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52화 (919/2,000)

< 935. 여름 방학-27- >

도훈이 껄렁거리며 대답했다.

"달린 눈을 그럼, 어디로 치울까요?"

"뭐요?"

"어차피 들어 올 때 볼 장 다 봤구만, 뭘."

"무, 무례하군요!"

정원이 치를 떨며 정색했다.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도훈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한 마디로 양아치. 정원이 평소 교류하는 무리와는 전혀 달랐다.

‘저질스러워. 하긴 그러니 사냥개처럼 남의 뒤나 캐고 다니겠지만.’

도훈이 과장된 동작으로 코밑을 비비적댔다.

영락없는 하류 인생의 표본이었다.

"참네, 무례는 아까 그 변호사가 더 하더만."

"뭐라고요?"

"미안한데, 두 사람 대화 아까 밖에서 다 들었어요."

"서, 설마 도청한 거예요?"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우리 직업이다 보니, 이해하쇼."

"대, 대체 어디서부터···."

"10시 30분, 명륜동 공용주차장에서 접선. 10:43분 경, 현 모텔로 각각 이동···. 더 읊어 드릴까?"

"그, 그만 해요. 역겨워 토할 것 같으니까."

도훈은 최번개에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을 미행한 것처럼 꾸몄다. 도청 장치 또한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솔직한 말로 별의별 사람들 뒤는 다 캐고 다녔지만, 그 변호사 같은 막장은 처음 봤수다."

"그 이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쪽이 모르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

"그리고 궁금할 것 같은 이야기도."

도훈이 뜸을 들이며 호기심을 유발했다.

결국 정원이 낚였다.

"무, 무슨 소리죠?"

"헤-. 이제 좀 구미가 당기시나?"

[주인님, 저 몰래 메소드 담배 피우신 거 아니죠?]

‘어, 안 피웠는데?’

[이건 천성 양아친데요? 연기력 아이템이 필요 없을 정도랄까.]

‘크크. 자꾸 하다 보니 연기도 느는구나.’

도훈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김 변에게 정말 당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알고 있어요. 지방에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 하지만 그 여자랑은 이제 거의 교류가···."

"아니지. 그건 페이크지."

"···네?"

"아줌마가···, 아니 뭐라고 불러야지? 암튼 최근에 사모님이 먼저 보자고 할 때 까인 적 있죠?"

"그건 일이 바빠서···."

"정말 일이 바빠서라고 생각해요?"

도훈이 얄밉게 이죽거렸다.

"하긴 바쁘긴 하겠네. 영계로 몸보신 하려면."

"영계라뇨?"

정원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변호사 요새 스폰도 하더라고요."

"스폰?"

"왜, 어린 여자애 용돈 주면서 가끔 필요할 때 섹파처럼 만나는 거···. 진짜로 몰라요 스폰?"

"거, 거짓말."

"못 믿겠으면 믿지 마시고. 암튼, 여자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한 놈이에요. 직업이 변호사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인 줄?"

"지금 그 이런 얘길 왜 저한테 다 말해주는 거죠? 당신은 어차피 결혼할 여자 측에 고용된 사람이라면서요?"

도훈이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어차피 난 정의감 따위 하나도 없는 인간이에요. 돈만 보고 움직이지. 그래서 말인데, 아까 사모님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했었죠?"

"······."

"나한테 얼마까지 줄 수 있는데요? 금액 한번 맞춰보고 우리 쪽 고용주보다 더 부르면, 내가 사모님 편에 붙을지도 모르지."

"내, 내 쪽에 붙는다고?"

"당신이 사랑하는 변호사가 이대로 인생 망가져도 괜찮겠어요? 준재벌급 집안의 데릴사위가 될 일생일대의 기회를, 이대로 파혼당하고 추락해버려도 상관없냐고요."

도훈의 제안에 정원이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캬, 야비하군요. 주인님도.]

‘크크. 눈치챘냐?’

[당연하죠. 앞서 김 변호사의 비행을 신랄하게 까놓고, 갑자기 사랑하는 김변을 위한 입막음 비를 달라니. 어느 여자가 거기에 동의하겠습니까?]

‘그치? 아무리 정원이 순해 빠졌어도, 이쯤 되면 빡칠만 하지?’

[충분합니다.]

침묵하던 정원이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 지금 한 얘기 다 사실이죠?"

"당연하죠. 내가 그럼 길 가다 우연히 여기 모텔방으로 굴러들어왔을까? 일주일 넘게 캐고 다녔다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요?"

"돼, 됐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럼···. 이대로 진행합니다? 파혼당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간주하면 되죠?"

"잠시만요."

정원이 일어서려는 도훈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요? 예쁜 사모님이 갑자기 마지막에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셨나?"

"당신들, 돈만 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거 맞아요?"

"맞습니다. 금액만 맞으면 그게 뭐든."

