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1. 별이 쏟아 지는-21- >
여학생들 일부가 난색을 보였다.
게임 규칙상 남자 셋이 밑을 바치고, 여학생은 가운데 지탱하는 사람 목에 목마를 올라타야 한다. 그것도 비키니를 입은 상태로. 너무도 노골적인 스킨쉽이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부회장님 이거 좀 게임이···."
"전 못하겠어요."
"그냥 남녀 따로 하면 안 돼요?"
게임방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해지자 성수가 딱 잘라 말했다.
"오케이.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과에 강제는 없다. 기수는 무조건 자원자만 받도록."
"지원자만요?"
"그리고 대장조 모자만 뺏으면 끝나는 게임이니까 팀별로 딱 한 팀만 나와도 경기는 무조건 진행할 거고."
성수의 논리는 이랬다.
기마전 구성의 최소 인원은 남자 셋에 여자 하나.
이번 캠프에 참여한 남녀의 숫자가 각각 27대 13명이므로 대략 2:1의 비율이다. 즉, 만들 수 있는 말의 최대치는 결국 팀당 4팀뿐이라는 소리고, 여학생들 역시 팀당 4명만 자원하면 끝이다.
현재 승완 팀과 도훈 팀의 여학생 숫자는 각각 7명과 6명.
반으로 나뉜 여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빠질지 고민했다.
"잠깐만요, 저희끼리 얘기 좀 할게요."
"저희 팀도요."
여학생들은 각각 따로 모여 누가 기수로 나갈지 의견을 나누었다. 승완 팀에는 여학생 씨름대회 우승자인 정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음인 꼭 나가는 걸로 하자."
"맞아. 정음이가 나가면 이길 수 있어. 이기면 설거지 면제라잖아."
"잠깐만, 애들아 정음이 의견도 먼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니? 정음이 너 나갈 거야?"
친구의 신중한 의견에 정음은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왕 나가는 거면 이겨야지!"
"역시 정음이야."
"씩씩해서 좋다."
"난 근데 좀···. 게임 방식이 좀 그렇지 않니? 목마가 뭐야, 목마가. 다 큰 성인들끼리."
"맞아. 나도 솔직히 부담 돼. 그냥도 하기 껄끄러운데 수영복까지 입고."
슬슬 뒤로 빼는 애들이 생기자 정음팀에 소속된 희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니? 그냥 게임이잖아. 새터가서 말뚝박기까지 해놓고선 이제와서···."
"아니 그, 그건···."
"그냥 하기 싫은 사람 하지마. 부회장님도 방금 그랬잖아. 기수는 강제로 오르는 거 없다고. 난 정음이랑 같이 할게."
희주의 거침없는 의견에 불만을 표시하던 여학생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본래 희주는 학과 내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막 나가는 이미지였기 때문에 감히 그녀에게 토를 달기란 쉽지 않았다. 소위 여자들 사이에선 센 언니 스타일이었다.
희주가 정음에게 힘을 실어주자 잠자코 있던 효민도 동조했다.
"나도 자원할게. 상대팀보다 적으면 곤란하니까."
효민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정음이 살짝 긴장했다.
‘되게 적극적이네. 도훈 오빠 앞이라 그런가?’
정음은 효민과 썸씽이 있었다. 지난 새터 당시 단체 혼숙 상황에서 도훈과의 섹스를 효민에게 들켜 버린 것.
결국 좆막음(?)을 위해 도훈은 효민까지 끌여 들였고, 그 덕에 정음은 처녀막 개통하자마자 쓰리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력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
효민은 도훈에게 가위질을 당하며 이전의 기억이 희미해진 반면, 정음은 여전히 효민과의 추억이 강렬히 남아있었다. 부끄러워 말은 하지 못했지만, 공식적으로 도훈과 몸을 섞었던 사이라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질투가 나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직 오빠한테 미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기억이 소거된 효민은 정음과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지냈다. 다만 정음만 혼자 속앓이를 앓는 셈이었다.
아무튼 효민까지 나서자 이제 정음 팀에는 딱 한자리만 남았다. 다들 눈치를 보는데, 묵묵히 있던 경희가 입을 열었다.
"···까짓거 내가 하지 뭐. 난 좀 무거운데 남자들 목 안 빠지려나 모르겠지만."
"역시 강경희! 그리고 경희 네가 뭐가 무겁니? 그 정도면 충분히 늘씬하지."
"야. 양희주. 너한테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더 창피하거든?"
희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신내바였으므로 다들 수영복을 입은 채 그녀 옆에 서길 꺼릴 정도였다. 정음은 기수가 부족할까 걱정하다 경희가 자원한다는 소리에 몹시 기뻐했다.
"경희야. 너무 고마워."
