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9. 별이 쏟아 지는-29- >
***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서 그런지 다들 허기져 있었다.
돌아서면 배고플 20대 초반. 그런 짐승 같은 남녀가 마흔 명 가깝게 저녁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세팅 끝. 다들 식사하러 오십셔!"
한참 저녁 식사 준비에 분주하던 우선이 마침내 개시를 알렸다. 마당에 설치된 간이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먹을 수 있도록 삼겹살 세팅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비록 테이블은 낡아 빠지고 의자도 어디 편의점 앞에서 훔쳐온 것 같은 플라스틱 재질의 그것이었으나, 20대 초반의 남녀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땅바닥에서 구워먹으라고 했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스버너 위로 커다란 불판이 달궈졌다. 목살, 항정살, 삼겹살, 오겹살등 다양한 종류의 고기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상추에 깻잎, 고추와 마늘, 파절이에 쌈무까지 다양한 채소들도 정성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아, 이걸 우선이 네가 다 준비했다고?"
그렇게 무려 7테이블이었다.
방에서 쉬고 있던 성수가 부러질듯한 한상차림에 입을 쩍 벌렸다. 우선이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에이, 어제 같이 장 보셨으면서."
"아니, 그래도···. 대단한데?"
"저 혼자 한 게 아닐고 2학년 집행부 애들이랑 같이 했어요."
"짜식, 정말 수고 많았다. 얼른 교수님 모셔와야겠네."
"창희가 방금 모시러 갔어요. 어, 저기 오시네요."
마침 체육과 학과장은 조교 강민주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방에서 혼자 자다 나왔는지 주변머리가 위로 뻗쳐 일본산 오락 게임 캐릭터인 헤이하치를 닮아 있었다. 다들 속으로 킥킥거렸으나, 교수의 체면을 생각해 입을 꾹 다물었다.
교수는 자신의 두발 상태도 모른 채 가운데 테이블에 떡 하고 자릴 잡더니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다들 오늘 해양 실습한다고 고생 많았네."
그때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조교 강민주가 교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교수님, 수영 캠프입니다."
"아, 그렇지. 아무튼 배 많이 고플테니 눈치 보지 말고 어서들 들자고."
교수는 여태껏 방구석에 누워 한 것도 없으면서 자기가 생색을 냈다. 이를 지켜보던 도훈이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어이가 없네. 민주는 학생들하고 같이 어울리기라도 했지, 명색이 학과 공식 행사차 책임교수로 따라온 사람이···.’
도훈은 지도교수라는 사람이 꼴보기 싫어 등을 돌렸지만, 성수는 소주잔과 병을 들고 교수쪽으로 향했다.
"교수님, 한 잔 받으셔야죠."
"어, 그래. 회장 자네가 수고 많았어."
"부회장님입니다, 교수님. 회장은 유미고요."
"아, 그래?"
도훈은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슨 학과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자기와 회장 부회장도 구분 못 해? 뭐하는 새끼야?’
듣고 싶지 않아도 계속 귀로 들리는데 잔을 받은 교수가 고기를 올리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자자, 다들 잔 채우라고."
"네?"
"오랜만에 이렇게 야외에서 고기도 꿔먹는데, 거국적으로 한 잔 해야지 않겠어?"
한참 배고픈 아이들이 잠시 젓가락을 놓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교수의 말이니 일단 듣긴 하지만, 대부분 불만을 숨기고 있었다.
‘완전 꼰대 새끼네. 설마 건배사도 하는 건 아니겠지?’
잔이 채워지자 교수가 잔을 높이 쳐들더니 입을 열었다.
"나때는 말이야···."
‘오 마이갓.’
도훈은 거기서 이성이 끊어졌다.
설마설마하니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고 라떼 드립을 시작할 줄이야. 도훈도 물론 실제 나이론 불혹이 넘긴 했지만, 젊은 몸으로 살다보니 꼰대끼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와, 고기 한 점 들기도 전에 일장연설 실화냐?’
"···어? 막 바다에 뛰어들어서 물고기도 잡고···."
한번 입이 트인 헤이하치의 말은 그칠 줄 몰랐다.
보다 못한 민주가 적당한 시점에 교수에게 살짝 조언했다.
"교수님, 애들 많이 배고플 것 같은데···."
하지만 눈치 없는 교수는 민주의 조언마저 무시했다.
"···우리 체육교육과가 장차···."
‘에이 씨. 진짜, 저 꼰대새끼를 그냥.’
[주인님. 어쩌시려고요?]
‘그냥 여기서 사라져 주는 게 좋겠는데.’
[일반인에게 폭력을 쓰는 건 금지입니다.]
‘아니, 그냥 좀 재우려고.’
도훈이 결심을 마칠 때쯤 꼰대 교수의 긴 건배사가 끝이났다.
