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5. 별이 쏟아 지는-55- >
"아침부터 찬 공기 마시면서 뛰니까 얼마나 좋냐!"
성수는 잠도 덜 깬 학우들을 독려해가며 아침구보를 감행했다. 비몽사몽간에 끌려 나온 40여명의 체교과 학생들은 난데없는 구보에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뭔데 이거, 대체?"
"몰라. 부회장님이 갑자기 깨우는 바람에…."
"아씨, 진짜로 토할 것 같은데."
사방에서 불만이 속출했지만, 의의로 묵묵히 뛰는 학생들도 있었다. 특히 정음은 유독 기운이 넘쳐 보였다.
"아침부터 땀 흘리고 좋은데 왜 그래? 다들 힘내자!"
그녀는 운동이 일사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침구보가 찌뿌둥한 몸을 일깨우는 데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정음을 늘 앞서려고 기를 쓰던 경희는 맨 후미에 처져 비실거렸다. 평소 같으면 승부욕에 불타 정음의 뒤를 바짝 쫓을텐데, 오늘은 병든 닭처럼 맥이 없었다.
그녀와 나란히 꼴등이 된 희주가 물었다.
"왠열, 우리 테니스 선수님께서? 오늘 컨디션 별로?"
"어, 어제 과음을 했나 봐."
경희가 얼렁뚱땅 둘러댔다. 희주는 어기적거리는 수준이었으므로 나중엔 구보를 포기하지고 아예 걷기 시작했다.
'도훈 오빠한테 너무 심하게 당했나 봐. 도저히 못 뛰겠어.'
"경희야 같이 가."
"왜 그래? 못 뛰겠어?"
"어. 나도 어제 술을 많이 마셨거든. 더 뛰다간 토나옴."
결국, 두 사람은 앞서가는 학우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근데 희주 너 어제 일찍 자지 않았니?"
"어?"
""어제 방에 들어가니까 네가 제일 먼저 자고 있던데?"
희주는 도훈에게 처음으로 호되게 당하고 쓰러진 1빠 였다. 나중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방으로 기어서 들어가다시피 했다.
'요상하네? 음주가무를 아하는 희주 저것이 일찍 잔 것도 그렇고.'
경희의 의심에 희주가 곧바로 받아쳤다.
"내가 제일 먼저 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응?"
"그럼 네가 두 번째로 들어온 거구나?"
"아, 아니 그게….나도 어제 피곤해서."
당황한 경희가 눈을 못 마주치고 허둥대자 희주도 부쩍 의심이 들었다.
'설마 너도?'
'저년, 예리한 것 보소?'
하지만 둘 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를 속이며 둘러댈 뿐이었다.
"하긴 어제 좀 무리하긴 했지. 첫날부터"
"그러게 말이야. 이 와중에 구보라니….부회장님도 참도. 너무 파이팅 넘치시는 거 아니니? 임기도 얼마 안 남으신 분이."
"어? 저기 유미 언니 아냐?"
"누구라고?"
뒤에서 무리를 따라 걷던 이들은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유미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여기 계셨어요?"
선두에서 달리다 몰래 옆으로 빠졌던 유미는 맨 뒤에서 후배 둘이 다가오자 머쓱한 눈치였다. 풀린 신발 끈을 묶는 척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자신보다 뒤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어, 너희들 이제 오니?"
"네, 어제 너무 무리를 했는지 못 뛰겠어서 그냥 걷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다른 사람을 몰라도 유미가 구보를 열외하는건 의외의 일이었다. 현역 대학 배구부 선수에다, 지금도 리그를 뛰고 있는 그녀의 체력이면 아침 구보쯤은 누워서 떡 먹기 였던 것.
하지만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야밤에 도훈에게 샤워장에서 호되게 당한 터라, 유미도 완전히 다리가 풀려버렸다. 뭔가 변명할 거리를 차던 유미는 여자들만의 사인을 보냈다.
