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6. 여름 방학-18- >
도훈의 손짓이 멈칫했다.
‘기리’란 도박용어로 선을 잡은 사람이 패를 나누기 전에 말번이 한 번 더 패를 뒤섞는 것을 의미했다. 통상 3토막으로 나누는 3단 기리가 일반적.
"귀찮은데 그냥 퉁 하시죠."
‘퉁’이란 기리를 하지 않고 곧바로 패를 돌리자는 은어였다. 하지만 카센터를 운영한다는 사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판 나가리면 기본 2배 판인데 퉁이라니? 가당치 않지. 다시 줘봐."
카센타 사장은 갑자기 도훈의 화투패를 뺏어 들더니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흐트러트렸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손장난을 원천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흐흐. 내가 모를 줄 알고? 아까 미쓰리가 옷자락 펄럭일 때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단 말이지?’
카센타 사장은 도훈의 부자연스러웠던 재채기에 뒤이은 미쓰리의 시선 끌기가 일종의 사인일 거로 의심했다. 직접 보진 못했으니 속임수를 잡아낼 순 없었지만, 패를 완전히 재배열해 버림으로써 미연의 사태를 방지한 것이었다.
‘그럴리 없겠지만 네 놈이 설사 타짜 할애비라도 이 상황에선 장난질 못 할 거다.’
패를 다시 섞은 카센타 사장이 화투를 한 대 모아 도훈에게 내밀었다.
"기리 끝."
"거참, 기리 한 번 요란하게 하시네요."
"젊은 친구. 너무 기분 나빠 말라구. 이래야 누가 이겨도 불만 없지 않겠어?"
탄을 완전히 봉쇄당한 도훈이었지만, 그의 표정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카센타 사장의 과한 의심이 그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크크. 멍청하긴. 이게 보통 탄인 줄 알고?’
도훈이 여유를 부린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탄은 패가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모든 게 망가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천상계의 탄은 애초부터 카드 앞면이 미확정인 상태로 나왔다.
원리는 초나노입자로 구성된 스크린이 카드 앞면에 설치되어 패를 까뒤집을 때마다 사용자에게 가장 최선의 패로 뒤바꾸는 방식.
가령 고도리를 하고 싶으면, 쥐고 있던 패 중 아무거나 던지더라도 뒤집는 패와 페어를 맞춤으로써 족보를 완성시켰다. 실제 도훈이 연습할 때 프로그램에 결과 값만 입력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해당되는 결과가 도출되는 식이었다.
[주인님, 준비되셨습니까?]
‘어. 노태윤 저 영감 혼자 독박 쓰도록, 최대치로.’
[알겠습니다. 이제 원하는 데로 플레이만 하시면 됩니다.]
도훈이 여유있게 패를 돌렸다.
입력된 명령어가 작동하며 아무 그림도 없던 민무늬 화투에 제각기 꽃그림이 새겨졌다. 인공지능을 통해 자동배열된 패는 사람의 심리를 절묘하게 간파하도록 구성되었으며, 설사 플레이어들이 무작위로 패를 던지더라도 뒤집는 패를 실시간으로 변경하여 끝
내 원하는 결과값을 도출하도록 만들어내는 고도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다.
‘후후. 최고의 타짜는 손기술로 완성되는 게 아니야.’
[그럼요?]
‘템빨이지.’
마침내 게임이 시작되었다.
패를 받은 다섯은 각자의 패를 확인하는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만하면 나가리 판을 먹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3명만 참여하는 고스톱 규칙상 두 명은 필히 죽어야 했다. 결국 4번과 5번 플레이어가 아쉬운 표정으로 패를 던졌고, 말 번인 5번은 광2장과 특피 한 장을 팔며 광값으로만 10만원 넘게 벌었다.
"아이고, 아쉬워라. 이걸 죽어야 하다니."
"패를 잘 받으면 뭐해. 나가리 판에 참여도 못 하는데."
"그래도 자네는 광이라도 팔았지."
"광 값만 가지고 되겄는가, 큰 판을 먹어야지."
두 사람의 패가 다시 뒤섞이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닥 패를 뒤집자 특피 한 장이 보였다. 특피가 깔리면 선이 먹는 것이 규칙이었으므로 도훈이 만족해하며 특피를 챙겼다.
"아이고, 첫 끝 빨이 개 끝 빨만 아니면 좋겠네요."
"얼른 시작이나 해."
태윤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그가 받은 패와 바닥에 깔린 패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판이었다.
‘흐흐. 이놈의 새끼, 한 번 제대로 맞아봐라.’
처음부터 태윤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운이 따르는지 내는 족족 뒤집어 먹었고, 특피에 쌍피를 모두 쓸어가며 3바퀴 만에 3점이 났다.
함께 게임에 참여한 도훈과 김사장을 보니 둘 다 날 것도 없는 상황. 태윤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원 고!"
"아이고, 영감님 살살 좀 하쇼. 무서워 죽겄네."
김 사장이 엄살을 부리며 패를 던졌다.
