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81화 (948/2,000)

< 964. 별이 쏟아 지는-24- >

***

"···저 오빠랑 손만 잡아도 젖어버리는 데 정상인가요?"

헉!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대충 무슨 상황인지 느낌이 온다.

남자들은 스무살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흔히 발기가 안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 관계를 했건 안 했건, 앞으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 자극받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꼴린 채 종일 데이트를 하고나면 고환에 몰린 피가 돌지 않아 후에 고통에 허덕인다.

지금 정음이 보이는 반응은 남자들이 보이는 발기 반응과 유사했다. 흔히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나오는 조건반사처럼, 나와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해버리니 나로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발랑까진 여학생이 저런 말을 했다면 노골적인 유혹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 테지만, 백치미 넘치는 정음의 질문이다 보니 오히려 순진무구하게 느껴졌다.

내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민망했는지 정음이 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생각이 불순한 가 봐요···."

"아니야."

"네?"

"아니야.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정상이요?"

나는 정음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차분하게 설명했다.

"혹시 내 손만 잡아도 막 심장 떨리고 그러니?"

"···네."

"내가 이렇게 허리를 감싸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혹은 이렇게 손끝으로 옆구리를 간지럽히면?"

간질간질.

"하, 하핰 하지마요!"

정음이 간지러움을 못 참고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그녀를 간지럼 태웠다.

"으하하핰 오, 오빠 그, 그만!"

"예민하구나."

"예? 누구나 그렇지 않아요?"

"누구나 그렇긴 하지만, 너처럼 격렬하진 않아."

"그래요?"

"보통 간지러움을 잘 타는 사람들이 성적으로 예민하다고 하더라고."

"아···."

"그만큼 외부 자극에 민감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전 그럼···."

"그렇지. 남보다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거야. 그래서 반응도 빨리오는 거고."

"몰랐어요."

이번엔 허리를 감싸 쥔 손가락을 슬쩍 올려 그녀의 가슴을 쿡 찔렀다.

"헉!"

정음이 화들짝 놀라더니 미어켓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누가 본다고. 다들 자기 할 일 하느라 신경도 안 쓰는데."

내 말대로 바닷가에 놀러 온 피서객들은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차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 그래도···. 부끄러워요."

"미안. 실험 한 번 해본 거야."

"실험요?"

"어때. 가슴 자극하니까 꼭지가 곤두서지 않았어?"

"···예?"

정음이 눈을 크게 뜨더니 스스로 가슴을 한 번 움켜쥐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포즈였다.

"모, 모르겠는데요."

"옷 위이니까 당연히 모르지. 손을 넣어서 만져봐야지."

"소, 손을···."

"내가 커버해 줄테니까 살짝 만져봐."

나는 일부러 정음의 앞을 가리며 그녀가 안 보이게 만들었다. 정음은 그사이 지퍼를 쓱 내리더니 하얀 스포츠 브라 위를 슬쩍 만져보고는 깜짝 놀라 손을 다시 뺐다.

"서, 섰어요!"

"그치?"

"네···. 어떻게 이런···."

"말했잖아. 넌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다고."

"제가 너무 야한 걸까요?"

"아니야. 그냥 남들보다 반응이 빠른 것 뿐이야."

"그래서···. 오빠 곁에만 있어도 이렇게 변하는 걸까요?"

"아마도."

"······."

얼굴이 빨개진 정음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한 거 없어. 그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래도 너무 민망해요. 오빠가 밝히는 여잔 안 좋아하실 거 같아서."

"누가 그래?"

"···?"

"물론 대놓고 그런 여잔 별로지. 난 솔직히 네가 비키니 안 입어서 더 좋았어."

"정말요?"

"응. 몸매도 전혀 안 꿀리는데 일부러 안 입은 거잖아. 맞지?"

"네. 오빠가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정음 양은 정말 현모양처의 교과서 같은 사람이군요. 레쉬가드로 몸매를 감춘 게 주인님을 의식해서 였다니···.]

‘나도 방금 알았어. 이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음, 싫어하는 건 아닌데, 정음이 네가 날 생각해서 그랬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네."

"오빠가 좋아하니까 다행이에요."

"아무튼 난 다 괜찮아. 정음이 너라면. 좀 더 야해도."

"아···."

정음이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어쩜 나는 이런 순수한 성격 때문에 정음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민주처럼 피학적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미처럼 가학적 성벽도 없다. 희주처럼 싼 티 나지 않고, 서현이처럼 집착하지도 않는다. 연두나 나연처럼 까불거리며 촐싹대는 타입도 아니다.

정음은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좋아한다.

그 순수한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이런 정음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나는 정음을 향해 나직히 물었다.

