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8. 별이 쏟아 지는-8- >
체육과 학생들이 수영 캠프를 시작한 시각, 조교 강민주는 학과장을 대동해 태안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 고속도로의 풍광에, 민주도 간만에 일상에서 벗어나 해방된 기분을 만끽했다.
‘아, 드라이브 나오니까 좋네. 요샌 외삼촌한테 선보라는 연락도 안 오네? 드디어 포기한 건가?’
민주가 한창 신이 난 표정으로 엑셀을 밟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교수가 입을 열었다.
"참, 민주는 학위 딸 생각 없나?"
"그러잖아도 내년쯤 대학원 입학할 예정입니다, 학과장님."
학과장 마종수는 체육교육과 소속 4명의 정교수 중 가장 막내였다. 다른 두 사람은 정년을 앞둔 시기라 딱히 감투 욕심이 없었고, 나머지 한 사람도 올해 안식년을 맞아 유학 중인 자녀 뒷바라지에 매진한 상황.
자연스레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체육교육과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여전히 스스로를 젊고, 왕성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세부 전공은 뭐로 할지 결정했고?"
"계속 고민 중입니다, 교수님."
"괜찮다면 내 밑으로 들어오게나. 다른 교수님들이야 워낙 바쁘시다 보니 논문 도와주기 어려울 걸세. 나야 늘 학교에 붙어 있으니까 언제든 물어보기도 쉽지 않나?"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학부생 때 교수님 수업을 무척 인상 깊게 들어서 고려하고 있습니다."
"하하, 학부 때랑은 다를 걸세. 본래 대학 공부의 진정한 시작은 대학원부터라지 않는가?"
"네, 새겨듣겠습니다."
마교수는 운전에 집중하는 강민주를 훔쳐보며 몰래 군침을 삼켰다.
‘애가 참 착하단 말이야. 얼굴이든 몸매든···.’
마교수는 학부생들에겐 인자하고, 훌륭한 인품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자기 밑의 대학원생들에게는 정반대의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본래 교수와 원생의 관계라는 게 다소 수직적일 수밖에 없지만, 마 교수는 특히 원생들에게 혹독하기로 악명높았다.
특히 남자 대학원생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여자 대학원생 중에 얼굴이 반반한 이들에게는 은근슬쩍 성희롱이 잦은 것이다. 특히 회식 때 취중을 빙자해 아무렇게나 몸을 주물러 대는 주사로 상처를 입은 여대학원생들이 부지기수였다.
다만 괜히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어디에다 말도 못 하고 속앓이로 끙끙대는 통에 주변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뿐. 운전하던 민주는 괜히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은?’
민주는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최근 들어 마교수가 자신을 훑어보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다만 겉으로 워낙 신사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혹여라도 자신이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민주야."
"네?"
"네가 내 딸 같아서 하는 소린데, 우리 쪽 분야가 워낙에 길이 좁은 편이잖니."
"···네."
"그러니 처음 지도교수를 잘 만나야 나중에 전임강사 자리라도 하나 꿰차지 않겠니? 생각을 잘해야 한단다. 원래 학문의 길이 고되고 힘든 법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그래. 오늘 밤 술자리에서 한 번 장래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자 꾸나."
"······."
"기왕 박사까지 밟으려면 쉽게쉽게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 이건 대체···.’
민주도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마교수의 의중을 파악했다. 쉽게 말해, 앞으로 학위 따는 길을 편히 가려면 알아서 자신에게 잘 보이라는 소리였다.
‘학과장님 점잖은 분인 줄 알았더니, 되게 지저분하게 노시네. 하-. 대체 왜 주변에 이런 사람들밖에 없는 걸까?’
민주는 낙담보다 서글픔을 느꼈다.
어느 정도 사회 경제적 지위에 올라선 사람들일수록, 젊은 여자를 볼 때마다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자신처럼 젊고, 예쁘고, 유능할수록 그러한 속물들과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환멸감.
인간에 대한 불신.
매 순간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신분에 대한 착잡함.
‘하여간 사내새끼들은 다 똑같아. 주인님만 빼고는.’
그런 사람들을 접할수록 민주의 도훈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져 갔다.
도훈은 마교수 같은 늙다리와는 전혀 달랐다.
젊고, 유능했으며, 강했다.
그는 이빨을 숨긴 짐승이자, 누구보다 강력한 수컷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당당히 요구할 줄 알았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아랑곳 않고 놀라울 정도로 욕망에 충실했다.
진짜 상남자.
사내중의 사내.
도훈을 떠올리자 민주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변의 못난 속물들이 바글댈수록, 그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간절했다. 어디에도, 또 언제라도 그만한 사내를 만날 순 없을 것 같았다.
