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07화 (974/2,000)

< 990. 별이 쏟아 지는-50- >

태영은 군대라는 말을 제 입으로 꺼내자마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군대.

흔히들 청춘의 무덤이라 불리우는 곳.

20대의 파릇파릇한 신입생이 ‘아재’가 되어 돌아온다는 무시무시한 곳.

"하···. 씨발, 내가 군대라니···."

태영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언젠간 가야겠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군대를 피치 못해 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서글펐다. 심지어 2학년 과대인 우선이처럼 계획을 세워 가는 것도 아니고, 학과에서 받을 비난이 두려워 도피성으로 도망친다는 점이 가장 쓰라렸다.

‘지금 가면 동기들은 3학년 2학기 때 다시 만나는 건가···.’

군대가 현실로 다가오자 태영은 점점 진지한 생각에 빠졌다.

빠르게 칼 복학하면 요샌 1년 6개월이면 제대를 한다지만, 날짜를 조율하는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체로 앞뒤로 여유를 두어 2년 가량 휴학하는 게 국롤이었다.

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새내기로 함께 왔던 동기들은 2년 뒤 3학년이 되어있고, 자신은 여전히 1학년 2학기인 상태로 복학할 것이다. 떨어진 기간과 벌어진 학년만큼 멀어진 사이는 다신 회복하기 어려울 터.

즉, 지금 군대를 가게되면 건 현재까지 사귀었던 모든 인연들과 작별을 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친했던 동기도, 혹은 선배들도.

‘성수형은 그땐 졸업해서 선생님 하고 있겠구나···.’

하-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스무 살 사내에게 군대란 도저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장애물과 같았다. 면제라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쓸데없이 몸은 건강해서 현역 1급을 받은 자신의 몸뚱이가 저주스러웠다.

"···아니지. 군대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잖아? 그 잘난 도훈이 형도 군대 가서 환골탈태하고 왔는데!"

태영이 갑자기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평소 도훈과 친했던 그는 도훈에게서 군대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과씨씨를 하다 충격적으로 차이는 바람에 군대로 도망친 도훈은, 2년 뒤 복학했을 때 어마어마한 카사노바로 변신해 돌아왔다.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공부면 공부. 심지어 여자를 꼬시는 스킬까지.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남으로.

도훈이 늘상 하던 얘기가 있었다.

-···이거 다 군대에서 배웠어.

"그래! 그거야! 도훈이 형처럼 2년간 갈고 닦으면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도훈은 부대에 있는 노래방에서 매일 연습을 해 노래 실력을 늘렸고, 체력단련장에서 헬스를 하면 몸을 키웠다고 했다. 특히 우연히 픽업 아티스트인 선임을 만나 여자 꼬시는 기술까지 사사 받았다고.

"막말로 나라고 못할 것도 없잖아? 나도 거기서 완벽히 달라져서 올 수 있는 거잖아? 게다가 남보다 빠르게 군대 갔다 오면 2년 뒤에 신입생들하고 같이 대학도 다닐 수 있고 말이지."

태영은 복학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군대를 마치고 늠름히 복귀한 22살의 태영. 20살 새내기들은 미필인 동기보다 예비역인 자신을 더 좋아할 것이다. 중간에 군대 때문에 헤어질 일도 없고, 철부지 같은 또래에 비해 나이도 2살이나 더 많아서 듬직한 오빠인 자신을.

‘그래! 그때도 7선녀니 8선녀니 또 있을 거고···. 그럼 나도 도훈이 형처럼···.’

그 생각이 든 태영은 자신의 결심을 확고히 굳혔다.

"그래 가자, 군대. 나도 가서 멋진 사나이가 되어 오는 거야!"

태영이 저녁 바다를 바라보면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결심했다.

기왕 갈 거면 저 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헤치는 해병대를 자원해야겠다고.

***

"무슨 소리야 갑자기? 픽업, 뭐라고?"

"둘러댈 생각 마요. 저도 다 들은 게 있으니까."

아영의 말에 도훈은 단박에 태영을 떠올렸다.

‘아오! 이 입 싼 촉새같은 새끼! 내가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건만.’

[태영군이 설마 꼰지른 겁니까?]

‘픽업 아티스트라는 단어를 쓴 적이 걔한테 밖에 없는데 100%지. 진짜 이럴 수가 있냐? 태영이가 나한테?’

도훈은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껏 태영을 친한 후배라고 생각해서 늘 잘 챙겨왔다. 만날 때마다 밥도 사주고, 같이 조별 과제를 하면서도 성적을 잘 받도록 도와주었다.

그랬던 태영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는 생각에 분노가 솟구쳤다.

‘내 이새끼를 당장!’

[주인님. 자제하십시오.]

‘이건 아니지. 남자 사이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남자 사이라뇨?]

‘원래 사내의 아랫도리 일은 서로 묵인해 주는 게 예의란 말이야. 괜히 남의 연애사가 껴들지 않고, 자긴 여자만 건드리는 거 아니면 그냥 눈 감아 주는 거.’

