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3. 별이 쏟아 지는-33- >
***
폐창고에서 희주와 떡방아를 돌린 도훈은 뒤처리를 마치고 몰래 빠져나왔다.
희주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심하게(?) 당한 터라 곧장 여학생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고, 도훈은 낮은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더니 다시 민박집 정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어? 형 어디갔다 오셨어요?"
도훈을 발견한 후배의 물음에 도훈이 씽긋 웃으며 담배를 꺼내 보였다.
"바람 좀 쐬러."
"아하."
다행히 그가 사라졌던 30분 동안 그의 행적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야외에 마련된 술자리였고, 동시에 수십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정신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이군. 이런 분위기라면 딱히 의심받을 일은 없겠어.’
[축하드립니다. 미션 하나를 완벽히 해치우셨군요.]
‘그래 봐야 겨우 1스텍 쌓은 거야. 나머지 아홉명을 어떻게 따먹을지 아직도 막막해.’
이번 미션은 희주의 경우처럼 1:1 몰래 따먹기를 10명 연속 성공시켜야 했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주인님 정력 말입니다. 방금전 희주양한테 너무 쏟아부으신 건 아닌지.]
‘음. 첫 코라서 살짝 힘 조절에 실패하긴 했지.’
한명씩 따로 불러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의 정력이 10연속 사정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도훈도 그 부분 만큼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튼 한 명하고 10번도 아니고, 10명하고 한 번씩이니까.’
[그게 다른가요?]
‘다르지. 아무리 속궁합이 좋은 여자라도 한 명이랑 계속 하면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거든. 3,4번이야 그렇다 치고 10번의 의무방어전이면야.’
[호오.]
‘근데 일단은 여자가 바뀌는 거잖아. 그럼 또 없던 기운도 생겨난단 말이지. 예컨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같은 것만 계속 먹으면 빨리 질리는 것하고 비슷해.’
[쉽게 말해 뷔페인 셈이군요.]
‘딱 좋은 비유야.’
도훈이 자연스럽게 자리로 합류하는데 부회장 성수가 빈 소주병을 숟가락으로 땡땡땡 두들겼다.
"자, 일동 주목."
고기와 술을 먹고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성수를 주목했다.
"다들 배는 채웠지?"
"네!"
"맛있게 먹었습니다!"
"부회장님 최고예요!"
처음엔 숙소 컨디션에 불만을 품던 학생들이었지만, 근사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에 마음이 한껏 누그러들었다. 비싸고 편한 숙소보다, 배 터지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한 청춘들이 많았다.
"이제 슬슬 2차로 넘어가 볼까 한다."
"2차요?"
"우리 노래방 가요?"
"아니. 2차 장소는 물론 여기다."
"아···."
"에이, 괜히 기대했네."
장소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이 가득해지자, 성수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단 2차부턴 맥주가 무제한 제공된다."
"오!"
"맥주, 맥주!"
"또 안주도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안주도 무한 리필!"
"체육과 최고다!"
성수의 손짓에 우선을 비롯한 2학년 집행부가 얼음물에 담궈 았던 맥주 궤짝을 들어 날랐다. 뒤에는 마른안주를 비롯 수박 화채 같은 다채로운 안주가 이어졌다. 도훈이 어머어마한 술과 안주의 양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게 수영캠프야, 음주캠프야? 방금 고기 먹었는데 이걸 또 먹는다고?’
[실질적으로 저녁 술자리가 오늘과 내일밖에 없어서가 아닐까요? 2박 3일 일정 중에서 오늘이 제일 만만한 날이니까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도훈은 펼쳐지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을지도. 술이 진탕 들어가면 누구 하나 사라져도 신경 못쓸 테니까. 차라리 술판을 벌이는 게 미션 클리어엔 더 도움이 되겠어.’
술과 안주가 배달되자 성수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참, 오후에 노예팅 하기로 한 거 기억나지?"
"네!"
"맨날 자기 분과끼리만 뭉치니까 이번엔 색다르게 여자가 남자를 고르는 방식으로 팀을 짜겠다."
"팀이요?"
"노예팅이 아니고요?"
성수가 학생들에게 노예팅(?)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했다.
진짜 노예팅을 기대하던 몇몇 여학생들은 김빠진 표정이었나, 어쨌든 원하는 사람을 골라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자, 처음으로 뽑을 여학생은···. 씨름 우승한 육정음. 어딨지?"
"여기요."
정음이 수줍게 손을 들고 일어섰다.
"자, 여기서 같이 술 먹고 싶은 남자 아무나 고르면 돼."