오직 그만이 자신의 영원한 주인이었다.
‘하아-. 얼른 주인님을 보고 싶어. 주인님만이 나를 조련할 수 있어.’
민주가 엑셀을 꾹-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 150Km를 넘나드는 스피드에 바짝 움츠러든 마교수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뒷좌석이 조용해지자 민주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도훈과 만나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휴가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며칠 푹 쉬었다 와."
"네, 감독님."
"그 비치발리볼인가 뭔가 하는 대회, 너무 열심히 하다 부상 입지 말고."
"네, 감독님."
사복으로 갈아입은 유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거참, 너처럼 싹싹하고 예쁜 애가 왜 아직 남자친구 하나 없냐? 누가 보면 내가 우리 선수들 연애 금지라도 시킨 줄 알겠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암튼, 먼 길 고생해라."
마지막 인사를 올린 마유미가 백 팩을 한쪽으로 매고 감독실을 나섰다.
‘드디어, 도훈이를 볼 수 있겠구나!’
국성대 여자배구부 간판 공격수.
프로팀도 주시하는 대학 배구계의 떠오르는 신성.
그녀를 수식하는 표현들이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대학 리그 일정을 소화하느라 유미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매 주말 원정경기 소화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경기가 없는 날엔 끝도 없는 훈련으로 늘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배구처럼 팀 스포츠 종목에선 팀훈련 열외가 곧 주전 제외를 의미하기 때문에, 유미는 아무리 힘들어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대학 배구팀 주전.
그 길을 위해 달려온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마침내 3학년에 이르러서 꿰차게 된 주전을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했지만.
가끔은 유미도 평범한 또래들처럼 남자친구와 연애도 하며 알콩달콩 살고 싶었다. 과연 프로 데뷔를 할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이때, 솔직히 인생을 내던질 각오가 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의 행복을 포기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혔다.
남자친구가 없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의 큰 키를 부담스러워한 남자들이 대부분. 하지만 섹스에 대한 강렬한 욕망까지 잠재울 순 없었다.
‘특히 도훈이를 알고 나서부터 더더욱.’
도훈은 섹스에 고픈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특히 지배적인 성벽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 도훈은 늘 정복하고 싶은 사내였다.
‘오빠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져.’
도훈에겐 그녀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한참을 묶어놓고 괴롭히다가 나한테 제발 넣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몇 안 되는 경험이었지만, 유미는 도훈이야 말로 자신이 찾던 남자임을 확신했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훌륭한 육봉의 소유자.
‘오로지 도훈 오빠만이 나를 감당할 수 있어. 시시껄렁한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마침 여름 수영 캠프가 적절한 기회였다.
성수 때문에 명예직으로 수락한 학회장이라는 허울이 훌륭한 명분이 됐다. 때마침 열린 비치발리볼 대회 역시.
‘저녁에 도착하면 둘이 연습한다고 따로 나가야지.’
본래 다음 날 아침에나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운 좋게 시합이 오전으로 당겨지며 오늘 저녁 도착이 가능해졌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갈수록 한 시간이라도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유미의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하아-. 도훈 오빠를 묶어 버리고 싶어. 묶어놓고 개처럼 따먹고 싶어. 발로 잦이를 지근지근 밟아 버릴 거야.’
간만에 도훈을 본다는 생각에 유미의 머릿속이 살 색의 망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혼자 자위를 할 때마다 딸감이 되었던 도훈을, 마침내 만나게 되는 것이다.
‘2박 3일 매일매일 따먹고 말 거야. 다음번 다시 만날 때까지 견딜 수 있게.’
유미가 웅대한 각오를 품고 버스에 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도훈을 만나기도 훨씬 전부터 붉게 상기되었다.
***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하지?’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도 도훈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왠지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었다.
‘저번에 처녀 보살 만난 이후로 신기가 생겼는지, 이따금 이런단 말이지.’
도훈이 혼자 오한을 느끼던 그때 구보를 마친 경희가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오, 오빠. 제가 1등이죠?"
무릎에 두 손을 지지한 그녀의 슴골은, 가운데로 알뜰하게 모여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건 뭐 눈을 둘 데가 없네.’
도훈이 시선을 힐끗 돌리며 말했다.
"어. 근데 선착순은 의미 없겠다."
뒤이어 속속들이 여학생들이 도착하자 도훈이 말했다.
"중간에 일 있었다며? 성수 형한테 전화로 들었어. 미안하다. 내가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선배. 저희에겐 정음이가 있는데요, 뭘."
정음의 태권도 실력에 감탄한 나연이 말했다.
