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4. 별이 쏟아지는-4- >
시크한 표정으로 나연과 연두를 노려보는 여학생은 바로 서현이었다. 티팬티 인증으로 논란을 일으킨 수석입학생.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후 서현은 1학기 성적표를 받았다. 종합 평점 4.4의 놀라운 성적.
평년 같으면 당연히 학년 수석은 물론 체육과 전체에서도 1등을 노려볼만 했지만, 그녀는 조교 강민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장학금 여부는 2학기 등록금 납부 기간에 알 수 있는 거죠?
-응, 근데 아쉽겠다. 열심히는 했는데 이번에는 전장이 어려울 거 같아.
-···예? 제 평점으로도요?
-응, 이번에 우리 과에서 사범대 전체 수석이 나와버렸거든.
-전체 수석요? 누구요?
-아직 소식 못 들었니? 도훈이가 의외로 겸손한 성격인가 보네. 성적 나온 첫날 알아 갔는데.
-도, 도훈 오빠가 그럼 1등이에요?
-응. 4.5 만점. 그러니 사범대 전체 수석이겠지?
서현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수능 성적 평균 최하위라는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점수로만 치면 사범대 3대장이라는 국영수 교육과 어느 곳을 지원했더라도 너끈히 합격할 실력자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훈에게 밀리다니.
그와 기말시험 때 내기한 것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제가 오빠 이기면 저랑 만나주실 거죠?
서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가 아는 도훈은 천하의 바람둥이.
희주도 건드리고, 정음이도 농락하고, 심지어 조교 강민주와도 썸씽이 있었다. 자신 역시 당한 전력이 있었고.
그런데 여자들을 실컷 가지고 노는 와중에도 평점 4.5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거둔 것이다. 자신은 죽을 둥 살 둥 공부만 했는데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서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교수들에게 몸 로비라도 한 것일까? 그녀가 아는 도훈의 바람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훈이 들었던 과목은 남자 교수들이 훨씬 많았다. 설마하니 도훈이 비역질을 했을 거라곤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컨닝?
객관식이라면 컨닝도 가능했겠지만, 기말 과목의 절반 이상은 주관식이었다. 심지어 서현 자신도 함께 치렀던 시험은 논술형. 문제를 미리 빼돌려 모범답안을 달달 외워오지 않는 이상 논술을 컨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말도 안 돼. 그 시험은 심지어 제일 먼저 나가면서 금메달까지 땄었잖아?’
금메달이란 가장 먼저 시험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붙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다. 대체로 해당 과목을 포기한 사람들이 나머지 과목이라도 잘 보자는 마음으로 자진납세 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럼 그때 금메달을 따고도 만점을 받았었다는 거야? 그것도 논술형 문제를?’
서현은 이쯤되자,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남은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도훈 천재설.
보통 잘생기거나, 운동을 잘하면 당연히 공부 쪽은 부족할 것이라고 여기는 게 정설이다. 특히 체육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집단에서도 군계일학의 운동신경을 내보인 도훈이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그런데 그런 편견을 깨고, 만약 도훈이 타고난 천재라면?
머리가 좋아서 한 번 본 것을 절대 까먹지 않고, 집중력이 뛰어나 똑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남보다 몇 배의 성취를 얻는 두되의 소유자라면?
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더욱이 도훈이 수업이 끝나면 늘 도서관 출몰한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도훈은 보기 드문 노력하는 천재 유형인 것이다.
게으른 천재는 그 게으름으로 망하고, 노력하는 둔재는 보는 사람마저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노력하는 천재라면 누구도 이길 수 없다. 하필 도훈이 천재라니. 얼굴천재, 몸천재에 이어 공부마저 천재라니.
‘이, 이길 수 없어.’
서현은 절망과 동시에, 뼛속 깊은 소유욕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벌써 도훈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가 가진 섹시한 뇌까지 흠뻑 빠져버린 것이었다.
‘오빠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특히 나연이나 연두 너희 같은 변태들에게는 더더욱.’
서현은 눈치가 기민하게 빨랐고, 두 사람이 단짝 이상으로 섹슈얼한 관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특히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단둘이 있을 때 몰래몰래 벌이는 스킨십의 정도가 선을 넘는 경우가 잦았다.
‘오히려 저것들이 더 문제란 말이지.’
서현은 연두와 나연의 앞에 앉은 경희와 희주를 눈여겨보았다.
경희는 누구나 인정하는 건강미인.
운동능력도 발군인 데다, 특유의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여름철에 포텐이 폭발하는 타입이다. 특히 테니스로 단련된 튼실한 하체는, 같은 여자가 봐도 부러울 정도였다.
반면 희주는 최근 들어 급부상한 신성.
