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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40화 (907/2,000)

< 923. 여름 방학-15- >

차량으로 간 도훈이 대쉬보드 안쪽에 숨겨두었던 현금다발을 꺼냈다. 일전에 받은 현금 1억원 가운데 천만원 가량은 늘 비상금으로 가지고 다녔는데, 흥신소에 500을 쓰고 500만원이 남아있었다.

도훈은 지폐뭉치를 손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잃으면 괜히 의심할 거야. 앞서 30만원을 날렸으니 추가로 50만 더 잃어주자.’

5만 원 열 장을 챙긴 도훈은 복덕방으로 향하며 로시에게 물었다.

‘도박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은 뭐가 있지?’

[투시경 정도가 좋겠습니다.]

‘투시경?’

[네. 특정 물체를 투과하는 아이템으로 뒷면의 패를 훤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근데 안경을 안 쓰다 갑자기 쓰는 것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겠어?’

[투시경은 안경, 선글라스, 렌즈 형태 모두 가능합니다. 티 안 나게 사용하실 거면 랜즈 타입을 추천합니다.]

‘오케이. 랜즈 타입으로 구매해. 맞다, 이거 혹시 사람 몸도 투시해 볼 수 있나?’

[왜요? 변태처럼 몸매 감상하시려고요?]

‘아니, 그냥 물어 본 거야.’

[안타깝지만 사람 몸은 투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피부는 투과해 버리는 특성이 있거든요.]

‘아니, 왜 굳이 그렇게 만들었지? 잘난 천상계의 기술력이면 충분할 텐데 말이야.’

[주인님처럼 변태같은 플레이어를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뭐, 인마?’

도훈은 사람은 투시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쨌든 도박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투시 랜즈를 구매해 착용했다. 도훈이 다시 입장하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가게 사장들이 서로 자기 옆자리를 권했다.

"정말로 다시 왔구만, 그래."

"젊은 친구가 근성이 보통이 아니야."

"내 옆으로 앉으시게나."

도훈은 일부러 눈치를 살핀 후 태윤의 옆에 앉았다. 태윤은 도훈이 자기 옆에 앉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민주 외삼촌이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죠?]

‘고스톱은 원래 호구를 자기 왼쪽에 앉히는 게 국롤이거든.’

[왜요?]

‘생각해봐. 순서가 반시계방향으로 돌게 되니까 자기 왼쪽 사람이 어떤 패를 내는 가에 따라 다음에 자기 먹을 것이 결정되잖아. 호구가 옆에 앉으면 끊어야 할 것도 못 끊고, 먹을 것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야. 그러니 게임을 터뜨리기 쉬워지는 거지.’

[오호라. 주인님은 그럼 일부러 왼편에 앉은 것이군요.]

‘그렇지. 오늘은 작정하고 대주려고. 저 양반이 손맛을 봐야 다음 판에 끌어들이기 쉬울 테니까.’

"자, 젊은 친구도 왔는데 다시 시작해 볼까?"

또다시 패가 돌았다.

도훈은 이기고 지다를 반복하며 평범하게 플레이를 했다. 질 때는 몹시 아쉬워하고 이길 때는 환호성을 지르는 등, 호구처럼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 태윤에게 좋은 패가 들어오자 일부러 그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아이고, 감사! 딱 필요한 걸 골라서 던져주네! 시작부터 청단이요!"

"아, 아니!"

"아이고, 딱 봐도 청단을 노리는 데 그걸 던지면 어떡하나."

도훈의 자살골에 함께 플레이하던 사람들이 탄식했다.

그러나 이미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원고!"

태윤이 신을 내며 피 한 장을 뒤집었다. 다음 차례가 되었을 때 도훈은 투시경을 이용해 태윤이 필요한 패를 확인했다.

‘오케이. 이걸 내면 싹쓸이구나.’

도훈이 의도적으로 흘린 패에 태윤이 까뒤집어 나온 패로 바닥패를 모두 쓸어 담았다.

"아이고, 이런 행운이! 자자, 한 장씩 더 붙이고! 투고!"

"아, 아니 어휴, 이게 뭐야!"

"저도 낼 패가 이것밖에 없었어요."

도훈 역시 피해자임을 강조했지만 태윤은 벌써 양쪽에 피박까지 먹인 상태였다. 그 판은 두 번째 바퀴부터 나기 시작했으므로, 태윤은 끝내 포고를 완성하고 광박까지 곁들였다.

점수를 계산하는 태윤이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양쪽 다 피박에 광박에, 점수가 30점이니 따따블에 120점. 점 당 천원이니까 12만원씩, 깔끔하네!"

"와! 이게 이렇게나 돼나."

"휴, 나는 빠지길 잘했구만."

"아니, 이 친구가 패를 대주지만 않았어도···."

"저라고 설마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도훈이 흥분하며 씩씩거렸다.

한판에 24만원을 쓸어 담은 태윤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운이 좋았구만 그래. 자자, 젊은 친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흥분마시고."

