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06화 (973/2,000)

< 989. 별이 쏟아 지는-49- >

"효민아 괜찮아?"

일부러 내던진 도훈이 놀란 척 효민의 안부를 물었다.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였다. 하지만 말타기를 하던 중 모래사장에 처박힌 효민은 하필 머리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잠시 기절한 상태였다.

정신을 잃은 그녀는 겁먹은 타조마냥 머리를 땅에 처박고 일어서질 못했다. 훌렁 뒤집힌 치마 안으로 그녀의 봊이가 아가미처럼 벌렁거렸다.

"헉! 씨발, 뭐야? 야, 이효민!"

도훈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줄 알고 급히 효민을 일으켜세웠다. 그녀의 얼굴에 묻은 모래가루를 털어내는데, 효민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야? 설마 죽은 거야?’

[그럴리가요.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낙사를 하겠습니까?]

‘그럼 왜 이러는데?’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호흡은 여전히 안정적입니다.]

로시의 말에 도훈이 콧잔등 밑에 손가락을 대며 숨을 확인했다. 효민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쌕쌕거리며 잘 호흡하고 있었다. 도훈은 그제야 안도했다.

"휴-. 죽은 줄 알았네-."

"오빠, 도훈 오빠? 거깄어요?"

그때 어둠속에서 청아한 음색이 들려왔다.

‘헉, 이 목소리는?’

[이크, 박아영 양입니다! 얼른 수습하십시요!]

‘젠장할, 하필 이 타이밍에!’

도훈은 급히 바지를 추스르며 효민의 빤쓰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다 던져버렸는지 어둠속에서 빤스를 찾긴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도훈은 우선 뒤집힌 치마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아영을 향해 소리쳤다.

"아영이니? 얼른 이리 좀 와봐!"

"도훈 오빠?"

[무슨 짓입니까? 숨어도 모자랄 판국에 아영양을 어째서 부르시는 겁니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잠자코 있어. 어차피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 결국 들킬 게 뻔하잖아.’

도훈이 기절한 효민의 머리를 다리에 받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아영이 나타났다. 아영은 쓰러진 효민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효민이는 왜 그래요?"

"몰라. 갑자기 쓰러졌어."

"쓰러졌다고요?"

"술을 많이 마셨나? 머리가 어지럽다고 잠깐만 여기 앉아서 쉬자고 하더니···."

도훈이 나무로 된 비치 배드를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짧은 섹스를 나눈 장소였다.

"계속 머리아프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애들 불러서 이만 돌아가자고 하는데 갑자기 픽 쓰러져버리더라고."

"정말요? 그럼 엠뷸런스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도훈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데 효민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그녀는 아영이 당도했을 때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그러나 비치 배드에서 내던져져 머리를 처박고 기절 한 게 너무나 쪽팔렸고, 아영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아 계속 기절한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영이 갑자기 구급차 얘기를 꺼내자 일이 커질 것 같아 정신을 차린 척 소리를 낸 것이었다.

"으으···."

"엇? 효민아, 정신이 좀 들어?"

효민은 이미 도훈의 변명을 다 들은 후였으므로 잽싸게 말을 맞추었다.

"아아, 제가 원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기절하는 주사가 있어가지고···."

"주사라고?"

아영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도훈이 맞장구를 쳤다.

"아아! 그래서 갑자기 픽 쓰러졌구나."

"네."

"병원은 안가봐도 되겠어?"

아영의 물음에 쓰러져있던 효민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괘, 괜찮아. 가끔 있던 일이라. 어디가 아파서 그런게 아니고 술기운이 갑자기 올라와서 그런 거야."

"그래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효민은 쓰러지면서 머리를 모래사장에 처박는 바람에 얼굴과 머리에 여전히 모래가 묻어 있었다.

"아, 아니야. 그냥 숙소 가서 쉬면 될 것 같아."

효민이 억지로 일어서려고 하자 아영이 급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무리하지 마. 부축해줄게. 갑자기 쓰러진 걸 보면 기립성 저혈압 증세일지도 몰라."

"아아···. 맞아 그건거 같기도."

아영이 효민을 부축하는 데 도훈이 고개를 돌려보니 같이 있던 태영이 보이지 않았다.

"어? 근데 왜 혼자 왔어? 태영이는."

"몰라요."

"몰라?"

"네."

"음···."

도훈은 아영의 냉랭한 반응에 둘 사이에 뭔가 사달이 났음을 눈치챘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대충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하여간 줘도 못 먹는 새끼같으니.’

[태영 군을 안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여자애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야밤에 싸돌아 다닌다고 별일 이나 있겠어? 혼자 놔두면 알아서 숙소 기어들어 오겠지.’