"가만 생각해보니까 김변 그 개자식이 날 가지고 논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요."

"뭐, 인간적으로 이해는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고용주에게 사실대로 보고 하겠다잖아요. 공들였던 결혼이 무산되면 변호사 표정 볼 만 하겠네."

"···그정도론 성에 안 차요."

"예?"

정원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부숴버리고 싶어요. 김 변의 모든 걸 다."

"아, 아니···."

‘크크. 먹혔다. 역시 여자의 질투만큼 무서운 감정은 없는 법이지.’

[이간질 참 잘 하시는군요. 대체 주인님은 못 하는 게 뭡니까?]

‘이쯤 되면 나도 내가 두렵다. 대체 얼마나 잘난 건지 가늠이 안 되서.’

"도와주세요. 아니 부탁드릴게요."

"도움이고 부탁이고, 그거 다 공허한 단업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에겐 쩐이 믿음이고, 머니가 의리죠. 얼마까지 지불 할 수 있으신데요?"

"그게···."

정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은 많지 않아요."

"그럼 뭐, 협상은 결렬이네."

도훈이 매몰차게 돌아서자 다급해진 정원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왜 이러실까? 내가 방금 말했죠? 돈 없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 꿈쩍 않는다고. 나를 고용하고 싶으면 캐쉬를 가져오라고요. 당장."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앉아봐요.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참나."

도훈이 마지 못한 척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래요. 해봐요, 얘기."

"실은 2년 전 상속받은 받은 부동산이 있어요."

"부동산?"

"경기도에 있는 대진데, 적은 평수는 아니에요. 못해도 10억은 넘을 거예요. 남편 것이 아닌 제 명의고요."

"그래서요?"

"담보대출을 받으면 못해도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흐음. 그러니까 사모님 말은, 부동산에서 대출받아 현금을 땡겨 줄 테니 한 번만 믿어달라?"

"그래요."

"무슨 근거로?"

"···네?"

"말했잖아. 나는 현금만 받는다니까? 집에 금송아지가 몇 마리가 있건, 채권이고 주식이고 부동산이고 나발이고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왜 똑똑한 양반이 이 쉬운 걸 이해를 못 하실까?"

"그, 그치만. 대출을 실행하려면 어느 정도 말미를···."

"아이고, 됐수다. 그냥 지금 고용주한테 가서 싹 다 보고하고 잔금 정리나 하렵니다. 난 또 뭐라고."

"글쎄 준다니까요? 왜 사람 말을 못 믿는데요?"

도훈이 야비하게 웃었다.

"나는 말로만 한 약속은 절대 안 믿는 주의거든."

"그럼 뭘 믿죠? 각서라도 써드려요?"

"그깟 종이쪼가리가 무슨 효력이 있다고? 여기서 당장 공증받을 거 아니면, 각서 얘긴 꺼내지도 마쇼."

"아니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데요? 나중에 돈을 준데도 믿지도 않으면서···."

그때 도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마치 이 질문만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아, 그렇지. 여성 의뢰인이라면 담보로 쓸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게 뭐죠?"

"나체 사진."

"미, 미쳤어요! 어디서 감히!"

흥분한 정원이 목청을 높였다. 나체라는 단어를 꺼낸 것만으로 극도로 혐오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아니 아니, 내 설명 끝까지 들어봐요. 여자한테 자신의 벗은 모습보다 훌륭한 담보가 어딨겠어요? 약속? 믿음? 각서? 그딴 거 다 필요 없다니까? 자신의 나체 사진이 지인들 사이에 퍼진다고 생각해 봐요. 겁나서 돈을 안 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담보로 최고

지."

"지, 지금 그러니까···. 나보고···."

"당장 나한테 줄 현금 없다면서요? 담보대출 심사 들어가고 승인 떨어지려면 빨라도 일주일이에요. 그 전에 일을 시작 해야 하는데, 막말로 착수금도 없이 좆뺑이 치다 나중에 땡전 한 푼 못 건져봐? 얼마나 열 받는지. 하지만 사모님의 나체 사진을 내가 들고

있다면, 나한테 잔금을 치르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내 말 틀려요?"

[정말이지 궤변의 끝판왕입니다, 주인님은.]

‘기다려 봐. 지금 귀가 팔랑팔랑하는 거 같으니까.’

한참 대답을 망설이던 정원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도훈을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질이군요, 당신이라는 인간은."

"아, 예 뭐. 이렇게 생겨 먹어서 죄송하게 됐수다."

"근데 당신한테 그럴 능력이 있긴 해요?"

"무슨 능력?"

"김 변을 완전히 부숴버릴 수 있는. 능력도 검증 안 된 사람을 제가 어떻게 믿죠?"

"질문이 틀렸네."

"네?"

"저한테 먼저 말해 봐요. 김변을 어디까지 망가뜨리고 싶은데요?"

"어디까지···."