다시 도박이 시작되었고, 몇 차례 같은 일이 벌어지자 도훈은 1시간 만에 40만원을 태워버렸다. 도훈이 밀어준 탓에 태윤은 오늘 하루만 100만원 넘는 가까운 돈을 벌었다.

"대박이네, 대박. 점당 천 원짜리가 이렇게까지 커지나? 오늘은 내가 크게 땄으니 커피라도 한잔 대접함세. 차다방 전화 해봐."

"차다방으로요?"

"응, 미쓰리로 불러."

"그래. 간만에 미쓰리 고것 궁딩이 한 번 두들겨 보자고."

돈을 딴 태윤이 신이 나서 다방에 주문을 걸었다.

돈 잃은 연기를 하느라 울상을 짓고 있던 도훈이 생각했다.

‘미쓰리? 다방레지인가? 나이도 정정하신 분이 여색도 겸하셨구만 그래.’

[왜요? 무슨 아이디어가 떠오르셨습니까?]

‘자고로 사내 가슴에 불을 당기는 건 여자를 이용하는 방법이 최고거든.’

잠시 후 복덕방으로 젊은 아가씨가 한 명이 커피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진한 화장, 미니스커트에 망사스타킹까지. 온몸에서 천박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다방레지였다.

‘완벽하다, 진짜. 천상 다방 레지 스타일이야.’

"오늘도 한판 치고 계셨엉?"

풍선껌을 쫙쫙 씹으면서 들어오던 미쓰리가 테이블에 앉은 도훈을 발견하고는 묘한 시선을 보냈다. 40~50대가 대부분인 복덕방에 간만에 젊은 피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근데 이 잘생긴 오빤 누구?"

"이번엔 동네에 컴퓨터 가게 낸다는구만. 가게 구하러 왔다가 잠시 놀고 있는 중이야."

"어머, 그럼 앞으로 동네 주민이네? 반가워요. 미쓰리라고 해요, 호호홋."

미쓰리가 싸구려 웃음을 지으며 도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사이 몰래 오빠믿지 립밤을 입술에 바르던 도훈이 미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정우라고 합니다. 미인이시네."

립밤을 바르고 건넨 말은 상대로 하여금 강한 신뢰를 품게 한다. 도훈의 칭찬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미쓰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호홋."

도훈은 동시에 손목에 뿌린 페레몬 향수로 그녀의 방심을 흔들었다.

"저는 달달한 걸로 부탁할게요."

"커피보다 내가 더 달텐데?"

"아이고, 우리 미쓰리가 젊은 총각을 보더니 아주 신이 났구만, 그래. 근데 총각 맞지?"

"아, 네.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어머, 미혼이에요? 애인 있게 생겼는데?"

"사업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어요."

"오빠 짱 멋지다, 진짜. 나 이 오빠 옆에 앉아도 되죠?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내가 한참 동생같은데."

미쓰리가 굳이 비좁은 틈 사이를 파고들며 도훈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기분을 낸다고 커피를 쏜 태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도훈이 몰래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

{아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더니 괜히 헛돈만 썼구만? 미쓰리 저것은 나한테는 쌀쌀맞더니 왜 처음보는 저놈한테는 저리 아양을 부리는 거야?}

도훈이 태윤의 속마음을 읽고 비웃었다.

‘풉-. 참으로 주책없는 양반일세. 아니 그럼 환갑이 다된 노인네보다야 30대 총각이 당연히 인기가 많지. 하여간 잘됐다. 저 노인네 열 받게 미쓰리를 더 구워 삶아야겠다.’

"오빠 돈 좀 땄어?"

"아니. 다 잃었어."

"돈은 내가 땄지."

태윤이 자랑스럽게 딴 돈을 바닥에 펼쳤다.

5만원 짜리 현금이 바닥에 펼쳐지자 미쓰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도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까짓것 푼돈 좀 잃으면 어때? 남은 돈 너 다 가져."

도훈은 남은 10만원을 쥐더니 미쓰리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주었다. 미쓰리가 돈을 흘리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꽉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도훈의 손이 미쓰리의 허벅지 사이에 들어가자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따, 젊은 친구가 제법 놀 줄 알구만, 그래!"

"사내는 사내여!"

"아잉, 오빠. 처음 봤는데 무슨 용돈을 주고 그랭. 잘 쓸게."

미쓰 리가 도훈의 팁에 활짝 웃었다. 돈 자랑만 실컷하고 선수를 빼앗긴 태윤은 더욱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저, 저 새파랗게 어린놈이!}

하지만 이제와 뒤늦게 팁을 챙겨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괜히 도훈을 의식해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태윤을 도발한 도훈이 커피를 다 마시더니 손을 털고 일어났다.

"박 영감님은 오늘 연락이 안 되실 모양이네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벌써 가게?"

"더 놀다가지."

"비즈니스가 바빠서요. 참, 그리고 내일 시간 되면 한 판 더 하실래요? 제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도박판에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눈치를 살폈다. 호구인 도훈이 제 발로 다시 오겠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그러시게. 얼마든지 환영이네."

