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5. 별이 쏟아 지는-45- >
***
"오빠, 저 좀 잠깐 보실래요?"
또, 박서현이다.
한참 좋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그녀가 난입했다. 누구든 계집애가 씩씩거리며 남자에게 다가와 저런 투로 얘기를 한다면 오해하지 않을 수 없다.
효민과 아영이 무슨 일이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고주망태가 된 태영만이 눈치 없게 서현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우리 과수석, 서혀니! 오랜마···."
"넌 빠져."
서현은 태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싹뚝 잘랐다.
아무래도 태영은 동네북 취급인 것 같다. 나는 괜한 오해를 막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나 잠깐 서현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서현은 단 둘만 남게 되자 다짜고짜 쏘아 붙였다.
"오빠 지금 제 정신이에요?"
"목소리 안 낮춰?"
미친년은 초장에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서현이 더 미쳐 날뛰기 전에 기를 꺾어야 한다. 민박집 대문 앞에 서있던 나는 서현의 손목을 끌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혹시나 안에서 누가 나오다 볼까봐 두려웠다.
"뭐예요."
"얘기하자면서.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놔, 놔요."
"왜? 갑자기 무서워?"
"아프단 말이에요···."
그제야 너무 힘을 준 걸 깨닫고 서현의 손을 풀어주었다. 이건 스파르탄 벨트의 부작용이기도 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힘을 썼다가 평소보다 강한 악력이 가해진 듯 했다.
손목이 시큰 거리는 지 서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뭔데, 할 얘기라는 게?"
"오빠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또 뭐?"
"오늘 밤 오빠가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마치 나는 네가 지난 여름밤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저 지독한 스토커 기질이 그새 발병한 것일까?
‘로시, 나 미행 당했었냐?’
[그럴 리가요. 설마 제 감시망 밖에서 따라붙었다고 해도 어장관리 어플의 충돌 경보가 미리 울렸을 겁니다.]
‘혹시 서현이가 어장을 벗어났을 가능성은? 예전에 한 번 그런 적 있었잖아.’
예전이란 인스타 흑막 사건의 나예림 사례다. 어장에서 튕겨나간 경우 충돌경보가 뜨지 않는 다는 걸 그때 배웠다.
[글쎄요. 주인님께 호감도가 없는데 저렇게 씩씩 거릴 수 있을까요?]
하긴 질투의 근원은 결국에 독점욕이다.
독점욕이 발생하는 근저에는 결국 소유욕이 자리 잡고 있다.
서현을 나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니 어장에서 벗어 났을리 없다. 명쾌한 결론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여자 방에 누워있는 애들이요. 다 오빠 짓이죠?"
안경 너머의 서현의 눈매가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씨발, 무슨 코난이야? 어케 알았지?
확실히 서현은 머리가 비상하다. 뭔가 단서를 잡아 추리를 통해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 말인 즉슨, 직접 증거는 없다는 소리.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오리발이다.
"알아듣게 설명해봐. 이건 진짜 경우 없는 거 알지?"
"하-. 계속 발뺌 하시네요. 제가 설명해 볼까요?"
나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자세로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맨 처음 희주랑 사라지셨죠? 그리고 나서 희주는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더군요."
"그리고?"
"그 담엔 경희랑 또 사라지셨고, 경희는···."
"경희는 뭐?"
"중간에 길에서 만났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군요. 어기적 거리는 게 마치 강간이라도 당한 사람처럼요."
"그래서?"
"암튼, 마지막은 유미 언니였죠. 유미 언니마저 방으로 먼저 들어갔으니까."
"그게 뭐가 문젠데?"
"회장님이 알아주는 주당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아요. 새터부터, 개강총회, MT에 이르리까지 유미 언니가 술 먹다 먼저 자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럼 이유가 뭐겠어요?"
"그러니까 네 말은, 우연히 내가 그 세 사람과 비슷한 시간에 사라졌고 그 뒤에 여자들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잠든 걸 보니 나랑 뭔가 일이 있었을 거다?"
"제 말 맞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나는 버럭 성을 냈다.
예상대로 직접 증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우선 희주 일은 나도 몰라. 난 그때 밖에서 통화하고 있었으니까. 그 타이밍이 우연히 겹친 게 왜 내 잘못이야?"
"통화라고요? 누구랑요?"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쳇. 그럼 경희는요? 경희는 오빠랑 같이 나갔잖아요."
"경희랑 나가긴 했어. 하지만 곧바로 유미를 만났지. 그건 경희한테 물어보면 알거 아니야?"
"내가 곧바로 따라갔는데 계속 거짓말 할 거에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담배 피우러 나갔는데 경희가 할 얘기가 있다고 따라 왔더라고. 그래서 잠깐 얘기하고 있는데 유미가 배구 연습하자면서 나랑 같이 해변으로 갔단 말이야. 그 뒤에 경희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지."