연두도 거들었다.
"우리과 남자애들이 그렇게 듬직해 보인 건 처음이었어요. 아깐 무슨 조폭들인 줄 알았다니까요?"
"꺄아, 맞아맞아. 죄다 웃통 까고 있으니까 애들 볼만 하던걸?"
여학생들의 반응에 도훈은 살짝 부끄러움을 느꼈다.
‘음, 이건 자존심의 문젠데.’
[왜 그러십니까?]
‘성수의 의도가 어찌 됐건 지금은 내가 여학생들 관리하는 입장이잖아. 지금 애들 옷 입은 상태 보면 누가 봐도 날파리가 꼬일 만한데 말이야. 내가 너무 안일했어.’
책임을 느낀 도훈이 여학생들 앞에서 선언하듯 말했다.
"아무튼, 앞으론 아까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 끝날 때까지 너희들과 동행할게."
"꺄아!"
"오빠 멋져요."
"너무 좋아."
"거듭 말하지만 방금 전 일은 미안하다. 특히 정음이한테."
도훈은 정음이 직접 나서 양아치들을 무찔렀다는 말에 특별히 사과를 덧붙였다. 도훈의 사과에 정음이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에요. 선배. 별것도 아니었는데."
"아니야. 다음에는 혹시나 또 누가 시비 걸면 언제든 나부터 찾아. 알았지?"
"···네."
"자, 그럼 몸도 다 풀렸으니 본격적으로 바다 수영 배워보도록 할까?"
"네! 좋아요!"
"그럼 일단 허리 높이까지 입수!"
"와아아아아아!"
13명의 여대생은 방금 전 불쾌했던 기억을 지우고 해수욕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멀리서 훔쳐보던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바로 성수에게 쫓겨난 양아치 3인방이었다.
"와, 저 새낀 뭐냐? 계 탔냐? 무슨 삼천궁녀라도 끼고 노는 줄?"
"삼천 궁녀면 의자왕 말이지? 그놈은 전생에 나라 말아먹었는데 씨팔, 인생 존나게 불공평하네. 누군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한테 뺀찌를 맞지 않나, 쪽이란 쪽은 다 팔리고 도망이나 치질않나."
"아깐 어쩔 수 없었잖아. 거의 스무 명 넘게 달려드는데 쪽수가 감당이 되냐? 옛말에 다구리엔 장사 없다고 했어."
끝까지 입을 터는 친구를 보며 현승이 비웃었다.
"다구리 같은 소리 하네! 야. 아까 그 만두귀 못 봤냐? 우린 그 새끼 한 명한테 걸려도 다 뒤졌어."
"좆까? 너는 여자애한테 처 발린 주제에 말이 많아."
"아 씹! 급소였잖아, 급소! 너도 한 대 맞아봐. 아주 숨이 턱 막힐 거다."
"여튼 너 때린 걔, 존나 이뻤는데."
"맞아. 다 반반한데 그래도 걔가 젤 이쁘더라."
"하, 씨팔. 그나저나 이렇게 개 쪽 먹고 집에 가서 발 뻗고 잠이나 자겠냐?"
"어쩌라고 새끼야. 애들 상태 못 봤냐? 어디 운동부에서 단체로 합숙훈련 온 거 같더만. 잘못 덤볐다가 그 만두귀한테 잡히면 우리 진짜로 좆 돼 인마."
현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거고, 어쨌든 지금은 저 새끼 혼자잖아. 다른 남자애들은 저 멀리 있고."
"누구, 저 의자왕?"
"어. 저 새끼 혼자뿐인데 우리 셋이면 다구리치면 해볼만 하지 않을까?"
"새꺄. 다구리야 치면 치는건데, 그래서 뭐? 남은 여자애들 강간이라도 때리게? 깜빵 갈라고 작정했냐?"
"아니, 그냥 내 말은 저 새끼들 좆같으니까 한 놈이라도 조져버리고 가자는 거지. 니들은 열 받지도 않냐?"
"열은 씨팔, 고자 될뻔한 니가 젤 받겠지."
"뭐 이 새끼야?"
"···아니. 듣고 보니 현승이 말도 일리가 있네."
"어?"
"어쨌든 쪽팔린 값은 받아야 할 거 아냐, 그게 누구든? 우리 그냥 저 새끼 밟고 대천으로 넘어가자. 어차피 여기서 작업 치긴 그른 것 같은데."
"그것도 괜찮은데?"
작당 모의를 마친 양아치 삼인방은 여학생들을 물장구치게 두고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훈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들은 아까 나눴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다구리엔 장사 없다고 했겠다?’
< 948. 별이 쏟아 지는-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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