"아무나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편 뽑기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초딩 때 많이 해봤을 거 아니야."
"아하."
정음이 처음이다 보니 모든 학생들의 그녀의 선택을 주시했다. 남학생들은 제발 자신을 뽑아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눈을 반짝거렸고, 여학생들은 정음이 도훈을 먼저 뽑아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체육교육과 최고의 킹카는 도훈이었고, 정음 역시 딱히 도훈과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1픽으로 선발할 것은 자명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미리 도훈과 말을 맞춘 정음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분명 아무나 뽑아도 된다고 하셨죠?"
"당연하지. 씨름 1등 메리트니까."
"여기 있는 남자 아무나요?"
"그렇다니까?"
"그럼 전 부회장님요!"
성수가 당황하여 눈을 껌뻑였다.
"나, 나? 지금 나 뽑은 거야?"
"네. 선배님도 체육교육과 남자잖아요."
"아, 아니 그렇긴 한데···."
"오, 부럽다!"
"부회장님 계 탔네!"
"정음이가 남자보는 안목이 있구나."
"잘했어 정음아!"
남자들은 대체로 부러움을, 여학생들은 도훈을 거르고 성수를 뽑은 정음의 안목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역시 사람 취향은 모를 일이라면서 안도할 뿐이었다.
정음을 시작으로 여학생들의 서열에 따라 픽이 정해졌다. 모든 선택이 끝나고 나니 도훈은 경희와 효민, 그리고 태영과 우선 조에 포함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여학생의 숫자가 적었기에 대부분의 팀이 여자 둘에 남자 셋의 비율로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도훈이 핼쑥해진 태영을 향해 물었다.
"너 언제 돌아왔냐? 몸은 괜찮고?"
"···아까 식사 중에요. 짠물을 너무 먹었는지 입맛이 하나도 없어요."
태영은 물에 빠진 후유증 탓에 정상 컨디션처럼 보이질 않았다. 평소에는 늘 활기차 보였는데, 지금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쯧쯧. 그러게 되지도 않는 수영 실력으로 무슨 민주를 구하겠다고···.’
[주인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을 겁니다.]
‘물에 빠진걸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고. 밉상이긴 한데, 그렇다고 아주 나쁜 놈은 아니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태영은 안쓰러운 후배였다.
욕망은 큰데 능력이 부족했다.
늘 노력하고 애쓰지만 호구처럼 이용만 당하거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어 차이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게 한 두 번이면 상대랑 궁합이 안 맞아서라고 여길수도 있지만, 계속 반복되면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 객관화가 전혀 안되는 게 문제였다.
"힘들면 방에 들어가 쉬어. 괜히 무리 말고."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태영이 고집을 부렸다.
여기서 쓰러지면 썸씽이고 뭐고 하나도 건질 수 없다. 기껏 마음먹고 방학중에 캠프를 왔는데 허무하게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같은 조가 된 동기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경희는 육감적인 몸매가 매력적이었고, 효민은 체육과 답지않게 어딘가 소녀소녀한 매력이 있었다.
둘 다 평소에 친하지 않던 사이라 그런지, 태영은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다리를 놓고 싶었다. 물론 베스트는 민주와 함께 하는 것이었지만, 조교인 민주는 어차피 팀 편성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일단 꿩 대신 닭이라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우선이 빈 잔에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자, 어쨌든 오늘 같은 조가 되었으니 재밌게 놀아보게요."
우선은 형인 도훈에게 먼저 술을 따르더니, 이어서 여자 후배들에게 술을 건넸다.
"술은 좀 하지?"
"저는 조금만 주세요."
효민이 수줍게 술을 받았다. 아무리 봐도 외형이 체육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조그마한 몸집에 다소 마른 몸이 운동을 전혀 안해 본 일반인 같았다.
우선이 궁금해 물었다.
"효민이는 따로 뭐 운동하는 거 있어?"
"저요?"
"응. 경희는 테니스선수잖아."
"아···. 저는 탁구 쳤어요."
"아!"
우선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운동 중에는 경희나 정음처럼 운동한 티가 많이 나는 종목도 있는 반면, 탁구처럼 말하지 않으면 운동을 배웠는지도 모르는 종목들도 더러 있었다.
"아쉽네. 우리과에 탁구 분과는 따로 없을텐데. 실력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괜찮아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고 지금은 안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경희는 술···."
"선배. 저는 그냥 소주로 주세요."
경희가 맥주를 사양하고 소주를 요구했다.
"왜?"
