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8. 별이 쏟아 지는-58- >
***
이번엔 스파이크 서브가 아닌 통상의 언더 서브를 날렸다.
참나, 봐주면서 게임 해야 하다니.
공이 쉽게 넘어가자 상대방에서 오랜만에 공을 받았다. 공중으로 올라간 공을 2타에서 여자 선수가 강타했다. 어쭈, 한 때 선수였다더니 제법인데?
공은 생각보다 매섭게 날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본능적으로 내 몸도 움직였다. 낙하지점 예측, 리시브 동작, 그리고 적절한 힘조절을 통해 띄우기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이 내몸에 각인된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완벽한 수비를 해내고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것이 재능 약탈자의 위력인가?'
재능 약탈자는 문자 그대로 상대가 지닌 평생의 노력을 한순간에 약탈하는 능력. 유미가 초등학교 때부터 흘렸던 땀방울 하나까지, 몸에 배기위해 수 천번 수련했던 동작 하나까지 완벽하게 모사해냈다.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재능은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캬, 이건 정말 양심 없네.'
[주인님이 양심이 있던 적이 드물긴 하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스킬 말이야. 섹스 한 번으로 운동 능력을 강탈해 간다는 거, 너무 사기 아니냐.'
[그래서 80% 제한이 걸려있지 않습니까?]
'하긴 그마저도 없으면 뺏긴 사람이 분통 터질듯.'
문득 배구를 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유명 여성 프로 선수를 꼬실 수만 있다면, 모든 운동에 정통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가령 프로 골퍼를 꼬시면, 최소한 준프로 이상의 샷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여성 UFC 선수면 또 어떨까? 나도 격투기 데뷔 가능?
"오빠, 준비요!"
망상에 빠져 있는데 유미가 신호를 보냈다.
공을 살짝 띄울 테니 속공을 날리라는 의미였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곧바로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배구의 속공은 농구로 치면 엘리후프를 하는 것처럼 미리 몸을 날린 상태에서 올라오는 공을 짧게 끊어치는 방식이다.
그러나 유미의 공은 오픈 공격처럼 긴 포물선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얼레? 속공 아니었나?'
사인이 엇갈린 나는 공중에서 부랴부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손가락 끝에 걸리며 공은 허무하게 아웃되고 말았다. 처음으로 상대 팀의 점수가 올라갔고, 사인 미스에 유미가 허리에 두팔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오픈 사인 줬잖아요!"
"언제?"
"서브 넣을 때요. 못 봤어요?"
내가 서브를 넣고 있을 때 네트 앞에 있던 유미가 엉덩이 위로 손가락 사인을 내기로 했다. 손가락이 1개면 오픈, 2개면 백어택, 3개면 속공이라는 의미였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유미의 수신호를 놓친 것이 화근이었다.
"아, 미안. 내가 착각했나 봐."
"집중하세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죠."
유미의 따끔한 조언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확실히 코트 안에서 유미의 모습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평생 팬을 잡았던 시간보다 배구공을 만진 시간이 길었던 그녀에게 배구는 삶의 일부나 마찬가지.
'음, 유미가 진지하니까 좀 멋있네.'
[당연하죠. 대학 배구 선수면 프로도 노려볼만할 수준 아닌가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 하지만 배구를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더구나 이벤트 전같은 비치발리볼 대회마저 말이야.'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라 하잖습니까?]
'하긴 프로를 꿈꾸려면 마인드부터 프로여야겠지. 이번엔 내가 실수했다, 인정.'
아무튼 나의 실수로 서브권이 상대팀에게 넘어갔다.
이번엔 여자 선수의 차례였다. 유미와 안면이 있다던 그녀는 공을 잡은 순간부터 집요할 정도로 유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쟤는? 유미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았나?'
[중학교 때 인연이라지 않았습니까?]
'인연이 아니라 악연으로 보이는데 저 정도면.'
심판의 호각 소리에 맞춰 상대 팀에서 서브를 날렸다. 그러나 공의 방향이 완벽하게 유미에게 맞춰져 있었다.
'응? 완전 목적타네?'
[목적타요?]
'강서브를 넣으면 무조건 후위로 날아오게 되어 있거든. 근데 전위에 있는 유미를 노리고 힘빼고 날린 거잖아.'
[그렇군요. 혹시 유미양이 수비가 약한 편인가요?]
'설마. 내 배구 실력의 근간이 유미에게서 왔는데. 유미는 쉽게 말하면 전천후야. 공격 수비, 심지어 세터까지도 가능할 걸?'
예상대로 유미는 살짝 동요하긴 했지만 손쉽게 공을 받아냈다. 내가 공을 띄우자 유미가 멋지게 라이트에서 스파이크를 꽂아 넣었다.
팡!
도약, 공중동작, 착지까지 교과서같이 완벽한 그녀의 공격에 구경하던 관람객들이 웅성거렸다.
"뭐냐? 저 선수?"
"너도 봤어? 방금 공격?"
"완전 프로급에서 나오는 씬인데?"