"혹시···. 지금도 젖어있니?"

정음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다. 계속 줄줄 흘러서."

"오, 옷 갈아입을 게요. 속옷도요."

"아니지. 물이 흘러나오는데 닦는다고 해결이 되나? 하루 종일 그럴텐데."

"그, 그럼요?"

"원인을 차단시켜야지."

"어떻게요?"

"구멍을 막아버리는 거지."

"헉!"

이번엔 정말로 당황했는지 정음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오, 오빠···. 근데 이번엔 정말 위험할 거 같아요."

"왜? 나랑 별로 하기 싫어?"

"아, 아니요. 저야 늘 원하지만··· 앗, 그 말이 아니고 오빠가 원하면 언제든 괜찮은데 숙소가 너무 위험해서."

정음이 말하는 요지는 숙소의 방이 단 두 개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방, 여자방.

금남 금녀의 구역이다 보니 만날 장소도 마뜩치않았다.

더구나 새터에서처럼 몰래 하다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둘 다 무슨 창피를 당할지 몰랐다.

"굳이 숙소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요?"

"음···. 해변도 괜찮고."

"헉! 지금요?"

"아니 아니. 내 말은 저녁 늦게 말이야."

"아···."

"새벽에 내가 연락하면 몰래 나올 수 있지?"

"네."

정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물에 빠져보라면 빠지는 시늉이라도 할 착한 아이다.

"그래. 그럼 내가 새벽에 톡 할 테니까 조용히 빠져나와. 밤에는 어두워서 누가 있는지도 모를 거야."

"네, 오빠."

"응? 지금 못 해줘서 아쉽다는 표정인데?"

"아, 아니에요. 참을 수 있어요."

정음이 부끄러웠는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아, 맞다. 오빠 저 나중에 오빠 지명해도 돼요?"

"응?"

"아까 씨름 우승하면서 딴 거요."

"아, 그렇지. 부회장님 말로는 진짜 노예팅이 아니라 술 먹을 조 짜는 게임이라던데?"

"그래요?"

나는 성수에게 들은 룰을 대강 설명했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왜? 나 노예로 뽑아서 이상한 거 시키려고 했어?"

"아, 아니요!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럼?"

"그냥 저는 다른 여자애들이 오빠 먼저 뽑을 까봐서···."

"다른 여자애들이 나 뽑으면 싫을 거 같아?"

"···네. 오빠 좋아하는 애들 많거든요."

"누구?"

설마 눈치 없던 정음이 뭔가를 알아챈 걸까?

정음은 한동안 우물쭈물 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효민이도 그렇고···."

"효민이?"

"네."

효민이라면 새터 때 정음과 함께 쓰리썸을 했던 사이다. 처음엔 그 일 때문에 껄끄러웠으나 인연의 붉은실 가위로 연을 쳐낸 이후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정음의 입장에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아, 내 실수다.’

[뭐가요?]

‘나야 효민은 안중에도 없었는데, 정음의 입장에선 내가 한 번 먹은 애잖아.’

[그렇죠?]

‘그러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마음을 쓰고 있었나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으니 효민이 나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정음양 역시 쓰리썸 사건의 당사자인데 인연의 붉은 실 가위로 정리하지 못했으니까요.]

‘진작 얘기해 줄 걸 그랬네.’

"아, 몰랐구나."

"네?"

"효민이랑은 확실하게 정리했어."

"정말요?"

"응. 학기 초에 진작. 자기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는지 없던 일로 치기로 하겠데. 잠결에 비몽사몽이라 사실 잘 기억도 안난다고. 효민이가 그때 술을 좀 많이 먹었던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암튼, 그렇게 끝났어. 효민이도 그 얘기 두 번 다시 안하지 않았어?"

"둘이 따로 그 얘기를 한 적은 없었어요."

"아마 그럴 거야. 효민이는 그냥 그날의 기억을 삭제해 버린 거 같아."

"아···."

"정음이 네가 이렇게 신경쓰는 줄 알았음, 진작 말해줄 걸 그랬다."

"아,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빠."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정음이 네가 노예팅에서 날 먼저 찍으면 안될거 같아."

"왜요?"

"같은 조에서 놀다가 둘이 동시에 사라지면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누굴 찍죠? 전 오빠밖에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난 누구한테 찍혀도 상관없어. 신경도 안쓸테니까."

"네."

"성수형 어때?"

"부회장님이요?"

"응. 성수형이면 여자친구도 있겠다, 괜한 오해 살 필요도 없고. 어차피 노예팅 게임 자체가 그냥 같이 술마실 사람을 고르는 거라서."

