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5. 별이 쏟아지는-5- >
‘민박이라고? 아니 때가 어느 땐데···.’
도훈은 민박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당연히 시설 좋은 콘도 아니면 최소한 팬션 한 동 정도를 통째로 빌렸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요새도 민박이 있어요? 펜션이 아니고요?"
"성수기 때 태안 펜션이 워낙 비싸야지. 방 하나에 10만원 넘게 부르더란다. 40명 넘게 들어가려니 2박 3일 비용이 감당도 안 되고."
‘아니 그렇다고 시설도 열악한 민박집에 40명을 때려 넣어?’
"그럼, 거긴 방이 몇 갠데요?"
"4개."
"4개요? 그럼 한방에 10명씩 자요?"
"아니. 작은 방 두 개는 교수님들 드려야 해서 큰 방 두 개에 남자방 여자방 나눴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이번 캠프의 참여인원은 학생만 40. 그것도 남자27에 여자 13명의 불균형한 성비였다.
"자, 잠깐만. 그럼 스물일곱명이 한방에 잔다고요?"
"어차피 내려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미리 알려주자면, 맞아."
[와, 이건 좀 심한데요. 2박 3일간 사생활 따윈 없는 거군요.]
‘저번 MT때처럼 텐트 치고 안 자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가.’
도훈은 장정들 스물 일곱명이 부대껴 자는 상황이 암울하게 다가왔지만, 적은 예산을 가지고 힘들게 계획을 세운 현 집행부에게 불만을 표시할 순 없었다. 성수는 자기가 말하고서도 민망했는지 도훈에게 덧붙였다.
"야, 그래도 남자 방이 제일 크데. 좁으면 술 먹다가 마당에서 골아 떨어지면 또 어때? 젊고 건강한데 풍전노숙이 두렵겠냐? 여름밤에 동사할 것도 아니고."
"동사가 문제가 아니라 모기를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암튼, 비용문제로 그렇게 됐다. 그래서 배 곪지 말라고 식량은 두둑히 챙겨 왔잖아. 짜샤, 먹는 게 남는 거야."
도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고생길이 훤하네. 남자들은 그나마 군대 내무반 경험이라도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여학생들 불만은 어찌 잠재우려고.’
도훈의 우려는 버스 도착 후 민박집으로 향해 갈 때 현실이 됐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고급스러운 팬션을 기대했던 학우들은, 양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허름한 어촌 골목 구석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어째 해변이랑 점점 멀어지는 거 같은데?"
"여긴 그냥 사람사는 동네 아니에요?"
"부회장님 언제까지 가요. 짐 무거워 죽겠어요!"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버스가 드나들지도 못할 비좁은 골목길을 한참을 낑낑대고 들어간 뒤에야 선두에 서 있던 우선이 소리쳤다.
"다 왔다! 이 집이에요!"
"······."
"아니!"
"여, 여기가 2박 3일간 저희 숙소라고요?"
각오를 하고 있던 도훈마저도 민박집 컨디션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쌍팔년도에 지어졌을 것같은 허름한 건물 외관에, 대문 입구에 붙은 ‘민박 받습니다’라는 글씨는 세월의 흔적으로 ‘민’의 일부와 ‘받’자가 지워져 ‘박 습니다.’처럼 읽힐 정도였다.
‘아, 아니 대체 뭘 박는다는 거야.’
학생들 사이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자 부회장 성수가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자자, 일단 마당에 있는 편상 위로 짐부터 내리자. 무겁게 들고 있지 말고."
성수의 재촉에 체육과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짐을 내려놓고 집합했다. 예로부터 체육과는 다른과와 달리 선후배 기강이 엄한 편이었으므로 최고 학년이자 부회장인 성수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마당 한가운데 도열하자 편상 위로 올라 선 성수가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수고 많았다. 예산 문제로 조금 열악한 곳에 묶게 되었지만···."
성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몇몇 학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고?"
"장난해?"
"와, 난 머리털 나고 이런 곳은 처음 와봐."
그러자 성수의 옆에 서 있던 우선이 1학년 학생들을 째려보며 단단히 기강을 잡았다.
"야이 씨! 부회장님 말씀하시는 데 어디서 지방방송 틀고 있어? 방학하고 나사 풀렸냐? 캠프 시작 전에 한따까리 해드려?"
현재 캠프에 참가한 3학년은 집행부에 속하는 성수와 내일 합류하기로 결정된 마유미가 전부. 즉, 2학년 과대인 우선은 서열상으로 그 다음이었다. 어차피 그와 동기 아니면, 대부분이 후배들. 더구나 우선은 전형적인 FM 성격이라, 학과 내 군기반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도훈에게는 귀엽지만, 1학년 후배들에게는 무섭고 어려운 선배인 우선의 엄포에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었다. 한 학기를 지나며 다소 편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체육과는 전통적으로 학과내 군기가 빡센 편이었다.
급 진지해진 분위기에 성수가 우선을 나무랐다.
"인마. 아직 캠프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후배들 갈구고 있어."
"죄송합니다."
