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51화 (918/2,000)

< 934. 여름 방학-26- >

신고라는 말에 김변이 식겁했다. 그가 생각해도 처음 정원을 건드린 것이 실수였다.

‘젠장. 그날 술이 떡이 되지만 않았어도···.’

정원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 분쟁 때문에 의뢰인으로 만났다.

처음 본 순간부터 김변은 정원이 마음에 쏙 들었다. 30대 중반이라는 한창의 나이에, 성숙한 몸매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모가 딱 제 스타일이었다.

뒤를 캐보니 남편은 잘나가는 외국계 회사 과장에, 평생 유복하게 자란 탓에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여성이었다. 부유층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여유 넘치는 태도에 김변은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이에 김변은 정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끝내 유류분청구 소송에서 승소하여 상당한 재산을 정원에게 안겨주었다.

정원이 감사의 의미로 마련한 술자리.

하필 남편이 출장을 간 날 시작된 술자리는 2차, 3차까지 이어졌고, 아침에 두 사람이 눈을 뜬 곳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호텔 침대 위였다.

정신을 차린 정원은 성폭행으로 신고하겠다며 노발대발 날뛰었고, 김변은 팬티 바람으로 무릎 꿇고 사죄했다. 피차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서로 입만 다물면 아무도 다치는 일 없을 거라는 은근한 협박까지.

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정원은, 일을 키우는 것이 부담되어 유야무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작이 어려웠을 뿐, 한 번 시작된 두 사람의 불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의 잦은 출장과 과중한 업무로 늘 욕구불만에 싸여있던 정원에게, 의도치 않게 시작된 김변과의 관계는 무료한 삶의 짜릿한 일탈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김변은 괜찮은 불륜 상태였다.

젊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질척거리지 않았다. 매사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으며, 불륜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정원 역시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목적은 일치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온 지 어느덧 2년여.

그간 입장은 바뀌어 이제는 정원이 더 김변을 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바람기가 많았던 김변은 계속되는 정원과의 관계가 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남의 여자를 탐한다는 상황이 스릴 넘치고, 묘한 정복감을 안겨 주었지만 어쨌든 김변은 이제 막 전성기를 맞은 젊은 변호사였다.

공부만 한 범생치고는 나름 훌륭한 몸. 조금 사납게 생기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반반한 외모. 특히 서른이라는 나이에 벌써 변호사로 자리를 잡은 능력으로 비추어 볼 때, 그의 가치는 인생 최대치를 찍고 잇었다.

한편 정원은 어느새 서른 중반이 꺾였고, 여전히 매력적이긴 했지만 풋풋한 20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야 김변이 별 볼일 없는 초짜 변호사였지만, 어느덧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위상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김변이 오랄을 하려는 정원을 저지하며 말했다.

"···신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당연히 농담이지. 뭘 그렇게 정색해?"

"말이 좀 그렇잖아. 시작이 어찌됐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알았어, 미안해. 그냥 해본 말이었어."

정원이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지만, 김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기분 잡치게 하네, 진짜."

김변이 침대에서 일어서 돌아앉더니 협탁에 놓아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원이 담배를 태우는 김변에게 사과했다.

"미안, 진짜. 생각 없이 한 말이었어. 화 풀어."

"넌 늘 그게 문제야. 내가 생각 좀 하고 살라고 했지?"

김변이 작심한 듯 독설을 퍼부었다.

"막말로 총각이 유부녀 만나 주는데 고마워는 못할망정, 사람 협박이나 하고 말이야."

"혀, 협박이라니? 말이 심해."

"심하긴? 간만에 보는데 몇 년 전일 들먹이면서 강간이나 운운하는 니가 더 심하지. 그리고 내가 업무폰으로 연락하지 말랬지? 세컨폰 번호 알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그, 그건···. 실수야. 번호가 둘 다 저장되어 있어서···."

"그러니까 네가 생각 없다는 거잖아. 내가 말했지? 문자 남기면 폰에서 지워봤자 빼도 박도 못 하고 증거 다 남는다고. 지금 누구 혼삿길을 망치려고!"

김변의 일방적인 막말에도 정원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사람이 너무 변했어. 처음부터 착한 사람은 아닌 줄 알았지만, 갈수록 나한테 막대하는 것 같아···.’

"너는 이미 결혼했고 애도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라 이거야? 나야 장가를 가던 말던?"

"왜, 왜 그래 진짜···. 내가 다 잘 못했어, 그만 화 풀어."

"그러니까 왜 사람 짜증나게 만들어? 오늘 한참 기분 좋았는데···."

"미안. 다신 안 그럴게."

정원이 돌아선 김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슴을 등에 문지르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응? 미안, 앞으로 더 잘할게."

