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9. 여름 방학-21- >
"제안?"
"종목, 바꿉시다."
"종목을 갑자기?"
대호가 걸걸하게 웃으며 물었다.
"와?"
"고스톱은 셋이 치는 게임이죠. 근데 셋 중 둘이 같은 편을 먹으면 절대로 못 이기는 게임이기도 하고."
"나가 시방 이 영감이랑 한패라는 소리여?"
"아닙니까?"
"으허헛, 요 새끼 보소? 좋아, 뭣으로 바꿔줄까? 원하는 거 말만 혀."
도훈은 대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걸 바로 받아?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단 소린가?’
사실 도훈은 고의적으로 강짜를 부린 것이었다.
상대가 타짜니 만큼 고스톱에 대해 대비를 철저히 해왔을 거로 의심했다. 일전의 자신처럼 몰래 탄을 만들어 왔을 수도 있고, 노태윤과 사인을 맞추어 특정 패를 밀어주도록 사전에 모의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본 것인데, 대호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종목을 바꾸면 나가 당황할지 알았냐? 경기도 오산이다, 이 새끼야."
‘씨, 씨발··· 아재 새끼가.’
도훈은 느닷없는 드립에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받아쳤다.
"뭐든 상관없다고?"
"그려. 말 혀 봐. 포커? 블랙 잭? 도리짓고땡? 난 느가 뭘 하든 상관없으니께 맘대로 골라봐라."
"섯다로 가죠."
"섯다? 앉았다는 싫고?"
‘좆같은 새끼가 아까부터 왜 되지도 않는 드립을 치는 거야?’
[평소에 주인님이 자주 저러시는데요?]
‘그랬어? 완전 개극혐이네.’
대호는 주변에 반응이 싸늘해진 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좋아, 니가 원하는 종목으로 바꿔줄게. 단 나도 하나 받아 줬으니께, 너도 하나 받아야 쓰겄다."
"뭘요?"
"여기서 누가 이기든, 어디 하나 잘려야 쓰지 않겄냐?"
"잘려?"
대호가 갑자기 테이블 밑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으허허, 손모가지 하나쯤은 걸어야 재밌제?"
"아니 이 사람아 이, 이런 말은 없었잖는가?"
"아재요, 요것은 우리끼리 하는 얘기니까 빠지쇼. 같이 피 보기 싫으믄."
노란 백열등 빛에 도끼날이 번뜩였다. 투척용으로 쓰일 것 같은 날이 바짝 선 도끼였다. 작은 손도끼긴 했지만, 그의 말처럼 손모가지 하나쯤 댕강 자르는 데는 문제 없어 보였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도훈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미동도 없이 받아쳤다.
"손모가지? 그거 잘라서 어디다 쓰게?"
"뭐시여?"
"어디서 영화 좀 봤나 본데 나는 그걸로는 만족 못 하겠는데?"
"그럼 뭐슬 걸자고?"
도훈이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좆대가리."
"조, 좆 대가리?"
"좆?"
"시방 그러니께 지는 쪽이 고자 되자는 거여?"
당황하는 대호와 태윤을 두고 도훈이 양아치처럼 말했다.
"왜? 후달려? 후달리면 애초부터 연장을 꺼내질 말았어야지?"
"하- 이 새끼 말하는 거 보소. 완전 골때리는 새끼네?"
"할거요 말 거요? 손모가지 잘라봐야 팔 병신이지만, 좆대가릴 잘리면 좆병신이지. 그 정도는 되야 내기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느, 진짜로 자신 있냐?"
"자신 없으면 혼자서 여길 오지도 않았어."
대호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으허허! 쥐톨만한 새끼가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네. 이름이 뭐꼬? 타짜들 사이에서 말이여."
"나?"
‘뭐라고 하지. 이건 생각 안 해봤는데?’
[아무거나 대시죠. 어차피 도박사로 명성을 날릴 것도 아닌데.]
‘오케이.’
"대짜."
"대짜? 소짜 중짜 대짜할 때 그 대짜?"
"그건 아니고, 대물 타짜의 줄임말이랄까."
"대물? 으허허허허! 하, 이거 존나게 아름다운 새끼보소? 만나서 전남 영광이구만이라."
‘어우씨, 저 빌어먹을 아재 새끼.’
"암튼 조건 합의 됐으니까 패나 돌립시다."
"좋아. 영감도 상관없지? 섯다로 바꾸는 거?"
"나, 나야 뭐···."
"그려. 시작들 해 보자고."
대호가 화투패를 쥐더니 빠른 속도로 패를 섞기 시작했다.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손으로 파바박 패를 뒤섞는 모습에서 굉장한 실력이 느껴졌다. 대호가 빠른 손놀림을 과시하며 말했다.
"나가 이 바닥을 구른 지가 벌써 20년이여, 나한테 손모가지 날아간 하룻강아지가 지금까지 몇이나 될 것 같냐?"
"누가 입으로 화투를 치나? 시끄럽게."
"실력 한번 보여 줄 테니까, 함 보고나서 떠들어라잉."
