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47화 (914/2,000)

< 930. 여름 방학-22- >

메소드 담배를 피운 그의 연기력은 가히 압권.

도박을 잘하는 사람은 소위 탈이 좋다고들 하는데, 도훈은 마치 광땡이라도 잡은 것처럼 온몸에서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20년 경력의 타짜 대호가 주춤하고 말았다.

‘뭐, 뭐여? 이 자신감은? 진짜로 속임수를 안 썼단 얘기여? 내가 진짜로 잘못 봤다고?’

도훈이 들고 있는 패는 8광.

그리고 반쯤 접혀서 가려진 나머지 패는 분명 새가 그려진 2짜리 패였다. 그러나 도훈의 당당한 모습에 대호는 스스로 본 것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가 아니면 3짜 였을까나? 내가 진짜로 잘못 봤다고?’

8과 2는 합여 10끗이 되어 망통이지만, 8광과 3광이 만나면 ‘섯다’ 최고의 족보라는 3,8 광땡이다. 도훈의 박력과 자신감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적의 패를 든 모습이었다.

대호가 쉽사리 대답을 못하자 도훈이 다시 압박에 들어갔다.

"말해봐. 내가 장난쳤다고 장담할 수 있어? 지금 좆대가리 걸까?"

도훈이 기세에 눌려 찌그러져 있던 태윤을 향해 소리쳤다.

"영감. 도끼 꺼내."

나이 차가 한참 나는 어른에게 반말을 지껄였음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노태윤은 당장이라도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쫄아 대답했다.

"도, 도끼는 왜···."

"이 양반이 끝까지 가보자니 누구 하난 잘려야 하지 않겠어? 패 확인해서 아무 이상 없으면 누구 좆이든 내리쳐버리라고! 당장!"

도훈이 극한까지 밀어붙이자 결국 대호가 기가 꺾였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뭐?"

"이런 시시한 판에 좆대가리까지 걸겠어? 그냥 해본 말이제."

대호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흉흉했던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도훈은 그제야 긴장을 풀더니 자신의 패를 한 장씩 까뒤집어 보여주었다.

"다음부턴 확실하지 않으면 걸지를 말아."

한 장은 대호가 확실하게 생각했던 8광.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2였다.

도훈의 뻥카 패를 확인한 두 사람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서 소리쳤다.

"8하고 2···? 마, 망통이잖아?"

"이런 미친 새끼가! 망통으로 현금 2억을 태워?"

도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도박은 원래 배짱으로 치는 거 아냐?"

쾅!

"이 좆만한 새끼가, 진짜!"

흥분한 대호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자 가벼운 화투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는 도훈에게 완벽하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봤던 게 맞았어! 이 좆만한 자식의 뻥카에 완벽하게 당해버렸다니!’

그의 분노는 도훈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보다, 그의 연기에 완벽히 속은 자신에게 기인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연기를 할 수 있지? 표정만 봐선 광땡이라도 잡은 얼굴이었는데, 그게 망통이었다니?’

이쯤 되자 대호도 도훈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정을 속속 빠져나가는 귀신같은 눈치, 망통을 들고도 올인을 때리는 과감한 배짱, 그리고 20년 경력의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뛰어난 탈까지.

재수 없는 것과 별개로 완벽한 타짜의 자질을 갖춘 청년이었다. 대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편 도훈은 속으로 씩 웃었다.

[아니, 마지막 패는 굳이 왜 보여주신 겁니까? 상대가 죽으면 패를 감출 수 있었을 텐데요.]

‘알지. 당연히 일부러 깐 거야.’

[일부러요?]

‘열 받으라고. 봐, 지금 흥분해서 미쳐 날뛰고 있잖아. 최악의 패인 망통한테 밟혀서.’

[아···.]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무리하려 들 거야. 판단이 흐려지고, 실수도 잦아지겠지. 그렇게 되면 저놈도 끝이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놈이 기술을 발휘하면 여전히 주인님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뛰어난 타짜임에는 틀림없으니까요.]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까 놈의 속마음을 읽었잖아. 놈은 표시목을 쓰고 있었어. 즉, 패가 바뀌면 절대 지금 같은 장난질을 못 친다는 말이 되지.’

도훈은 대호가 흥분하면서 내리칠 때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화투패 한 장을 구둣발 아래 몰래 감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패를 추스르며 확인하다 말했다.

"뭐야? 한 장 모자라는데?"

"모자란다고?"

"뭐시여?"

"아니 씨발,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성질을 부리고 지랄이야? 아까 날아가면서 바닥에 흘렸나 보네."

세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흘린 화투패를 찾았지만, 도훈이 발로 감추고 있는 이상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었다.

"젠장, 이게 어디로 튀었지?"

"밑으로 굴러 들어갔나 본데."

"그럼 어쩐다?"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화투 바꿉시다."