"네, 오빠가 시키는 데로 할게요."

"그래."

정음과 한창 해변을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학이 시작된 이후론 처음 보는 거라 같이 웃고 떠드는 것만으로 너무나 반가운 대화였다.

물론 언제까지 계속되는 행복은 없다.

어디를 갔다왔는지 떠벌이 태영이 자식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크, 정음아 잠시 손 놓아야 겠다. 태영이 온다."

"아···, 네."

정음이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손을 놓고 개인 간격을 최대한 벌렸다. 그때 우리 앞으로 도착한 태영이 두 손을 무릎에 짚으며 숨을 헉헉 거렸다.

"혀, 형! 여기 계셨구나!"

"뭘 그렇게 뛰어다니냐?"

"아, 아니 누굴 좀 찾느라고요."

"누구?"

"형 혹시 조교 선생님 못 보셨어요? 어? 정음이도 같이 있었네?"

"잠시 산책하다 만났어. 근데 조교선생님은 왜?"

다행히 태영은 뭔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나와 정음의 사이는 전혀 의심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 아니 아까 같이 계시다가 잠시 화장실 간다고 사라지셨거든요. 근데 안 돌아오셔서···."

으잉?

그게 저렇게 미친 듯이 해변을 뛰어다니며 찾을 일이라고?

"그냥 화장실에 오래 계신 게 아닐까?"

"아니에요! 여기 화장실이 몇 개 없거든요. 제가 다 찾아 다녔는데."

미친.

여자화장실을 왜 찾아다녀?

태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무슨 일 난 거 아니겠죠?"

"화장실 다녀온다고 갔는데 무슨 일이나?"

"그래도···. 조교 선생님은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괴한이 납치라도···."

"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밤늦은 시간도 아니고 백주 대낮에 화장실 가서 늦게 돌아온다고 실종된 미아를 찾는 것처럼 온 해변가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니.

[태영군이 왜 저러죠?]

‘또 시작 한 거 아냐?’

[뭘요?]

‘아니. 태영이 잘하는 거 있잖아, 뇌내 망상. 쟤는 여자랑 손 만잡으면 다음날 쯤 결혼해서 애를 몇이나 낳을지 자녀 계획 세울 놈이거든.’

[헐. 근데 왠지 틀린 말은 아닌 것도 같고.]

‘쯧쯧. 여자를 제대로 못 만났더니 점점 얘가 이상해지는 군.’

"전화는 해 봤어?"

"네. 안 받으세요."

"바닷가 나온다고 혹시 숙소에 두고 나온거 아닐까?"

"아···. 그럴지도."

"아니면 피곤해서 숙소에 가셨을지도 모르지. 숙소는 가봤어?"

"아, 아니요. 전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하고···."

"음, 태영아. 내 생각엔 일단 숙소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은 그냥 신경쓰지 않고 가만 있는 거고."

"형은 걱정도 안 되세요?"

태영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이새끼가 뭘 잘 못 먹었나. 어이가 없어서 한 번 째려보니까 그제야 버릇없이 대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태영이 눈을 깔았다.

"아,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사람이 사라졌는데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셔서···."

"인마. 조교 선생님이 초등학생이냐? 애야? 잠깐 안 보인다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

"그래 태영아. 너무 걱정 하지마. 잠깐 어디 가셨을 수도 있으니까."

"그, 그런가."

"암튼 정 불안하면 숙소라도 찾아봐."

"네, 형."

태영은 다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아무리 봐도 녀석은 정상은 아닌 거 같다. 정음도 똑같이 느꼈는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태영이가 좀 정신없어 보이네요."

"언제 철들려는지 모르겠다."

"예?"

"군대나 좀 일찍 갔다오는 게 좋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저희 남자 동기들 두 명 2학기 때 입대한다더라고요."

"그래? 태영이는?"

"태영이는 별 말 없었는데···."

"젤 빨리 가야 할 놈이 안가네."

"예?"

"아니야. 아무것도. 암튼 한 바퀴 다 돈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질까?"

정음이 아쉬운 듯했지만, 나를 배려하며 밝게 웃었다.

"네, 선배."

"이따 새벽에 폰 꼭 쥐고 있어. 상황 봐서 연락할 테니까."

"네. 기다릴게요."

나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정음을 향해 한마디 했다.

"아, 맞다. 정음아."

"네?"

"나도 너랑 마찬가지야."

"네?"

"나도 너랑 같이 있으면 꼴린다고."

"아!"

"실은 아까부터 계속 꼴려있었어."

"부,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 말한 정음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귀여운 녀석."

그녀의 뒷모습만 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 964. 별이 쏟아 지는-24-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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