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8. 별이 쏟아 지는-18 >
***
아웃사이더.
흔히 아싸라 불리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발적 아싸, 그리고 왕따.
다행히 아영은 전형적인 전자로 보였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2가지다.
첫째, 얼굴이 지나치게 예쁘다.
여자는 아무리 무능력해도 얼굴만 예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의사, 약사 직업을 가진 못난이보다 백수더라도 고저스한 20대 미녀가 훨씬 인기 많은 이유다.
둘째, 표정이 너무 시크하다.
어찌 보면 이건 중이병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검은 동자가 큰 커다란 눈 속에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허무함이 담겨있었다. 왠지 혼자 있을 때 니체의 철학책을 탐독할 것 같은 분위기랄까?
간만에 행사에 참여해 놀란 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쟤?"
"우리과에 저런 애가 있었다고? 제법인데?"
"쟤 몰라? 새터 때 잠깐 얼굴 비쳤잖아. 이름이 아영이라던가?"
"어찌됐던, 디게 이쁘네."
사내놈들은 대부분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특유의 도도한 분위기와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더 이목을 끄는 것 같았다.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군.’
[누구요? 아영 양이요?]
‘어. 가만 있어도 궁금증을 유발한달까? 물론 저것도 얼굴이 예쁘니까 가능한 거지만.’
[만약 안 예뻤다면요?]
‘그럼 뭐, 천하의 썅년이지. 지 까짓게 어디서 시크한 척.’
[크크크. 주인님 지나치게 외모지상주의자신 거 아시죠?]
‘알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인걸. 물론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 얼굴은 예쁜데 인성이 못된 애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다른 편견도 있을 수 있지.’
[어떤 편견이요?]
‘예쁘면 왠지 싸가지 없을 거라는 생각. 혹은 부자는 다 나쁠 거라는 생각같은.’
[그것도 일종의 선입견인가요?]
‘그렇지. 원래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야. 진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겉으로만 봐선 모르거든.’
[듣기 좋은 말씀이십니다만, 주인님은 외모로 일단 거르잖습니까?]
‘당연하지. 굳이 예쁘고 착한 여자도 많은데 일부러 못 생기고 착한 애를 찾을까? 요컨대 외모란 지역 예선 같은 거지. 본선에 오르지 못하면 인성이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자빠뜨릴 것도 아닌데.’
[허!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더니···. 쯧쯧.]
‘아니지. 올챙이 적을 또렷이 기억하니까 이런 현실적인 개구리로 진화한 거라고. 세상 어느 누가 나처럼 소추 한남이었다, 대물 훈남으로 거듭나 봤겠어? 난 전생에 밑바닥까지 맞본 사람이야. 그러니 누구보다 더 솔직할 수 있는 거야. 까놓고 물어보라고,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 있는지.’
[어휴, 주인님도 참···.]
우선이 선수들의 샅바를 골랐고, 공교롭게도 아영이 내 쪽으로 왔다. 무표정하고 도도한 스타일의 미녀가 나를 향해 샅바를 내미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메는 거 도와줘?"
"······."
아영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 보면 선배에게 싸가지 없어 보일 수 있는 태도다. 하지만 본래 성격이 그러려니 했다.
정보창을 보니 이번 캠프에 참여한 것도 학과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사정을 모르면 모를까, 다 아는데 굳이 선후배의 예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왼쪽 다리 내밀어 볼래?"
"······."
아영이 소심하게 왼쪽 다리를 내밀었다.
효민과 아영은 지금까지와 달리 비키니가 아니었다. 특히 아영은 정음과 같이 오전부터 내내 레쉬 가드 차림이었다.
‘얼굴에 비해 몸매는 별론가?’
샅바 고리를 다리에 끼운 채 그녀의 몸매를 감상했다. 일단 각선미를 훌륭한 편이다. 타이즈를 입어서인지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리를 끼운 채 허리 쪽으로 휘감았다. 샅바를 매는 건 배우지 않으면 흉내도 못 낼만큼 복잡하다. 바로 앞에서 시범을 보여줘도 엉망진창으로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옷이 좀 걸리는데, 뒤에 살짝만 들어봐."
"···네."
아영이 처음으로 대답했다.
무심한 표정과 달리 의외로 귀여운 목소리였다.
샅바가 걸리지 않게 뒤쪽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잘록한 허리가 보였다. 척추의 형태가 또렷이 보일 만큼 마른 몸이다. 하지만 골반이 의의로 커서 그런지 콜라병처럼 환상적인 몸매였다.
‘이햐, 몸매도 끝내주는데? 마른데 비율이 엄청 좋아. 왜 숨기고 있었지?’