"······."

정원의 젖가슴은 큰 편이었기 때문에 등에 닿자마자 곧바로 물컹한 촉감이 전달되었다. 3일이나 여자를 만나지 못했던 김변은 곧바로 반응이 왔다. 그 모습을 본 정원이 더욱 노골적으로 젖가슴을 문질러댔다.

"응, 응. 화내지 마. 자기 화내면 무섭단 말이야."

결국 성욕이 이성을 집어삼켰다. 김변은 바짝 꼴린 물건을 치켜세우며 정원에게 명령했다.

"잦이나 빨아."

"이제 화 풀린 거야?"

"알았으니까, 얼른 빨기나 해."

김변이 정원의 머리채를 잡고는 우악스럽게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정원은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성심성의껏 오랄을 시작했다. 정원의 입에 잦이를 물린 김변이 그녀의 오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꼭 혼이 나야 고분고분해진 말이지. 하여간 여자들이란···.’

그러면서도 슬슬 손절 각을 따졌다.

‘그나저나 정원이랑 관계도 슬슬 정리해야겠어. 옛날엔 몰랐는데, 스무살짜리 따먹다 보니까 차이가 확 느껴지네.’

정원과 불륜을 이어가면서도 왕성한 성욕을 식히지 못한 김변은 최근 원조교재 식으로 여대생 한 명을 만나는 중이었다.

원조라고 해봐야, 만날 때마다 몇십 만원 용돈을 쥐어 주는 정도지만, 어쨌든 20대 초반의 여자를 접하다 보니 안 그래도 질리기 시작한 정원이 더욱 더 성에 차지 않았다.

단지 여대생보다 정원이 나은 점이라곤 만날 때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가 정말로 돈이 많아 스폰을 했다면 진작에 손절을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하긴, 일이 잘 풀리면 노영감의 조카랑 조만간 혼담이 오갈지도 모르잖아? 지방 사는 여친이야 어차피 오늘 당장 헤어져도 무방한 사이니, 이제 슬슬 정원이도 방생해야겠다. 솔직히 그때 술만 안 취했어도 내가 애 딸린 유부녀랑 이렇게 길게 엮었으려고? 하

여간 술이 웬수지.’

처음엔 본인이 먼저 호감을 느끼고 강제로 덮쳐놓고, 처지가 바뀌자 어느새 과거 따윈 완벽히 잊어버린 김변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유부녀인 정원이 먼저 자신을 작업했다고 믿는 것처럼.

‘아쉬울 때 불러서 몇 번 더 따먹고 치워야 겠다.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나중에 괜히 발목 잡히면 인생 꼬일 수도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김변이 정원을 거칠게 자빠뜨렸다.

"아, 아! 갑자기 그렇게 넣어버리면···. 헉!"

김변의 섹스는 상대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혼자 애무를 받다, 박고 싶어지자 쌀 때까지 흔들어 버리는 게 전부였다.

일방적인 섹스를 마친 김변은 성욕을 풀고 나서 곧바로 옷을 껴입었다. 여전히 침대에 쓰러져 있던 정원이 물었다.

"씻지도 않고 벌써 가게?"

김변이 거울로 넥타이를 고쳐매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어. 저녁에 약속 있어."

"저녁? 지금도 많이 늦었는데."

김변이 고개를 홱 돌리며 짜증을 냈다.

"뭐? 내가 그럼 없는 말을 지어내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참나, 지가 무슨 내 마누라도 아니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다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정원은 또 다시 상처받았다.

‘아···.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버렸을까. 김변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나 먼저 간다. 그럼 씻고 가."

"아···. 으, 응."

정리를 마친 김변은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정원은 서글픔에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편이 출장이라서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설레했건만···. 정사를 마친 김변은 볼장 다 봤다는 식으로 무심히 떠나버렸다.

"흑흑···. 나빴어."

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다. 정원은 김변이 다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혹시 뭐 두고 갔어?"

정원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알몸 바람으로 입구로 마중나갔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김변이 아닌 낯선 남자였다.

"꺄, 꺄악!"

정원이 까무러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뒤늦게 알몸이란 생각이 든 정원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두 손으로 간신히 젖가슴과 밑을 가렸다.

상대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입구 근처에 놓여진 샤워타올을 던졌다.

"아니, 옷도 안 입고···. 일단 이걸로 가려요."

정원이 정신없이 커다란 타올을 몸에 둘렀다.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든 정원이 상대를 향해 물었다.

"누, 누구세요?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죠?"

"나에 대해 알 필욘 없고, 그쪽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대체 누구신데요? 저는 그쪽이랑 할 얘기 없으니까, 얼른 나가주세요. 안 그럼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신고라는 말에 남성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신고요?"