"자자, 분위기 풀고.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과가 이 민박집을 통째로 빌렸다는 거! 우리가 3일간 전세냈다 이거야!"
"······."
"···와!"
짝짝짝-
무덤덤한 반응에 보다못한 태영이 박수를 유도했다. 1학년이지만 집행부 일을 도우면서 이번 여름 캠프를 위해 성수와 우선이 얼마나 고생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영의 박수를 시작으로 이곳저곳 간헐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보다 민망해진 도훈이 창피함에 고개를 돌렸다.
‘어휴. 이건 진짜 예상보다 휠씬 참담한데.’
[어쩔 수 없지요. 싫은데 좋다고 연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내 돈으로라도 좋은 팬션 독채 하나 빌려주고 싶다.’
[오버입니다, 주인님.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식으로 쓰면 괜한 오해를 살 것입니다.]
‘알아, 그냥 내 맘이 그렇다는 거지. 성수가 임용 공부도 팽개치고 혼자 죽어라 고생한 거 아는데, 숙소가 저 모양이라 애들 반응이 영 그래서.’
"크흠, 암튼 방 배정은···. 우선아 남자 방이 어디라고?"
"저기 왼쪽 큰 방이요."
"남자들은 왼쪽 방. 여자들은 오른 쪽 방이다. 중간에 작은 방 두 개는 교수님이랑 조교선생님이 묶으실 곳이니까 그리 알고 각장 방으로 짐 풀고 개인 정비 후 30분 뒤 현 장소로 집합한다. 알겠나?"
"네···."
대답이 시원 찮자 군기반장 우선이 인상을 찡그려며 소리쳤다.
"목소리!"
"넵!!!"
다들 개인짐을 들고 숙소로 이동하는 사이 성수가 도훈에게 말했다.
"야, 담배나 한 대 빨러 가자."
"네."
두 사람은 민박집 밖으로 나온 뒤 담벼락 구석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후, 민망해 죽는 줄 알았네. 우선이한테 대충 듣긴 들었는데 숙소 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네."
"요새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건 IMF시절에나 봤던 수준인데."
"응? 니가 IMF시절을 우찌 알고? 마치 그때 대학 다녀본 사람처럼 말해?"
도훈의 말실수에 성수가 뜬금없다는 듯 물었다. 도훈은 당황하지 않고 급히 둘러댔다.
"아,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쌍팔년도 시절같은 드립이랄까. 근데 여긴 얼마에 구하신 거예요?"
"어. 하루에 20."
"20만원요?"
"응. 숙소 알아보던 우선이가 팬션으로 견적 내보곤 너무 비싸다더라고. 그렇다고 갑자기 애들한테 돈을 더 걷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과에서 진행하는 공식 캠프니까 지원금 나오지 않아요?"
"나왔지. 딱 전세버스비 값만큼."
"아···."
"근데 우선이가 하루 20만원으로 40명이 모두 잘 수 있는 방을 구했다는 거야. 비싼 팬션 방 한 개 빌릴 값으로."
"거기가 여기에요?"
"크흠. 그래도 덕분에 숙박비에서 돈 굳혀서 식재료만큼은 왕창 샀잖아."
도훈은 그제야 마트를 탈탈 털고 있던 3인방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돈 걱정 없든 사람처럼 죄다 쓸어 담는 것을 보고 예산이 생각보다 풍족하겠거니 했건만, 알고보니 숙소를 저렴하게 구한탓에 없던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잠깐. 저보고 뜬금 없이 비치발리볼 대회 나가라는 것도 혹시 상금 때문에···."
"1등 100만원이면 큰 돈이긴 하지."
"형!"
"농담이야 인마. 이건 유미가 먼저 제안한 거라고."
"회장이요?"
"어. 원래 전지훈련 때문에 팀에서 빠지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나봐. 그래서 비치발리볼 대회에 나간다는 핑계로 감독님한테 허락을 받은 모양이야. 어차피 같은 배구 종류니까 가서 연습 이어갈 수 있겠다면서."
"그게 완전히 같은 게임은 아니지 않나요?"
"당연히 핑계지. 그래도 명분은 있어야 보내줄테니까. 유미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실내 경기장이랑 모래사장은 완전 느낌 다를 텐데. 거기다 6인제도 아니고 둘이서 뛰는 경기라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너랑 미리 호흡 좀 맞춰봐야겠다고 하더라."
"···저랑 둘이서요?"
"아니, 선수등록은 후보까지 모두 셋이니까 한 명 더. 아무래도 우선이가 뛰는 게 좋겠지? 어차피 후보는 거의 경기 뛸 일 없을 테지만."
도훈은 그제야 유미의 의도를 파악했다.
‘이것 봐라? 대체 어디서부터 큰 그림을 그린 거야?’
[마유미양이 주인님을 노리는 게 확실해 졌군요.]
‘뻔하지. 나중에 연습 핑계로 불러다가 우선이 딴 데 보내놓고···. 어휴, 이걸 진짜.’
[하긴 유미양이랑 못 보신 지 꽤 되기도 했지요. 유미양 입장에선 이렇게 행동하는 게 이해가 되긴 합니다.]