[부끄러움이 많아서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어? 잠깐 저건.’
샅바를 돌리는 데 그녀의 아랫배 바로 위로 거뭇거뭇 한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비’ 모양의 문신이었다. 뿔처럼 튀어나온 두 개의 그림은 나비 날개의 끝부분 같았다.
‘헐. 대박. 문신 위치 보소? 저 위치면 아래까지 연결되겠는데?’
[무, 문신이라니···. 학생이 저렇게 문신을 해도 되는 겁니까?]
‘못 할 거야 없지. 근데 좀 충격이긴 하네. 얼굴은 이슬만 먹을 것처럼 곱게 생겨놓고. 하긴, 후장도 경험했다고 했지?’
아마도 수영복 차림이 아니었다면 문신이 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레깅즈의 밑위가 지나치게 짧은 편이라 아랫배에 새겨진 문신 끝이 살짝 보이고 말았다. 아마도 평소에는 감추고, 남자친구에게만 보여주는 은밀한 문신 같았다.
"여기서 한 번 세게 조일 거야. 괜찮지?"
"······."
"읏차!"
고리를 만들어 당기자 샅바가 바짝 조여지며 아영의 중요 부위에 닿았다. 남자들의 경우엔 걸리적(?)거리는 것 때문에 고리가 정중앙에 위치할 수 없지만, 여자들은 걸릴게 없다보니 고리가 정확히 음부를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으음, 좀 세게 당긴 거 같은데?
"괜찮아? 이 정도면 돼?"
"······."
아영은 괜찮다는 건지 불편하다는 건지 대답이 없었다. 말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휴, 모르겠다. 그냥 해야지.’
나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고 계속 샅바를 돌려맸다. 그러자 아영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저···."
"응? 왜?"
"저···. 그게···."
"말해봐. 불편해?"
"···예."
"너무 세게 조였어?"
"예."
아영을 보니 살짝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급하게 다시 샅바를 풀었다. 아씨, 저쪽은 다 찬 거 같은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오히려 손발이 꼬이며 샅바가 더욱 엉키고 말았다. 아영이 더 조여졌는지 갑자기 신음을 내뱉었다.
"흐, 흠!"
"응? 아파?"
"······."
갑자기 아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혹시 숨을 못 쉬나? 그것치고는 너무 상기됐는데?
‘로시, 마음의 소리 좀 들려줘 봐.’
[아영 양을 말인가요? 공략대상도 아닌데?]
‘대답을 똑바로 안 하니까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무슨 묵언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마음의 소리 스킬을 실행합니다.]
·········.
세상에.
마음의 소리에서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영이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천성이 과묵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대체 어딜 조이는 거람. 매듭이 내 거길 너무 짓누르고 있어.
윽! 다시 보니 샅바에 만들어 둔 매듭이 돌아가면서 하필 아영의 중요한 곳을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으아악! 변태로 오해받고 있었다. 대답을 괜히 잘못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빠르게 사과했다.
"내가 실수했나봐. 매듭이 좀 꼬인 거 같아. 금방 풀어줄게."
"······."
<아니구나. 아쉽네. 그런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어? 뭐라고?"
"예?"
[주인님! 마, 마음의 소리에 대답을 하시면!]
‘아차!’
"아,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나 봐."
"······."
<···깜짝이야. 근데 이 오빠가 그 유명한 도훈 선배구나. 소문대로 잘생기긴 잘생겼네. 너무 반듯할 것 같아서 별로지만.
매듭을 다시 매면서 그녀의 마음의 소리를 계속 청취했다.
겉으로는 과묵한데 의의로 쉴 새 없이 떠드는 수다쟁이였다.
<그나저나 씨름은 또 어떻게 하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나오지 말 걸 그랬나. 괜히 열심히 하겠다고 오버했나봐.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대답했다.
"혹시 씨름은 해본 적 있어?"
"아니요."
"내가 알려줄까?"
"뭘요?"
"초보들에게 제일 잘 통하는 기술 같은 거."
"···아니요. 사양할게요."
<아···. 도훈 오빠는 예상대로 친절하구나. 역시 재미없는 사람이었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있는데 점점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친절해서 재미가 없다니. 보통은 자상한 매너에 감동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내가 말했지? 어딘가 배배 꼬여있을 거라고. 확실히 정상은 아닌 듯.’
[그래서 아싸를 자청했을까요?]
‘아마도. 본인 스스로 남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 강한 타입 같아. 자기애가 강하다 보니 남들에게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사회성이 결여되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거지. 은근히 쿨찐따 기질이 있네.’
[쿨찐따요?]
