 당장 주전 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 제 말은, 왜 실력을 숨겼냐는 말이에요. 이렇게 잘하시면서."
"음…. 오늘은 컨디션이 유독 좋은가 보지. 평소엔 절대 이 정도 아냐."
유미는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세번째 게임을 함께 뛰고 있으니 도훈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고 있었다.
[유미 양이 눈치 채 버린 것 같은데요?]
'그러게. 적당히 할 걸, 나도 모르게 도발에 흥분해 가지….'
[유미 양도 유미 양이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이면 주인님의 변화를 대충 감지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이제 뭐라고 둘러대지?'
[둘러대긴요. 이제 주인님의 배구 실력은 이렇게 각인되신 겁니다. 앞으론 배구를 할 때마다 약물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래, 뭐 상관없어. 앞으로 배구 할 일이 얼마나 있을라고.'
어차피 3학년 쯤 되면 진지하게 프로를 생각하는 애들만 운동부에 남게 된다. 분과 활동 역시 3학년이란 핑계로 적당히 빠질 수 있다. 즉, 지금과 같은 남들 앞에서 배구 솜씨를 뽐낼 일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기왕 도핑한 김에 제대로 찍어 누르고 애들한테 실력 발휘해야지.'
[저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세트, 시작하겠습니다."
경기가 재개되었다.
이번엔 도훈의 서브.
1세트에 박살이 난 상대팀은 긴장한 표정으로 수비에 들어갔다. 아예 공격을 포기한 듯, 후위 라인에 좌우로 나란히 섰다. 사각을 줄여 서비스 에이스르 막겠다는 의도였다.
'어림없지!'
하지만 도훈의 점프 스파이크 서브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평소보다 훨씬 고점에서 내리 찍히는 서브가 공격과 다를바 없었다. 철통 수비를 뽐내던 흑누나가 손을 밀어 넣었지만 제대로 반응도 못하고 득점을 허락했다.
"와, 와! 봤어? 무슨 서브가 공격이네…."
"도훈이 형, 몸 제대로 풀렸는데?"
"대체 도훈이 형은 못 하는 게 뭘까? 보드도 잘 타고 수영도 잘하고, 심지어 배구까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데?"
"이거 어쩌면 회장님보다 더 잘할지도?"
"에이, 그건 너무 나갔지. 그래도 회장님은 현역 선수잖아."
"그럼 네가 보기엔 도훈이형 더 못해 보이냐? 또 남녀 차이라는 것도 있잖아."
"음, 틀린 말은 아닌데…."
지켜보던 체육교육과 후배들은 도훈이 보이는 놀라운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런 선배와 같은 학과를 다닌다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국내에서 개최한 경기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외국인 혼성팀을 무찌르는 데 국뽕까지 차올랐다.
그들은 마치 도훈의 성공이 제 일이나 되는 양 열띤 응원을 시작했다.
"이도훈! 이도훈!"
"형! 서브로 게임 끝내 버려요!"
"잘생겼다, 이도훈!"
도훈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지금 이순간, 도훈은 완벽하게 코트를 지배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인기가 올라가는 모습에 성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예상대로 도훈의 주가가 상한가를 치겠구나. 이 기세를 몰아 오늘 밤 회장 이취임식까지 한방에 간다.'
이번 여름 캠프를 마지막으로 집행부 활도이 끝나는 성수는 빼어난 후임자 발굴에 무척 뿌듯해했다. 마침내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도훈이가 확실히 달라졌어. 그 계기가 여친에게 차인거든, 군대에서 뭔가 각성했든 상관없는 일이지.'
성수는 1학년 때부터 도훈과 친했기 때문에, 그의 달라진 변화를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호쾌한 성격이었기에 도훈이 어떤 계기로 달라졌는지에 대해선 궁금해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도훈이는 역대 최고의 회장감이니까.'
도훈의 일방적인 서브로 어느새 경기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서브득점으로 10점 이상 차이를 벌린 도훈은, 운 좋게 반격해온 상대의 공격마저 블록으로 막아내며 좌절감을 안겼다.
거구의 게르만 전사의 표정에 패식이 가득했다.
'으으, 나보다 키도 작은 코리안에게!'
상대의 패턴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 선수는 부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활동반경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모든 수비와 공격을 남자 선수 혼자 도맡았다. 뻔한 공격과 예측 가능한 수비.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체력과 배구실력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한국, 정말 무시무시한 나라였군!'
결국 두 번째 세트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국성대 체교과가 승리했다. 구경하고 있던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축하를 위해 우르르 뛰어들려는데 유미가 단호하게 제지했다.
"애들아. 게임 안 끝났다."
곧 심판이 관중들을 진정시키며 경기 결과를 선언했다.
"남녀 혼성 경기는 국성대 체교과팀의 2:0 승입니다. 양팀 서로 인사하시고."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 번갈아 악수를 나누는데 흑누나가 도훈을 보더니 갑자기 포옹했다.
'으윽, 뭐야 이 육탄공세는.'
도훈은 당황했지만, 외국인 특유의 친교표현이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그때 흑누나가 귓가에 대고 영어로 귓속말을 햇따.
"Tonight, possible?"
(오늘밤, 가능?)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훈은 소름이 쫙 돋았다.
'미친 근육 흑돼지년이!'
하지만 도훈은 국제 신사였으므로 점잖케 못 들은 척 물러섰다. 흑누나를 무시한 도훈은 이번엔 게르만 전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게르만 전사는 패배에 큰 충격을 먹은 듯 기가 팍 죽은 모습이었다.
"Good game."
(좋은 게임이었다.)
"Just moment, I have a question."
(잠시만, 나는 너에게 질문이 있다.)
남자 선수가 악수를 하던 도훈에게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너는 얼마나 강한가? 한국 사람들은 다 너처럼 배구를 잘하는 가?"
도훈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는 좆밥에 불과하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으으!"
도훈의 말에 충격을 받는 게르만 전사가 말없이 짐을 싸서 떠났다. 흑누나는 마지막 순간 까지도 도훈을 노려보며 입맛을 다시는 등 끝까지 추태를 부렸다.
'으으, 왜 저래. 날 언제 봤다고.'
[게임하다 주인님의 모습에 반했나 보죠.]
'그렇다고 보자마자 떡칠 생각부터 하냐? 예쁘기나 하면.'
경기가 완전히 끝나고 도훈과 유미는 체육과 학생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와! 진짜로 우승이라니! 너무 축하드려요, 선배님"
"오늘 최고였어요!"
"너무 예쁘고 잘생겼어요!"
"한턱 쏴! 한턱 쏴!"
상금으로 받은 100만원을 쏘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봉투를 들고 있던 유미가 도훈에 양보하자, 도훈이 봉투를 높이 쳐들고 소리쳤다.
"그럼 체육과의 건승을 위해, 우승 상금을 기탁하겠습니다!"
"우아아아아아아"
"멋지다 이도훈!"
"잘생겼다 이도훈!"
"섹시하다 이도훈!"
오늘 배구는 그야말로 도훈의 독무대였다. 경기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도훈에 대한 연호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의 주가가 올라갈수록 그를 속으로 연모하는 여자들의 모음은 복잡해졌다.
"아씨, 도훈 오빠 인기 많아지면 곤란한데….'
'오늘밤은 꼭 나랑 만나기로 했는데, 저래서 몰래 시간이 나려나.'
특히 새벽 내 독수공방을 하며 도훈을 기다렸던 민주는 먼 발치에서 도훈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주인님. 오늘 밤은 제발 저에게 은총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아영은 뭔가 신기한 점을 깨달았다.
< 1002. 별이 쏟아지는-6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