"······."
나는 아주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한다. 특히 사실과 거짓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진실을 왜곡하는 데 타고난 사기꾼이다.
서현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는 순간 나는 계속 몰아붙였다.
"야밤에 배구 연습하다 온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의심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 그럼 유미 언니는 왜···."
"술 진탕 먹고 갑자기 운동하니까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었어. 컨디션이 안 좋아보여서 들어가 쉬라고 했었고."
"하지만 경희는···."
"경희는 바로 헤어졌다니까? 걔가 뭐랬길래 나를 추궁하는 건데?"
"그, 그냥 굴렀다고."
"굴러?"
"······."
"하-. 나 진짜 이게 뭐하자는 건지."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꼬나물었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서현의 면접에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서현이 너 진짜 왜 그래? 나를 뭘로 보는 건데? 왜 나를 발정난 개새끼 취급 하는 거냐고!"
[맞는말 아닙니까?]
‘처맞고 싶냐?’
[진짜 뻔뻔함이 도를 넘었군요.]
‘일단 저 스토커를 따돌려야 할 거 아니야.’
"아니, 저는 그냥···."
"난 솔직히 1학기 때 너랑 다 얘기된 줄 알았어. 근데 계속 이렇게 성가시게 굴면 진짜 힘들다."
"···오, 오빠."
"뭐가 불만인데? 말해봐.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 못 했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폭압적인 일부러 분위기를 연출했다. 으슥한 곳에서 덩치 큰 남자가 윽박지르니 서현으로서는 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 흑."
"뭘 잘했다고 울어? 의심받은 건 난데?"
"미, 미안해요. 저는 그냥···."
"넌 내가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닐 쓰레기로 보인다는 거잖아. 아니야?"
"아니에요. 전 그냥···."
"뭐? 나를 따로 불러서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저는···."
서현이 안경을 벗으며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았다.
여자애가 우니까 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나참. 울긴 또 왜 울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자 서현이 애처롭게 말했다.
"···나는 왜 안 되는 데요."
"뭐?"
"다른 애들은 다 되는데 왜 나만 안 되는 거냐고요!"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제가 그렇게 못 났어요? 막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세요?"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럼 왜 다른 애들은 다 만나고 다니면서, 저만 찬 밥 취급인 데요! 오빤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서현은 아예 악다구니를 썼다. 억하심정이 많은 듯 소리치는 내내 움켜쥔 주먹을 부들거릴 정도였다.
"저도 오빠 좋아한다고요! 맨날 오빠 생각만 한단 말이에요! 제가 오빠 비밀 알면서도 곤란하게 한 적 한 번도 없잖아요."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부담스럽다는 건데···.’
[서현양도 참···. 머리는 좋은데 왜 저렇게 인간관계에 서투를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저런 범생이들은 연애도 공부같은 건 줄 아는 게 문제야.’
[무슨 말씀이신지.]
‘공부란 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이룰 수 있잖아. 그게 성적이든 진학이든, 나중에는 취업이든. 땀흘린 성과가 보상받는 구조란 말씀이야.’
[그렇죠.]
‘하지만 사람 마음은 다르거든. 본인이 혼자 노력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상대를 배려하고, 맞춰주고,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자긴 노력했으니까.’
[어찌 보면 안타깝군요. 마치 태영군을 보는 듯합니다.]
‘맞아. 본질적으로 똑같아.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심지어 서현은 집착 기질까지 있어서 남자를 엄청 질리게 만드는 스타일이거든. 저런 여자는 아무리 예뻐도 열에 아홉은 학을 뗄 걸.’
[휴우. 역시 손절이 답인가요.]
‘외모가 못난 거면 희주처럼 고쳐주면 돼. 아니, 차라리 그 편이 낫지. 근데 이건 뭐···.’
[흐음.]
‘암튼, 미션이 걸려있으니 당장은 내칠 수도 없어. 아픈 손가락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안고 가는 수밖에.’
"휴-. 서현아. 내가 그렇게 좋아?"
"네."
"왜?"
"왜라뇨?"
"네 말 대로면 난 그냥 쓰레기잖아. 아무여자나 닥치는 대로 따먹는 난봉꾼이잖아. 그래도 좋다고?"
"상관없어요. 제가 고칠 수 있으니까."
[으헉!]
‘미치겠구만. 역시 서현이는 안되겠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자. 아무튼 오해는 풀렸지?"
"오해는 풀렸지만···."
서현이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겨우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한번만 저 안아주심 안 돼요?"
"···뭐?"
