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08화 (975/2,000)

< 991. 별이 쏟아 지는-51- >

도훈의 말에 태영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열중쉬어 자세로 긴장해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도훈이 절래절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노답 새끼 같으니.’

"니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

도훈이 면전에 대고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끝이야?"

"아, 아닙니다."

"어쩔 건데 이제? 나 과에서 매장당하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에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임?"

"네. 제가 지금 아영이한테 가서 형을 시기해서 거짓말 한 거라고 다시 말할게요."

"거짓말?"

"네."

"사실맞잖아."

"예?"

"내가 픽업 아티스트 했던 건 사실이라고."

"그, 그치만···."

"정태영."

"네."

"다른 걸 떠나서 남자들 사이에선 지켜야할 룰이 있어. 알고 있어?"

"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그런 부분에서까지 입이 싼 놈인줄은 정말 몰랐다."

"···면목 없습니다."

도훈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주워 담기 힘들 말이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네,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태영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기색을 보이자 도훈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만에 하나 취중실수라는 둥 한마디라도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두 번 다신 그를 용서치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남자답게 사과하는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하긴 뭐. 나도 너한테 썩 좋은 선배는 아니었으니까.’

도훈은 태영이 노리던 여자들을 모조리 강탈했다.

교환학생 일본인 료코도, 조모임 쌍둥이도, 소개팅녀 설수지도, 그리고 이번엔 아영이까지 그렇게 될 공산이 높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태영의 입장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훈은 차마 태영을 더 나무라지 못했다. 맞는다고 알아먹을 애도 아니고, 때린다고 기분이 풀릴 것 같지도 않았다.

"됐다. 아영이랑은 내가 얘기했어."

"해, 했어요? 벌써요?"

"아영이가 단숨에 달려와서 묻더라. 그게 진짜냐고."

"아···."

"당연히 아니라고 잡아뗐지. 앞으로 너만 잘 처신하면 딱히 소문 날 일은 없을 거야."

도훈은 태영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협박당한 이야기는 쏙 뺐다. 어차피 이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형을 곤경에 빠뜨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저, 군대 가서 새 사람 되어 올게요 형."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 하는데, 군대가 무슨 유배지냐? 사고 치고 도망가는 도피처야? 갑자기 뜬금없이 왜 자꾸 군대 타령이야?"

도훈의 물음에 태영이 작심한 듯 말했다.

"음···. 솔직히 형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아무래도 제가 사람이 덜된 것 같아서요."

‘주제 파악은 하네.’

"가서 철들어서 오겠습니다."

"진짜로 가게?"

"네, 어차피 1학년 마치면 가려고 했어요. 한 학기 당기는 건데 얼마나 다르려고요. 다른 동기도 올해 안에 간다니까 뭐."

"흠···."

"형. 제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란 건 잘 알아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모자라고, 형에 비하면 발톱에 때만도 못하다는 것도."

"왜 이래 갑자기? 취했냐?"

"그냥 객관적으로 제 자신을 한 번 돌이켜 봤어요. 여자들이 왜 나를 좋아해주지 않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하고 말이요. 문제의 원인을 저에게서 찾으니까 해답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찾은 답이 군대야?"

"네. 저도 형처럼 군대가서 진짜 사나이가 되어서 오겠습니다."

[저게 뭔 소리랍니까? 뜬금없이?]

‘혹시 태영이 내가 걸핏하면 군대 핑계 댄 것에 꽂힌 거 아니냐?’

[그거 다 뻥 아니었습니까?]

‘당연하지. 군대가서 누가 그딴 걸 배워. 조뺑이 존나 치다 오는 거지. 몸만 성하게 돌아오면 다행이고.’

[설마 그럼 태영군은 설마 주인님을 롤모델 삼고 일찍 군대를 가려는 거라고요?]

‘으음···. 이걸 솔직하게 말해줘야 하나.’

도훈은 말릴까 망설였지만, 겨우 결심을 굳힌 태영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의 말대로 지금 상태로 캠퍼스 생활을 보내는 건 시간 낭비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즐기는 폐인에, 여자들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실속도 없는 보빨남으로 허송세월하느니 차라리 군대라도 미리 해치우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러다 철이 들면 2년 뒤에는 제법 사람처럼 변해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군대가 답이 아니라, 그냥 나이를 두 살 더 먹어서겠지만.

"정,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형."

"됐어 새꺄. 이미 끝난 일 가지고 자꾸 그래."

"그래도요. 저 너무 마음에 짐이 돼서 그런데 딱 한 대만 때려주심 안 돼요?"

"뭘 때려? 장난하냐?"

"그냥 분이 풀릴 정도만요. 그래야 저도 덜 미안할 것 같아서요."