그는 우연히 띠만 먹었기 때문에, 피박을 면하기 위해 무피 전략으로 맞섰다. 피박이란 껍데기가 6장이 미만일시 두 배로 물어주어야 했는데, 피를 하나도 안 먹을 경우 면피가 되는 룰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어 도훈의 차례.
도훈이 과감히 팔 광을 노렸지만, 뒤집는 패에 싸고 말았다.
"아차!"
"허허, 초출은 늘 조심했어야지."
도훈이 싸는 순간 태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안전벨트 단단히 매라고. 이제부터 사정없이 달려버릴 테니까."
"워메, 그냥 죽어브써야 된디 괜히 껴가지고."
태윤이 신이 나서 피를 추가하는 순간.
공교롭게도 뒤집는 패가 똑같이 나오고 말았다.
"엇?"
"쌌네?"
"못 났지?"
"못 났는데?"
고를 한 상태에서는 다음 차례에 무조건 점수를 추가해야 다음 진행을 선택할 수 있었다. 초장부터 악셀을 밟던 태윤은 급제동이 걸리며 주춤했다.
"원참, 다음에 나면 돼."
이어 김사장의 차례.
김사장은 최대한 피를 안 먹으려 했지만, 우연처럼 내던지 패가 뒤집어 맞으면서 끝내 피 한 장을 추가했다.
"아이고, 피를 안 먹었어야 되는데."
‘이제부터 시작인가.’
도훈의 손에 쥐어진 화투패의 그림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인공지능이 결과 값을 계산해 최선의 패를 조정해 주는 방식이었다. 다른 사람의 패는 나눠줄 때 고정되지만, 아이템 사용자인 도훈의 패는 백지 수표나 마찬가지였다.
"자, 우선 아까 먹은 특피 부터 내리고요."
도훈이 바닥에 특피를 내리고 더미에서 한 장을 가져왔다. 이것으로 피가 6장이 되면서 피박은 자연스럽게 면해졌다. 이어서 도훈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닥패를 내리쳤다.
"폭탄이요!"
바닥에 깔린 똥피에 3장을 투하한 것이었다.
"으아니!"
"똥 폭탄!"
똥은 광과 특피를 포함 피가 4장이나 포함되어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녔다. 특히 폭탄을 던지는 순간 상대 패를 뺏어오기 때문에 도훈은 한방에 6피를 벌어들였다.
"저게 뭐야?"
"와, 한방에 몇 피를 먹은 거야?"
"가만 있어 봐, 지금 난 거 아녀?"
"진짜네? 피로 나브렀네?"
피가 12장이 되면 3점.
특히 노태윤이 고를 외친 상황에서 도훈이 나버리자 태윤의 독박 게임이 되고 말았다. 독박이란, 혼자서 나머지 한 사람의 몫가지 대신 값을 치러야하는 무시무시한 룰.
"어, 어떻할 텐가?"
제발 스톱을 외쳐달라는 표정으로 태윤이 간절히 물었지만, 도훈은 일언지하에 고를 외쳤다.
"이렇게 되면 못 먹어도 고죠, 원 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초장에 리드를 잡은 태윤의 무난한 승리로 끝날 판이 똥 폭탄 한방에 판이 뒤집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태윤이 독박을 맞음으로써 조마조마하고 있던 김사장은 차라리 잘됐다며 기뻐했다.
"젊은 친구, 화끈하구만!"
태윤은 손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많던 바닥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도훈에게 피를 하나 뺏기면서 두 개를 먹어야 되는 상황에서 태윤은 무리하게 국화(9자) 껍데기를 던졌다.
"아!"
그러나 뒤집힌 패는 전혀 상관없는 패였다.
바닥 패만 늘린 꼴이 된 태윤이 절망적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어진 김사장이 로열끗 투피를 던져 9자를 노렸으나, 그대로 싸고 말았다.
"아이고야! 이걸 여기서!"
"아니! 초출인데 조심하지 않고서!"
태윤이 김사장의 무성의한 행동을 비난했지만, 어차피 승부와 상관이 없어진 김사장은 머쓱해할 뿐이었다.
"저라고 이리 될 줄 알았당가요, 피박이라도 면할라고 한 거지."
연이어 도훈이 쌓아진 두 개를 터뜨렸다.
던져서 먹고, 특피 얹고, 까뒤집어 먹고. 심지어 싹쓸이까지 했다.
"투 고!!!"
도훈이 우렁차게 외쳤다.
이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또다시 피를 3장이나 빼앗긴 태윤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아, 아니 이게 뭐야.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손발이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마냥 눈 앞이 깜깜해졌다.
고스톱은 배팅을 하는 게임이 아니다.
포커처럼 불리한 카드를 받는 다고 중간에 죽을 수도 없다.
한 번 휘말리기 시작하면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가면서 폭풍처럼 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이건 꿈이야.’
도훈이 싹쓸이를 했기 때문에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태윤은 또다시 바닥패를 깔았고, 거짓말처럼 김사장이 광이 든 패를 쌓았으며, 도훈이 연달아 터뜨리며 싹쓸이를 했다.