"화투패를?"

"어디서?"

"뭘 어디서야? 하나 사오면 되지. 근처 24시간 편의점에 널린 게 화투장인데."

도훈의 제안에 영문을 모르는 태윤의 동의했다.

"그래. 그게 낫겠군. 찾느라 시간 낭비하느니 새로 사는 편이 빠르겠어."

"아, 안 돼!"

표시목을 쓰던 대호가 반대했다.

그러자 도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왜 안 돼? 누가 보면 화투패에 장난질이라도 해놓은 줄 알겠어?"

"아, 아니 그건···."

대호에겐 명분이 부족했다.

원래 장난질이 잦은 도박판에선 게임마다 새 화투로 갈아치울 만큼 표시목을 경계하는 편이었다. 굳이 편의점에서 새 화투를 사 온다는 데 이를 거절했다간 오히려 바닥에 깔린 자신의 표시목까지 의심받을지 몰랐다.

대호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 내말은 그게 아니라 누가 거길 다녀오냐는 말이지."

"아무나 가면 되지 뭘?""그러다 나머지 둘이서 남은 돈 가지고 튀기라도 하면?"

"그럼 돈을 손에 들고 가면 되지."

"그것도 말이 안 되지. 나갔다가 그대로 줄행랑 쳐버리면 어떻게 둘이서 게임을 계속하겠어?"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건데?"

대호가 계속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결국엔 대안없는 딴죽걸기에 불과했다. 그러자 도훈이 묘수가 있다는 듯 말했다.

"좋아. 그럼 우리가 움직일 수 없으니 밖에 있는 누구한테 사오라 시키면 되겠네."

"시켜?"

"누구한테 말인가?"

"있어 봐. 잘됐네, 다들 목이나 축이면서 할까?"

폰을 든 도훈이 미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이쪽으로 커피 3잔만 갖다 줘. 오늘 길에 편의점에서 새 화투장 10개만 사오고. 어."

도훈은 일방적인 통화를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지켜보던 태윤이 도훈에게 물었다.

"누군가? 혹시···."

"생각하시는 그 여자 맞아요."

"미, 미쓰리!"

"네."

"미쓰리가 여길 안다고?"

"왜요? 나라고 아무 대비 없이 혼자 왔을까 봐서? 당연히 밖에 조력자가 있지."

도훈은 일부러 미쓰리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은 만에 하나 도박 후에 있을 깽판을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

"내가 실은 아는 형님이 한 분 있거든. 미쓰리한테 내가 2시간 안에 안 돌아가면, 이쪽 주소 불러서 애들 보내달라고 말해 놨어."

"또 뻥카냐?"

"뻥카라고 생각하면 그리 믿어도 좋고."

"씨발. 근데 이건 말도 안 되지. 미쓰린지 뭔지 하는 년이 들고 오는 패가 멀쩡하다고 누가 보증할 건데? 장담할 수 있어?"

도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못 믿으면 직접 까서 확인해봐도 좋아. 난 화투장에 장난질 같은 건 안 하는 주의니까."

"뭐? 내가 그럼 이제까지 표시목이라도 썼다는 소리여, 뭐여?"

대호가 흥분해 소리쳤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속임수를 들킬 위기가 되자 과하게 반발하는 것이었다.

"지랄하네. 별 말도 안 했는데 표시목 같은 소릴."

"이 새끼가 자꾸 보자보자 하니까!"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미쓰리가 문을 열고 등장했다.

"오빠, 나왔어."

미쓰리는 배달이라는 나가는 듯한 복장이었다.

치마는 짧고 가슴은 깊이 파였다. 갑작스러운 미쓰리의 등장에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축되었다.

"오호홍, 재밌게 치고들 계셨어?"

"미쓰리, 자네가 여길 왜···."

노태윤이 눈을 껌뻑였다. 애초에 일이 이 지경까지 번진 화근에 미쓰리가 일조했음을 알았지만, 막상 미쓰리의 방정맞은 모습을 보자 또다시 음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저, 저년이 저 젊은 새끼랑 붙어 먹고선···. 뻔뻔하게 여기까지···.’

"화투장 새로 사왔어?"

"어. 10개."

미쓰리가 비닐 봉지에 든 화투장을 내밀었다.

도훈은 바닥으로 뒤집더니 대호에게 말했다.

"자,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던가."

"···쳇."

새로 사 온 화투패를 살피던 대호는 그것이 아무 조작 없는 새 제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거부했다간 자신이 쓰던 표시목까지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훈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좋아, 다시 쳐보지."

"열 식히게 커피나 한잔 씩 들고서 하자고."

도훈은 미쓰리를 시켜 커피를 따르게 시켰다. 미쓰리가 보자기를 풀고 보온병에 든 커피를 타는데 도훈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더니 말했다.

