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1. 별이 쏟아 지는-11- >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정을 드러낼 순 없는 일이었다. 민주가 애써 질투를 숨기며 태영에게 말했다.
"이쪽은 분위기가 아주 다르구나, 아까랑은."
태영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 동기들이 도훈이 형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어머, 그랬니?"
민주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라는 표정을 짓자 태영이 부연했다.
"잘 모르시는구나. 도훈이 형 완전 아이돌이잖아요. 특히 나연이랑 연두 쟤들은 아예 사생팬 수준일걸요? 배구 연습 경기만 있으면 피켓까지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응원 다니고."
"나연이랑 연두가?"
민주가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연은 노란색, 연두는 라임색 계열의 비키니를 입어 이름과 잘 매칭이 되었다.
"거기다 요즘 보니까 경희도 엄청 관심 보이더라고요."
"경희? 테니스 치는 강경희?"
"네. 저쪽에 까만 애요."
경희는 흰색 비니키를 입었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와 유난히 대조되었다. 다른 여학생들과 다르게 온몸 구석구석이 육상 선수처럼 탄력이 넘쳤다.
‘엄청 야하게 생겼네, 기억해 놔야겠다.’
민주는 태영이 알려주는 요주의 인물 리스트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한참 이런저런 동기들을 언급하던 태영이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저중에 가장 팬심 가득한 사람은 서현일 거예요."
"그 공부 잘하는 애?"
"네. 이번에도 엄청 시험 잘 쳤다던데···."
"아쉽지만 전장은 못 받았어."
"진짜요? 와, 그 점수를 받고도? 암튼, 서현이는 예전부터 말 많았어요. 한때는 도훈이 형 스토킹한다는 소문도 돌았고요."
민주 역시 서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학과 사무실까지 찾아와 미친년처럼 문을 두드렸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네. 하긴 주인님이 워낙에 매력이 넘치시니까.’
민주는 여자로서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경쟁이 과열되자 도훈에 대한 애정이 더욱 강렬히 끌어 올랐다.
‘훗-. 그래 봐야, 다들 풋내기뿐. 고작 스무 살짜리한테 내가 꿀릴까 봐서?’
민주가 각오를 다지는데 어느새 교육을 마친 도훈이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고생했어. 점심 먹으러 가야 하니까 오전 훈련은 이것으로 종료하자. 마무리 체조도 나연이가 맡아줘."
"네, 선배."
먼저 뭍으로 나온 도훈에게 밖에서 지켜보던 태영이 말을 걸었다.
"형, 조교 선생님 오셨어요."
민주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이라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최대한 절제된 표현으로 인사했다.
"수고가 많구나, 도훈이가."
"오셨어요, 조교 선생님?"
도훈 역시 깍듯하게 인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공적인 자리에선 절대 티를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예의 바른 학생과 조교의 관계처럼 보였다.
도훈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민주가 갑자기 태영을 향해 말했다.
"참, 태영아.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니?"
"네? 뭔데요?"
민주의 철저한 종복이 되기로 결심한 태영은, 부탁이라는 말에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헉헉거리며 달려들었다.
"휴게소에서 급하게 음식을 삼켰는지 속이 체한 것처럼 영 더부룩하네. 어디서 활명수 좀···."
민주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아픈 기색을 내보이자 태영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곧바로 말을 따랐다.
"앗, 제가 금방 다녀올게요."
태영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해변가 주변에 약국이 있을 리 만무했다. 최근엔 편의점에서도 소화제를 판다는 사실을 떠올린 태영이 민주에게 말했다.
"어디 편의점이라도 찾아서 사다 드릴게요."
"미안, 괜히 너한테 귀찮은 부탁을···."
"별말씀을요! 후딱 뛰어갔다 올게요!"
"태, 태영아, 돈은 받고 가야지."
이미 달리기 시작한 태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소리쳤다.
"에이, 그거 얼마나 한다고요. 제 돈으로 사올 게요."
민주에게 예쁨받고 싶었던 태영이 사라지자 도훈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쟤 왜 저렇게 말을 잘 들어요?"
"글쎄? ···교육 다 끝났으면 천천히 숙소 쪽으로 걸을래?"
도훈은 마무리 체조를 하는 여학생 쪽을 쓱 쳐다보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시죠, 선생님."
무리에서 한참 벗어난 뒤 민주가 태도를 싹 바꾸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주인님."
"···쉿. 다른 애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없어요. 여긴."
도훈도 사방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휴, 갑자기 등 떠밀리는 바람에 옷도 못 갈아입고 입수했잖아."
"아···."
도훈은 상의는 벗고, 젖은 반바지만 입은 채였다.
