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7. 여름 방학-19- >
***
도박은 철저한 제로섬 게임이다.
승자가 있다면 패자도 있다.
오늘 도훈에게 1억원이란 거금을 털린 노태윤은 철저한 패자였다.
‘이게 과연 현실이란 말인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서서 거울을 보는데, 이마에 골이 더욱 깊어졌고 흰머리가 수북했다. 반나절 사이 그는 10년은 훌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태윤의 머릿속에선 마지막 게임 장면이 또렷하게 재생되었다. 무슨 패를 내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뇌리에 박힌 듯 지워지질 않았다.
‘속임수라도 쓴 것일까?’
하지만 손놀림은 서툴렀다. 도박을 자신보다 덜 해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기리를 두 눈으로 본 이상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패가 그렇게 뒤죽박죽이 되었는데도 다시 탄을 만드는 기술은 듣도 보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태윤은 도훈과 나누어 가진 차용증을 보며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1억.
자그마치 1억이다.
평생을 아득바득 살면서 모아온 재산 중 1억이라는 거금을 단 한게임만에 털리고 말았다. 울분을 참다못한 노태윤이 김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 세."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조카분에게 연락이 왔던가요?
"그게 아니라, 내가 좀 물어볼 게 있네만."
-···혹시 법적인 조언인가요?
김변이 짜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두 사람은 변호사와 클라이언트로 인연을 맺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쌓이자, 태윤은 김변을 이용해 매형의 유산을 뺏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어르신, 저희가 비록 한배를 탄 사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부탁은 조금···.
"1억을 털렸네."
-네? 1억요?
"하루사이에 1억을 털렸어."
-무슨 일인데요? 혹시 사기라도 당하셨습니까?
적당히 선 긋기를 하려던 김변이 흥미를 느끼고 캐물었다. 단순한 법률 자문이 아니라 이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캐치한 것. 수임료는 나중에 받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노태윤은 대낮에 있었던 도박에 대해 상세하게 구술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이라 그런지 소상한 것 하나까지도 구구절절 불었다.
한참 얘기를 듣던 김변이 답했다.
-그거 안 갚아도 됩니다.
"안 갚아도 된 다고?"
-형사법에 따르면 사행성 도박으로 이루어진 빚은 원천무횹니다. 애초에 갚을 필요가 없는 돈입니다.
"차용증을 썼어."
-협박과 강요에 의한 차용증도 무횹니다. 경찰에 신고하시면 도박과 관련된 처벌은 피할 수 없겠지만, 채무 관계는 정리 될 겁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라···."
도훈은 만일을 대비해 머리를 썼다.
그는 노태윤이 잠적해버리면 큰일이라며 1억 중 일부라도 회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태윤이 부동산에 돈이 다 묶여있어 현금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도박에 함께 참여한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라고 맞섰다.
당시 큰 판을 벌일 요량으로 참가자들이 챙겨 온 현금은 각기 500이 넘었다. 그렇게 도훈은 다른 참가자들에게 빚을 지게 하면서까지 바득바득 현금 2000을 챙겨갔다.
-아니, 그렇다고 현금을 빌려서 줬다고요? 도박 빚을?
"어쩔 수가 없었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경황이 없기도 했고···. 쌩돈 1억원을 덜컥 빚졌는데 내놓으라며 하도 난리를 피워버리니. 나는 그것으로라도 막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겼네."
노태윤이 건물주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물론 대출과 보증을 제하면 깡통에 가깝지만, 그래도 빌린 돈을 떼일 정도까진 아니었다. 더구나 차용증까지 쓰고 건물을 담보로 잡겠다는 약속이 있었던 터라 다들 돈을 빌려주게 된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돈을 못 돌려받으면 차용증을 근거로 건물을 강제
경매에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 이거 악질 새끼네. 혹시 타짜 아니에요?
"말했잖는가, 그건 아닌 거 같다고. 두 눈 뜨고 똑똑히 감시했는데 속임수 같은 건 일절 없었어."
-그래도 말이 안 되잖습니까? 점당 만원판에 어떻게 자연빵으로 1억이 터져요? 어르신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김변이 계속 따지고 묻자 노태윤도 점점 의심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마지막 기리를 한 카센터 사장이 한 패였다면?
"생각해보니 그럴지도···."
-게다가 어디서 굴러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놈이라면서요? 어제 처음 봤고요.
"그렇지. 인근 가게를 알아본다면서···."
-그거부터 수상하잖습니까. 쌩판 모르는 사람이 도박판에 껴들어서 1억을 따가요? 백번을 생각해도 이건 사깁니다.
"사기? 그럼 경찰에 신고할까?"
-이미 튀었을 겁니다. 2,000만원을 벌써 먹었다면서요. 놈은 처음부터 1억을 다 받을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1억으로 엄포를 놓고 2,000을 챙겨가겠다는 게 속셈이었겠죠.
"하아···. 이럴 수가. 정말로 당한 건가? 정녕 내 돈을 찾을 수 없는 거야?"