"오늘 하필 그날이라…."
"아!"
"정말요?"
"응, 너희들만 알고 있어."
"당연하죠."
"해수욕장 왔는데 힘드시겠다. 근데 언니 오늘 무슨 대회 나간다지 않았어요?"
경희가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비치 발리볼 대회는 규정상 수영복 착용이 필수.
생리대를 찬 상태로 수영복을 입을 수도 있겠느냐며 돌려 묻는 것이었다. 그제야 변명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유미가 곧바로 다른 거짓말로 응수했다.
"으, 응. 그래서 탐폰 찼어."
"아, 그러시구나."
"언니 그거 쓰기 편해요?"
"응. 양이 많아도 새지 않고 익숙해지면 편한 것 같아."
세 사람은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며 서로를 의심했다.
'이상한데? 둘 다 어제 나보다 먼저 방에 뻗었던 것들이잖아?'
'설마 유미 언니도? 에이, 오빠가 아무리 바람둥이라도 다 같이 모인 민박집에서 우리 세 사람을 돌아가면서 덮쳤을라고? 그건 무리지.'
'어쩌면 도훈 오빠 정력이면 가능할 수도….근데 유미 언니까지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데? 유미 언니는 대학 리그 뛰느라 학교도 잘 못 나오는데 무슨 수로 언니랑 친해졌겠어? 몇 번이나 봤다고.'
도훈은 자신과 관계한 여자들을 철저하게 비밀리에 붙였기에 각각의 여자들은 도훈이 학과의 모든 여자들에게 마수를 뻗쳤을 거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혹 의심했다 하더라도 도훈과의 특별할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사귀는 사이도 아닌 바에야, 그와 밀회를 즐기는 쪽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불문율은 도훈이 하렘왕국을 차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뒤처진 세 여자와 달리 성수에게 붙들려 선두에서 달려가던 도훈은 죽을 이었다.
'아이씨,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도훈이 정신 좀 차렸나?"
"형, 근데 아침 구보는 좀 심한 거 아니예요? 애들 수영 캠프 온 거지, 해병대 캠프 온 것도 아니고."
"인마. 이런데 와서 한 번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는 거야. 아침에 땀 좀 흘리면서 술독도 빼야지."
"술 취해서 뛰면 더 취하거든요, 형. 아침에 음주운전 더 걸리는 거 몰라요?"
"암튼 아침 입맛은 좋을 거다."
두 사람은 헥헥거리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빠르게 뛰면서도 편히 대화를 나눌 만큼 체력이 좋았다. 같은 체육과라도 여기서부턴 괴수들의 세계였다.
"참, 오늘 대회 나가는 거 알고 있지?"
"알죠. 야밤에 연습까지 하고 왔는데. 유미랑 따로 빠지면 되죠? 수영캠프 지도는 어떡할까요?"
""일단 오전 타임은 내가 대신 들어갈 게."
"오후는요? 준결승 올라가면 오후에 시작이던데?"
"준결승까지 올라가면 당연히 응원 가야지."
"응원요?"
"어. 우리과 현 회장과 차기 회장이 나오는 경긴데 응원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어? 응원전의 진수를 보여줄게."
"형, 저 회장 아직 수락 안했는데요?"
"아직도 결정 안했나? 난 인수인계 채비 끝냈으니까 얼른 결정만 내려."
"나 원참."
처음엔 설득으로 접근했던 성수는 이제는 아예 뻔뻔할 정도로 도훈에게 회장직을 떠맡길 태세였다. 다른 것보다 수영캠프에서 본 도훈의 모습에서 충분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유미랑 같이 팀을 맞출 정도로 뛰어난 구기 실력. 유도 선수 출신인 나와 겨룰 만큼 대단한 투지. 게다가 수영부 강사에 보드 강사를 맡을 정도로 모든 스포츠를 섭렵한 데다, 잘생긴 외모로 특히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모습까지. 도훈이 녀석이 회장을 안 하면 누가 하겠어?'