도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만나면 패 죽여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불쌍해서 참고 있던 차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네, 형. 전 각오됐어요."

태영이 긴장됐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래. 시원하게 한 대 맞고 싹 털어 버리자. 잘못해 비하면 싸게 치르는 거지.’

"다시 한 번만 묻는다. 진짜로 괜찮겠냐?"

"네, 형."

태영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주사도 맞기 직전 알콜 솜 바를 때가 제일 긴장되는 것처럼 태영도 눈을 질끈 감고 도훈이 주먹을 날리기 직전이 가장 두려웠다.

‘으으,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빨 꽉 깨물어."

"···네, 형. 힘껏 때려 주···"

도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부를 걷어 올렸다.

퍼억!

"우욱!"

[아니, 방금 분명 이빨 깨물라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페인트지.’

[아니 여기서 무슨···.]

방심하고 있던 태영은 복부를 강타당하고는 몸이 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도훈의 펀치는 일반인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맞는 순간 온몸의 내장이 진탕 치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위로 들썩일 만큼 커다란 충격에 태영이 곧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우에엑!"

뱃속을 건드린 게 화근이 되었는지 구토가 밀려온 태영이 바닥에 엎드리더니 맹렬한 토를 시작했다.

"구에에엑, 구엑!"

토사물 속에는 태영이 오늘 저녁 먹은 모든 식사와 안주와 술이 뒤섞여 있었다. 한참 동안 태영이 토하는 모습을 지켜본 도훈이 말했다.

"괜찮냐? 그러니까 왜 굳이 맞겠다고···."

"쿠헉, 혀, 형. 이제 저 용서해 주시는 거죠?"

"알았어 새꺄. 앞으론 입단속 잘해. 한 번만 더 배신하면 내가 너 다신 안 볼 거니까."

"아, 알았어요. 형."

"그리고 혹시 진짜 입대할 거면 말해."

"···네?"

"새꺄. 동생 군대 가는 데 코는 풀어 줘야지 형이 되 가지고."

"혀, 형···."

토하고 있던 태영이 감동의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 도훈은 좋은 선배이자 형이었다.

그런 그를 시기하고 모함한 자신이 그토록 찌질해 보일수가 없었다. 태영은 도훈을 보며 결심했다.

‘두고 봐. 나도 전역하고 나면 도훈이 형처럼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반면 도훈은 결기에 찬 태영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휴-. 태영아. 제발 가서 사람만 돼서 와라. 부탁한다.’

***

두 사람이 화해하고 돌아오는데 여전히 민박집 마당 앞에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다 된 시각이라 그런지 절반 가까이는 이미 자러들어간 것 같았다.

조가 재밌게 짜여진 곳은 여전히 신이 나서 놀고 있었고, 하나둘 이가 빠진 팀은 인접한 조와 합류해 새로운 조합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성수와 함께 있던 우선이 벌떡 일어서더니 도훈을 불렀다.

"형! 어디갔다 오세요?"

"어, 태영이랑 잠깐 얘기 좀 하느라."

도훈의 옆에 선 태영은 한번 시원하게 게워낸 후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훈이 태영을 보고 물었다.

"너 괜찮겠냐? 안색 안좋아 보이는데 힘들면 방에 들어가 자."

"잠시만 얼굴 비치고 갈게요."

"그러던가."

우선이 두 사람을 자기조로 안내했다.

"형, 어디갔다가 오시는 거에요. 아까부터 계속 안 보이시던데."

"어. 애들이랑 밤바다 좀 보고 왔어."

"오, 바다?"

"우리도 가요."

"에이, 그냥 술이나 마시자."

도훈이 둘러보니 원래 이곳은 성수가 함께 있던 조였다. 성수를 뽑았던 정음도 여전히 같이 있었다. 그녀는 돌아온 도훈을 보더니 수줍어 하며 몰래 눈인사를 건넸다.

‘정음이가 아직까지 날 기다리고 있었나?’

조강지처를 팽개쳐두고 다른 여자들과 4연속 떡을 치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도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태영의 험담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학과 최고의 바람둥이. 체육과 카사노바. 보이는 여자는 다 눕히고 싶어하는 이 시대의 호색한.

‘흐음. 괜히 미안하네.’

[정음양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니까 괜찮을 겁니다.]

‘야. 나도 양심이 있어.’

[네, 대충 1g 정도 되보이더군요.]

‘장난해?’

도훈과 태영까지 둘러앉자 테이블이 비좁을 정도였다.

이곳에는 모두 여섯 명이 앉아 있었는데, 여자는 정음과 나연 둘 뿐이었다.

"여긴 무슨 남탕이에요?"