"치마 짧은 거 봐? 어디서 또 뒹굴고 왔니?"

"무슨 소리야? 내가 오빠 말고 누가 있다고."

"눈꼴 사나우니까 작작 좀 혀. 걔가 니 좆집이냐?"

두 사람의 작당을 보던 대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실화로 치는 수밖에 없겠군. 자연빵으로 친다고 내가 꿀릴 건 아니니까.’

방금 전의 일전으로 도훈과 대호는 각각 비슷한 자금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리저리 얻어맞은 노태윤만 5,000 이상을 잃었다.

‘어차피 섯다판에서 저 영감탱이는 아무 도움도 안돼. 우선 저 영감부터 먼저 죽인 뒤에 돈으로 밀어 붙이는 수밖에.’

대호가 전략을 수정했다. 태윤을 먼저 죽이고 그 자금력을 이용해 도훈과 1:1 승부를 걸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이는 도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태윤은 두 사람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패가 돌았다. 커피를 따른 미쓰리는 도훈 옆에 찰싹 붙어서 도박을 구경했다.

"오빠 돈 많이 땄어?"

"아야, 시끄러운 게, 니 좆집은 저짝 가서 놀라고 혀라."

"뭐야, 저 아저씬? 아저씨 나 알아요?"

"가스나 땍땍거리는 것도 지금인 줄 알어. 좀 있음 니 기둥서방 좆 잘리게 생겼으니께."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있어.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지켜봐."

손장난 없이 실화로 치기 시작하자 이젠 완전한 실력 승부가 펼쳐졌다. 물론 도훈은 상대 패를 훤히 들여 다 볼 수 있었기에 모든 게임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질 것 같은 판에는 과감히 죽고, 이길 수 있는 승부는 무조건 먹었다. 대호 역시 경력을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뛰어난 기량으로 안정적으로 승률을 가져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진다고 이 판에 호구는 노태윤 혼자였다. 그는 야금야금 자금을 잃더니 오래지 않아 2억의 현금이 바닥나고 고작 3,000만원만 남기게 되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태윤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대호를 흘겨보았다.

‘저 새끼, 자기만 무조건 믿으라더니 나만 개털 되게 생겼네. 김변은 어디서 저 딴 놈을 데려와가지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호 역시 방법이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영감.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영감이라도 잡아 먹고 마지막 승부를 노려보는 수밖에.’

마지막 판에 드디어 태윤이 큰 패가 떴다.

9땡을 든 태윤이 모든 걸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캐치한 것 같았다.

도훈이 이를 받았고, 서로 패가 펼쳐졌다.

"으흐흐!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이구나! 9땡이네!"

"어이코, 어르신. 하필 이게···."

도훈이 7,3을 내밀었다.

숫자의 조합으로는 10끗 망통이지만, 족보로 치면 ‘땡잡이’라고 불리는 패였다. 땡잡이는 광땡을 제외한 모든 땡을 잡을 수 있었다.

"아, 아니 어떻게 이게!"

"안타깝게 됐네요. 이 타이밍에 땡잡이라니."

도훈이 테이블의 판돈을 모두 쓸어 담았다.

태윤이 나가떨어지자 그의 돈은 이제 도훈과 대호가 비슷하게 나눠 가지게 되었다. 각각 현금 3억여 원.

모두 현금 뭉치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비주얼이었다.

이 판을 모두 먹으면 무려 6억원이라는 거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호가 물었다.

"마, 니 어디서 굴러 먹었노?"

"굴러 먹다니?"

"스승이 있을 꺼 아이가?"

타짜는 홀로 크지 않는다.

대호는 도훈을 가르친 스승을 묻고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난 혼자 컸는데?"

"하-. 새끼, 싸가지는 밥 말아 먹어가지고. 니 도박판에서 겸손하라는 말 못 배웠나?"

"겸손은 씨발, 아재는 평생 그리 사쇼. 겸손하게 쭈욱-."

도훈이 도발하듯 옆에 앉은 미쓰리의 가슴골에 손을 넣어 주물렀다. 시건방진 모습에 대호가 고리눈에 안광을 번뜩였다.

"좆만한 새끼. 넌 내가 오늘 기필코 고자 만들어 버릴 줄 알아."

"아이고 무서라. 이거 무서워서 도박 하겄습니까?"

"개시끼, 내가 오늘 너 못 잡으면 대호가 아니다."

20년 경력의 타짜 대호가 마침내 전력을 다하고 나섰다.

어느새 새로운 화투패의 감각에 익숙해진 대호는 손끝의 촉감으로 패를 구분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새끼, 내가 이제 껏 표시목으로만 치는 줄 알았지? 내가 그 유명한 신의 손이라 이말이야.’

그를 경상도 최고의 타짜로 만들어준 천부적 재능, 신의 손이 마침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930. 여름 방학-2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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