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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16화 (983/2,000)

< 999. 별이 쏟아 지는-59- >

"모르겠어요. 생각보다 심하게 밟히는 바람에…."

유미가 아픈 발목을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내색을 않는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확실히 아픈 모양이다.

"그때 그 사건 복수한 거 아냐?"

"네?"

"중학교 때 결승전에서. 그때 네가 밟았다지 않았어?"

"무슨 소리예요? 그때도 제가 밟혔는데."

"그래? 근데 밟은 사람이 더 다쳤다고?"

"게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요. 점프보다 착지가 더 중요한데 단단한 코트에 닫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발등을 밟게 되면, 순간적으로 발목을 삐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번엔 제대로 밟았나 보네. 너만 다친 거 보면."

"사람 놀리기에요.? 아파 죽곘는데."

유미가 눈을 흘겼다.

"농담이야. 어디 봐."

"오빠가 본다고…. 아, 앗!"

발목을 잡아 살짝만 누르는데도 유미가 신음을 토해냈다.

'이정도면 생각보다 심각한 거 아냐?'

[그래 보입니다. 이거 경기를 제대도 뛸 수 있을지.]

'그러게. 우린 후보선수도 없는데….'

자칫 게임은 이기고, 경기에서 지는 우를 범할지도 몰랐다.

전투를 이기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처럼.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하다. 하얗게 불태웠으면 모를까, 허무하게 포기해야 하다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

"상관없어요. 점프만 안하면 견딜만 할 거예요."

"점프만?"

"네. 수비보는 데는 끄떡없어요."

"점프를 안 하면 공격은 누가 해?"

"오빡 있잖아요."

"나?"

유미의 구상은 그랬다.

본래 우리 팀 구상은 내가 레프트, 유미가 라이트에서 번갈아 때리는 방식이었다. 서브를 넣은 사람이 수비로 들어가면 마지막 3타에서 좌우를 공략해 상대를 교란시키는 방법.

하지만 이제 유미가 공격을 할 수 없으니 첫 리시브와 마지막 공격을 나 혼자 떠맡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빠가 받고, 마지막에 오빠가 때려요. 현재로선 그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 그래도…."

"전 괜찮아요. 이 정도 다쳤다고 게임 포기했으면, 이제껏 몇 번이고 포기했을 거예요. 경기하다 보면 부상은 피할 수 없어요. 중요한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죠."

"음…."

유미는 부상 투혼을 보이고 있었다.

만지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부상을 참으며, 경기를 이어갈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비록 이벤트전에 가까운 비치발리볼이었지만, 중도 포기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해요. 할 수 있어요."

"네 뜻이 그렇다면…."

"오빠만 믿을게요. 우승할 수 있죠?"

"…최선을 다해볼게."

얼결에 전력을 다해야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현역 선수인 유미에게 얹혀가려는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불가피했다.

[주인님도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좋긴. 나가기도 싫은 대회였는데 이젠 떨어지면 내 탓이잖아.'

[하지만 그만큼 성과는 있을 겁니다.]

'무슨 성과?'

[잊으셨습니까? 오후엔 체육과 학생들이 응원 온다는 거. 주인님이 주목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횝니다.]

'아니, 주목받아서 어디다 쓰냐고.'

[왜요? 나중에 학회장 취임해서 두고두고 회자되지 않겠습니까? 운동 천재 이도훈, 배구까지 접수로요.]

'뭐?'

[심지어 전 회장인 마유미양 보다 돋보일 수 있을 거구요.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죠.]

'무슨 의미부여를 그렇게 거창하게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살짝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학회장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흐음. 어차피 나머진 쭉정이들이고 저 팀만 이기면 되다는 건데….'

의료텐트에서 쉬고 있는데, 혼성팀 경기가 보였다. 토너먼트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근육질 흑누나와 게르만 전사의 경기였다.

처음엔 강렬한 인상의 흑누나가 눈에 들어왔지만, 보면 볼수록 외국 혼성조의 백미는 게르만 전사였다. 키가 2m에 육박하는 금발의 거구.

"저 외국인 꽤 하는데?"

"누구요?"

"저 떡대 말이야."

마침 게르만 전사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스파이크를 꽂았다. 반대편에서 블로킹을 떴지만 타점이 그보다 높아 손 끝에 채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쾅!

모래 바닥을 맞은 공이 한참이나 튕겨나갈 만큼 위력적인 파워. 공격에 성공한 게르만 전사가 씩 웃으니, 앞니에 누런 금니가 반짝거렸다.

[오오, 엄청난 실력아닙니까? 아마추어가 아닌데요?]

'그러게 피지컬만 괴물이 아니라, 배구 실력도 장난 아닌데.'

15cm라는 높이.

높이의 경기라고 불리는 배구엔선 치명적인 차이다.