‘사실 유미만 문제가 아냐.’
[그럼요?]
‘아까 버스 출발 전에 보니까 1학년 여자애들도 눈빛도 심상치 않더라고. 뭔가 작정한 눈빛이랄까?’
[허어. 충돌 경보 무지하게 울려대겠는데요. 생각해보니 강민주 조교도 합류하지 않습니까?]
‘난리 났네. 차라리 27명 합방하는 게 다행이구나. 적어도 방으로 불쑥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 주인님 업보입니다. 미션과 업적 수행한다고 같은 과에 여자란 여자는 죄다 건드려놨으니 말입니다. 그러게 진작 인연의 붉은 실 가위로 가지치기를 하셨어야죠.]
‘그건 최후의 수단이지. 아무리 그래도 정없게 애들을 다 내치냐.’
[계속 끌어안고 가시다간 어마어마한 폭탄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위험한 싹은 일찍부터 잘라야지요.]
'일단 최대한 조심해 볼게. 설마하니 학과생 다 모인 민박집에서 달려들진 않겠지.’
[허참, 별일이군요. 그렇게 여자 좋아하시는 주인님이, 이번엔 반대로 여자들을 피해다녀야 하는 입장이라니.]
‘그러게나 말이다.’
"뭔 생각하냐?"
도훈이 계속 조용히 있자 성수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혹시 마유미?"
"네?"
"하긴 유미도 아직 솔로지? 계속 배구만 하느라. 유미는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생각해요? 그냥 나보다 학번 낮은 선배님이지."
"야. 알고보면 유미 걔가 진짜 진국이야. 내가 같이 학교 다녀서 알잖아. 운동하는 얘치곤 얼굴도 엄청 예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그런 애가 왜 지금까지 솔로죠?"
유미의 이상성욕을 잘 아는 도훈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우리 대학 여자배구부 간판 공격수잖아. 당연히 연습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랬겠지."
"그게 정말 다 일까요?"
도훈이 계속 캐묻자 성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여자치곤 키가 너무 크긴 하지만···. 야, 그래도 너랑 서면 그림은 잘 나오겠네. 둘이 한 5Cm 차이 나나?"
‘어휴. 키가 문제가 아니지 이 양반아. 유미 스파이크로 스팽킹 한 번 당해봐야 저런 소리가 쏙 들어갈 텐데.’
유미는 특이하게도 강한 S 성향의 여성이었다. 비슷한 성향의 도훈과는 완전한 상극. 둘이 붙으면 누구 하나 굴복할 때까지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는 터라, 도훈은 유미와의 관계를 유독 힘들어했다.
‘어휴, 유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그래도 덕분에 업적도 완료하셨잖습니까.]
‘그거라도 있으니까 참은 거지. 근데 진짜 그 성벽 받아줄 남자 찾기 쉽지 않을 걸.’
"에이, 됐어요. 혹여나 밀어줄 생각일랑 마요."
"역시 너무 키가 부담되긴 하지? 그럼 혹시 따로 마음에 드는 애 있냐? 오늘 보니까 신입생들 예쁜 애들 많더만. 애들이 한 학기 지나더니 다들 미모에 물이 올랐어."
"왜 자꾸 사람을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요? 저 알아서 한데니까."
"새끼, 튕기기는. 됐고, 짐 풀고 좀 있다 애들 모이면 캠프 강사 소개할 테니까 브리핑 준비나 잘해 둬."
"브리핑이라면···."
"그냥 오늘은 뭐 배우겠다, 내일은 뭐 하겠다 정도만 알려주라고."
"설마 강사가 저 혼자는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남자부는 2학년 승완이랑 찬호가 맡기로 했어. 특히 승완이는 중학교 때까지 수영 배워서 엄청 잘 한다더라. 기록이 안 나와서 선수까진 포기했지만."
"그럼 저는요?"
"넌 당연히 여자부 맡아야지."
"아니 제가 왜···."
"부회장 명령이다, 짜샤."
도훈을 어떻게든 여자들과 엮게 하려는 성수의 결정으로 도훈은 더욱 난감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를 호시탐탐 노리는 여학생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휴, 진짜 저 화상. 시작부터 바짝 긴장해야겠네.’
도훈은 구시렁거리며 숙소에 개인 짐을 풀었다.
***
"자, 그러면 3일간 여러분의 수영캠프를 책임질 조교를 소개한다. 2학년 도승완, 김찬호 그리고 이도훈 앞으로."
"와아아아아!!!"
성수의 부름에 앞으로 끌려 나온 도훈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부터 여학생들은 아이돌이라도 등장한 것처럼 격렬히 환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함성은 도훈이 여학생 전담 강사로 배정되는 순각 극에 달했다.
"꺄아아아!"
"선배님 멋져요!"
"오빠, 개인지도 부탁해요!"
"오빠, 저 물에 빠지면 구해 주실 거죠?"
"개수작 부리지 마! 넌 내가 건져줄 테니까."
시작부터 아비규환이었다.
< 945. 별이 쏟아지는-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