‘쿨한 척하는 찐따. 딴에는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 거지. 안 보이는 곳에 몰래 문신도 하고,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후장도 한 번 뚫려주고. 자상하고 착한 남자보다 나쁜 남자에 끌리고.’
[그게 쿨찐따라서 그렇다고요?]
‘다름을, 우월함으로 믿고 싶은 거지. 자긴 특별하다. 그러니 너희들 같은 평범한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
[아아··· 확실히 괴상한 사고방식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배척하다보면 점점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가거든. 외로운 섬이 되는 거야. 그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결국 여름 수영캠프까지 나오게 된 거고.’
[아아, 그렇군요.]
‘알고 나니까 괘씸하네. 한 번 골려줘 볼까?’
[뭘 어떻게요?]
‘원하는 데로 한 번 해주지 뭐, 나쁜 남자.’
"···거 씨발, 더럽게 비싸게 구네."
일부러 아영에게만 들리게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욕설을 들은 아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뭐? 너 들으라고 한 소리 맞아."
"!?"
"선배가 샅바 메는 거 도와주는데 아까부터 고개만 까딱까딱거리고 말이야. 씨발, 체육과 군기 다 빠졌구만?"
"···저, 저···그게···."
"넌 내일 수영 배울 때 죽었다고 복창해라. 알았어?"
"······."
"대답 안 하지? 저녁에 신입생들 한따까리 할까? 내 밑으로 한 번 다 모아줘?"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고, 샅바 다 맸으니까 꺼져."
[아, 아니 이건 나쁜 남자가 아니라 나쁜 새끼잖습니까! 그렇게 심하게 꾸짖을 상황은 아닌 것 같았는데요.]
‘기다려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어보면 알겠지.’
샅바 도우미를 끝내고 물러서는데 아영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쳤다 씨발! 도훈 오빠 완전 개쩔잖아? 방금 완전 쌀 뻔했어. 와, 아직도 심장이 콩딱 거리네?
[아, 아니 이게 무슨 병신같은···.]
‘내가 말했지? 아영이 쟤 뭔가 꼬여있다고. 이제보니 살짝 마조끼도 있는 것 같네.’
<하아-.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르는 거구나. 도훈 오빠에게 저런 박력이 있는 줄은 몰랐어.
아영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게임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마음의 소리의 타임이 끝나 더이상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아영인 미친년이다.
***
"경기 끝! 효민 승!"
"오오, 치열했어."
"아영이도 의외로 끈질기던데?"
"괜히 체육과가 아니잖아."
경기가 끝나고 아영은 굳이 도훈을 다시 찾았다.
"···저, 선배. 아깐 죄송했습니다."
"알았으니까 나중에 보자."
도훈은 일부러 쌀쌀맞게 대하며 아영을 무시했다.
그녀의 청개구리 같은 성격상 사과를 바로 받아주는 게 더 매력 없어 보인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아영은 한참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도훈을 쳐다보다 물러났다.
"자, 이제 8강 마지막 경기입니다! 박서현 대 육정음!"
"우아아아아아아!"
"육정음! 육정음!"
"티팬티 걸 파이팅!"
정음이 등장하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체육과 8선녀 원탑. 아니, 단과대를 통틀어 퀸으로 불리울 만큼 어마어마한 팬덤을 자랑하는 그녀였다.
정음은 민망한 듯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과한 응원이 부담스러운지 자꾸 손사래를 치며 그만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박서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으으, 하필 정음이랑 붙을 게 뭐람.’
정음은 누구나 알아주는 최고의 스포츠 걸.
구기면 구기, 체조면 체조.
도구를 쓰는 운동이건, 숙련도가 요구되는 운동이건 한 번 보는 순간 자신의 것으로 소화 시킬 만큼 놀라운 운동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운동 능력 이미 실기 시간에 충분히 봐왔기 때문에 서현은 하필 1차전 상대로 정음을 만난 게 죽을 맛이었다.
‘에씨, 우승해서 도훈 오빠 노예팅 뽑아야 하는데···.’
"자, 선수들 샅바 착용해 주세요."
우선의 진행에 따라 서현이 성수에게로, 정음이 도훈에게로 왔다. 정음은 도훈을 가까이서 보자 얼굴이 빨개지며 부끄러워했다.
"아, 앗. 선배."
"어. 우승 후보 왔네? 자신 있지?"
"네! 열심히 해볼게요."
"응. 샅바 매는 거 도와줄게."
"잠시만요. 제가 아까 눈대중으로 익혔는데 혼자서 한 번만 해볼게요."
"어? 혼자서?"
"네."
과연 몸 천재 정음이었다.
< 958. 별이 쏟아 지는-1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