"이야, 이 팀 잘한다!"
다들 배구를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스파이크 동작 하나로 유미의 실력이 노출되고 말았다. 내가 공을 때릴 땐 신경도 안 쓰던 외국인 혼성팀조차 유미의 공격에 놀라는 모습이 살짝 거슬렸다.
'쳇. 뭐냐? 저것들은? 왜 유미만 의식하는데?'
[주인님보다 유미양이 더 경계대상인가 보죠.]
'개 빻은 흑마 주제에 건방지긴.'
[방금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 아닙니까? 더구나 흑인 여성을 상대로 업적도 걸려있을 텐데요.]
업적?
내가 저 흑마랑?
어우, 이건 진짜 아니다.
'절대 사양. 아무리 흑마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외국 혼성팀의 흑누나는 진성 니그로였다.
인종 혐오적 표현이 아니라, 학문적 구분으로 아프리칸 니그로 말읻. 피부 색은 먹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머리털은 수세미처럼 뽀글거렸다. 더욱이 여잔데도 굉장한 근육질이라, 남자가 가발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뭐 서던 좆도 죽을 판이네.
'이건 정말 아냐. 나도 취향이란 게 있다고.'
[아무래도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으신데요?]
'노노. 절대로 흑인이라서가 아니야. 흑누나들도 얼마든지 섹시한 분들 많단 말이지. 근데 저분은 정말 사람 잡아먹을 상이잖아.'
과장해서 말하면 어느 정도냐면 이 세상에 만약 흑누나와 나 단둘만 남더라도 인류의 멸종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랄까? 도무지 욕구가 일지 않을 수준이다.
다시 공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이번에는 유미가 서브를 넣을 차례.
네트 앞에서 스크린을 펼치는 데 상대편 남자 선수가 가까이서 말을 걸었다.
"거 보아 하니, 대학생들 같은데 살살 좀 하지?"
"예?"
"아니 무슨 기를 쓰고 덤비냐 이거야. 게임에 목숨 걸었어?"
상대는 끽해야 나보다 서너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초면에 말투가 아니꼽길래 나도 반말로 받아쳤다.
"…걸었으면, 어쩌게?"
"뭐, 뭐라고?"
"거, 게임이나 집중하쇼. 잔말 말고."
딱 잘라 받아치자 상대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놈도 눈이 있으면 똑똑히 봤을 것이다. 키가 비슷해도 상의를 벗겨놓으면 나와는 체급에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사실 나는 여기 모인 남자 배구 선수들 중에서 가장 몸이 좋은 편이다. 자랑이 아니라, 배구 선수는 특성상 팔다리가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타입이 대부분.
굳이 근육을 과하게 키울 필요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몸이 무거워지면 점프력도 떨어지고 체력관리가 안되기 때문에 늘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
[너무 과격하신 거 아닙니까?]
'싸가지없게 굴길레, 싸가지없이 대해준 것뿐이야. 지가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나이가 벼슬이야? 아니지, 나이는 솔직히 내가 더 많네.'
[그렇긴 한데, 주인님이 그러면 상대가 위협감을 느낄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시비 걸지 말아야지. 어디서 입을 털어?'
유미가 살살 서브를 넣었다. 아까 작전회의 때 말한 것처럼 연습을 위해 최대한 길게 게임을 끌고 갈 생각 같았다.
이어지는 여자 선수의 공격.
그녀는 또다시 유미를 향해 강타를 날렸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공은 유미의 머리 쪽으로 날아갔다. 유미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자 공이 아웃 라인에 떨어지며 멀리 튕겨 나갔다.
부심이 공을 주으러 간 사이 내가 말했다.
"힘조절이 잘 안되는 모양인데? 아예 바깥으로 날려버리네?"
"…노렸어요."
"엉?"
"내 얼굴 노린 거라고요."
"뭐? 실수가 아니고?"
"보자보자 하니까 사람 열 받게 하네?"
"무슨 일인데?"
"몰라요. 시작할 때부터 입 털더니 고의적으로 나만 노리는데요?"
그러고보니 상대 여자선수는 게임에 집중하기보다 유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계속 신경전을 벌인 것이다.
"혹시 중학교 때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 결승에서 서로 다치긴 했는데."
"다쳐?"
"자기가 실수로 내 발을 밟고 쓰러졌어요."
"상대 코트 넘어가 밟으면 반칙 아닌가?"
"반칙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응급실 실려 갔죠."
"흐음. 둘 사이에 뭔가 있긴 했구나."
"있긴 뭐가 있어요? 내가 발을 갖다 댄 것도 아니고, 지가 제풀에 밟고 다친 건데."
"그래도 억하심정이 생기면 뭐든 불합리하고 억울한 법이지."
"신경 안 써요. 경기는 경기로 끝내야지, 찌질하게 아직까지 그 일로 꿍해 있을 줄 몰랐네요."
"그래.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1세트는 우리가 원하는 흐름대로 최대한 공을 주고받으며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점수는 15:3으로 압도적인 스코어였다.