"뭐가?"
"게임을 위해 자원해서 줘서."
경희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정음의 모습에, 괜히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씨름 결승에서 진 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정음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도 건네지 않은 것이다.
지난번 MT에서도 지고, 학교 실기에서 지고, 심지어 이번엔 여름 캠프에서도 졌다. 이제껏 늘 1등만 하던 그녀에게 육정음이란 존재는 넘기 힘든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결국엔 그것과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만 모아서 의과대학에 진학해보면, 그 안에서 또 1등 하는 사람과 생전 처음으로 전교 꼴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드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
거기서 느껴지는 격차는 정말이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
만년 2등, 소위 콩라인.
정음 앞에서 경희는 늘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 비참한 사실은 그런 자신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는 정음의 천진난만한 태도였다. 아마 어쩌면 정음은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꺾어왔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라이벌로서 인정받지도 못한 2등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참, 너 정말 힘세더라. 완전 철벽 같았어."
경희가 자조적인 생각에 빠져있는데 정음이 뜬금없이 씨름 결승 얘기를 꺼냈다. 경희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래 봐야, 결국 졌잖아."
경희는 "또."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포기했다.
그 말을 꺼내면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아니야. 그땐 내가 운이 좋았던 거 같아. 이번 게임은 같은 팀이니까 열심히 해서 꼭 이겨보자. 알았지?"
정음의 격려에 속상했던 경희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왜 자신이 만년 2등이고 정음이 1등인지 알 수 있었다.
‘정음이는 정말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마음이 넓구나. 이렇게 착한 애를 시기했다니···. 내가 많이 부족했어. 더 노력해야지.’
팀이 의기투합하는 모습에 희주가 말했다.
"좋아! 이번 게임은 무조건 우리가 이길 거 같아. 정음이도 경희도 우리 팀이니까. 아자아자!"
"화이팅!"
***
"화이팅!"
"얼씨구, 저기는 분위기 화기애애하구만. 우리는 화기애매한데."
상대 팀에서 회의를 하던 연두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이쪽 팀에선 여자 기수 4명이 확보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연두가 먼저 자원하자 그녀와 사이가 틀어진 나연이 출전을 거부하면서 1명이 모자라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연두가 자기보고 들으라는 듯 말하자 나연도 지지 않고 맞섰다.
"뭐가? 부회장님이 그랬잖아. 이번 게임은 원하는 사람만 참여해도 된다고.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시키는 게 어딨어?"
"내가 언제 너보고 그랬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잖아, 지금?"
나연과 연두가 투닥거리자 참다 못한 서현이 쏘아 붙였다.
"그만들 좀 해 두사람 다. 그냥 우리팀은 3명으로 출전하면 되지, 왜 싸우고들 그래."
"상대 팀엔 정음이도 있고, 경희까지 있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숫자까지 딸리면? 너희들 진짜로 안 할 거야?"
"······."
여전히 다들 침묵했다. 분위기도 안 좋은데 괜히 말을 꺼냈다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운 것이었다.
현재 참가의사를 밝힌 사람은 연두와 서현, 그리고 간만에 과행사에 의욕을 보이는 아영 뿐이었다. 연두의 생각으론 나연만 참가해주면 끝인데, 씨름에서 진 것이 분했는지 끝끝내 불참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때 이제껏 한마디도 않고 있던 아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이건 팀 편성부터 문제가 있어."
"그치? 저쪽엔 운동 잘하는 애들 다 모아놓고 우리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저쪽은 7명 중에서 4명이 나오는 거잖아. 우리는 6명 중에서 나가야 하는 거고. 애초부터 불리한 구성이랄까?"
핵심을 찌르는 지적에 연두가 흥분해 소리쳤다.
"맞네! 그러니까 우리가 팀 짜기가 힘들지. 안 되겠다. 부회장님한테 가서 따져야겠어. 우리가 숫자가 적으니까 적은 쪽에 맞춰 달라고."
연두가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성수에게 다가갔다.
"부회장님!"
"어, 왜?"
"저희 지원자가 3명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말했지만, 기수는 강요없어. 하기 싫다면 하고 싶은 사람만 나와도 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우리팀이 처음부터 여자가 한 명 적잖아요."
연두가 팀원 수를 근거로 따지자 성수도 난처해졌다.
‘아, 이건 생각 못 했네. 딱히 틀린 소리도 아니고.’
성수가 난감해하는데 갑자기 뒤에 누군가 다가왔다.
"무슨 문제 있니? 성수군."
"앗, 조교 선생님!"
숙소에서 짐을 푼 조교 강민주가 학생들을 보러 해변으로 나온 것이었다. 성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민주가 의견을 제시했다.
