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70화 (937/2,000)

< 953. 별이 쏟아 지는-13- >

***

고개를 돌리자 마주치기 껄끄러운 계집애가 눈에 들어왔다.

[헛, 박서현 양이군요.]

‘아씨, 하필 쟤한테 걸렸냐?’

서현은 팔짱을 낀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연, 연두와 함께 마실 나간 모습을 몰래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어, 서현아. 오랜만."

"아까 얼굴 봐놓고 오랜만이라니···."

"아, 아니 아까는 수영 교습한 거고."

"하긴 그때도 저랑은 눈도 안 마주치셨죠?"

서현은 톡톡 쏘듯 말을 받아쳤다.

이래서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다. 스스로 바뀌겠다 약속했지만, 여전히 내가 다른 여자랑 있으면 맹렬한 질투심을 드러낸다. 자존감이 낮은 건지, 소유욕이 강한 건지 모르지만 하여간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제야 서현도 아차 싶었는지 팔짱을 풀고 보다 나긋나긋한 태도로 말했다.

"아, 암튼. 축하드려요."

"갑자기 웬 축하?"

"조교 선생님께 들었어요. 오빠가 1학기 1등 했다고. 사범대 전체 수석이라면서요?"

"거참, 민주 샘도 쓸데없는 말을···."

전액 장학금 받게 된 이야기는 여태껏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두면 으레 소문이 날 것이고, 굳이 먼저 나서 떠벌여봐야 잘난체한다는 평판이 따를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여학우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바람에 시기하는 무리가 많은 데, 공부마저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귀가 따가울 것 같았다.

"축하드리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하네요."

"응?"

"···오빠만큼은 꼭 이기고 싶었는데."

"이번엔 운이 좋았어. 다음 학기 땐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하여간 재수 없어."

갑작스러운 막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재수 없다고? 지금 서현이가 나보고 한 말인가?

"운이라는 말로 웃어넘기는 오빠의 그 태도 말이에요. 세상이 우습죠?"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질투가 아니라 결투 선언이라도 하러 온 거야? 진짜 왜 저래?’

얼이 빠져 한동안 말을 못 잇는데 서현이 계속 혼자 떠들었다.

"난 다 알아요."

"뭘?"

"···오빠가 천재라는 거."

"큭."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도 관자놀이가 씰룩거렸을 것이다. 너무 진지한 서현의 태도에 겨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쟤 오늘 뭐 잘 못 먹었냐?’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모양인데요.]

"하긴, 바람둥이 중엔 머리 나쁜 사람이 없다고 하데요. 오빠같이 잘나가는 바람둥이라면 더 머리가 좋겠죠."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이번에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저."

오해를 풀고 싶은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이 웃겨서 가만 내버려 두었다.

"암튼, 제 앞에선 다신 겸손한 척 마요. 그게 더 자존심 상하니까."

"······."

"아까 연두랑 나연이한테는 뭘 시키신 거예요?"

"뭐? 아무것도 안 시켰는데?"

"방금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오빠 말 한마디에 미친 듯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거."

"그냥 운동한다고 간 거야."

"맨날 거짓말이시군요."

"거짓말이라니?"

"됐어요. 뭐, 그거야 제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암튼 공부는 졌지만, 나 아직 오빠 포기 안 했어요."

"뭐?"

"내가 오빠 가질 거라고요."

으으.

어떻게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눈 하나 안 깜빡거리고 하는 걸까?

확실히 서현은 어딘가 망가져 있다. 스토킹하며 집착할 때도 왠지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약간의 과대망상 증세마저 보이는 것 같다.

[으으, 서현 양은 역시 가위로 쳐내버리시는 게···.]

‘나도 동감이야. 근데, 타이밍이 영 좋지가 않네.’

[타이밍이라뇨?]

‘미션 보너스 말이야. 10명을 채워야 추가 포인트 받을 텐데 지금도 인원이 부족한 상태잖아. 여기서 서현이까지 잘라내면 보너스는 물거품이라고.’

[아아, 이런 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라고···.]

‘인마. 이번 캠프만 끝나면 진짜로 잘라낼 거야.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있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길래 그냥 내버려 뒀더니 여전히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아니 어쩌면 더 흑화된 것 같기도.’

[그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랬죠.]

‘맘에는 안 들지만, 이번엔 안고 간다.’

"너 설마···."

"걱정 마요. 예전처럼 집착할 일 없으니까. 오빠한테 거치적거리지도 않을 거예요."

"근데 방금 그건 무슨 말이야?"

"오빠가 누굴 만나건, 누구랑 자고 다니건 끝내는 제가 오빠 곁에 있게 될 거란 말이죠."

"허-. 자신감 넘치네?"

"제가 못 할 것 같아요?"

"넌 공부를 잘했으니까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나 본데, 사람 마음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세상엔 노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는 거야."

"할 수 있어요. 아니 할 거예요."

"적어도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힘들걸?"

"제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오빠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어떻게 하면 오빠 마음에 들 수 있죠?"