화투패 48장을 이용하는 고스톱과 달리 섯다는 스무장의 패만 쓴다. 화투패를 섞던 대호가 빠른 속도로 패를 뽑아내 바닥에 흩뿌리는 순간, 지켜보던 태윤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아, 아니 어떻게 이것이!"
놀랍게도 대호가 뒷패만 보고 뽑아낸 패들이 섯다에서 사용하지 않는 버림 패였던 것.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대호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니는 나이도 어린놈이 우짤라고 좆까지 걸었노? 아는 있어야 할텐디? 대를 이를라믄 말이여."
"거, 진짜 더럽게 씨부리네. 패 다 추렸으면 돌리기나 해."
도훈의 일축에 착착착 패를 섞던 대호가 빠르게 패를 돌렸다. 도훈은 투시 랜즈를 착용한 상태였으므로, 세 사람의 패가 훤히 보였다.
‘이 새끼가 시작부터 장난질이야? 노태윤한테는 8땡, 나한테 9땡, 그리고 본인은 장땡을 가져가?’
[대, 대단한 손놀림입니다! 속임수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꼴에 실력은 있다 이거네?’
"기본 빵으로 100만원 씩 가자고. 2억 다 태울라면 그 정도는 가야지 않겄어?"
선을 잡은 대호가 백만원짜리 뭉치를 탁 올렸다. 시작부터 큰 패를 잡은 태윤 역시 마지못해 따라가는 연기를 했다.
"한 판에 백만원씩이라니 어휴···. 좋네. 따라감세."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본 판돈을 내고는 그대로 패를 던져버렸다.
"죽어."
"죽어?"
"시작부터 죽는다고?"
"남이사 뒤지든 살든, 뭔 상관?"
대호가 도훈을 보고 생각했다.
‘밑장 빼는 소리도 안 들렸을 텐디, 9땡을 들고 죽어? 눈썰미가 제법일세?’
"시시하게. 패도 안 보고 죽기는."
"자, 잠깐. 우리 둘만 남았는데 판 돈 더 올려도 되는 거 아닌가?"
"왜? 영감 따라오시게?"
"200 더 걸겠네."
8땡을 든 태윤은 첫판을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본 대호가 쯧쯧 혀를 찼다.
"따라오면 안 될 것 인디···. 200받고 500 더."
"오, 오백?"
"거, 좋게 말할 때 뒤지쇼. 첫판이라 내가 봐드릴께."
대호가 태윤을 말렸지만, 8땡을 든 태윤은 도저히 죽고 싶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끄응. 그래도 패는 보고 죽어야 겠네. 500 콜!"
"하- 나참. 말을 해도 따라와 버리네."
결과는 예상대로 장땡 대 8땡.
승리를 예상하던 태윤은 대호의 패를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시작부터 장땡이!"
"운이 좋았나 보지. 영감도 8땡 아니요? 그러니까 다음부턴 죽으랄 때 죽으쇼잉."
순식간에 800만원을 털린 태윤이 침을 꼴깍 삼켰다.
2억원이라는 거금이 순식간에 태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든 순간이었다. 어제 큰 돈 처럼 보였던 100만원이, 이제는 고작 두장의 패를 보기 위한 판값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선을 잡은 대호가 패를 돌렸다.
이번에도 대호는 교묘하게 패를 주었다.
도훈에게는 8끝, 태윤에게는 7끝. 그리고 자신은 갑오(9끝)였다.
"죽어."
"또 죽어?"
"니는 뒤지러 왔냐?"
"남이사 뒤지든 말든?"
승부는 계속 일방적이었다. 허나 대호의 손놀림이 너무나 정교했기 때문에 도훈은 도저히 속임수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대, 대단한 실력입니다. 주인님한테 계속 한 끝 발 낮게 패를 주고 있군요. 이걸 무슨 수로 이기죠?]
‘우선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손장난이 과하니 한 번은 실수를 하겠지. 놈은 신이 아냐. 손기술이 좋은 사기꾼일뿐.’
10판을 도훈이 내리지는 사이, 고의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태윤이 선을 잡았다.
‘좋아. 지금이다. 여기가 승부처야.’
이번엔 태윤이 패를 돌렸다. 벌써 5,000만원 이상을 따낸 대호는 표정에서 여유가 넘쳤다. 두둑히 쌓인 현금 다발의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도훈은 여기서 더 밀렸다간 나중엔 돈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쩐이 후달리면, 배짱도 사그라들지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패를 든 상대의 뒷패가 훤히 보였다.
그것은 도훈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었다.
‘노태윤 저 영감은 갑오. 대호 저놈은 알리(1,2)구나. 나는···. 망통?’
도훈은 속으로 탄식했다. 하필 태윤이 처음으로 패를 잡은 판에 최악의 패가 나온 것이었다. 실화로 치는 태윤이 손기술을 썼을리 없으니 지독하게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망통이 뭡니까 주인님?]
‘합이 0이 되는 조합. 끗중에서도 최하패라고 할 수 있지. 이길 수 있는 패가 없어.’
[그럼 무조건 지는 판 아닙니까?]
‘아니. 한 번 배팅으로 이겨보려고.’
[배, 배팅이요?]