그때 아영의 부축을 받던 효민이 제대로 걷질 못하고 비틀거렸다.

"아앗."

"괜찮아?"

"다, 다리에 힘이 좀 풀린 것 같아. 못 걷겠어."

"못 걷겠다고?"

"네···. 죄송한데 선배가 좀 업어주시면 안될까요? 숙소까지만···."

효민의 부탁에 도훈도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딱봐도 연기 같은데 일단은 속아 넘어가 주지. 나 때문에 다친것도 있으니까.’

"그래. 아영아, 효민이 업을 수 있게 좀 도와줘."

"네."

도훈이 무릎을 꿇고 등을 내밀자 효민이 그의 등에 업혔다. 도훈은 단숨에 몸을 일으키더니 무릎 뒤를 받쳐들며 단단하게 고정했다.

"떨어지면 다치니까 꽉 잡아."

"네, 오빠.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그럴수도 있지. 넌 근데 술 적당히 마셔야겠다."

두 사람은 아영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계속 대화를 주고 받았다. 효민을 업고 가는 도훈을 보며 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영이 이 찌질이 새끼 같으니. 두 사람 사이에 별일도 없는데 괜히 사람 모함하기는.’

아영이 곧 뒤따르려 하는데 갑자기 모래 위에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응? 저게 뭐지?’

호기심이 든 아영이 그것을 손을 집어들고는 화들짝 놀랐다.

‘패, 팬티? 여자 팬티?’

처음엔 비키니 수영복의 일부가 아닌가 착각했던 아영은 재질을 보고 여성의 팬티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운데만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사실도.

‘···뭔데 이거?’

"아영아, 뭐해?"

앞서가던 도훈이 그녀를 부르자 아영이 황급히 팬티를 등뒤로 숨기며 대답했다.

"아, 네. 가요."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그녀가 불쑥 태영의 말이 떠올랐다.

-픽업 아티스트. 몰라? 길거리에서 여자들 헌팅하는 게 취미인 사람들. 도훈이형이 픽업 아티스트라니까?

‘설마··· 저 두 사람.’

한번 의심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다시 의혹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두 사람.

효민의 기절하는 술버릇. 말을 맞춘 것처럼 주고받은 대화들.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아영이 팬티를 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짜였단 말이야? 진짜로 도훈 오빠가?’

꽉 쥔 팬티에서 물기가 스며 나왔다. 아영은 그것은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것 봐라? 점점 재밌어 지는데?’

모든 진실을 깨달은 아영이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도훈을 뒤따랐다. 그 사이 효민은 도훈의 귓가에 대고 아영이 몰라 속삭이는 중이었다.

"오빠,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어떻게 된거야 아까?"

도훈 역시 아영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곤조곤 대답했다.

"정말로 기절했었어요. 떨어지면서 머리부터 박아가지고."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안에 싸면 안 될 것 같아서 급하게 빼느라···."

"괜찮아요. 이해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걸요."

[일부러 그러셨지 않습니까?]

‘어. 솔직히 내던질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러는 편이 더 초보 같아서. 근데 기절할 줄은 몰랐지.’

[방금은 좀 위험했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게. 이놈의 아이템 때문에 힘조절이 잘 안되네.’

사과를 받은 효민은 잠깐은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기분이 풀린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아영이 뒤따라 오는지 살피더니 다시 속삭였다.

"근데 오빠, 괜찮았어요?"

"뭐가?"

"첫 경험이요."

"아···. 모, 모르겠어. 너무 빨리 끝내지 않았니?"

"처음엔 다 그렇데요. 전 괜찮아요."

"미안. 내가 너무 경험이 없어가지고···."

"뭘 또 미안해요. 다음에 더 잘해주시면 되지."

"다, 다음에 또?"

도훈이 당황하자 효민이 도훈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이빨을 세우지 않고 입술로 가볍게.

"그럼, 한 번만 하고 끝내려고 했어요?"

"아, 아니 그래도···. 여긴 너무 위험하지 않아? 방금도 아영이한테 들킬뻔 했고."

"수영 캠프 말고요, 그 다음에요."

"아···."

"왜요? 오빠는 별로였어요?"

"아니, 나도 좋았지···. 근데 우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지금까진 그랬죠. 하지만 앞으로는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효민의 당찬 선언에 도훈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건 또 뭐야? 설마 때놓았던 혹이 또 달라붙은 거야?’

[그러지 마시고 이번 미션 끝나면 한 번에 일괄정리하시죠. 계속 안고 가봐야 주인님만 피곤할 텐데요. 대학교 한 과에서 하렘을 차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계획입니까?]

‘하긴. 그래야겠어.’

"어, 숙소다."