"부탁할게요. 오빠 섹스 좋아하잖아요. 저 오빠랑 하고 싶다고요."
[제 정신입니까 휴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군요.]
‘눈 딱 감고 해?’
[무리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아참, 그렇지.’
"안 돼."
"왜요?"
"애들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왔잖아. 눈치 보여서 어떻게 그래? 얼른 돌아가 봐야 돼."
"······."
"오해하진 말고. 너가 싫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다만 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한가지만 지켜줬으면 좋겠어."
"뭔데요? 오빠 말이라면 뭐든 다 따를게요."
"의심 하지마."
"네?"
"날 의심하지 말라고. 세상 어떤 남자라도 의심받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 순 없는 거야. 넌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라고 믿어."
"···네. 앞으론 안 그럴게요."
"그래. 일단 오늘은 날이 아니니 내일 기회를 찾아보자."
"내일이요?"
"그래. 내일."
"내일은 그럼 저 안아주시는 거죠?"
"그렇다니까."
"또 피하시면요?"
"그땐 니가 나 강제로 덮쳐도 좋아."
"분명 약속했어요?"
"알았어. 이제 들어가자."
나는 겨우 서현을 진정 시킨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돌아가자 애들이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뭐예요?"
"서현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여자애들은 다들 나와 서현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니 좀 오해가 있어서."
"무슨 오핸데요?"
"그게···."
괜히 얼버무리면 일이 커질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댔다.
"실은 나랑 서현이가 1학기 기말고사 때 내기를 하나 걸었거든."
"내기요?"
"어. 서현이가 공부에 자부심이 있잖아. 너네 동기들 중에 수석으로 입학하기도 했고."
"그쵸."
"공부는 제일 잘하긴 해요."
"그래서 같이 듣는 교양과목 수업 성적으로 내기를 했는데, 거기서 좀 오해가 있었어."
"진짜요?"
"오빠 공부도 잘하시는구나."
"몰랐어? 도훈이형 이번에 전장 받을 걸? 맞죠 형."
"헉, 전장이면···."
"과수석이에요?"
"야야, 일부러 말도 안했으니까 소문내지마. 암튼 그냥 내가 졌다고 하고 밥 사기로 했어. 후배한테 얻어먹기 좀 그래서. 근데 서현이가 알아버렸나 보더라고."
"형이 과수석인걸요?"
"대박."
"어. 그래서 아까 화나서 나한테 따지러 온 거야. 자길 기만한 줄 알더라고."
"그러셨구나."
"서현이도 공부 잘하는데 자존심 상했겠네요."
"그래도 후배한테 얻어먹을 순 없으니까."
"왜요? 후배가 선배 사줄 수도 있지."
"맞아요. 그러는 의미에서 야구장 티켓은 태영이가 쏜데요."
"태영이가?"
나는 놀라서 태영을 쳐다보았다.
"니가 왜?"
"형, 그냥 제가 결제 했어요. 캠프 끝나고 다음 주 경기니까 시간 비우셔야 해요?"
"아니 잠깐만, 말도 없이 갑자기 스케줄을 짜버리면···."
"형이 안오셔서요."
"주말에 시간 안되세요?"
"날짜 좀 봐봐."
태영이 예매한 싸이트를 켜 시간과 좌석을 보여줬다.
다음 토요일 잠실 경기, 좌석은 치어리더석 바로 앞자리였다.
"야, 이거 너무 비싼 자리 아냐?"
"에이, 형 야구는 그래도 앞에서 봐야죠. 안 그래 아영아?"
태영이 생색을 내며 아영에게 으스댔지만, 아영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이쓰한데요? 공교롭게도 치어리더 앞자리라니. 주인님에겐 잘 된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치어리더 업적 깨려고 가는 거니까. 태영이가 센스가 있네. 근데 저 자식은 나한테는 밥 한번을 안 사더니 아영이랑 같이 야구장 간다니 돈을 턱턱 쏘네? 하여간 양아치 새끼.’
나는 태영으로 속으로 씹으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그럼 그날 내가 맥주랑 치킨 살게. 태영이 혼자 다 쓰게 할 수 없으니까."
"앗, 오빠까지! 야호!"
"···고마워요. 선배."
"그나저나 야구장 가기로 약속했으니 우리 야구팸끼리 술이나 한 잔 할까?"
"다른 사람 끼워주기 없기에요?"
"당연하지."
"자, 잔 채우시고!"
술이 꿀꺽꿀꺽 들어갔다.
뭔가 공감대가 형성된 우리들은 점점 더 친해지고, 거리낌이 없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는 슬슬 고민에 빠졌다.
둘 중 누굴 자빠뜨려야 할까?
오늘 밤 마지막 타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 985. 별이 쏟아 지는-4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