"우리 체교과를 위하여!"
"위하여!"
마침내 술이 한 잔 돌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쯤 시작된 식사는 땅거미가 지고 조명이 커지도록 계속되었다.
도훈도 간만에 고기를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 앞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우선이 보였다.
"고생했다, 우선아."
"아니에요, 형. 다 같이 준비했는데요."
"네가 군대만 일찍 안 가면 같이 집행부도 하고 좋을 텐데 말이야."
우선이 군대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선은 이미 자원입대로 날을 받아놓은 상황.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그는 휴학계를 내고 해병대로 갈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저도 늦게 가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임용 준비하려면 군대는 끝내고 오라고 해서."
"그렇긴 해."
"그래도 도훈이 형이 잘 하실 거에요. 형이 내년도 회장 하시는 거죠?"
우선의 물음에 도훈이 대답을 망설였다.
여전히 회장을 맡는 것에 대한 부담이 남아있었다. 사실 도훈의 입장에서는 두 번째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 어떻게든 위업과 미션을 해결하며, 빠른 시일 내에 랭커에 진입하는 것.
이 목표와 관련해 차기 회장직 수락은 상당히 신중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태영이 같은 놈이나 일찍 갈 것이지, 묵묵하게 자기일 성실한 우선이가 하필 가버리네.’
[우선군이 계속 학교를 다닌다면 내년도 회장도 물려받을 수 있을텐데요.]
‘그렇지. 성수같은 카리스마는 없어도, 우선이도 나름 후배들 군기반장 할 짬밥은 되거든. 일단은 우직하게 맡은 일을 잘 해내는 편이고.’
[고민되시겠군요. 성수군의 부탁이기도 하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이라서요.]
‘그러게. 아니면 유미의 전례를 따르는 방법도 있긴 해.’
[유미양요?]
‘회장이 실무에서 빠지고 얼굴마담을 하는 거지.’
[아하. 지금 부회장을 맡은 성수군이 실질적인 회장을 하는 것처럼요?]
‘그렇지. 대외적인 행사 정도만 얼굴 비치고, 실무는 믿을 만한 부회장이 다 진행하는 거야. 그럼 나름 명분도 살리고, 실속을 챙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럴만한 인물이 보이던가요?]
도훈은 함께 전공수업을 들은 2학년 동기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우선이 빼고는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았다. 학과를 위한 헌신도, 궂은일도 마다할 희생정신을 가진 인물도 찾기 어려웠다.
‘캬. 나도 참 인복이 없구나. 유미는 성수 만나서 팔자 좋게 회장 하는···.’
"어? 회장님!"
그때 입구 쪽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기를 싸 먹던 도훈이 고개를 돌리니 늘씬한 키의 건강 미인이 포니테일 머리를 한 채 입장하고 있었다. 막 전지훈련에 복귀한 것처럼 삼선 저지를 입고, 등에는 배구공5개가 들어가는 길다란 가방을 걸친 그녀는 바로.
"마, 마유미가 왜 벌써?"
"어? 유미누나 왔어요?"
우선도 고개를 쏙 내밀며 유미를 확인했다.
기세좋게 등장한 유미는 후배들의 환영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나이쓰 타이밍이네. 용케 저녁시간은 늦지 않았으니."
"오! 마유미!"
성수가 반가운 표정으로 마중나갔다.
학과에서 가장 잘나가는 간판 스타인 마유미의 등장을,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지만 도훈만은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실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이나 올 수 있다며?"
"감독님이 기왕 가는 거 푹 쉬었다고 오라시면서 일찍 보내줬어요."
성수와 인사를 나누던 유미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도훈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원체 덩치가 좋아 단박에 발각되고 말았다.
"앗, 도훈 오빠. 잘 계셨어요?"
"어, 어···."
도훈이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유미는 오자마자 도훈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일 저랑 비치발리볼 나가신다면서요? 저녁에 연습좀 하려고 배구공좀 챙겨왔어요."
"아, 저녁에?"
"네. 내일 오전부터 대회니까 ‘호흡’ 맞춰봐야죠. 오랜만에."
유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훈은 유미의 이른 난입으로 스케줄이 엉키는 기분이었다.
‘와, 씹. 무슨 이런 일이.’
[호사다마라고. 세상일이 호락호락 하진 않죠.]
‘아, 유미는 진짜 아닌데.’
하지만 도훈과 달리 유미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인사였다.
혼자서 진탕 술 처먹고 있던 교수 역시 유미를 반겼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과 보물 아니야?"
거나하게 취한 헤이하치교수가 코끝이 빨개진 채 말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유미는 표정이 밝고 쾌활한 편이었다. 특히 키도 180에 이를만큼 여자치곤 큰 키에, 얼굴도 예뻐서 다들 모델같다고 부러워했다. 다만 도훈은 그것이 유미의 진면목을 모르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저 사디스트가 대체 무슨 꿍꿍이를 계획중인 거지?’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피부도 더 좋아진 거 같고."