서현이 구차하게 매달렸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저렇게까지 매달리는 걸 보니 약간은 마음이 짠했다.

"시키는 대로?"

"네, 뭐든요."

"흐음."

"원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오빠 거 빨아 드릴 수도 있어요."

"여기서?"

"네."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전 오빠가 절 좋아하게 할 수 있으면 뭐든 다 할거에요."

‘하-. 이건 진짜.’

[살짝 안타까울 정도네요.]

‘저렇게 자존심 굽혀 버리면 오히려 있던 정도 다 떨어지겠네.’

[맹목적 집착이 명석한 두뇌를 아둔하게 만들어 버린 케이스군요.]

‘뭐 일단, 미션의 성공이 목적이니까.’

"좋아. 그렇다면 내가 저녁에 문자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어."

"오늘 밤이요?"

"그래."

"네."

"대신 수업 중엔 절대로 아까처럼 질투하는 모습 보이지 마."

"알겠어요. 노력할게요."

"아니. 노력하지 말고, 그렇게 하라고. 그게 내 조건이야."

"···알았어요. 절대로 티 안 낼게요."

"그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연이랑 연두랑 돌아오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 좀 전해줘."

"뭐라고요?"

"도훈 오빠 볼일 보러 화장실 간 것 같다고."

"네."

겨우 서현을 떼어냈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껄끄러운 여자애다.

***

다시 숙소로 돌아가자 성수가 도훈을 찾았다.

"밥 먹고 어디 갔다 왔어? 한참 찾았네."

"저를요? 밖에서 담배 좀 피웠어요. 근데 왜요?

"수영 조교들하고 잠깐 회의 좀 하자고."

도훈이 성수를 따라 남자 방에 들어가니 남자부 교관인 승완과 찬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완은 삼수해서 그와 동갑. 찬호는 현역에 미필이라 동생뻘이었다.

"어, 왔어?"

"형, 남자애들 불만이 너무 많아요."

찬호는 도훈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아쉬운 소리를 했다. 이유인즉슨 같은 과에서 수영 캠프를 왔는데, 마치 다른 학교처럼 멀리 떨어져 수업한다는 것이었다.

"애들이 하도 성화라 오후부턴 합동 수업으로 진행해 보겠다고 일단 불만을 잠재우고 왔어요."

"합동 수업?"

잠자코 있던 승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물론 나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솔직히 난 여자애들 가르치기 싫어서 남자부로 간 거니까."

승완은 체육교육과 내에서 수영으로는 일인자였다. 하지만 일전에 수영강사를 하다 여자회원들에게 크게 덴 후로 물속에서 여자랑은 말도 섞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말인데, 합동 수업을 하더라도 일단 여자부 애들은 도훈이 네가 맡아줘."

"그건 알겠어. 근데 무슨 내용으로? 오전에 내가 발차기랑 스트로크는 대강 끝냈는데."

강사진의 의견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성수가 말했다.

"오후 수업은 게임 위주로 진행할 거야."

"게임이요? 강습은 더 안 하고요?"

"인마. 솔직히 바다까지 와서 종일 강습만 받으면 애들이 즐겁겠냐? 그리고 도훈이 너희 쪽은 모르겠는데, 남자부는 완전 전투 수영이었어. 승완이 이 자식이 워낙 빡세게 가르쳐야 말이지."

"부회장님. 원래 제 스타일입니다."

"아니, 네 교육관은 잘 알겠는데 오후까지 계속 그런 식이면 내일도 전에 애들 다 퍼진다. 적당히 즐기면서 배워야지, 명색이 캠프잖아."

"네, 알겠습니다."

"근데 무슨 게임 하시게요?"

도훈은 성수가 먼저 게임으로 진행하자고 할 때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왠지 여자부 강사를 맡은 자신을 엮기 위해 수작을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많지. 물 밖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물속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수구 어때요? 수구는 수영 실력 기르기도 좋은데."

"난 물속에선 기마전 같은 거 해도 재밌겠더라."

"기마전이요?"

"어. 왜, 밑에서 3명이 받치고 위에 한 명 올라타서 모자 뺏는 게임 있잖아. 땅에서 하면 넘어지면 크게 다치는데 바닷가에서 하면 부담 없잖아."

"아, 그거 재밌겠다. 근데 그건 남녀 따로따로 해요?"

성수가 찬호의 질문에 씩 웃었다.

"아니. 남녀 혼성팀이 더 재밌지 않겠냐?"

"호, 혼성요?"

"그건 여자애들이 거부할 거 같은데···."

성수는 막무가내였다.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지 뭐. 근데 어차피 여자애 중에 절반만 한다고 해도 게임에는 문제없어. 남자들이 워낙에 많으니까."

"아, 그럼 기수는 무조건 여자로?"

"그렇지."

‘이 양반이 또 무슨 꿍꿍이를.’

도훈이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성수가 선언하듯 말했다.

"대신 수업자 교감을 위해서 조교들은 무조건 참가하는 거로."