"내가 못 할 줄 알아요?"

"한 번 해보세요. 아, 그 전에 방금 이 방 나간 남자 이 사람 맞죠?"

사내가 정원을 향해 인화된 사진을 몇 장 던졌다.

정원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라 중얼거렸다.

"이, 이건 김 변호사···."

"이제야 좀 얘기가 통하겠군요."

사내가 정원과 시선을 맞추며 쪼그려 앉았다.

"피차 뻔히 아는 처지 같은데, 대화로 해결할까요, 우리?"

***

모텔방에 들어온 30대 사내는 사실 역용 마스크로 분장한 도훈이었다.

본래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는 최적의 타이밍을 잡기 위해 아이템을 이용해 둘의 대화를 도청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도훈은, 김변과 불륜녀의 관계에 이상징후를 파악했다.

‘···하여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도무지 상도덕이란 게 없는 새끼네.’

[상도덕이라뇨?]

‘바람둥이 사이에도 룰이란 게 있는 거야. 아무리 관계를 청상할 작정이라도 저딴 식으로 싸가지 없게 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니, 그런 룰도 있습니까?]

‘하여간 단순 불륜으로 엮기엔 죄질이 너무 무겁네.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면 진짜로 좆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려줘야겠어.’

[아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걸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면 설득력이 좀···.]

‘됐고, 현장 급습은 포기한다. 작전 변경이야.’

도훈의 배려로 다시 가운을 껴입은 정원은 도훈과 응접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혹시 저희 그이가 보낸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그, 그럼 목적이 뭐죠? 저랑 김변하고 관계를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돈이 필요한가요?"

"돈요?"

"돈이라면 제가 드릴게요. 많지는 않아도 비상금으로 융통할 수 있는···."

"어이가 없네."

도훈이 씨크하게 말했다.

"지금 그 변호사 지켜주려고 그러는 겁니까?"

"지, 지키다뇨. 무슨."

"그럼 왜 당신이 돈을 지불해요?"

"아무래도···. 저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제발 부탁이에요. 그냥 못 본 척 해주세요. 돈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마련을···."

도훈이 혀를 끌끌찼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이 아줌마."

"네?"

"잘 들어요. 그 변호사가 말을 안 했나 본데, 나는 그분이랑 혼사가 오가고 있는 상대측에 고용된 사람이에요."

"혼사라니요?"

"진짜 처음 들어요?"

"지금 김변이 결혼을 한다는 소리에요?"

"이거봐.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아줌마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 양반이 일언반구도 안 했을까?"

"무슨 소린 줄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세히 말해봐요."

도훈이 빠르게 설명했다.

"김변호사 그 양반요, 지금 중소기업 운영하시는 사장 따님하고 혼담이 오가는 중이란 말입니다."

"주, 중소기업이라니···."

"그 사장님이 제 고용주고요."

"그럼···."

"맞아요. 우리 사장님이 워낙에 검증이 철저하신 양반이라 김변호사 뒷조사를 저희에게 맡겼어요. 근데 이게 웬걸? 여자가 있는 것도 모라자, 유부녀랑 불륜이네?"

"······."

"증거 채취가 완료되었으니 이제 나는 고용주에게 보고하러 갈 겁니다. 상황 이해됐어요?"

"자, 잠시만요."

"또 뭐요?"

도훈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 그럼 김변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당연히 파혼이죠. 여자관계가 복잡한 정도도 아니고 유부녀랑 불륜인 사람에게 어느 누가 금쪽같은 외동딸을 내주겠어요?"

"외동딸···."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변호사라는 양반이 장인 장모 될 사람들에게 참 극진했다더라고요.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상대가 무남독녀라, 사실상 데릴사위로 가는 셈이었거든. 만약 이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다면, 나중에 내실 있는 중소기업도 꿀꺽할 수 있었겠죠."

"······."

"근데 그 중대한 사실을 내연녀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니···.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아줌마?"

"···몰랐어요. 그리고 저희 초면인데 아줌마라는 말은 좀 실례되는 말 아닌가요?"

"아, 불쾌했으면 죄송합니다. 딱히 호칭을 붙이기 뭐해서."

"물론 아줌마가 맞긴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군요."

정원은 속옷도 안 입고 곧바로 가운을 걸친 상태라, 조금만  방심해도 가운 사이로 하얀 속살이 훤히 보이는 상태였다. 도훈은 일부러 그녀의 가슴골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하긴 뭐···. 몸매는 처녀같기도 하시니."

"지, 지금 어딜 보시는 거예요!"

< 934. 여름 방학-2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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