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3. 별이 쏟아지는-3- >
***
무더운 여름 방학.
활기 넘치던 대학 캠퍼스도 한산해진 이때, 체육교육과가 자리한 사범대 1관 앞으로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기대에 들뜬 표정.
하와이안 셔츠에 선글라스, 챙이 넒은 모자를 쓴 남학생도 있고,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돌핀 팬츠에 끈나시만 걸친 여학생도 있었다. 양손가득 쇼핑가방과 백 팩을 메고, 커다란 캐리어까지 끌고 온 학생들도 종종 보였다.
이들의 집결지는 사범대 1관 주차장 전세버스 앞.
그리고 그곳엔 한 시간 전부터 미리 와 짐을 나르고 있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야, 그건 위로 올려야지."
부회장 성수가 도훈의 차에서 내린 짐을 후배들과 함께 버스로 옮기는 중이었다. 도훈의 말에 따르면 장보기를 하도 ‘거국적’으로 하는 바람에 차에서 버스로 옮기는 데만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남학생들이 인간 띠를 이루어 전달행렬에 속속 참여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자기 개인 짐을 싣기 바쁜 나머지 남일 보듯 구경만 하는 중이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바닥에 자기 가방을 팽개치더니 짐나르기에 동참했다. 캐리어까지 끌고 온 다른 여학생에 비하면, 단촐해 보일 정도로 작은 백팩 하나만 메고 온 학생이었다.
트렁크와 뒷좌석에서 짐을 빼던 도훈에게 다가간 여학생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오빠, 저도 도울게요."
"정음이니? 괜찮아. 이건 남자들이 할게."
도훈은 간만에 본 정음이 반가웠지만, 무거운 짐나르는 일은 남학생들만 해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음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에요. 이런 일은 다 같이 해야죠. 그리고 저 힘 세요."
정음이 한사코 물러나지 않자,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생수 24개 들이 박스를 건냈다.
"그럼 이거라도."
"넵!"
정음은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생수를 받아 버스로 향했다. 도훈은 다른 여학생과 달리 적극적으로 학과일에 동참하는 정음의 태도가 고마웠다.
‘참, 착하단 말이야.’
[몸매가요, 아님 얼굴이요?]
‘마음씨 인마. 물론 다른 것도 착하지만.’
정음의 가세를 시작으로 눈치를 보던 다른 여학생들도 차에서 짐을 내리는 도훈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저도 도울게요!"
"도훈오빠 같이 해요."
정음이 도훈에게 점수를 따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인식했는지 갑자기 경쟁적으로 바뀐 분위기에 짐 싣기에 속도가 배가되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성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신입생 여자애들 엄청 적극적이지 않냐? 옛날부터 체육과 남학생은 머슴이라고 불렸는데."
"애들이 다 착하잖아요."
"크크. 이 새끼 수영복 사진 보고나더니 눈 돌아가서 후배 노리네?"
성수가 우선에게 핀잔을 줬다. 일찍 나와 일을 돕고 있던 우선이 볼맨소리로 말했다.
"형, 저도 군대 가기 전에 여자친구 한번은 사귀고 가야죠. 군대 가면 편지 써줄 사람도 없는데."
우선은 일전에 아이돌 연습생과의 소개팅에서 ‘보보가’를 외친 기억이 떠오르는지 무척 상기된 표정이었다. 술에 취해 길거리 한복판에서 절규하던 그날, 그는 결심했다.
입대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친구를 꼬시고 말겠노라고.
"참, 너 2학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입대냐? 휴학하고?"
"네. 올 여름방학이 마지막이에요."
"어휴. 노답이네 진짜. 근데 곧 군바리 될 사람을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
"흑. 형, 놀리지마요. 저 나름 필사적 이니까."
성수는 군대에 끌려가는 후배가 안타까운지 도훈을 도와 짐을 나르고 있는 1학년 여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부회장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최대한 너 밀어줄게. 1학년 중에서 누구 노리고 있는데? 저기 치마 입고 온 쟤?"
"연두 괜찮죠."
"아님, 원피스 입고 온 쟤?"
"나연이도 좋고요."
"쟤는 어때? 핫팬츠 입고 야구모자 쓴."
"어휴, 요즘 희주면 제가 엎드려 절해야죠."
성수가 한심한 듯 말했다.
"이 새끼 이제 보니까 치마만 두르면 다 좋다는 거구만!"
"아, 아니 그니까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1학년 후배들이 하나하나 워낙 출중하다는 말이죠."
"인마, 딱 정해줘야 내가 몰래 밀어주기라도 할 거 아냐?"
"형. 전 그냥 아무나 밀어주면 돼요. 그럼 제가 알아서···."