"저, 저희도요?"

"아니 애들끼리 하면 되잖아요."

"그건 재미없잖아. 이렇게 해. 어차피 기마전은 대장만 죽으면 끝난단 말이야. 승완이랑 도훈이가 각각 대장 말을 목에 올리고 지는 팀이 오늘 저녁 설거지하기. 어때?"

승완과 찬호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설거지 내기라는 말에 솔깃한 모양이었다.

"그거 괜찮겠네요."

"오케이 좋아요."

"도훈이 넌?"

"······."

‘아씨, 성수가 진짜 여러 가지로 사람 피곤하게 하네.’

[주인님 등에 올라타겠다고 여학생들 캣파이트 벌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기마전이 워낙 스킨십이 심해서 비키니 입고 하면 다들 난리 날 텐데.’

[성수군이 머리를 쓴 게 아닐까요?]

‘머리라니?’

[어쨌든 학과를 이끌고 나가는 실질적인 리더지 않습니까? 남자부 학생들의 불만도 잠재울 겸 일부러 스킨십 심한 종목을 고르지 않았겠냐는 거죠.]

‘그거 말 되네. 게다가 나도 못 빠지게 승완이랑 라이벌 구도 만들고 말이야.’

[은근히 머릴 굴릴 줄 아는데요?]

‘교활한 곰탱이라니까, 하여간.’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없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도훈이 네 의견 없이도 다수결로 결정 났으니."

"아니 그런 법이···."

도훈이 불만을 토로하려는데 성수가 얄밉게 화제를 바로 돌렸다.

"그럼 물밖에는 뭐할까? 체육과답게 좀 화끈한 게임으로 하면 좋겠는데."

"그거 어때요? 모래사장도 고운데···."

"뭐?"

"씨름."

"씨름?"

"에잉?"

다들 얼떨떨해 하는데 성수가 옳거니 손가락을 튕겼다.

"재밌겠네. 씨름해보자. 대신 이건 남자부 여자부 따로따로."

"진짜로 하자고요? 피서객 다 구경할 텐데? 우릴 전지훈련 나온 씨름부로 알 걸요?"

"그러면 더 잘됐지."

"잘 되다뇨?"

"아니, 아까 보니까 주변에서 우리과 여학생들한테 찝쩍거리더라고. 남자애들이 맨날 따라 다니면서 도와줄 수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위력시범 한 번 하자는 거지. 장정 스무 명 넘게 둘러앉아서 씨름 하는 거 보고 나면 쫄아서 안 건드리지 않겠냐?"

"그렇네요. 어필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찬성요."

도훈은 또 한 번 다수결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난 물어보나마 나겠네."

"당연하지."

"부회장님. 근데 이것도 이기면 뭐 있나요? 기마전엔 설거지 면제권 거셨잖아요."

"씨름은 개인전이니까 개인 타이틀을 줘야 하지 않을까?"

"개인 타이틀이면···. 어떤 거로···."

성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멀찍이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우선에게 물었다.

"야, 우선아. 우리 잔금 얼마나 남았냐? 민박 싸게 구해서 좀 남았다며."

"지금요? 잠시만요. ···대충 20만 원 넘게? 그건 왜요?"

"잘됐네. 그걸로 개인전 상금 주게."

"상금이요?"

"어. 상관없지? 어차피 캠프 운영 상품으로 나가는 거니까."

"네, 문제 될 건 없어요."

우선과 대화를 마친 성수가 모두에게 설명했다.

"들었지? 남녀 각각 우승자 10만 원씩."

"가만, 우승자 몰빵이요? 준우승이랑 3위는요?"

"아니 10만 원을 어떻게 더 쪼게? 그냥 1등한테 몰아주는 게 낫지."

"아···. 그럼 이건 지원자만 해야겠네요. 어차피 개인전이면."

"대충 토너먼트로 짜자. 남자는 16강, 여자는 8강까지 어때?"

"네, 그건 지원자 받아보고 결정해요."

"나도 나가도 되지?"

한참을 설명하던 성수가 뜬금없이 말했다.

"부회장님이요?"

"왜? 나도 체육과 학생인데 당연히 자격 있지."

"아, 아니 안된다는 건 아닌데···."

"부회장님은 체급이 너무 다른데요. 거기다 유도까지 배우셨잖아요."

"야, 유도랑 씨름이랑 같냐? 전혀 달라."

성수가 결코 아니라는 것처럼 부정했다.

‘와, 인제 보니 성수 이새끼, 이제껏 밑밥 깐 게 지 혼자 10만 원 날름 먹으려고.’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군요. 성수군이 약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저 곰탱이를 누가 무슨 수로 이겨. 힘 하나는 우리과 최곤데.’

[주인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

[스파르탄 벨트가 있는 한 주인님도 성수 군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힘 대 힘으로 붙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저 곰탱이를?’

로시의 말에 도훈은 갑자기 호승심이 끌어 올랐다.

< 953. 별이 쏟아 지는-1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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