"쓰리고!"
노태윤에겐 그야말로 악몽같은 순간이었다.
이제 도훈은 3광까지 달성하며 광박까지 얹었다.
"그, 그만···."
"네?"
"저, 적당히 스톱해도 되지 않는가."
"아니, 영감님 무슨 소리 하세요? 끝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면서요. 아직 게임 안 끝났습니다."
도훈의 차가운 대답에 태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미 도훈의 패는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재 6개인 피를 지키며 피박이라도 면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그래 피박이라도 면하면···.’
하지만 하늘은 태윤을 버렸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한 번 더 반복되며, 태윤은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면피 저지선이 무너졌다.
"포. 고."
도훈이 선전포고를 하듯 포고를 외쳤다.
결국 마지막 패를 뒤집었을 때 끝내 피를 먹은 김사장 덕분엔 둘다 양박을 맞았다. 도훈이 수북히 쌓인 패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계산 들어갑니다. 오광 15점, 고도리 5점, 청단에 3점, 멍텅구리(동물그림) 3점, 피가 총 17장이니 8점. 포고니까 4점 더해서, 도합 39점에다가, 전판 나가리 2배, 흔들어 폭탄 4배, 광박에 8배, 피박도 하셨으니 16배, 멍박 더해서 32배, 쓰리고에 64배.
포고니까 토탈 128배!!!"
"배, 백이십팔배?"
"이것이 뭐시여?"
"으아니!"
"이게 말이 돼?"
"계산기 한 번 줘보세요."
도훈의 말에 김사장이 넙죽 계산기를 가져다 바쳤다.
그의 입장에선 인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패에서 구제가 되었으므로 심장이 박동치는 상황이었다.
"계산기 때리니까 4992점 나오네요."
"사, 사천 구백?"
"우아악!"
"말도 안돼."
기절할 것 같은 태윤 앞에서 도훈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 참, 독박이셨죠? 그럼 곱하기 2해서 9984점. 점당 만원이니까 1억 좀 안되네요."
도훈이 가진 지폐를 세더니 16만원을 먼저 거슬러 줬다.
"이거 개평 아니고요, 이거 받고 1억 주시면 되겠습니다."
"1, 1억!"
"한 방에 1억을 태워?"
"아니, 이건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않는가?"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한 판이었다.
"서, 설마 자네 탄 쓴 거 아녀?"
"탄이라뇨?"
도훈이 되레 물었다.
"시작할 때 카센터 사장님이 제 패 섞은 거 못 보셨어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
"세상에 어떤 기술자가 그렇게 뒤죽박죽된 패를 가지고 탄을 씁니까? 설마 남자가 한 입 가지고 두 말하시는 거 아니죠?"
"아, 아니 이건 그래도···."
"사람아, 그래도 인정이라는 게 있어야."
김사장이 도훈을 만류하자 도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왜요? 영감님 힘드실 것 같으면 독박 씌우지 말고 대신 절반 내실래요?"
"내, 내가 뭐덜라고 그런당가."
"아니면 빠지시고요. 괜히 참견하지 마시고."
"그, 그럼세."
도훈이 기절 직전인 노태윤을 향해 다시 말했다.
"토탈 1억이에요. 영감님 저한테 지금 1억 빚지신 거예요."
"이, 일억···."
노태윤은 한 방에 일억을 날린 도박에 혼이 나가버렸다. 다들 도훈의 내보이는 흉흉한 기세에 밀려 감히 따질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주실 건데요? 같이 은행 갈까요?"
"아, 아니 잠깐만 내가 현금 일억이 어디있나? 오늘은 힘드니 조금만 말미를 주시게."
"왜요? 도박 빚은 안 갚아도 되니까 나중에 무르시려고요? 그렇게는 못 하죠. 차용증 한 장 쓰시죠?"
"차, 차용증?"
"네. 1억을 못 갚으면 담보로 영감님 건물을 넘긴다던가. 마침 여기 공인중개사 분도 계시니."
김사장이 눈만 꿈뻑거렸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도훈이었다.
컴퓨터를 빌린 도훈은 순식간에 차용증을 써 내려갔다.
만약 현금 1억을 갚지 못하면, 가진 건물로 대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부러 도박에 대한 부분은 일절 쓰지 않았다.
"이제 지장 찍으시죠."
"아, 아니 젊은 양반. 이렇게까지 해야겠는가?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라는 게 있는데···."
"인정요? 무슨 인정요? 저 아세요?"
"아, 아니 그래도."
"얼른 찍기나 하세요."
태윤은 마지못해 지장을 찍었다.
도훈 역시 도작을 찍으며 말했다.
"차용증에 적힌 대로 오늘은 여기 있는 판돈만 다 챙겨가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영감님이 만약 돈을 못 갚으면 건물 저당 잡혀 경매 넘기는 것으로 받으세요."
도훈은 그렇게 각각 사람들이 판 돈으로 챙겨 온 현금 2000여만원을 싹 쓸어갔다.
< 926. 여름 방학-1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