놈과 맞설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왜요? 갑자기 강한 적을 보니 호승심이 끌어오르십니까?]

'그러게. 나도 어디가서 꿀려본 적 없는데, 나보다 키 큰 사람 보니까 갑자기 승부욕 돋네.'

[주인님도 슬슬 스포츠인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묘수가 있겠어?'

[마유미양이 건재하다면 좌우에서 공격하며 활로를 뚫을 수 있겠지만, 주인님이 집중견제를 받게 된다면 그만큼 이길 확률이 낮아지겠죠.]

'그러니까 말이야. 공격은 다 막히고, 놈의 공격은 받아낼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죠. 치사하긴 하지만, 약물에 의존하는 수밖에요.]

'약물?'

[3월에 100M 달리기 기억 나십니까?]

'아! 그게 있었지?'

생각해보니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아이템이 존재했다.

당시에도 템빨로 신기록을 세우고, 교수에게 눈도장을 찍은 일이 있었다.

[아이템을 찾아볼까요?]

나는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유미를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우승해서 유미를 웃게 해줘야 겠다고.

'검색해. 후배들 다 지켜보는 데 자존심 구길 순 없지.'

***

성수가 지도하는 오전 수영캠프는 어제와 분위기가 확 달랐다.

전형적인 FM스타일인 성수는 여학생들의 애교와 아양에도 아랑곳 않고 바다 수영에 매진했다.

"팔 더 힘차게 저어. 파도를 이겨내는 거야. 그렇지, 정음이 잘한다!"

금세 실력이 느는 정음을 칭찬하자 옆에 있던 희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회장님은 왜 계속 정음이만 칭찬하세요?"

"잘하잖아. 너는 언제까지 쉴 거야?"

물가에 나와 있던 희주가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고."

"어제 일찍 자지 않았어? 애들이 너 안 보인다고 찾다가 방에 일찍 들어갔다고 그러던데?"

"맞아요.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잤어요. 오늘도 여전히 안 좋구요."

"어디 아프냐?"

희주가 성수를 놀리듯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걸리는 매직, 부회장님도 경험해 보실래요?"

"크흠, 애가 무슨 농담으 해도…."

성수는 희주의 입심에 설득을 포기하고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그때 희주 옆에서 나란히 쉬고 있던 아영이 희주에게 넌지시 물었다.

"탐폰했어?"

"어?"

"아니 너. "

희주는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는 듯 아영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당연히. 수영복 입고 오는데 생리대를 차고 올순 없잖아. 나 생리합니다,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으흥, 그렇구나."

아영이 묘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아영과 별로 안 친했으므로 갑자기 질문을 하는 저의가 궁금했다.

'뭐야 얘는? 혼자 폰만 보고 있더니.'

희주는 붙임성이 좋았고, 누구에게나 편하게 다가가는 스타일이었지만 아영이만은 의외였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새침때기 처럼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원래부터 말수가 적다고 했다. 학과 비공인 왕따래나 뭐래나

"넌 왜 수영 안해?"

"응. 별로 재미없어서."

"수영 캠프 재미 없어?"

"아니. 캠프는 흥미로워. 아주."

알 듯 모를 듯한 소리에 희주가 결국 대화를 포기했다.

'하여간 이상한 애야. 수영도 안 할 거면 뭐하러 캠프에 온 거람? 나처럼 도훈 오빠 보려고 온 것도 아니고.'

한편 아영은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느 여학생들을 하나씩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이도훈이 대체 여기서 몇이나 따먹었을까?'

그녀는 어젯밤 도훈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효민이가 전부는 아닐 거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를 홀랑 자빠뜨릴 만큼 난봉꾼인 이도훈이 한명만 건드렸을 리가 없지. 가만, 그러고 보니 희주도?'

아영이 수영복을 입은 희주를 힐끔거렸다.

야한 비키니는 여자가 봐도 후끈한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방학을 맞아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유난히 밝은 그녀의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근데 희주란 애가 이렇게 예뻤던가?'

아영은 희주와 딱히 교류는 없었지만, 오다가다 수업에서 만나며 안면은 있는 상태였다. 분명 1학기 초만해도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미인이 되어 있었다.

'이도훈이 건드릴만한 취향이긴 한데….'

아영이 갑자기 물었다.

"너 도훈 오빠랑 친하니?"

"응?"

희주는 도훈의 이름이 언급되자 화들짝 놀랐다.

어젯밤 몰래 떡을 쳤으니, 당연히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왜 물어?"

"아니. 친해 보여서."

"오빠랑, 내가?"

"아니야?"

'뭐지? 혹시 어젯밤 일을 아영이가 훔쳐본 것은 아니겠지?'

희주는 괜한 걱정에 말을 돌렸다.

"친하기보단, 오빠가 워낙에 후배들에게 상냥하니까."