원래부터 몸매는 알아주긴 했지만, 얼굴은 못난이 같다고 무시당했었는데, 갑자기 미모가 폭발하면서 체육과 남학우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항간에는 성형 의혹도 잠시 돌았지만, 학기 중 수업 한 번 빠지지 않았던 사실 때문에 논란은 금세 불식되었
다.
‘하여간 저 둘이 요주의 경계 대상이야. 경희도 도훈 오빠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고, 희주는 아예 대놓고 질질 흘리는 다니는 타입이니까.’
반면 서현이 가장 큰 경쟁상대로 여겼던 정음에 대한 경계는 많이 약화 된 상태였다.
‘정음이는 뭐. 얼굴 빼곤 볼 것도 없지. 성격도 선머슴 같고.’
지금도 유일하게 버스 옆좌석에 남학생과 함께 앉을 정도로 털털한 성격인 데다, 여학생들 특유의 여우짓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경쟁 대상 분석을 마친 서현은 이번 여름 캠프 기간 어떻게 해서든 도훈을 독차지하고 말겠다는 플렌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뛰어난 머리는 태안으로 향하는 동안 쉴 새 없이 굴러갔다.
한편, 서현이 관심 밖으로 놓은 정음은 태영의 옆자리에 앉아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태영아, 방학 잘 보내고 있니?"
"날 더워서 요샌 집구석에서 게임만 하고 있어."
"게임? 무슨 게임?"
"그냥 뭐, 괴물도 때려잡고 지구도 몇 번 구하고 문명도 건설하고. 아주 공사가 다망해."
"공사가 다 망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태영은 백치미 넘치는 정음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흐, 역시 정음이는 뇌까지 청순하단 말이지. 하지만 어쩌나. 이제 내 마음은 온통 조교 샘한테 뺏겨버린 걸.’
민주에게 꽂힌 태영은 이제껏 매력적으로 보였던 동기들이 하나같이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스무살 풋풋함은 있지만, 여자로서의 성숙미에선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격차를 느낀 것이다.
‘으으, 젖비린내. 하긴 니들이 무슨 잘못이겠니, 하필 민주샘이랑 같은 소속이라는 게 문제지.’
"아, 암튼 그런게 있어. 정음이 넌 방학 때 뭐했어?"
"나? 거의 태권도장에서 살았어. 대회 준비 돕느라."
"어휴, 알바만 주구장창 하는구만. 1학기 내내 계속 하던 거 아냐?"
"응. 맞아."
"그렇게 열심히 돈 벌어서 어디다 쓰냐 넌? 동기들 밥도 좀 쏘고 그래봐."
"으, 응. 다음에 기회 되면."
태영의 물음에 정음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민망해졌다. 태권도 사범 알바로 받은 돈 대부분을 도훈의 선물값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정음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이번 달 알바비 받으면 오빠 여름옷이나 한 벌 사줘야겠다. 맨날 비슷한 옷만 입고 다니는 거 보면 옷이 몇 개 없나 봐.’
정음이 애틋한 마음으로 맨 앞 열에 앉은 도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도훈은 부회장인 성수와 함께 버스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야, 넌 옷이 그게 뭐냐."
성수가 도훈의 후줄근한 카라티를 보고 핀잔했다.
"제 옷이 왜요?"
"인마, 그래도 바닷가 가는데 바캉스 룩으로 쫙 빼입고 와야지. 얘들 옷 입은 거 못 봤냐? 선글라스는 기본에, 다들 화려하게들 차려입고 왔더만."
성수가 혀를 끌끌 찼다.
‘이 새끼는 가만 보면 얼굴만 믿고 너무 대충 다닌단 말이지. 아무리 밀어 줄래도 도통 관심이 없으니, 쯧.’
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휴, 어차피 바닷가 가면 다 벗을 거 뭐하러 옷에 신경 써요. 옷 입고 수영할 것도 아니고."
"어쭈. 벗은 몸에 자신 좀 있나보다?"
성수가 이두박근을 과시하며 알통을 크게 부풀렸다. 어찌나 근매스가 큰지, 입고 있던 반팔티가 찢어질 것처럼 꽉 끼었다.
"봤냐. 이 정도는 되어야 근육이라고 하는 거야."
도훈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형. 요새 누가 근육을 그렇게 무식하게 키워요. 형 팔꿈치끼리 서로 안 닿죠."
"팔꿈치? 뭔 말이야?"
"아니 양팔 가슴으로 끌어 모아봐요. 버터플라이 짜듯."
"이렇게?"
성수가 복싱 가드 자세로 두 팔을 수직으로 세우더니 가운데로 끌어모았다. 하지만 워낙에 가슴이 두꺼운 나머지 두 팔 사이로 주먹이 들어갈 만큼 휑하게 벌어졌다.
"어, 엇. 왜케 안 붙지."
성수가 당황하자 도훈이 말했다.
"거봐요. 벌크만 들입다 키우니까 이제 팔꿈치도 안 닿잖아."