하지만 워낙에 몸매가 좋다 보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힐끔거렸다. 민주는 도훈이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치밀었다.
‘주인님의 벗은 몸을 보는 건 나 혼자이고 싶은데···.’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네요."
"그러네. 그냥 민망하니 젖은 상태로라도 입어야겠다."
도훈이 손에 든 상의를 대충 구겨 입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벗은 몸을 본 이상 잔상처럼 계속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왜 주인님은 바라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린담?’
민주는 그와 단둘이 모래사장을 밟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학과 학생들과 같이 오지만 않았어도, 팔짱을 끼우며 연인처럼 거닐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수님 모시고 오느라 고생했겠다."
"그럭저럭요. 그래도 막상 바다 보니 좋네요."
도훈도 고개를 돌려 바다를 감상했다. 푸른 바다와 황금빛의 모래, 그리고 하얀 포말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따금 밀려오는 해풍이 더위를 가시며 무더운 날씨를 잊게 했다.
분위기에 취한 민주가 자기도 모르게 도훈의 손을 맞잡았다. 도훈은 누가 볼까 깜짝 놀랐으나, 근처에 체육과 학생들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충돌 경보가 울리는 것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민주가 알려나 모르겠군.’
[뭘요?]
‘내가 자기 때문에 타짜 짓도 하고, 흥신소 직원 연기도 했다는 걸 말이야.’
[후후-. 억울하십니까? 고생한 걸 알아주지 않아서?]
‘꼭 그렇다기보단. 내가 민주를 많이 아꼈었나 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흐음···. 그나저나 이번 행사에 체육교육과 핵심 멤버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긴 했군요.]
도훈의 여자관계는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게 체육과 내 관계였다.
새터 때부터 엮였던 정음과 효민은 물론, 레즈 커플 나연과 연두, 스토커 서현, 발랑 까진 희주에, 테니스부 강경희까지 1학년의 거의 절반이 그와 썸씽이 있었다.
또한 메갈 정의 구현을 위해 피치 못하게 엮이게 된 2학년 우현미, Sm 업적 달성을 위해 만난 3학년 학회장 마유미, 그리고 졸업반이자 임용공부에 매진하는 4학년 오수정까지 학년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만났다.
그중 조교 강민주와는 학기 초부터 지금까지 그와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민주랑 오래되긴 했네.’
[오래되셨죠. 이제껏 민주양이 주인님께 헌신한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대신 복수한 것이 마냥 헛고생은 아닐지도. 그만큼 주인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니까요.]
‘맞아. 민주는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본인이 알건 모르건 말이야.’
[한데 주인님 본처는 오로지 육정음 양 아니었나요?]
‘정음이도 좋긴 하지. 하지만 다들 다른 매력이 있잖아.’
[왠지 이번 수영캠프가 서열을 가릴 장이 될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첩에도 순위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려나? 근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면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이 실감 날 것 같아. 서로 견제하고 눈치 보느라 오히려 더 기회가 없을 것 같달까?’
[그건 주인님이 고민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응?’
[다들 각자 전략을 짜왔을 테니까요.]
로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주가 조심스레 말했다.
"주인님. 아까 숙소에 짐 놔두고 왔는데 저 혼자 독방을 줬더라고요."
"좋겠네. 학생들은 한 방에서 몰아 자는데."
"잠자리 불편하시면 제 방에서 주무셔요."
민주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단순히 잠만 재울 생각은 아닐 것은 뻔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미친놈처럼 달려왔다.
"조교 선생님!!!"
놀란 도훈이 화들짝 손을 놓고 쳐다보는데, 아까 심부름을 갔던 태영이 모래 먼지를 날리면 달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 활명수를 들고 맨발로.
‘헐, 대박. 벌써 다녀왔다고?’
[태영군이 의외로 달리기에 재능이 있었군요.]
"조교선! 윽!"
하지만 급한 마음이 앞섰는지, 급하게 달려오던 태영이 기우뚱 균형을 잃더니 그대로 모래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다. 누가 봐도 뜨악할 정도로 아파 보이는 부상이었다.
그러나 태영은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 나더니 옷에 모래도 털지 않고 쉼 없이 달려왔다.
"서, 선생님, 여기 사 왔어요, 활명수! 헉헉!"
무릎이 까져 피가 철철 나는 태영은 자신이 다친 줄도 모르는 듯 해맑게 웃으며 민주에게 활명수를 건넸다.
"태, 태영아. 근데 너 피···."
태영이 힐끔 까진 무르팍을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모래를 털어냈다.
"하하, 그냥 살짝 까진 거예요."
"살짝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지?"
"정말로 괜찮아요."