-흐음. 어쩌면···. 놈이 진짜 타짜라면, 어르신한테 남은 돈을 받겠다고 연락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경찰에 신고할까?"
-신고하면 어르신도 다칩니다. 어쨌든 사행성 도박을 벌인 건 사실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눈 뜨고 2,000을 털리란 말이야?"
-아뇨. 제가 한 번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쪽으로 빠삭하신 형님을 아는데, 잘하면 그 돈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 진짜로?"
-어르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제 발이 넓습니다.
"고, 고맙네. 그렇게만 된다면야···."
-10%만 받겠습니다.
"응?"
감사를 표하던 태윤이 의아함에 되물었다.
"무슨···."
-1억원짜리 사기를 막아줬으니 10%는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뭐야? 그럼 천만원을 달란 말인가? 자네랑 나 사이에···."
-어르신. 아니면 1억원을 털릴지도 모르는데 그냥 맞으시려고요?
"그 돈은 아깐 안 갚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모르죠. 놈이 그 차용증을 싸게 후려쳐서 사채업자들한테 넘겨 버리기라도 하면요?
"사, 사채?"
-떼기라는 수법인데, 많이들 합니다. 채무 증서를 전가하면서 염가로 떠넘기는 거죠. 가령 1억원짜리 차용증이면 오천이면 팔리지 않겠습니까?
"아, 아니 어떻게 그런···."
-저도 더러운 꼴 많이 보면서 살았지만 사채 굴리는 놈들, 사람 아닙니다. 건달들도 한 수 접어요. 지독한 놈들이라고.
"아···아···."
-전 정말로 싸게 부른 겁니다. 1억 잃을 거 10%로 막는 거면 괜찮은 거래 아닙니까?
김 변의 통화를 들은 태윤은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칫하면 금쪽같은 1억을 날리게 생긴 것이었다.
그 와중에 수수료를 요구하는 김변도 얄미웠지만, 그렇다고 그의 도움이 없이는 더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알겠네. 자네만 믿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 드릴테니 기다리고 계십시오.
***
1시간 뒤.
태윤은 김변과 으슥한 다방에서 만났다.
실내에서 흡연도 가능한 다방이라 그런지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변호사 뱃지를 단 값비싼 수트를 걸친 김변이 태윤을 맞았다. 그의 옆에는 선글라스를 쓴 초면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쪽은 분은···."
"제가 아는 형님에게 소개받은 기술잡니다. 인사하시죠."
"니미럴, 상견례 자리도 아니고. 고마 인사는 집어 치와삐고 본론부터 들어가입시더. 그러니까 얼마짜리 맞았는교?"
선글라스 남성는 경상도 사투리에 말투가 걸걸했다.
태윤은 그의 험악한 첫인상에 쫄아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 일억···."
"일억?"
"네, 일억입니다."
"허-. 새끼, 한 판에 많이도 해 먹었네. 캬악, 퉤!"
갑자기 재떨이를 들어 가래침을 뱉은 사내가 태윤에게 물었다.
"아재요,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납니까?"
"예?"
잔뜩 쫄아있는 태윤을 향해 김변이 타이르듯 말했다.
"일단 앉으시고요, 이쪽 기술자분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전라도에 흑곰이 있다면, 경상도에는 대호라고들 하죠. 이쪽 바닥에선 엄청 유명하신 분입니다."
"뭔, 소개를 삐까뻔쩍하게 하요. 참 내, 낯간지럽게."
대호라는 사내가 머쓱한지 담배를 꼬나물었다.
김변이 계속 소개했다.
"별명이 타짜 잡는 호랑입니다."
"쉰 소리 고만하고. 후딱, 설명이나 싸게 해주쇼."
태윤은 대호라는 사내의 시건방진 태도에 오히려 신뢰를 느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뭔가 전문가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태윤은 도훈을 만났던 계기와 이틀간 이어진 도박 내용, 특히 마지막에 1억을 털린 단 판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태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대호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타짜 새끼 맞네."
"지, 진짜 말입니까?"
"나머지 넷은 평소에 치던 사람들이라고요?"
"네."
"믿을 만은 하고?"
"같은 동네에서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입니다.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렇게 큰 도박은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대호가 선글라스를 끌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 헌디?"
"뭐가요?"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혼자선 작업을 안 하거든. 원래 호구 하나 앉혀놓고 병신 만드는 게 이 바닥 방식이여. 근데 동료 하나 없이 작업을 쳤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소리여."
태윤이 뭔가 생각났는지 소리쳤다.
"아, 미쓰리!"
"미쓰리?"
"미쓰리가 누군데요?"
태윤이 흥분해 소리쳤다.
"그, 그 티켓 다방년. 이년놈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더니 역시!"
"아재요, 혼자만 떠들지 말고 자세하게 얘기 좀 해 보소."
"아니 그러니까···."
태윤은 도훈과 미쓰리에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미쓰리가 불쑥 자기 옆에 앉았다는 사실도.