"그래?"

"응. 되게 자상하잖아."

"자상해?"

"어. 왜? 아영이 너도 관심있어?"

"너도?"

자꾸 말끝을 올리는 아영의 화법에 희주도 점점 감정이 상했다.

'왜 자꾸 의문형이야? 대화를 하자는 건지, 취조를 하자는 건지.'

"아니 1학년 여학생들이 다 좋아하잖아. 도훈 오빠는."

"왜?"

"왜냐니. 잘생겼지, 운동 잘하지, 공부도…."

"으응. 그렇구나. 난 딱히."

왠지 맥이 끊기는 반응에 희주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 재수없는 반응은. 에이, 기분 나빠서 같이 못 있겠네."

희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성수에게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수영하러 갈게요."

"왜? 몸 안 좋다면서."

"괜찮아요."

희주가 아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탐폰 했거든요."

"윽."

성수를 곤란하게 만든 희주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했네, 했어. 희주도. 이도훈은 대체 몇 명에 손을 뻗친 거지?'

그녀는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여학생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

오전 수영 강습이 끝나고 4강 진출 소식을 들은 성수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유미랑 도훈이가 혼성 4강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이다."

"우아!"

"역시, 회장님!"

"그래서 오후부터는 휴식 겸 응원을 갈 참이다. 다들 국성대 명예를 걸고 진출한 두 사람에게 확실하게 기를 불어 넣을 수 있도록!"

"넵!"

"얼른 가요!"

체육과 학생들이 야외 비치발리볼 경기장에 다다랐다. 40여명의 젊은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경기장은 금세 관중들로 가득찼다.

"저기다. 곧 4강 시작하나봐요."

마침 경기를 앞두고 있던 도훈과 유미를 발견한 학생들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릴 질렀다.

"결승가요, 형!"

"회장님! 멋지게 꽂아 주세요!"

토스를 주고받던 도훈은 우르르 몰려온 후배들을 향햐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정말 떼로 몰려왔네.'

[부담되십니까?]

'부담은 무슨. 아직 결승도 아니고'

"오빠. 전 세터밖에 안되니까 이제부터 오빠가 다 하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한 번 해볼게."

4강이 시작되었다.

체육교육과 학생들은 코트 주변으로 둘러앉아 열띤 응원을 시작했다.

"잘 생겼다, 이도훈!"

"우윳 빛깔, 마유미!"

서브를 준비하던 도훈은 낯이 뜨거워지는 유치한 응원 문구에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휴,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지. 다른 사람 다 보는데 쪽팔리게.'

[왜요? 상대방 기도 죽이고 좋죠.]

'우리가 무슨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엄연히 주최측이 있는 대회인데….'

아니나 다를까 도훈의 우려대로 체육과 학생들의 일방적인 응원은 진행요원의 제재를 받았다.

"정숙해 주세요. 게임에 방해가 됩니다."

"우우!"

"응원하는데 왜 그래요?"

"어이, 학생들만 왔어?"

"그러게. 지들이 전세낸 것도 아니고."

상대 팀의 일행들도 불만을 표시하자 진행요원이 더욱 강하게 나왔다.

"게임 진행을 방해하는 경우 퇴장 조치 됩니다. 다들 협조 바랍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성수가 대표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애들 조용히 시킬게요. 야, 다들 들었지? 조용히 게임만 관람하도록."

"그럼 응원은요?"

"끝나고 기뻐해도 되잖아. 여기 우리만 온 것도 아니니까 예의를 차리자."

"네."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경기가 재개되었다.

도훈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키 위해 시작부터 스파이크 서브를 날렸다. 하지만 4강에 오른 만큼 상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공을 받아내더니 반격을 해온 것이었다.

'어쭈, 제법인데.'

도훈이 공을 받고 유미에게 전달했다.

발목이 불편한 유미를 향해 완벽히 머리 위로 띄우는 택배 크로스였다.

"오빠, 오픈!"

"오픈!"

도훈이 바깥으로 크게 돌더니 네트 기둥 바깥에서 치고 들어왔다. 유미의 완벽한 토스는 도훈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정확하게 그의 오른손 앞으로 떨어졌다.

파앙!

강력한 일격!

무게를 실은 도훈의 오픈 공격은 블록은 상대를 뚫고 정확히 메다 꽂혔다. 조용히 지켜본다던 체육과 학생들이 그 모습에 함성을 터뜨렸다.

"이도훈! 이도훈!"

"꺄아, 도훈 오빠 나이쓰 빠따!"

"야, 빠따가 뭐야? 야구도 아니고."

"그거나 그거나!"

도훈의 완벽한 공격으로 분위기가 흠뻑 끌어올랐다.

그 모습을 아영이 의미심장하게 지켜보았다.

< 999. 별이 쏟아지는-59-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1000화,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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