[그런 룰도 있습니까?]

‘당연하지. 원래 남자는 태생적으로 바람기가 많고, 남의 허물을 들춰서 괜히 관계가 틀어지기 싫으니까 그냥 신경 쓰지 않는 거야.’

[그럼 태영군은 사내의 룰을 어겼군요.]

‘어긴 정도가 아니지. 이건 나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야.’

[흐음···. 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난적부터 상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한테 무엇을 들었건 일단 내 말도 들어봐야···."

"들을 필요도 없어요. 결정적 증거를 찾았으니까."

"증거라니?"

아영이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뭔데 그게?"

"봐요. 뭔지."

그녀가 손바닥을 펴자 그 위로 조그마한 여자 팬티 하나가 나왔다. 아까 해변에서 잃어버렸던 효민의 팬티였다.

‘씨발, 저게 저기서 왜 나와?’

[아영 양이 발견했나 본데요?]

"그, 그게 뭔데?"

"보고도 모른 척 할거에요? 효민이가 쓰러져 있던 비치 배드 주변에서 찾았어요."

"아니.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글쎄요. 오빠 등에 업혔던 효민이가 바람 불면 치마가 들려서 엉덩이가 훤히 다 보이던데, 이게 그럼 누구 팬틸까요?"

"······."

[주인님. 완전 좆 된 거 같은데요.]

‘···나도 알아 새꺄.’

도훈은 일이 어그러졌음을 느꼈다.

이는 단순히 아영의 공략을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껏 비밀로 숨겨왔던 바람둥이 행각이 아영으로 인해 학과 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인님. 얼른 기억을 소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붉은 실로 자를까?’

[글쎄요. 그건 주인님과의 호감도를 초기화하는 것이지, 이번 일을 삭제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저번처럼 꿈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가능하다면 그것은 시도해 볼만 합니다.]

도훈이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데 아영이 갑자기 도훈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학과에서 제일 인기 많은 훈남 오빠가, 여자애들 팬티나 벗기는 호색한 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

"솔직히 이번이 처음이 아니죠?"

"무슨···."

"후배들 자빠뜨린 거 말이에요. 아까 술 먹을 때 들어 보니 효민이랑은 오늘 거의 처음으로 얘기한 것 같더니, 어떻게 그 틈에 팬티까지 내릴 생각을 하셨을까? 정말 재주도 좋네."

아영이 도훈의 주위를 위성처럼 돌며, 그의 죄목을 하나둘 씩 까발릴 때마다 도훈은 치부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한 학기 내내 겨우 틀어막았던 비밀을, 여름 방학에 이르러 전혀 예상 못 했던 상대에게 들키게 될 줄이야.

"···그래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결국 도훈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더 둘러댈 핑계도 없었고, 말이 많아질수록 구차해질 뿐이었다.

다시 도훈의 정면에 선 아영이 손가락에 팬티를 걸더니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렸다.

"난 사실 오빠 처음 봤을 때 느낌 오긴 했어요."

"느낌이라니?"

"뭔가 야할 것 같은?"

‘얼래?’

[이 상황 전개는 뭐죠?]

‘글쎄, 일단 들어보자.’

"내가?"

"오빤 생긴 게 딱 봐도 야하잖아요. 몸도 근육질이고."

"······."

"그래서 혹시나 했죠. 여자들 좀 후리고 다녔겠거니."

"잠깐.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효민이랑은···."

"쉿-. 거기까지."

아영이 갑자기 한 발 짝 다가오더니 도훈의 입술을 손가락을 세워 눌렀다.

[뭐, 뭡니까?]

‘이건 나도 예상 못하겠는데?’

"나한테 들킨 걸 다행으로 알아요. 이 바람둥이 선배님."

"······."

"난 치사하게 이런걸로 소문내고 과에서 매장시키는 사람 아니니까."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도훈의 물음에 아영이 씽긋 웃었다.

"역시 공부 잘한다더니 머리 회전은 빠르시네."

"내 비밀을 숨겨주는 대가로 원하는 게 뭐냐고."

"···아직은 생각 못 했어요."

"뭐?"

"하지만, 이 비밀을 제가 간직하고 있으면 왠지 저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아뇨.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을. 오빠가 저한테 겁이나 먹겠어요?"

도훈은 살짝 놀라고 있었다.

아영이 저렇게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에도 놀랐고,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남자를 가지고 노는 듯한 말투 역시 적응이 되질 않았다.

‘대체 쟤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확실히 정상은 아닙니다. 혹시 문신하고 관계되어 있을까요?]

‘일단 속셈을 모르겠어. 마음의 소리라도 들어볼까?’

[좋은 생각입니다.]

도훈이 마음의 소리 스킬을 준비하려는데 갑자기 아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 여기까지 일단 녹음 끝."

"노, 녹음?"