"뭐가?"

"아니 죄다 남자들뿐이라서."

"하하. 쪽수가 중요하냐. 우리과 신입생 중에 제일 예쁜 둘이 이곳에 있는데."

도훈이 정음과 나연을 번갈아 보았다.

정음은 단연 군계일학이었지만 나연은 살짝 급이 떨어졌다.

한때는 나연과 연두가 육정음 다음의 원투펀치로 이름을 날렸으나, 희주의 역변과 아웃싸이더 아영의 가세로 살짝 서열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나연이는 왜 근데 연두랑 따로 있지? 아까 그 일 이후로 다툰건가?’

영혼의 콤비라 둘리던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는 모습은 의외였다. 성수가 도훈과 태영에 잔을 돌리며 말했다.

"야야, 어차피 지금 남은 사람들은 이 밤을 찢어야 하니까 술이나 채워."

"형 많이 마셨어요?"

"뭘 많이 마셔. 이 정도는 끄떡없지."

성수가 배를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술에 취해 얼큰해진 그의 얼굴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처럼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하긴 성수도 주당이지.’

성수는 덩치만큼이나 술이 센 편이라 어지간해선 취하질 않았다. 여자 중에 유미가 있다면 남자중에선 성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형. 조금만 따라주세요. 저 술약하잖아요."

"아, 맞다. 태영이는 가득?"

"아, 아뇨."

한번 게워낸 태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일이냐? 너는 술 좀 마시잖아."

"아까 잠깐 토했어요."

"토해? 적당히 마셨어야지."

태영까지 술을 받자 성수가 태영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태영이가 건배 한 번 외치자."

"건배요?"

"어. 우리 돌아가면서 건배사 놀이하고 있었거든. 막내가 시원하게 한 발 뽑아봐."

"저 그럼···."

태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폭탄 선언을 했다.

"저 군대갑니다."

"어?"

"뭔 소리야 갑자기?"

"너 나랑 같이 들어가게?"

우선이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쌩뚱맞은 태영의 선언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태영은 결심을 마친 듯 작심하고 말했다.

"어차피 갈 거 일찍 갔다가 오려고요."

"오, 태영이!"

"잘 다녀와."

"편지 써줄게."

"다치지 말고."

태영이 큰 결심을 굳히고 말을 꺼냈지만, 아쉽다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 태영은 오히려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서 더욱 결심을 굳혔다.

‘그래. 내가 지금 딱 이 수준이야. 갑자기 훌쩍 떠난다고 해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는. 차라리 잘 됐어. 갔다와서 멋지게 대학 생활 시작 해야지.’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잔입니다. 모두 잔을 들어주세요."

"뭐야 이 새낀. 죽으러 가냐? 쓸데없이 비장해?"

"그래. 여기 성수형이랑 도훈이형도 벌써 다녀온 걸."

"야야, 얼른 잔이나 쳐."

태영이 머쓱하게 잔을 가운데로 들었다.

"그럼 모두···."

"태영의 무사 전역을 위하여!"

"위하여!"

갑자기 누군가 선창을 하는 바람에 부지불식 잔을 부딪힌 태영이 뻥지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 태영을 놀리듯 노래를 불렀다.

"집떠나와~ 열차 타고~"

"야야, 하지 말라고."

"태영이 운다."

"훈련소로~ 가던 날~"

"하지 말라니까."

"그래. 노래나 잘하면 몰라."

"도훈이형이 한 곡 뽑아줘요."

"맞다. 도훈이형 가수잖아?"

"오빠. 오랜만에 노래 듣고 싶어요."

"이도훈, 이도훈!"

갑자기 노래 자랑처럼 바뀐 분위기에 도훈도 머쓱했다.

‘거참. 태영이 민망하겠네.’

[어쩔 수 없죠. 자업자득이니. 차라리 지금 다녀오는 게 본인에게도 좋겠네요.]

‘그렇긴 해.’

"진짜로 불러요?"

"어, 한 곡 뽑아줘."

"태영이 가는 길, 위로해 줘야지."

"우선이도 있잖아."

"그럼 잠시만요."

도훈은 목청을 가다듬는 척 물을 마시며 간만에 오늘은 내가 가수다 목캔디를 삼켰다. 그가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시작하자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집 떠나와~"

가수의 목소리를 100% 모사할 수 있는 아이템의 위력에 그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술판을 순식간에 음소거 시켰다. 남학생들은 감탄을, 그리고 정음과 나연은 경이에 찬 표정으로 도훈의 노래를 감상했다.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노래가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군대에 끌려가는 태영이 눈시울을 붉혔다. 반주도 없는 도훈의 노래가 여름밤 수영캠프를 수놓았다.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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