오히려 심부름을 시킨 민주가 당황할 정도였다. 자신에게 점수 따는 게 뭐라고 저렇게 숨이 턱에 막힐 정도로 편의점을 다녀왔단 말인가? 지켜보던 도훈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저놈, 또 시작했군.’
[태영 군은 뭐랄까···. 한 번 호감이 간 상대에게 간이고 쓸게고 다 내주는 타입이랄까요.]
‘뭘 그렇게 둘러 말해? 그냥 호구 새끼라고 하면 되지.’
[···쩝. 근데 태영군은 또 어쩌다 민주양에게 꽂힌 걸까요?]
‘알게 뭐야. 또 혼자 행복 회로 돌리면서 뇌내망상에 푹 빠져버린 거지. 어쩐지 민주가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야, 상처 난 데 괜히 만지지 마. 괜히 균 들어가면 골치아프니까. 숙소 가면 우선이가 챙겨온 구급함 있을 거야. 그걸로 소독부터 하자."
도훈의 지적에도 태영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무릎 좀 까졌다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민주가 자신을 남자답지 못하다 여길 것 같았다.
"에이,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냥 바닷물에 소독 한 번 하면 되요."
"엉?"
맨발의 태영이 갑자기 바다 쪽으로 걸어가더니 밀려오는 파도에 무릎을 적셨다.
‘미, 미친놈.’
태영의 행동에 민주가 기름을 부었다.
"어머, 태영이 완전 남자구나."
"하하! 제가 좀!"
도훈은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민주가 태영의 호구 끼를 눈치채고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음, 그러고 보니 민주도 나에게만 순종적이지, 원래 착한 타입은 아니었지.’
[그렇죠. 전생의 이도훈을 가지고 놀던 송지희와 단짝이었으니까요. 클럽 죽순이 시절 생각하면 절대 순진한 사람은 아니죠.]
‘역시 타고나길 착한 사람은 정음이 밖에 없는 건가?’
[정음 양도 질투심에 눈이 멀면 어찌 될지 모르죠.]
‘정음이가? 질투를? 에이, 설마.’
[여자의 질투심을 간과하면 안 된다던 분이 주인님 아니셨습니까? 정음 양이 눈치가 없길 망정이지, 주인님의 복잡한 여자관계를 알았다면 지금처럼 주인님께 헌신할 수 있을지···.]
‘으음. 그러려나.’
[아무튼 부디 조심하십시오. 꽃밭이긴 한데, 가까이 가면 장미 덩굴입니다. 사방에 가시가 있으니 언제 찔릴지 모릅니다.]
‘조심할 게 뭐 있어? 기회가 되면 하고, 안 하면 마는 거지. 어차피 미션도 안 걸린걸.’
그때였다.
도훈의 귓가로 띠링- 하는 신호음이 들린 것은.
‘키아! 타이밍 보소? 아주 귀신같이 등장하네.’
[미션입니다.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띄워봐.’
태영과 민주와 함께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 사이 도훈이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미션을 확인했다.
-몰래 먹는 게 제일 맛있어!-
*거미줄 같은 관계망 속에서 여자를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동일 집단 내 8명 이상의 관련인이 모여있을 때 활성화됩니다.
*성공 보상은 여자 한 명당 1,000포인트며 공략 대상이 늘어날수록 누적됩니다. 또한 공략 대상이 10명을 넘을 경우 1만 포인트가 추가 지급됩니다.
*제한 조건으로 미션 대상자에게 타인과의 관계 사실을 들킬 경우, 누적된 포인트가 모두 소멸 되며 관련된 사람들의 호감도가 일제히 하락합니다.
*정신조작류 스킬은 일제 금지됩니다.
*남은 시간 : 캠프 종료 시점까지.
‘오옷, 이게 뭐야?’
[설명대로 몰래 먹기 미션입니다. 주인님이 그냥 있는 걸 허용하지 않는군요.]
도훈이 복잡한 내용을 짧게 요약했다.
‘한마디로 내 어장에 있는 여자들을 몰래 하나씩 자빠뜨릴 때마다 천 포인트씩 누적된다는 거지?’
[네, 10명을 넘을 경우 1만 포인트가 추가되고요.]
‘그럼 10명이면 누적에 보너스까지 최대 2만 포인트?’
[이론상 충분히 가능하지요.]
‘와, 이건 초대박아냐? 한방에 2만 포인트까지 나오는 미션은 처음본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제한 조건이 빡빡합니다.]
‘한 번이라도 들키면 모든게 물거품이란 말인가?’
[또한 동시에 쓰리썸이나 포썸도 불가능합니다. 원 바이 원 미션이거든요.]
‘흐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지. 못 먹어도 고!’
< 951. 별이 쏟아 지는-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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