선을 잡은 태윤이 판돈을 올렸다.
"200부터 시작하지."
"허허, 영감님 간만에 잘 나왔네 보네. 따라갑니다."
대호가 여유 있게 200을 얹었다.
‘1,2 알리’면 족보 중에서는 제일 높게 치는 패였으므로 승산이 높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한편 망통을 든 도훈은 갑자기 가방에서 오백만원 뭉치를 꺼내기 시작했다. 100장씩 묶어 한 뭉치에 무려 500만원짜리였다.
"받고, 오백. ···아니 천 더."
도훈이 망설이는 척하며 오백만원 뭉치를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주, 주인님! 망통 패를 들고 천을 더 얹다니요!]
‘있어 봐. 다 계획이 있으니까.’
도훈이 판돈을 급격히 올리자 태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가, 갑자기 천을 얹어? 한참 지더니 결국 떳나 보구나. 으으, 갑오를 들고 죽어야 하다니.’
"나, 나는 죽겠네."
태윤이 아쉬운 얼굴로 패를 던졌다.
이어 대호의 차례.
"뭐 떴냐?"
"묻지 말고. 따라 올 거야 말 거야?"
"고놈 새끼, 형한테 말 한 번 예쁘게 것 보소."
대호 역시 밀리지 않고 오백만원 뭉치를 얹었다.
한 덩이, 두 덩이···.
"천 받고."
이어서 네 덩이를 더 얹었다.
"이천 더."
"이, 이천!"
갑자기 판이 커지자 태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테이블에 쌓인 돈만 해도 지금까지 대호가 따간 돈보다 많아 보였다. 그는 도훈이 뻥카라는 걸 확신하는 눈치였다.
"와? 후달리냐? 뻥카 치면 내가 뒤질 줄 알았냐? 사람을 물로 보네 이 새끼가."
[주, 주인님! 이걸 어찌하면 좋습니까?]
‘침착해. 아직 승부 안 끝났어. 메소드 담배 좀.’
[넵!]
다시 턴을 받은 도훈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거금이 걸리자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도훈의 목적은 연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후우-. 내가 진짜 블러핑 하는 걸로 보였다 이거야?"
도훈의 목소리 톤이 싹 바뀌었다.
마치 20년 내공의 도박꾼이 마지막 승부 쯤 내뱉는 말투같았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모든 것이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도저히 질 수가 없다는 기세였다.
"올 인."
도훈인 담담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가방째 테이블에 올렸다.
쿵-
묵직한 울림이 있고 도훈이 말했다.
"이 안에 1억 7천 좀 안되게 있을 거야. 세보고 따라 들어오던가."
도훈의 과감한 올인에 이번엔 대호가 긴장했다.
‘뭐시여? 시작한 지 10분도 안되서 올 인을 한다고?’
그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패는 노영감이 돌렸잖여? 설마 저 새끼가 뭔가 수작을 부린 거시여?’
하지만 대호의 예리한 눈썰미에 따르면 도훈은 패를 바꿔 치기 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패를 뒤집어 보고 바닥에 내려놓는 게 전부였다.
‘쓰읍-. 이상한디? 내 표시목이 틀릴 리가 없는디?’
사실 대호가 패를 원하는 대로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화투패 뒤에 교묘하게 새겨진 문양 때문이었다. 통상 ‘표시목’이라 불리는 불법개조 된 화투패로서, 대호 정도의 노련한 플레이어라ㅓ면 손에 잡히는 촉감만으로도 무슨 패인지 알아 맞출 수 있었다.
대호는 다시 바닥에 겹쳐진 도훈의 패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나는 8짜가 맞는디···. 그럼 저것이 2가 아니었다고?’
대호는 분명 도훈의 패를 망통으로 보았다. 도훈이 처음 패를 확인한다고 들었을 때 표시된 흔적을 통해 패를 확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분이 겹쳐져 장담할 수 없었다. 대호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니여. 분명히 망통이었어. 근디 망통에 1억 7천을 태운다고? 좆대가리까지 걸고? 진짜로 미친놈이여?’
대호가 시간을 끌자 도훈이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배팅을 종용했다.
"섯다 치는 사람 뒤져버렸어?"
"가, 가만있어."
대호가 계속 생각했다.
‘내가 잘 못 봤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잖여. 어떤 미친놈이 망통에 올인을 때려. 고작 3,000 더 먹겄다고?’
대호가 건 돈은 최초 200만원에 천 받고 이천 더.
총 3,200만원이 그가 밀어 넣은 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3,200만원을 먹으려고 1억 7000을 넘게 밀어 넣는 건 미친 짓일 뿐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실수를 했을 거여. 한 번쯤 삑사리가 나기도 하니께.’
대호가 고심 끝에 패를 던졌다.
"죽는다."
"죽어? 흐흐. 그럼 이건 내가···."
"잠깐. 패좀 확인해 봐야 겄어."
"무슨 패?"
"바꿔치기한 거 아녀?"
"어이 아재. 내가 장난질 했다는 그 말 책임 질 수 있어?"
도훈이 눈을 매섭게 뜨며 대들었다.
< 929. 여름 방학-2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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