"알아서 같은 소리 하네. 니가 알아서 잘 할 타입이면 2학년 1학기 마치고 군대 갈 때까지 모쏠이겠냐."
"크흑. 이번엔 진짜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성수가 안타깝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 과에 여학생만 전부에 남자가 너 하나 뿐이면 모르겠는데 내부에 경쟁자가 너무 많지 않냐?"
"경쟁자요?"
"봐, 남학생이 대체 몇이냐고. 저 중 3분의 2는 시커먼 남자새끼들이잖아."
"아···."
"그리고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여자들은 절대로 나눠갖는 법 없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남자들은 적당히 타협해서 알아서 흩어지는 편이잖아. 그래야 출혈경쟁을 피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근데요?"
"근데 여자들은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으면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하단 말이야. 막말로 세컨이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헐, 세컨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암튼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 놈이 여기 최상위 포식자일 가능성이 커."
"누구요?"
우선이 긴장된 표정으로 성수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차에서 열심히 짐을 퍼주고 있는 도훈이 있었다. 그리고 도훈에게 짐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여학생들이 보였다. 한 번이라도 그와 말을 붙여보겠다고, 머슴을 자처한 여학생들을 보는 순간 성수의 말이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아아! 그런 거구나! 도훈이 형이 우리과의 최상위 포식자였어!’
성수가 계속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왜 우리과에 예쁘고, 인기 많은 여학생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많은데 지금껏 커플된 사람이 거의 없는지 말이야."
"왜요?"
"바로 저놈 때문이야."
"도, 도훈이형요?"
성수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가 아직 쏠로잖아. 그러니까 다들 아직 기회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거라고."
"아!"
"학과 내 최고의 인기남에게 아직 여자친구가 없는 거잖아. 혹시나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다른 남자는 쳐다도 안 보고 오매불망 도훈이 저넘만 보고 있는 거지."
"그렇군요!"
"즉, 달리 말하면 도훈이가 짝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
"그럼···. 나머진 세컨이란 써드가 되는 건가요?"
"아니지, 이 븅신아."
성수가 답답한지 우선의 삼두박근을 쿵 때렸다.
"억! 아파요, 형."
"그땐 갈피를 잃은 나머지 여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거란 말이야. 쉽게 말해 너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는 거라고!"
"아, 아! 그럴수가! 부회장님은 역시 연애고수시군요!"
자신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우선을 보며 성수가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어휴, 이러니까 니가 여태 모쏠이지. 암튼, 미안하다 우선아.이렇게라도 해서 도훈이부터 보내고 보자. 넌 어차피 군대갈거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성수가 속마음과 다르게 우선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너의 최우선 과제는···."
"최우선 과제는요?"
"도훈이가 먼저 여자친구를 사귀게 돕는거야."
"역시!"
"최상위 포식자가 먼저 옆구리를 꿰차야 너에게도 기회가 오는 거라고. 사실 넌 딱히 꽂힌 애도 없다며. 누구든 하나만 걸리면 되는 거 아냐?"
"마, 맞습니다. 부끄럽지만, 이젠 여자기만 하면 다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하-. 그렇다고 아무나 막 꼬시진 말고."
"아무나까진 아니고요. 1학년 여자애들 물이 워낙에 좋아서 그런 거니까."
"그렇지?"
성수가 우선이를 포섭하고 있는 사이 태영은 조교실에 들르는 중이었다.
"조교샘, 제가 뭐 나르면 되나요?"
"어? 왔니. 도훈이 불렀는데···."
민주는 기다리던 도훈이 오지않고 태영이 짐을 가지러 들어오자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 도훈이형 차에 어제 마트에서 장본거 다 실려있거든요. 짐내리기 바쁘다고 저 대신 보냈어요."
"그렇구나. 일단 이거랑, 저 박스 좀."
"넵. 이건 교수님 짐인가요?"
"어, 지도교수님 가방이랑 과에서 가져가는 장비들이야. 내 차로 같이 옮겨주면 돼."
"넵."
태영은 짐을 들다 바캉스 복장으로 차려입은 민주를 보며 생각했다.
‘우아, 이제 보니 조교샘도 엄청 예쁘구나. 저렇게 화려하게 입으니까 출근할 때랑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
태영은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미니 원피스를 입은 민주의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특히 가슴에 찬 선글라스 무게로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자 의외의 볼륨에 속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생각해보니까 조교샘도 우리과에서 졸업하자마자 바로 돼서 나랑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늘 어렵게만 느껴졌던 민주였지만, 한 학기를 같이 보내고 나자 점점 여자로 느껴지는 태영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동기를 남자취급도 안 하는 여학생들에게 굳이 매달릴 필요 없잖아? 요샌 연상 연하 커플도 은근히 많은 편이라니까.’
민주의 차에 짐을 실으며 태영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중이었다.