"전 중간에 술 섞어먹는 거 싫어하거든요."
경희는 전형적인 소주파 였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때부터 마셔온 소주로 통일하길 원했다. 우선이 머쓱해하며 소주잔과 병을 가져오자 경희가 상관없다는 듯 글라스를 내밀었다.
"그냥 여기 주셔도 돼요."
"소주를 여기 따르라고?"
"네, 조그만 잔은 자주 따르기 귀찮잖아요."
경희의 쿨한 대답에 도훈도 살짝 놀랐다.
‘의외로 술이 센 편인가?’
[체격을 봐선 유미양 다음으로 말술이 아닐까요?]
‘흐음. 술을 잘 먹게 생기긴 했는데.’
경희는 딱 봐도 건강 미인이었다. 어지간한 남자는 옆에 있으면 주눅이 들 정도로 건강미가 넘쳤다. 성격도 화통했고, 특히 경기를 할 때 특유의 기합 소리는 코트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화끈했다.
태영이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술을 사양하자, 잔을 모두 채운 우선이 건배를 제의했다.
"어쨌든 이렇게 한팀이 되었으니까, 잔치기 한 번 갈까요?"
"좋아요."
"그래."
"태영이는 물이라도."
짠!
잔이 부딪히며 술잔이 출렁였다. 서로 눈치를 살피듯 효민과 경희는 일부러 도훈에게 잔을 부딪혔다. 미묘한 차이지만, 누구와 잔을 부딪히냐 하나까지도 의식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정음이가 도훈 오빠를 포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한 조가 되다니···. 이건 정말 하늘의 계시야.’
정음이 도훈을 포기하는 순간 2순위였던 경희가 냉큼 도훈을 뽑았다. 그와는 과거에 한두차례 썸씽이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오늘 밤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반면 효민 역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 오빠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같은 조가 되다니···.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잘생기긴 했구나.’
효민이 도훈을 애틋한 감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이 도훈과 새터에서 쓰리썸을 벌였다는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였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몰라도 도훈을 바라보는 데 어딘가 기분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해. 분명 말도 몇 번 안해 본 사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아. 어렸을 때 혹시 같은 교회를 다녔나?’
"저, 도훈 오빠."
"응?"
"오빠 혹시 종교 있으세요?"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굔데."
"아···."
"그건 왜?"
"아니 같은 교회를 다녔나 싶어서요."
"효민이 너 교회다녀?"
"네."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로시. 인연의 붉은 실 끊으면 기억이 확실히 소거되는 거 맞지?’
[네. 망각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점점 옅어지다 결국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요. 지금쯤이면 효민양에게 주인님은 완전히 낯선 사람일 겁니다.]
‘근데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보지?’
도훈은 효민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왠지 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과거 새터에서 좆막음을 했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졌다.
"근데 교회는 왜?"
"아, 아니. 어디선가 뵌 거 같아서요."
"교회에서?"
우선이 웃으며 말헀다.
"도훈이 형이 살짝 교회오빠 스타일이긴 하지?"
"교회 오빠요? 풉!"
잠자코 듣고 있던 경희가 느닷없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아, 죄송해요. 갑자기 사례들려서."
경희가 얼렁뚱땅 둘러댔다. 하지만 속으로는 교회오빠같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는 것이었다.
‘오빠가 겉만 얌전하지 얼마나 짐승 같은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훈과 관계를 한 것은, 테니스장 창고에서였다. 당시 미션을 수행 중이던 도훈은 강간 플레이를 하듯 경희를 능욕한 바가 있었다.
"형이 좀 자상하잖아. 젠틀하기도 하고. 딱 교회오빠 스타일 아님?"
"얀마. 취했냐?"
도훈도 어이가 없어 우선을 째려보았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자신의 띄우는게 오히려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그치지 않았다.
"물론 부드럽기만 한 건 아니지. 아까 씨름 할 때 봤지? 눈빛 싹 바뀌는 거? 형이 또 은근 상남자거든. 할 땐 하는 스타일이랄까?"
우선은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거듭했다.
실은 그는 도훈을 어떻게든 여자와 이어줄 생각 뿐이었다.
‘형이 가야, 나도 간다.’
그에게 있어 도훈은 자기보다 순번이 빠른 대기표를 든 사람이었다. 어찌됐건 도훈을 엮어 놔야, 자신에게도 차례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엔 점잖던 우선이 필사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 맞다. 선배 곧 군대가신다면서요?"
경희가 우선의 아픈 곳을 찔렀다.
< 973. 별이 쏟아 지는-3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