"말했죠. 금액만 맞으면 뭐든 다 해준다고. 죽이라면 죽이고, 묻으라면 묻고, 어디 하나 잘라달라면 정말로 잘라다 바칠게요. 자, 다시 물어봅시다.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데요?"

도훈의 질문이 핵심을 찔렀는지 정원은 쉽사리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부숴버리고 싶다는 모호한 분노보다, 어디까지 망가뜨리고 싶냐는 구체적인 물음이었다.

"···죽일 생각까진 없어요. 살인자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오케이. 죽이는 건 그럼 패스."

"그냥 철저하게 망가뜨려 주세요."

"망가뜨려요?"

"다신 바람피울 엄두도 못 내도록. 믿음을 배신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줘요."

도훈이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이는 편이 더 쉽겠네."

"뭐라고요?"

"아니에요. 접수했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좆병신으로 만들어 달란 소리죠?"

"뭐, 뭐라고요?"

"아니. 좆이 껄떡껄떡하니 바람도 피우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근데 좆도 꼴리지 않으면 앞으론 그런 의욕도 안 들 테니까."

"가능하겠어요?"

"해 드릴게. 금액만 맞는다면."

"얼마면 되겠어요."

도훈이 손가락 3개를 내밀었다.

‘삼 천만원이면 충분하겠지?’

[충분해 보입니다. 저번에 흥신소 직원들에겐 500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도훈의 사인을 오해한 정원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 삼억이나요?"

"······?"

"흐음. 생각보다 비싸군요. 심부름센터 의뢰라는 건."

‘어랍쇼? 삼천을 제시했는데 왜 삼억을 부르지?’

[주인님의 사인을 오해한 게 아닐까요?]

‘일단 가만히 있는 게 이득이겠군.’

도훈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정원이 말했다.

"알겠어요. 아까 말 한대로만 해준다면 제가 마련해 볼게요. 대신···."

"대신?"

"사진은 곤란해요. 그건 도저히 못 하겠어요."

"흐음. 보증 없이는 나도 곤란한데···."

"그치만···. 어떻게 오늘 처음 본 사람 앞에서 그런 사진을 찍어요?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란 게 있는데."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알몸 다 찍는 게 정 그러면 상반신만이라도."

"사, 상반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요? 아래까지 싹 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그래도···."

"이봐요. 나도 지금 양보했잖아요. 그럼 사모님도 하나는 양보하셔야지."

"돈은 확실히 준다니까요?"

"그 담보를 걸라는 겁니다, 내 말은."

"······."

"아니 막말로, 이름난 여배우들도 가슴 정도는 훌렁 까기도 하잖아. 그게 뭐 대수라고."

"저, 정말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군요."

"담보 없인 나도 착수 안해요. 지금 사모님 의뢰받는 순간 완전히 판을 다시 짜야 해서 현 고용주하곤 척지는 건데, 이것만 해도 나로선 완전히 밑지는 장사라고요. 근데, 보험 하나 들어 줄 수 없다? 이러면 거래 못하지."

"···정말 가슴만이죠?"

"나도 사모님 믿어 볼라니까, 사모님도 나 한 번 믿어 주쇼."

도훈의 계속된 회유와 협박에 정원이 끝낸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잠깐의 수치심보다 자신을 농락한 김변에 대한 복수심이 그만큼 컸던 까닭이었다.

"아, 알겠어요. 잠시만 돌아주세요."

"돌아달라니?"

"벗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나참···. 알겠수."

도훈이 껄렁거리며 의자를 돌아앉았다.

[근데 정원의 알몸은 왜 그렇게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응. 김변 물 먹이려고.’

[김변요? 하지만 아까 대화 내용으로 볼 때 김변도 정원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은 눈치던데요?]

‘애정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네?]

‘원래 자기 갖긴 싫어도 남 주긴 아까운 게 사람 심리거든. 김변 새끼가 아무리 정원에게 마음이 식었어도, 막상 자기 여자 나한테 뺏기고 나면 존나 열 받을걸? 안 그럴 것 같아?’

[아, 아니···.]

‘게다가 무려 3억짜리 의뢰잖아. 그 돈 다 받을 생각까진 없지만, 어쨌든 돈값은 해야지. 김변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첫 단계는 놈의 여자들을 모조리 다 뺏어 버리는 거야. 놈의 잘난 자긍심을 내 대물로 완전히 뭉게 주겠어.’

[주인님은 정말이지 잔인한···.]

"돼, 됐어요."

정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훈이 다시 의자를 돌아앉자 가운을 풀어 내린 정원이 두 손으로 젖꼭지를 가린 채 수줍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풍만한 가슴이라 두 손으로 가려도 윤곽이 훤히 드러나 몹시 음란해 보이는 포즈였다.

글래머인 정원을 보고 몰래 입맛을 다신 도훈은, 겉으로는 까칠하게 지적했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손 치워요."

< 935. 여름 방학-2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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