"맞네. 고년이네. 그러니까, 미쓰리라는 오봉년이 바람잡이를 했구만."
"바람잡이?"
"큰 판 전에 갑자기 나가리 났다고 했었죠?"
"그렇지."
"그때 고 오봉년이 작업을 한 거여. 선수 섭외도 고년이 했을지도 모르겠고."
"섭외를?"
"대충 와꾸 나왔네. 영감, 그 타짜새끼 지금 연락되지?"
"연락처는 받긴 받았는데···."
"전화 한 번 때리쇼. 내일 한 판만 더 붙자고."
"한 번 더?"
대호가 씨익 웃었다.
"잃은 돈 되찾아야 하지 않겄소? 내가 싹 다 찾아 줄 테니까."
"저, 정말인가?"
듣고 있던 김변이 거들었다.
"어르신. 뭐랬습니까? 제가 해결해 준다고 했죠?"
"그, 근데 어떻게···."
김변이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시나리오를 숙지한 태윤이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누구시죠?"
-날 세. 노태윤이.
"아아, 영감님. 잔금 주시려고요? 아직 8,000 남았습니다."
-아니. 잔금은 주겠는데, 대신 나랑 한 판 만 더 하세나.
"네? 그게 무슨 소린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그러네. 자네 같으면 안 그러겠는가? 독박 한 방에 1억을 잃었는데?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그러니 딱 한 판 만 더 하세.
"둘이서요? 전 맞고는 별론···."
-아니. 판이 커질 것 같으니 내가 다른 선수 한 명은 섭외해 보겠네. 광파는 사람 없이 셋이서 한 번 제대로 쳐보세나.
"음. 판을 얼마나 키우시려고요?"
-2억.
"2억요?"
-그래. 그 정도 판은 해야 내가 만회하지 않겠나? 본전만 찾을 거면 도박 안 해야지.
"그건 맞죠. 그럼 장소는요?"
-장소는 내가 섭외해서 알려줌세. 내일 저녁 9시 어떤가?
"좋습니다. 근데 영감님 저번처럼 차용증 쓰시고 그러는 거 아니죠?"
-아닐세. 자네야 말로 현금 챙겨오게나.
"저야 영감님한테 받을 돈도 있으니 1억 2000만 챙기면 되는데요?"
-크흠. 혹시 불안하면 지인과 함께 와도 좋네.
"불안하긴요.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게 생겼습니까?"
-암튼 알겠네. 내일 연락함세.
"그러죠."
통화를 마친 도훈이 가랑이에 달라붙은 미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통화하는 내내 계속 빠냐. 집중력 떨어지게?"
"뭐야? 설마 또 도박하려고?"
"어. 노태윤 그 영감이 복수전 하고 싶다는데?"
미쓰리가 홀딱 벗은 몸으로 도훈의 옆구리로 파고 들었다.
"가지 마."
"왜?"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옛날부터 그 영감탱이 재수 없었어."
"무슨 일 있어?"
도훈은 팔베개를 하고 누운 미쓰리의 큼지막한 가슴을 주물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영감탱이가 눈빛이 영 음흉했단 말이지. 나를 볼 때마다 군침이나 삼키고."
"너 따먹고 싶었나 보지. 한 번 대주지 그랬어?"
"미쳤어? 돈을 트럭으로 가져와 봐라. 내가 대주나."
"진짜 트럭으로 가져오면?"
미쓰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진짜 가져오면 눈 딱 감고 한 번 정도?"
"풉-. 누가 다방레지 아니랄까 봐."
"뭐야. 나 그렇게 싼 여자 아니거든?"
미쓰리가 투정 부리듯 도훈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커다란 대흉근이 탄력 있게 퉁겨나가자 미쓰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쩜! 오빤 왜 이렇게 몸이 탄탄해? 혹시 보디빌더야?"
"네가 나이든 오빠들이랑 만해서 젊은 몸뚱이를 간만에 본 건 아니고?"
"아니거든? 나 그러고 생각보다 안 헐렁해. 쪼임 좋다고 다들 난리야."
"어디 한 번 쪼여 보시던가."
도훈이 두 손으로 머릴 받치고 눕자 미쓰리가 그의 위로 올라탔다. 말타기를 시작한 미쓰리가 힘차게 요분질을 시작했지만, 그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확실히 헐렁한 느낌이 가득했다.
‘쯧쯧. 누가 갈보 아니랄까 봐.’
[근데 왜 말을 심하게 하십니까?]
‘누구? 나? 아아, 미쓰리가 그걸 좋아할 것 같아서.’
[아무리 몸파는 여자라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 텐데요.]
‘미쓰리가 무슨 여자친구도 아니고···. 괜히 다정다감하게 해줬다고 나한테 들러붙으면 어쩌려고? 원래 이것도 하기 싫었는데, 오늘 공이 많아서 한 번 박아주는 거야.’
[크흠. 아무튼 주인님 예상대로 노태윤이 곱게 물러나진 않는군요.]
< 927. 여름 방학-1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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