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1. 여름 방학-23- >
***
신의 손.
얼핏 선방이 뛰어난 골키퍼에 대한 수사처럼 들리는 별호.
하지만 이만큼 대호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었다.
대체로 타짜들은 손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고 한다. 지문에 닿는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내는 예리한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하지만 대호는 이 분야에선 단연 독보적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대호를 두고 손이 눈에 달렸다고 말했다.
패를 뒤집지 않아도 촉감만으로 앞장을 볼 수 있다며.
그가 표시목을 쓴 것은 사실 치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익숙한 패를 들고 칠 때의 대호는 두 눈을 가리고도 모든 패를 볼 수 있었다. 다만 표시목은 그의 판단에 확신을 더하는 과정이었을 뿐.
그 비밀은 바로 1mg(0.001그램) 단위까지 가늠해 내는 초인적인 무게 감각. 아무리 공장에서 규격으로 찍어내는 제품이라도 겉에 입히는 도료의 양에 따라 미세하게 무게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호는 바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흐흐, 딱 30분이여. 내가 스무장의 패를 구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말이여.’
실제로 대호는 태윤이 올인으로 모든 돈을 날렸을 즈음, 이미 모든 패를 안 보고도 맞출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자신이 선을 잡으면 자연스럽게 도훈의 패까지 모두 꿰뚫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넌 끝났어, 새끼야.’
게임이 계속되었다.
1:1이라 페이스가 빠르게 돌았다. 대호가 선을 잡는 순간 그의 장난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패를 쥐었는데, 그 때문에 그의 손에서 화투패는 완전히 감춰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대호는 그 속에서 흔히들 밑장빼기라고 부르는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보통 밑장을 빼면 소리부터 다르거든. 하지만 나처럼 중간에서 뽑아내면 절대로 소리로는 구분 못하지.’
대호의 특기는 커다란 손으로 화투패를 완전히 감춘 뒤 안에서 원하는 패를 티나지 않게 뽑아내는 능력이었다. 뭉특한 손끝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만큼 오랜 기간을 수련한 끝에 달성한 그의 두 번째 비기였다.
‘나는 5땡, 너는 4땡.’
대호가 수작을 부리자 도훈이 곧바로 감지했다.
‘또 시작이네, 저 고양이 새끼.’
[고양이 새끼라뇨?]
‘그럼, 호랑이겠냐? 저 무쇠 같은 손으로 조그만 화투장이나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영락없는 고양이 새끼지.’
[아···. 그나저나 주인님. 이렇게 되면 아무리 패를 보고 있어도 이기기 힘든 것 아닙니까?]
‘일단은 당해주는 수밖에. 아직 ‘그 기술’을 쓸 타이밍이 아니야.’
[넵.]
"죽어."
"또 죽어? 앞에 쌓이 돈이 큰 거 3장 쯤 되려나? 앞으로 300번만 뒤지면 니 좆도 따라 뒤지겄네?"
"입 털지 말고 패나 돌리시지."
대호가 또 장난질했다.
자신은 광땡.
도훈에겐 장땡이었다.
뻔한 수작이 계속되자 도훈은 코웃음이 나왔다.
‘언제까지 저 지랄 할지 두고보지.’
"죽어."
"또? 좋은 패가 들어왔지 않아?"
"내가 광땡을 들고 죽던 말던 뭔 상관이야?"
"으허허, 무슨 팬지 몰라도 광땡은 죽어도 아닐 걸?"
대호가 굳이 자신의 패를 내보이며 도훈을 도발했다.
하지만 도훈은 미동도 않고 연이은 패배를 받아들였다.
‘잃어봐야 100만원이야. 큰돈을 걸지 않으면 어차피 승부는 나지 않아.’
도훈의 연사 전략에 대호도 슬슬 생각을 고쳐먹었다.
‘감이 좋은 놈이네. 밑장 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 보소? 안 되겠어. 차라리 파토를 내서 판을 키워버려야지.’
대호가 다시 패를 섞었다.
이번엔 자신에게 10,4 장사 족보를 도훈에게는 9,4 파토를 내주었다. 파토는 상대가 광땡만 아니면 게임을 무효화 할 수 있는 패로서 필승은 아니지만 무패를 기대할 수 있는 패였다.
"천."
도훈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타짜답게 탈이 좋은 대호가 놀랍다는 듯 연기했다.
"떴나 보네? 간만에?"
"야부리 털지 말고 뒤질 거야, 따라 올 거야?"
"가줘야지. 이런 건. 천 받고 이천 더."
도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이천 받고, 사천."
"사천? 아야, 살살해라. 살 떨린 다야."
그러면서도 대호는 야금야금 따라갔다.
"그럼 나는 사천받고···."
이제는 가방에 있는 돈까지 꺼내는 대호였다.
"엣다. 팔천 더."
"파, 팔천!"
"우아, 오빠들 대체 얼마를 꼴아박는 거야? 무서워 오줌 지리겠어!"
무려 현금 2억원이 넘게 쌓인 테이블의 비주얼은 압권이었다. 도훈도 이에 질세라 가방을 털어 팔천을 밀어 넣었다.