성수가 생각하는 도훈은 이상적인 체육과 회장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심지어 군대 다녀온 이후론 정신 차리고 공부까지 수석을 할 만큼 잘하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도훈이 저놈아는 무조건 시켜야 해. 그래야 다른 선배들 보기 안 부끄럽지. 이놈은 우리 체육과를 대성시킬 놈이야.'
아침 구보가 끝나자 미리 열여되어 있던 식사조가 곧바로 아침을 대령했다.
"아침은 만둣국이에요~. 해장도 하실겸."
다들 배고팠던 터라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도훈의 옆에서 숟가락을 들던 태영이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형, 혹시 군대 가면 오늘 아침에 한 것처럼 매일 뛰나요?"
"어. 몰랐냐?"
"어우, 진짜 죽을 맛이던데."
옆에 있던 예비역이 거들었다.
"기왕 갈거면 지금부터 알람음악 바꿔. 기상 나팔로."
"크크크. 그건 너무 가혹한데. 태영이 트라우마 생길 걸."
"와, 근데 진짜 나 상병 꺾일 때 대대장 바뀌고나서 겨울에 알통 구보한 거 생각하면…."
"알통 구보가 뭐예요?"
"진짜 웃통 다 벗고 뛰는 거야. 지렸다 진짜 그때, 귀 떨어지는 줄."
"야. 그 정도면 약과지. 냉수마찰이라고 들어봤냐? 나 철원 근무했는데 소대장 약 빤 새끼가 계곡 얼음물 깨고 입수시키더라니까?"
"허!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나 때는 말이야~."
예비역들은 저마다 서로 힘든 군생활을 겪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태영은 점점 결심이 흔들렸다.
옆에서 묵묵히 아침을 들고 있던 도훈이 태영에게 말했다.
"인마. 술김에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면 당장 안가도 돼."
"아니에요, 형. 저 꼭 이번에 입대 할 거예요."
"왜 갑자기 군대에 집착하는 거야? 난 어제 너 용서했다니까?"
"음….형한테 잘못한 것도 있지만, 이건 나에게 주는 벌이 아니에요."
"그럼?"
"형 보고 느낀 게 많거든요."
"뭘?"
"역시 남자는 예비역 이후부터 인생 2막 시작이라고요."
"응?"
태영은 언제 해변에 대자로 누워 생각했던 바를 도훈에게 말했다.
"형처럼 군대에서 몸도 만들고, 멘탈도 다시 잡을 거예요. 2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새롭게 거듭나기엔 충분한 시간이거든요. "
옆에서 듣고 있던 우선이 피식 웃었다.
"모처럼 태영이 네가 철든 소릴 하네?"
"언제까지 스무살 일 순 없으니까요."
태영은 도훈을 이상형으로 삼았다.
군대가서 180도 달라져 나온 그를 보며, 자신도 도훈처럼 변하기를 꿈꿨다.
'나도 할 수 있어. 도훈이 형의 전설을 물려 받을 거야.'
도훈은 지금의 자신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2년을 헛되지 않게 보내면, 언젠가 그의 꽁무니라도 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2년이야. 2년만 고생하고 나와서, 진짜 체육과 아니 사범대 온갖 미녀들을 다 따먹어 버릴거야.'
웅대한 꿈을 품는 태영을 보며 도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꿈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왜요? 태영군이 정말로 달라져서 나올지도 모를일 아닙니까?]
'그러면야 좋지만, 군대라는 게 뭐 특별한 곳도 아니잖아. 대한민국 남자라면 99프로 가는 곳인데, 거기 갔다고 뭐 얼마나 달라지겠냐고.'
[음, 그렇군요.]
'물론 태영이가 독한 마음먹고 완전히 변신해 올수도 있겠지. 그때쯤이면 나야 졸업할때가 다 되었겠지만.'
[저도 태영군이 꼭 달라져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침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성수가 학생들 앞에 섰다.