도훈은 일부러 뒤따라오는 아영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아영은 마치 두 사람이 귓속말을 하라고 배려하는 것처럼 한참을 떨어져서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내려주세요."

"그럴까?"

아무래도 도훈의 등에 업혀 가면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 부담스러웠다. 당분간 도훈과의 관계는 숨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같이 들어가면 뻘쭘하니까 저 먼저 들어가서 씻을게요. 아무래도 오늘은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네요."

"어, 그래. 난 그럼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갈게."

"아영이 넌 안 들어가?"

민박집 입구에서 효민이 물었다.

아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 태영이 좀 연락해보고. 계속 안 보이니까 걱정되네."

"아,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방에서 봐."

효민이 먼저 들어간 후 도훈이 담배를 꺼내려다가 아영의 눈치를 보고 물었다.

"냄새 날 텐데 저쪽 가서 피울게."

"전 상관없어요."

"아···. 그래? 그래도 여자 후배들 앞에선 잘 안 피우는데···."

도훈이 머쓱하게 담뱃불을 붙이는 데 아영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시겠죠. 여자애 후배들이랑은 담배가 아니라 바람을 피우실 테니."

"어, 어?"

놀란 도훈이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아영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시선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왜요? 픽업 아티스트씨. 정체를 들키니까 당황하셨나 보네요?"

***

벤치에 앉은 태영이 벌써 두 캔 째 맥주를 찌그러뜨렸다.

"씨발!"

그는 세상 고독은 혼자 다 짊어진 사람같았다.

"왜 나만 안되는 거냐고!!!"

전략을 수정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여자가 아닌, 비공식적 왕따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러나 여전히 실패였다.

친구가 전혀 없는 아영조차도, 혼자일지언저 그를 거부했다.

더구나 폭언까지 퍼부어가면서.

-찌질이 새끼.

"으아아아아아아아!!!"

태영이 미친놈처럼 해변을 뛰어갔다.

바다속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발목부터 첨벙첨벙 빠져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래 죽자, 씨발, 좆같은 세상 이렇게 살바에는 죽자!"

태영은 큰 소리를 외치며 파도를 거슬러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자 한기가 올라오며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아까 익사할 뻔한 기억까지 떠오르자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으으! 추, 추워!"

태영은 도망치듯 물밖으로 기어나왔다.

모래사장에 철퍼덕 대자로 누워 밤하늘을 보는데,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어딘가에서 누구는 예쁜 여자랑 섹스를 즐기고 있겠지만, 자신은 여전히 혼자였다.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서글펐다.

"···이제 도훈이 형 얼굴을 어떻게 보지?"

갑자기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어째서 그런 뒷담화를 깠을까?

아영이에게 잘보이려고?

도훈을 흉보면, 자신에게 넘어올 줄 알고?

하지만 늘 그렇듯 네거티브 전략은 자신의 인기를 높이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찌질이’라는 낙인과 함께 뒤통수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고 말았다.

아영이 소문을 안 내면 다행이지만, 혹여나 소문이 돌았다간 도훈이 몹시 난처해 질 게 뻔했다. 그리고 소문의 당사자인 자신까지도.

"으으···. 도훈이형 화내는 거 한번도 못 봤는데 화나면 진짜 무서울 거 같은데···."

태영은 문득 오후에 있던 씨름 대결을 떠올렸다.

어마어마한 덩치의 박성수와 겨루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던 엄청난 힘. 그리고 생각해 보니 새터 장기자랑에서 차력쇼를 할 때는 태권도 발차기도 정음에 꿀리지 않았다.

쉽게 말해 도훈이 열 받으면 자신 같은 건 한순간에 고깃덩어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태영은 입술이 덜덜 떨렸다.

바닷가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생기는 일시적인 오한 증상이었으나, 도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반응마저 겁을 먹어서 생기는 것 같았다.

‘으으, 진짜 존나게 처맞을 거 같은데. 아니 그것보다 아영이 태도를 봐선 어차피 여자애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도훈이 형을 변호할 게 뻔하단 말이야. 그럼 나만 학과에서 쓰레기 되는 거고.’

태영은 암울한 미래를 떠올렸다.

뒤에서 남 험담이나 하고 다니는 찌질이.

여자만 밝히고 실속도 못 챙기는 병신.

동방 딸잡이라고 소문이 날 적에도 굳건히 버텼던 멘탈이지만, 학과에서까지 소외당한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남은 학교 생활은 지옥일 게 뻔했다.

고작 1학기를 마친 대학 생활이 말이다.

모래사장에 누워있던 그는 선언하듯 소리쳤다.

"···군대 가야겠다."

< 989. 별이 쏟아 지는-49- > 끝.

ⓒ 성난불기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