"콜!"
"어억!"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둘 다 1억오천씩 밀어 넣었으니 3억쯤 되겠지."
"사, 삼억 말인가!"
"와, 대박!"
이제는 구경꾼이 된 태윤과, 미쓰리가 흥분해 호들갑을 떨었다. 거액의 현금이 걸린 도박판은 지켜보는 이들마저 입술에 침이 바짝바짝 마를 만큼 긴장시켰다.
하지만 막상 게임을 플레이하는 대호와 도훈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도훈이 콜을 외치자 대호가 말했다.
"콜부터 까야지?"
"그쪽부터 까봐."
"왜? 또 땡잡이라도 들었는가? 아쉽지만 땡이 아니라 장산디?"
대호가 상갓집 섯다판 최고의 족보라는 ‘장사(10,4)’를 내밀었다. 장사를 지내는 것과 발음의 유사성 때문인지, 평소엔 낮은 족보인 장사는 초상을 치르는 집에 가면 장땡보다 위로 치는 패였다.
패를 본 도훈이 말했다.
"여기 누구 뒤진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개족보를?"
"으허허, 오늘 밤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뒤져야 쓰지 않겄냐."
"그럼 다음판에서 승부를 보지."
도훈이 패를 내밀었다.
그것은 9,4 파토였다.
"파, 파토네?"
"파토가 뭐야? 다시 한다고?"
도박을 잘 모르는 미쓰리가 노태윤에게 물었다.
"그렇지. 이건 누구도 이긴 게 아니야. 파토는 건 돈을 묻어두고 게임을 다시 하는 패야. 아니, 그렇다고 파토를 가지고 이런 거금을!"
태윤의 우려는 다름이 아니었다.
통상 파토를 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을 뻥카다.
절대 지지 않는 패를 들어놓고, 높은 패를 든 것처럼 돈을 계속 밀어서 넣어서 상대를 압박해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치명적인 단점을 상대가 레이스를 멈추고 콜을 때릴 경우 결국 무승부가 난다는 문제였다. 그리고 무승부 이후 판을 파토를 낸 사람이 먹는다는 보장 또한 전혀 없었다.
도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영감, 도박 날 새서 칠 거야? 다음 판에 누가 죽든 승부를 봐야지."
"으허허, 배짱 하나는 기가 막히네. 어디 함 시험해 보자. 누구 운이 더 좋은지."
파토를 낸 도훈이 간만에 패를 섞었다.
도훈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되는지 중간에 섞다 말고 커피를 한 잔 들이켰다.
"큭, 미쓰리."
"응? 왜 오빠?"
"내 잔에 설탕 안 넣었어? 커피가 쓰다."
"아, 앗 미안. 내가 각설탕을 깜빡했네. 지금이라도 넣어줄까?"
"아냐, 됐어. 어차피 인생이 다 쓰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호가 박장대소했다.
"푸하하, 아야. 많이 잡숴봐야 서른이나 넘었겄는디, 누가 보면 인생 반은 산 줄 알겄다? 커피 맛이 인생이여? 으허허, 이 새끼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네."
"나이가 대수요?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는 인간도 많은데."
"그게 누굴 까나?"
"패를 까보면 알겠지."
마지막 단판을 앞두고 흥분이 올라갔는지 도훈과 대호가 쉴 새 없디 대화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노태윤은 속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 저 타짜 새끼. 설마 지는 건 아니겠지? 여기 내 돈만 무려 오억이 들어있단 말이야!’
태윤은 이번 도박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건물을 담보 잡혀 사채업자들에게서 현금 5억을 빌렸다. 선이자로 천만원을 때일 만큼 살인적인 수수료였다.
‘이, 이 판을 망하면 나도 같이 망하는 거라고!’
김변에게 소개비로 천만원.
그리고 기술자인 대호에게는 이익금의 반을 주기로 약속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졌을 경우 손해는 오롯이 태윤의 몫.
사태가 이쯤 되자 태윤은 차라리 1억을 날렸을 때 그만뒀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칫하면 1억이 아니라 5억원을 통째로 날리게 생겼다. 아니, 사채업자들이 현금 대신 건물을 가져간다면 그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안 돼. 이겨야 해. 제발···. 여기서 지면 나는 알거지야!’
태윤이 간절한 눈빛으로 대호를 바라보았다.
자신감 넘치던 그가 실력을 발휘해 주기만 기도할 뿐이었다.
도훈이 패를 다 섞고 돌리려는 순간.
대호가 제지했다.
"잠깐."
"왜?"
"중요한 판인데 기리는 해야겠지?"
"유난 떨기는."
대호가 히죽 웃으며 도훈의 손바닥에 놓인 패를 받아 3토막으로 나누었다. 가장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3단 기리.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대호가 노린 승부수였다.
‘흐흐. 너는 이제껏 도박이 운이라고 생각했겄지? 아니다, 애송아. 진정한 타짜는 자신이 선을 잡지 않아도 받을 패를 고르는 법이여.’