"새꺄. 그래도 남자는 힘이지 힘."
"저도 충분히 세거든요?"
"어쭈. 요새 운동 좀 했나보다? 자신있어?"
"무슨 자신이요."
"팔씨름 한번 가?"
"버스 안에서 어떻게 팔씨름을 해요."
"좋아. 그럼 악수한 번 하자."
성수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도훈 역시 지지 않고 성수의 손을 맞잡았다.
[주인님,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성수군은 타고난 장사인데요.]
‘스파르탄의 벨트를 실험해 보려고 그런 거야.’
[아아.]
성수가 천천히 악력을 높이며 도훈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놔 줄 의향 있는데."
"저 악력 약한 편 아닌데."
"어쭈. 니가 유도선수 악력을 물로 보는구나. 내가 잡아챈 도복 깃만···.,"
성수가 바짝 힘을 주자 도훈이 버티기에 들어갔다.
‘우오오, 곰탱이 새끼 진짜 어마어마하게 센데?’
도훈은 예상치 못한 힘에 놀랐으나, 아이템 효과로 20% 증강된 악력은 성수의 괴력을 버틸 수 있게했다. 이쯤되자 성수도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야? 이걸 버틴다고? 이 새끼 대체 무슨 운동을 한 거야?’
장난으로 시작된 악력 다툼은 두 사람이 얼굴이 뻘게질때까지 이어지다 겨우 무승부로 끝났다. 도훈도 버틸 수는 있었지만, 최대치로 힘을 끌어내도 역공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휴, 요새 임용공부 때문에 운동을 좀 쉬었더니···."
"역시 형은 힘 하나는 최고네. 손 부러지는 줄."
"야, 그래도 내 악력 버텨낸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 뭔데 이렇게 힘이 좋아졌냐? 예전이랑 다른데?"
"여전히 성장판이 안 닫혔나 보죠."
도훈이 피식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파르탄 벨트의 효과가 성수같은 엄청난 떡대와 비등할 정도로 근력을 강화시켜준다는 사실을.
‘이햐, 이거 의외로 물건인데. 이 정도로 힘이 세졌을 줄이야.’
[근력 20% 상승이 적은 게 아니죠. 복싱으로 치면 라이트급에서 헤비급으로 올라선 정도의 변화인걸요. 거기다 애초에 주인님의 근력도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극적인 효과를 보일 겁니다.]
‘이러면 운동능력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근력이 필요한 운동이라면요.]
‘호오. 이거 기대되는 걸.’
자신이 약해진 것으로 대충 결론 내린 성수가 도훈을 툭 치며 말했다.
"인마. 힘만 넘치면 뭐하냐, 어차피 쓸데도 없는데."
"제가 왜 쓸데가 없어요?"
"그 힘 말고 말이야."
성수가 활짝 가랑이를 벌렸다. 최근 도훈의 파스 아이템 처방으로 부쩍 여친과의 관계가 좋아진 자신감의 일환이었다.
"아, 쫍아요! 가뜩이나 형이랑 앉아 좁아 죽겠구만."
"암튼 인마. 내가 너 이번에 작정하고 밀어 줄 테니까 딱 고르기만 해. 우선이도 돕기로 했어."
"아니 무슨 제가 여친 못 사귀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말했잖아. 3학년 되면 사귀고 싶어도 기회도 없다고. 아우, 진짜 내가 얼마나 답답하면 이러겠냐?"
"형 마음은 진짜 고마운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도훈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성수가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내가 너였으면 벌써 몇 명은 꼬셨겠다. 이제 그만 과씨씨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때도 됐겠구만.’
성수는 여전히 도훈이 군입대 전 받은 상처로 여친 사귀길 두려워한다고 오해했다. 그 때문에 더욱 그의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주고 싶었다.
‘암튼, 니가 아무리 싫다해도 이번만큼은 내가 등 떠밀어서라도 여친 만들어 주고 만다. 나중에 나한테 고맙다고 절이나 하지 마라.’
"엇, 바다다!"
그때 창가를 보고 있던 한 학생이 크게 소리쳤다.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2시간여를 내달린 버스가 어느덧 해안도로로 접어든 것이었다. 잠잠하던 버스 안이 술렁이며,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흥분감에 휩싸였다.
버스 기사가 도착 10분 전을 알리자 부회장 성수가 통로에 서서 일정을 알렸다.
"하차하면 숙소에 짐부터 풀고 곧장 마당 앞으로 집합한다."
"넵!"
안내를 마친 성수에게 도훈이 조용히 물었다.
"마당이라뇨?"
"몰랐냐? 우리 이번에 민박하기로 했잖아. 우선이가 4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민박집으로 예약했거든. 엄청 싼 값에."
뒷자리에 있던 우선이 자신을 칭찬하는 줄 알고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 944. 별이 쏟아지는-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