"자자, 뛰고 나니까 아침 잘 들어가지?"
"으으!"
"부회장님 제발 내일아침엔 구보는 생략좀."
"너무 힘들어요."
"알았어. 어차피 오늘밤이 마지막이니까 먹다 죽을 거야. 술먹다 뻗은 사람은 내일 구보 열외다."
"야호!"
"역시 부회장이라니까?"
"각설하고. 대충 끼니는 때운 것 같으니 오늘 일정을 소개하겠다. 오늘 여자부 수영 강사는 내가 대신한다."
"예?"
"도훈 선배는요?"
"몰랐어? 오빠 무슨 대회 출전하잖아?"
"힝, 난 도훈 선배가 알려주는 게 좋은데…."
"우리 대학 이름 걸고 나가는 거니까 모두 잘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힘찬 박수 부탁한다."
짝짝짝!
"와! 꼭 이기고 오세요!"
"둘 다 파이팅!"
"근데 저희는 구경 못하나요?"
"맞아요. 응원해줘야죠."
학생들의 질문에 성수가 대신 답했다.
"일단 오전에는 예정대로 수영 실습이 이어진다."
"우우~."
"보고 싶다고요, 경기!"
"물론 오후에 준결승 진출하면 우리과 모두 응원을 간다."
"정말요?"
"재밌겠다."
"그러니 오전에 오늘 끝낼 거 다 끝낸다는 각오로 빡시게 하도록."
"넵!"
성수가 머리를 썼다. 어차피 오후에는 어제처럼 휴식을 줄 예정이었지만, 대회 응원을 핑계로 오전 강훈련의 명분을 획득한 것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도훈이 생각했다.
'생긴 건 곰탱이같은데 의외로 잔꾀가 좋단 말이지?'
[성수군이요?]
'어. 예전부터 느꼈는데 교활한 곰이야 곰.'
[본받지 말입니다. 주인님도 곧 물려받으셔야 할텐데.]
"자자, 그럼 대회에 출전하는 두 사람에게 응원의 박수를!"
성수의 손짓에 유미와 도훈이 중앙으로 불려나왔다. 유미는 아침을 먹고 나서 컨디션이 많이 올라왔는지 특유의 쾌활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휴, 이러다 예선탈락하면 망신인데…."
"회장님! 회장님은 프로잖아요. 무조건 우승!"
"프로는 무슨. 겨우 대학배군데. 암튼, 잘 하고 올게요."
"도훈이도 한 마디 해라."
"물 조심하고, 오후에 봅시다."
"그럼 오전 훈련 시작한다. 설거지조 제외하고 환복하고 마당까지 집합하는 데 10분 준다. 어서, 움직엿!"
성수의 불호령에 체육과 학생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린 성수가 유미와 도훈을 향해 말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광고했는데 예선 탈락하는건 아니겠지?"
"에이, 유미가 받고 때리고 다할 건데요 뭘."
"아니예요 오빠. 어젯밤에 보니 도훈 오빠가 정말 전천후더라고요. 특히 후방침투가 압권이었어요."
"후방침투? 배구에 그런것도 있어?"
"아니 시간차 같은 거요. 백어택으로."
"아아, 그거?"
뒤치기를 했던 도훈을 놀리는 말이었지만, 성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두 사람 잘하고 와. 체육과의 명예를 걸고."
"너무 부담주시는 거 아니예요."
"그러게. 우리 둘이 떨어지면 쫓겨나게 생겼네. 꼭 이겨요 오빠. 어제처럼 호흡만 잘 맞추면 해볼만 할 것 같아요."
유미가 생글거리며 어젯밤 일을 자꾸 상기시키자 성수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호흡이 찰떡궁합인가 보구나야. 오늘 우승하겠네!"
"맞아요. 찰떡이죠 아주."
유미가 도훈을 보며 씩 웃었다.
< 995. 별이 쏟아지는-5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