대호는 3단 기리를 하는 그 짧은 순간, 바닥 면을 만져 패를 조정했다. 자신에게는 2끗을, 그리고 도훈에게는 1끗을 주는 전략이었다.
‘도박에서 제일 서러운 게 뭔지 알지? 바로 한 끗 차이라는 거여. 광땡하고 장땡만 패는 아니제. 낮은 끗으로도 승부가 나는 게 도박이다, 이 말씀이야.’
기리가 끝나자 도훈이 다시 패를 가져왔다.
그리고 패가 돌기 시작했다.
***
어젯밤.
미쓰리와 떡을 치고 돌아온 나는 고민에 빠졌다.
‘동네 할배들 속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타짜를 상대로 과연 내가 탄을 쓸 수 있을까?’
[어렵겠죠. 화투패 바꿔 치는 걸 걸렸다간 그대로 게임을 끝나버릴 테니까요.]
‘역시 그렇지? 혹시 다른 아이템은 없을까?’
[아이템이라···. 주종을 바꾸신다고 하셨죠?]
‘응. 셋이서 치는 고스톱에 두 사람이 편을 먹으면 절대로 못 이기거든. 서로 패를 밀어 줘 버리면 내가 이길 판도 못 먹게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섯다용 아이템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한참 뒤 로시가 반가운 소식을 알려왔다.
[찾았습니다!]
‘찾았어? 섯다용 아이템이 있다고?’
[네. 근데 이건··· 조력자가 한 분 필요하겠는데요?]
‘무슨 소리야? 혼자서 쓸 수 없다는 소리야?’
[네. <손은 눈보다 빠르다.> 반지입니다.]
‘반지?’
[네. 반지를 착용한 상태에선 어디서든 카드 패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타인의 몸에서 추출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숨기고 있다가 꺼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야?’
[네. 설명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가만있자. 어차피 중간에 화투패 바꿀 때 미쓰리를 부르기로 했으니, 조력자는 확보된 셈인데···.’
문제는 카드 패를 숨기는 위치다.
상대는 무려 타짜. 어설픈 곳에 화투패를 숨겼다간 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괜히 몸수색을 당한다거나 화투패를 흘리기라도 하는 날엔 미쓰리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다. 그녀에게 절대 안전을 보장했으니만큼, 무리를 시킬 수 없었다.
‘로시. 이 아이템이 타인의 몸에 숨겨진 패를 내 쪽에서 뽑아낼 수 있다고?’
[네. 아이템 이름 대로입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인간의 눈으론 인식 불가한 속도로 빠르게 카드를 바꿔치기하는 수법입니다. 하지만 아이템 특성상 본인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제약이 걸려있고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지? 내 몸에 숨겼다 빼는 게 빠를 텐데 말이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아마도 스킬의 일부를 응축해 놓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스킬의 일부?’
[타짜 플레이어가 보유한 스킬을 비슷하게 흉내낸 아이템이란 말이죠. 그럴 경우 오리지날보다 위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불가피한 제약이 걸렸을 겁니다.]
‘그렇구만. 그럼 미쓰리의 몸 어딘가에 화투패를 숨겨야 한단 말인데···. 대체 어디가 좋을까?’
설사 몸수색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들키지 않을 곳.
동시에 화투패 스무장을 감출 수 있는 넒은 장소.
"그래, 혹시 거기도 가능하나?"
***
싸늘하다.
등 뒤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위에서 한 장.
대호에게 먼저 7을 건넨다.
뒤집혀 있지만 내 눈엔 모든 게 보인다.
이번엔 나에게 한 장.
나는 6이다.
들고 있는 패를 보니 녀석은 5를 받도록되어 있다. 그리고 내 패도 똑같은 5. 녀석이 3단기리를 하는 사이 장난질을 쳐놓은 것이다.
놈은 7과 5을 더한 2끗.
나는 6과 5를 더해 1끗.
무조건 내가 지도록 설계된 판이다.
하지만 나에겐 놈이 모르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다시 위에서 한 장을 대호에게 보냈다.
화투패를 확인한 녀석이 실실 쪼갰다.
2끗을 받아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모습.
하지만 나의 손은 눈보다 빠르다.
‘로시 지금!’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나는 미쓰리의 봊이에서 한 장.
슈슉-
커피가 쓰다는 언질을 접수한 미쓰리는 파토 판이 끝났을 때이미 음탕하게 다리를 벌려 앉았다. 그리고 노팬티 상태인 그녀의 봊이 속에는 섯다패 20장이 추려진 상태. 그녀의 허벌봊이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용케도 한 장도 안 흘리고 왔구나.’
그녀의 봊이에서 화투패를 뽑아내는 데 걸린 물리적 시간은 그야말로 찰라. 이곳에 모인 누구도 나의 손동작을 눈치챌 수 없었다. 심지어 가랑이를 벌려 앉은 미쓰리 마저도.
이제 패는 바뀌었다.
패를 확인한 내가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남은 돈을 탈탈 쏟아부었다.
"올인!"
< 931. 여름 방학-2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