"네. 오빠가 나중에 딴말 할지도 몰라서 몰래 녹음했어요. 괜찮죠?"

"아니, 그게 무슨!"

도훈이 당황하면서 폰을 빼앗으려 하자 아영이 소리쳤다.

"허튼 짓은 마요. 저장 파일은 자동으로 클라우드에 올라가게 설정해 놨으니까."

"······."

‘이, 이거 뭐냐?’

[완전 새로운 캐릭턴데요? 주인님을 가지고 놀고 있지 않습니까?]

도훈이 어처구니없어 하는데 아영이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효민의 팬티를 집어 던졌다. 얼굴로 날아온 팬티를 도훈이 낚아채는 모습에 아영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요. 아직 즐길 날 많으니까."

"야, 박아영! 대체 어쩌자는···."

"팬티나 다시 효민이한테 돌려줘요. 아, 젖었으니까 빨아서 주는 편이 좋겠네요. 오빠 탓도 있으니까. 호호."

아영은 자기 할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민박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훈은 당황하다 뒤늦게 스킬을 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마음의 소리!’

[이미 멀어져서 인파와 섞이고 있습니다.]

‘젠장!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건데?’

효민의 팬티를 손에 쥔 도훈은 도무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약점을 손에 쥔 아영의 태도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통은 혼자만 알고 덮어주거나, 주변에 소문을 내거나 둘 중 하나. 하지만 아영은 마치 협박을 위한 좋은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핸드폰으로 녹음까지 하면서 그를 압박해 왔다.

어이가 없어진 도훈은 아까 떨어뜨린 담배를 다시 주워들더니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건 뭐하자는 플레이일까?’

[저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보는 캐릭터 유형이라서요.]

‘지금 나 협박당한 거 맞지?’

[정확히 말하면 협박은 아닙니다. 댓가를 원하진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대화 내용까지 다 녹음해서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었잖아. 처음부터 의도한 거라고. 아니 팬티를 발견한 순간부터.’

[흐음. 그렇긴 합니다만···.]

‘아이씨. 그냥 확 좆막음이라도 해?’

[무슨 수로요? 강제로요? 정보창으로 확인한 아영양의 호감도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완전 시한폭탄 스위치를 들고 있는 셈인데.’

[방법을 찾아봐야죠. 우선은 걱정 마십시오. 아영양이 쉽게 비밀을 발설한 타입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소문 낼 목적이었다면 주인님께 모든 걸 밝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결정적 증거인 팬티도 주인님께서 다시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자기가 녹음 다 끝냈으니까 그렇겠지.’

[그나저나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자군요. 겉으론 조용해 보이더니···.]

‘원래 저런 애들이 더 무섭거든. 에이, 찝찝해서 이거 원.’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오늘 하루만 4명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날아가 버렸다. 갑자기 화가 치민 도훈은 태영을 떠올렸다.

"맞다, 이 촉새 같은 새끼 어딨지?"

도훈이 씩씩거리며 태영을 찾아 나섰다. 괜히 또 다른 여자애들에게 떠벌이기 전에 입을 막아야 했다.

"확 입에 오바로크를 쳐버릴까 보다."

[오바로크요?]

‘있어. 군대에서 계급장 달 때 쓰는 거.’

[아, 군대···.]

도훈이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가는데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술에 취한 태영이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오고 있었다.

[앗, 태영군입니다.]

‘너 이 새끼 잘만났다.’

"야! 정태영!"

도훈이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소리치자 화들짝 놀란 태영이 쪼르르 도훈에게 달려왔다.

"네, 형, 가, 가요!"

하지만 술에 취한 채로 빨리 뛰다보니 스텝이 꼬여 해변에서 크게 나뒹굴었다.

"어이쿠."

"쇼하고 있네. 얼른 안 뛰어와?"

크게 넘어진 태영은 팔다리가 다 까졌지만, 도훈에게 혼날 까봐 재빨리 일어나 뛰어왔다. 도훈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야, 너 아영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태영은 도훈을 보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형, 잘못했어요. 제가 술에 만취해서 그만···."

"하- 새끼. 진짜. 잘못했다고 빌면 끝이야? 너 이 새끼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

태영은 무릎을 꿇다 못 해 머리를 땅에 처박고 도훈에게 용서를 빌었다.

"죄송해요 형. 이 일은 제가 다 책임질게요."

"뭘 어떻게 책임진다는 건데?"

"군대 갈게요, 형. 오늘 결심했어요."

도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태영을 내려다 보았다.

본인이 군대를 가는 것과, 자신의 뒷담화를 깐 것이 어떻게 사죄가 될 수 있는지 연결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뭐래는 거야, 이 병신 새끼는.’

도훈이 한심하게 태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어나 인마."

"아니에요, 형. 그냥 속 시원하게 밟아주세요."

"얼른 일어나라고! 무슨 사내새끼가 쉽게 무릎을 꿇어? 얼른 안 일어나?"

< 990. 별이 쏟아 지는-5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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