"연두 학생 말도 틀린 게 아냐. 당연히 불합리하다고 느낄수도 있지."
"저희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랜덤으로 반으로 갈랐거든요."
"그래. 성수군이 잘못했다는 소린 아니고. 애초에 숫자가 홀수니까 딱 떨어질 수가 없잖아."
"그쵸?"
"그러니까 최대 3명 출전으로 바꿔주세요."
연두가 계속 징징거렸다.
"아니, 그래도 기마전에 꼴랑 3팀이면···."
성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 하는데 민주가 의견을 제시했다.
"아니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
"네?"
"다른 방법이 있으세요?"
"연두 쪽 팀이 여자 숫자가 적어서 발생한 일이잖아. 그럼 한 명만 더 충원하면 되는 거 아닐까?"
성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혹시 유미 숙소 도착했어요? 내일이나 온다던데?"
"아니면 남학생들 기수로?"
민주가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를 이쪽 팀에 넣어주면 되지."
"서, 선생님을요?"
"헐! 대박!"
"왜? 새내기들이랑 같이 게임 하면 너무 주책없을까?"
"아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조교 선생님이 같이 해주시면 쌩큐죠! 안 그래도 상대팀에 강한애들 죄다 모였는데."
"근데 조교 선생님 복장이···."
성수는 민주의 복장부터 걱정했다.
수중 기마전이다 보니 다들 수영복 차림이 필수.
하지만 민주는 해변에 어울리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발목만 물에 적시고 바람 쐬러 나온 복장이었다.
"복장은 걱정 안 해도 돼. 혹시나 바닷가 뛰어들고 싶을지 몰라서 안에 수영복 받쳐 입고 왔거든, 호호."
"와, 조교샘 진짜 센스 짱이시다!"
여학생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성수는 구세주 민주의 등장으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그는 급히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자자! 모두 귀만 주목."
"주목!"
성수는 연두 팀의 여학생 수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교 강민주가 추가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공지했다. 다들 처음에는 뜨악하는 느낌였지만, 잠시 소요가 끝나자 금세 환영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특히 민주의 미모를 흠모하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쌍수를 들었다.
"우아! 조교선생님까지!"
"근데 조교샘 운동 잘하지 않아?"
"나도 들었는데, 학부생 때 에이스였데.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과탑 수준이라고."
"오오, 우리팀 전력보강 제대론데!"
3명씩 남자 조를 편성하고 있던 도훈도 민주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다.
‘아니. 여기서 민주가 뜬금없이 왜 튀어나와?’
[숙소에 혼자 있기 심심했나 보죠. 그리고 민주양도 사실 조교라곤 하지만 겨우 20대 중반인걸요. 학생들 사이에 섞어 놓으면 잘 구분도 안될 겁니다.]
‘아니 그 소리가 아니라···.’
도훈은 왠지 민주에게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수 참가 의사를 밝힌 민주는 경기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여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연두랑 서현이, 그리고 아영이까지 모두 4명 참가하는 거야? 아영이는 오랜만이다?"
"네, 맞아요."
"들어보니까 대장 말에 오르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구나. 대장말이 모자를 뺏기면 게임이 끝나니까."
"상대팀에선 아마 정음이가 나올 거에요."
"육정음?"
"네, 사실 걔가 너무 잘해서 큰일이에요."
"음, 알지. 실기 만점으로 합격한 여학생이 10년만이라고 했거든. 좋아. 그럼 내가 대장말에 오를게."
"조교선생님께서요?"
"괜찮으시겠어요?"
민주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나이 많다고 구박하는 거 아니지?"
"설마요!"
"그래도 조교선생님 덕분에 저희팀이 4명 출전할 수 있게 된걸요?"
연두가 나연을 쏘아보며 속을 긁었다. 나연은 이미 토라져서 연두랑은 말도 안하고 있었다.
"자, 그럼 상대팀도 슬슬 준비하는 거 같으니 우리도 시작해볼까?"
"네!"
"······."
"화이팅!"
간신희 의기투합을 이루어낸 연두 팀이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아니 이제 민주가 대장말에 오르니 민주팀이라고 해야 옳았다.
"자, 다들 수영 가능한 복장으로 준비하세요."
성수의 말에 남자들은 상의 탈의를, 여학생들도 완벽한 비키니 차림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강민주였다.
"우, 우아! 조교 선생님 좀 봐."
"여, 여기서 옷을 왜 벗지?"
"바보야. 안에 수영복을 받쳐 입었나 보지."
민주는 원피스의 등 지퍼를 살짝 내리더니 그대로 밑으로 끌어내렸다. 아무리 수영복을 안에 입었다곤 하지만 해변 한가운데서 옷을 벗는 모습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 961. 별이 쏟아 지는-2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