‘흐흐,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구나. 이렇게 가까이에 성숙한 미인이 있었는데 말이야.’
"태영이는 학과생활 참 열심히구나. 성수 도와서 장도 같이 봐주고."
"아,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인데요."
"응. 샘은 태영이 같이 열심힌 애들이 참 좋더라."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치례였지만, 태영은 민주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한 줄 알고 바짝 고무되고 말았다.
‘오오! 역시, 조교샘도 은근히 나같은 타입을 좋아하는 거였어. 혹시 연하남 킬러 이런 건 아니겠지?’
"이제 한 번만 더 나르면 되겠다."
"네, 넵. 저 혼자 금방 다녀올게요."
"아니야. 같이 가. 혼자 들긴 무거울거야."
"하하! 저 힘 좋아요!"
민주의 칭찬에 바짝 흥분한 태영은 혼자 할 수 있다면 헐레벌떡 학과 사무실로 뛰어갔다. 주차장에 홀로 남은 민주가 뛰어가는 태영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도훈이도 저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힝, 일부러 내 차타고 같이 가자고 부른건데, 안되겠지?’
짐 싣기가 모두 끝나고 버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학년 과대들이 나서 인원파악을 시작했다. 다행히 지각자 하나없이 정시에 모두 도착하자 버스에 오른 성수가 조교 강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교 선생님, 출발준비 끝냈습니다."
-어, 고생했어. 난 내 차로 교수님들 모시고 출발할게. 너도 바로 출발해.
"넵."
통화를 마친 성수가 버스 앞 좌석 가운데 통로에 서서 소리쳤다.
"자, 그럼 여름 수영 캠프 출발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태영의 선창에 화답하듯, 체육과 일원이 뒷소절을 떼창했다.
"해변으로 가요!!"
태안 해수욕장에서의 2박 3일 일정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
연두와 나연은 언제나처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나연아, 난 이거 올 여름 첫 피서야."
"진짜? 난 벌써 가족들이랑 제주도 한 번 다녀왔는데."
"가족들이랑 가는게 무슨 피서니, 노동이지."
"하긴 그래. 오빠 새끼가 하도 설쳐대서 죽이고 싶더라니니까?"
"원래 오빠들은 사람 아니잖아."
오빠 얘기를 꺼낸 나연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맞다. 우리 오빠새끼가 너 사진 보더니 관심보이더라?"
"진짜?"
"응. 누구냐면서. 남친있냐고."
"그래서 뭐랬어?"
"남친은 없는 데 꿈에도 꾸지 말랬지."
연두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남친은 없는데 여친은 있다 그러지."
"무, 무슨?"
연두가 은근슬쩍 나연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비밀 애인."
"야아!"
나연이 놀란 듯 연두의 못된 손등을 탁- 쳤다.
"하지마."
"왜? 우리 나연이 방학 사이에 얼마나 여자가 됐는지 궁금한데?"
두 사람은 1학기 내내 붙어 다니며, 은밀한 일(?)을 자주 벌인터라 서로간의 터치가 자연스러웠다. 물론 양성애자인 연두의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연이 주변을 살피더니 연두에게 속삭였다.
"말했지만 난 이번 캠프 때 꼭 도훈이 오빠 노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자중해."
"치, 질투나서 살겠냐."
"왜? 너도 도훈이 오빠 좋아하잖아."
"난 나연이 너도 좋아한다고."
"암튼, 난 이번에 작정했어."
"어째 너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더라?"
"뭐라고?"
연두가 핸드폰을 증거로 내밀엇다.
"봐. 우리가 사진 올리고 뒤이어 올린 애들. 애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야한 비키니 골랐을 거 같아?"
연두가 보여준 폰에서 강경희, 박서현, 양희주 등등 수영복 착용샷이 한 장씩 슬라이드 됐다. 두 사람 모두 나름 신경을 쓰고 수영복을 골랐지만, 인증 레이스에 참여한 나머지엔 살짝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 요년들 진짜. 작정했네 했어."
"그나마 정음이가 제일 무난하더라."
"어, 나도 봤어. 혼자 레쉬가드 입었던데?"
"크크. 은근히 몸매에는 자신이 없나 봐."
"아무래도 몸매는 희주지?"
"희주 고것이 제일 문제야. 요새 좀 예뻐졌다고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다니잖아. 도훈 오빠는 은근 유혹에 약한데···."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돼. 둘이 한 명을 못 이길건 뭐니?"
"맞아. 둘이서 같이 힘내보자."
"응!"
열심히 뒷좌석에서 떠들고 있는 연두와 나연을 멀리서 지켜보던 여학생이 혼자 콧방귀를 끼더니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촌스럽게 들떠있기는.’
< 943. 별이 쏟아지는-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