"오늘은 운이 없었지만, 내일은 또 모르잖는가?"

"그래, 그래. 어차피 이제 한 동네 주민인데 같이 어울리고 좋지."

도훈이 일어서자 미쓰리도 따라 일어섰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미쓰리는 왜 벌써가?"

"커피 다 드셨잖아요? 흥, 팁 하나 안주면서."

미쓰리가 도도하게 말하더니 짐을 싸서 먼저 나갔다. 도훈이 따라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쓰리가 말했다.

"오빠. 심심하면 우리 가게 한 번 놀러와. 잘해 줄게."

"어, 그래. 또 볼일 있을 거야."

"내 연락처는 알고?"

"응?"

미쓰리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도훈의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도훈의 탄탄한 엉덩이를 콱 움켜쥐는 것이었다.

"호호, 엉덩이 탄탄한 것 좀 봐? 내 명함 넣어뒀어. 티켓 끊고 싶음 아무 때나 콜때려. 나 그럼 간다."

명함을 건넨 미쓰리가 오토바이에 오르더니 도훈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도훈은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염색한 머리칼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싼 티 작열이네, 진짜. 대놓고 천박해서 은근 귀엽기도 하고."

[근데 미쓰리 호감도는 왜 올려두신 겁니까? 오빠믿지 립밤에 페로몬 향수까지···. 초면에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쓰시더군요.]

‘민주 외삼촌이 주책맞게 미쓰리를 눈독 들이잖아. 내가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나에게 더 열 받겠지.’

[한마디로 도발이군요.]

‘그렇지. 딴에는 노름도 못 하는 놈이 젊음만 믿고 설친다고 생각하겠지. 호구하나 단단히 물었다고 말이야. 그렇게 믿었으면 오늘 목적 달성이야.’

[오늘만 거의 80만원을 잃었습니다. 부디 투자의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80만원 쯤이야 우습지. 두고 봐. 다음에 판 키워서 100배로 갚아줄 테니까.’

[점 당 천원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아마 탄을 만들어 터뜨리면 이론상 3000점도 넘을 수 있어. 그래 봐야 300만원이지. 두 사람 동시에 긁어내도 600만원이고. 그러니 슬슬 약을 올리면서 판돈을 더 올려야지. 점 당 천에서 만원으로 올리면 한 판에 6000만원까지 터진다고. 독박 씌우면 밑천 거

덜 내는 건 일도 아니지.’

[역시 주인님은 치밀하시군요.]

‘민주를 함정에 빠뜨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 줄거야. 쫌생이 영감탱이 이번에 아주 임자 만났다고 봐야지.’

***

다음날.

준비를 마친 도훈이 점심부터 복덕방을 찾았다. 이미 부동산 중개는 뒷전인 듯 김사장이 노름 멤버들을 호출했다. 어제 도훈의 호구짓으로 대부분 돈을 땄으므로 손맛을 잊지 못한 그들은 대낮부터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왔는가?"

"네,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복수전 한 판 해야지 않겠습니까?"

도훈은 일부러 지폐뭉치를 담은 가방을 열어 보였다. 5만원 짜리 뭉치로 보아 얼핏 봐도 1000만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있었다.

다들 몇 십 만원 정도로 소소한 노름을 하던 이들이었지만, 도훈의 현금을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갔다.

‘저 호구새끼.’

‘개호구가 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구만.’

‘밑천으로 누를 생각인가 본데 어림없지. 우리가 돈이 없어서 작게 치는 게 아니거든.’

도훈은 눈이 돌아간 도박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어째 근데 어르신들은 영 지갑이 얇아 보이시네요. 설마 제 돈만 쏙 빼드실 생각은 아니죠?"

"에이, 무슨 말을. 현금이라면 당장 은행서 찾아오면 되지."

"말 나온 김에 나도 좀 챙겨옴세."

"그래. 기왕 하는 거 밑천 한 번 깔고 제대로 해보세."

이들은 어젯밤 암묵적으로 도훈을 털어먹을 계획을 세운 상태.

고스톱이란 게임은 손장난을 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패를 몰아줌으로써 상대를 못 이기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즉 호구 하나 앉혀두고 서로가 벗겨 먹을 궁리를 짠 것이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도훈의 돈만 빼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다들 서둘러 현금을 챙겨오기 시작했다. 도훈만큼은 아니더라도 인당 500정도씩 챙겨오자 금세 판돈이 두둑해졌다. 물론 이들은 서로 싸울 생각은 없고 호구인 도훈의 돈만 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패 돌리기 전에 미쓰리나 부를까요? 제가 옆에 여자가 있어야 기운을 받는 타입이라서."

"미쓰리를?"

"고것은 엉덩이가 가벼워서 금방 일어나 버릴 걸?"

"그럼 엉덩이가 무거워지게 돈 줘서 눌러 앉히면 그만이죠."

도훈이 현금을 펼쳐 부채처럼 흔들며 건방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태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저, 새파랗게 어린노무 새끼가!’

< 923. 여름 방학-1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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