"하하, 저흰 실내에서만 연습하니까요."
유미는 만취에 가까운 교수와도 죽이 맞아 잘 어울렸다. 유미의 강점은 누구에도 싫은 티를 안내고 친화력이 좋다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많은 후배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선배였다. 특히 사범대인 체육교육과에선 몇 안 되는 학교 대표 선수로 소속된 선수로서, 여자 대학 배구 리그에서도 유명세를 달리고 있다는 점도 한 몫했다.
한마디로 대학생 사이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먼 길 왔는데, 내가 술 한 잔 따름세."
"아이고, 감사합니다."
유미는 꼰대 교수가 뭐라든 넉살도 좋게 받아주었다.
‘저 가증스러운 얼굴의 본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주인님은 유난히 유미양을 싫어하시는군요.]
‘너도 섹스할 때마다 엉덩이 처맞다 보면 이해하게 될 거야. 느낌 아니까.’
[아, 예···.]
꼰대 교수는 유미의 등장에 유독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조교 강민주가 형식적으로 대답만 할뿐 전혀 자신에게 복종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흥, 조교가 학과장에게 이딴 식이면 곤란하지. 대학원 진학하고 나면 쓴 맛좀 보여줘야 겠어.’
따라서 교수는 유미가 온 이후로 그녀와 술을 대작하며 흥을 내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덕에 교수의 눈치를 덜 보게된 민주가 간신히 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바로 우선과 도훈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어머, 2학년 과대, 우선이 맞지?"
"앗, 선생님."
우선은 오늘 민주의 진면목을 보았기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원래부터 예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몸매까지 환상적일줄은 예상도 못했던 것.
민주가 얼굴이 빨개진 우선을 보고 말했다.
"술 많이 마셨나 보구나?"
"아, 아닙니다."
우선이 갑자기 남은 잔술을 한 번에 들이키더니 손바닥으로 잔을 쓱 훔치며 민주에게 내밀었다.
"조교선생님, 제가 술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나야 영광이지."
도훈이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찼다.
‘우선이는 다 좋은데 저렇게 티가 나서 문제야. 전형적으로 연애를 못하는 타입이랄까?’
[왜요? 솔직하고 좋기만 한데.]
‘민주가 우선이 보러 왔겠냐? 당연히 나 보러 왔지.’
[하긴 그건 그렇지만요.]
우선이 민주에게 소주를 붓자 민주가 재빨리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난 요만큼만."
"아, 넵."
"상차림 네가 했다며? 아까 성수가 그러던데?"
"아닙니다. 2학년 동기들하고 같이 준비했어요."
"겸손하기까지! 정말 듬직하구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교 선생님!"
우선은 민주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며 좋아했다. 딱 봐도 성숙하고 예쁜 조교의 미모에 정신을 못 차리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몰랐다.
민주가 우선을 칭찬하는 와중에, 몰래 도훈 옆에 붙어 테이블 밑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도훈은 잠시 민주의 손을 놓으며 말을 꺼냈다.
"조교 선생님, 우선이도 한 잔 따라주세요. 오늘 씨름대회도 진행하고 식사 준비도 하느라 고생했는데."
"당연하지. 도훈이 너도 줄까?"
"아뇨. 전 술이 약해서."
"아···. 그렇지? 새터 때 기억난다."
"아니 그땐 사발주 때문에···."
도훈이 난처해하자 민주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괜찮아. 주량껏 마시면 돼. 우선아, 자."
민주가 자신이 받았던 잔을 닦지도 않고 다시 돌렸다.
우선은 민주의 립스틱 자국이 살짝 남은 잔을 보더니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오! 조교 선생님과 가, 간접키스! 이 잔은 내 가보로 간직해야지.’
민주가 우선에게 술을 따르는데 도훈이 자신을 창피줬다는 괘씸한 생각에 테이블 밑에서 민주의 허벅지를 콱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놀란 민주가 술 병을 기울이다 잔이 넘치게 쏟고 말았다.
"어이코!"
우선의 손이 술로 소독될 만큼 쏟아지자, 민망한 민주가 혀를 내밀며 말했다.
"아차, 사랑이 너무 넘쳐버렸네?"
실수를 위트로 넘기는 모습에 감동한 우선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조교 선생님의 사랑, 남김없이 마시겠습니다!"
꿀꺽꿀꺽!
우선이 원샷을 때리는 와중에도 도훈은 허벅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민주의 사타구니를 쓱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는 노팬티 상태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어쭈? 이것봐라?’
도훈이 눈치를 주자 민주가 씩 웃었다.
‘오후에 하던 거 마저 해야죠, 주인님.’
< 969. 별이 쏟아 지는-2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