심판의 명에 따라 2세트 코트를 교대하는데, 유미가 말했다.
"오빠. 몸도 거의 풀린 것 같은데 그냥 발라버리죠?"
"오케이."
2세트에 유미는 시작부터 강공을 퍼부었다. 마치 경기엔 관심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상대 팀 여자 선수를 응징하듯.
배구는 기세 싸움이다.
비치발리볼도 마찬가지인데, 1세트에서 드러난 실력 차에 상대 팀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공격이 들어가도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고, 서브범실도 많아졌다.
일방적인 겡미에 관람객들도 흥미를 잃었는지, 다음 경기 대기자를 제외하곤 하나둘씩 떠나갔다.
스코어는 어느새 14:0.
한 점만 더 내면 4강 진출이다.
유미가 네트 앞에서 사인을 보내고, 내가 서브를 날렸다.
상대팀의 마지막 공격. 유미는 한 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블로킹을 시도했다.
'응?'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상대팀 여자 선수가 블록을 하는 유미를 앞에 바짝 붙은 것이었다. 수비랑은 전혀 상관없는 위치였기에 의아하다고 느끼는 순간, 착지를 하던 유미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유미야!"
상대방은 뻔뻔하게도 경기가 끝나는 시점에 유미에게 고의로 부상을 입힌 것이었다. 심판도 이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반칙패를 선언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이미 99% 이긴 경기나 마찬가지였다.
아파하는 유미를 보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야!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소리치자 상대편 남자가 맞서 나왔다.
"뭔 소리야? 방금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미안하면 다야?"
내가 흥분해서 네트를 넘어가려고 하자, 발목을 잡고 쓰러져 있던 유미가 나를 막았다.
"오빠. 하지 마요. 나 괜찮으니까."
"거봐. 괜찮다잖아. 암튼 죄송하게 됐수다. 이긴 김에 우승이나 하쇼. 목숨 걸고."
상대팀은 뻔뻔하게 반칙패를 당해 물러나면서도 이죽거렸다.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고, 나 역시 당장 달려가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유미의 부상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유미, 진짜로 괜찮아?"
"잘 모르겠어요."
유미가 발목을 내밀었는데 그 새 퉁퉁 부어 있었다. 경기 진행 요원들이 뿌리는 파스르 들고와 내밀었다.
"저, 이거라도."
"뭐에요? 의료띰 따로 없어요?"
"보건소에서 출장 나오기로 했는데, 그쪽 공보의가 오늘 휴가 갔다고 해서…."
심지어 의료팀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미에게 등을 보이며 무릎 꿇었다.
"업혀."
"괜찮아요. 혼자 일어설…. 악!"
유미가 몸을 일으키다 다시 쓰러졌다.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그냥 업히라고. 우리가 나가야 다음 경기팀 들어올 거 아니야."
"미안해요. 오빠."
"네가 뭘 미안해?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확 저것들을 그냥."
"됐어요. 그냥 둬요."
나는 유미를 업고 임시 텐트로 향하며 물었다.
""넌 화도 안나냐? 명백한 고의였다고."
"알아요. 처음부터 경기를 이길 생각보다 저만 노리고 있더라고요."
"알면서 왜 그랬어?"
"게임에 집중해야죠. 상대가 반칙할 게 예상된다고 쫄면 안 되는 거니까."
"나참…."
유미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나저나 나보다 더 다혈질인 그녀가 왜 상대선수를 그냥가게 내버려 두었는지 궁금했다.
"지금이라도 가서 따지고 올까? 생각할수록 빡치네."
"됐어요. 네트 앞에 설 때마다 계속 궁시렁 대더라고요."
"뭐라고?"
"중학교 때 당한 부상 때문에 배구 인생 끝장났다고.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면서."
"그게 막말로 네 탓도 아니잖아?"
"알죠. 자기도 알지만 억울하니까 그렇겠죠. 누구한테라도 화풀이를 안 하면 도저히 못 견딜 테니. 그래 봐야 자기만 손해에요. 그냥 평생 그렇게 살라고 해요. 결국엔 후회만 가득하겠죠."
"음…."
갑자기 유미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맨날 경기할 때 보여준 열정과 집중력은 차치하더라도, 상대의 반칙까지도 수용하는 넓은 마음씨가 확실히 내가 알던 폭력적인 유미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음. 유미는 확실히 멘탈이 좋네.'
[괜히 대학배구부 주전 공격수겠습니까? 그만한 역량이 있으니까 자릴 지키고 있는 거겠죠.]
'하긴. 난 유미한테서 당하기만 해서 그런가, 이런 타입인지는 전혀 몰랐네.'
누구든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선 빛나 보일 때가 있다. 코트 위에서 마주한 유미는 참으로 훌륭한 선수였다.
실력이든, 인성이든.
"그나저나 다음 경기는 뛸 수 있겠어?"
퉁퉁 부은 유미의 다리를 보며 물었다.
< 998. 별이 쏟아지는-58-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천화 이벤트를 위해 속도 조절중입니다.
흑흑.
아무쪼록 양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