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2. 여름 방학-14- >
‘우선 민주 외삼촌부터 작업 들어가자.’
[어떻게 하시려고요?]
‘실사부터 가봐야지.’
[실사요?]
‘어디서부터 작업을 들어갈지 견적 좀 내보려고.’
도훈은 일전 호스트빠 미션에서 사용했던 역용 마스크를 통해 얼굴을 바꾸기로 했다. 지금은 너무 어리고 잘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띌 가능성이 컸다.
아이템을 쓴 도훈은 잠시 후 30대 중반의 평범한 남성으로 변모했다. 거기다 변장아이템을 통해 수염까지 자연스럽게 붙이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이러면 나라는 건 전혀 못 알아채겠지?’
[감쪽같습니다, 주인님.]
도훈은 번개에게서 얻은 주소를 이용해 태윤의 주변을 탐문했다.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주인 태윤은 평소 지인의 가게를 방문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게 일상이었다.
‘노인네가 할 일도 참 없구나.’
[은퇴한 건물주가 할 일이 딱히 있겠습니까?]
‘그래도 뭔가 파고들 틈이 있을 텐데 말이야.’
[파고들 틈이요?]
‘평생 사업하고 돈 좋아했던 양반이 은퇴까지 했으니 얼마나 삶이 무료하겠어? 사람은 심심하면 제명에 못 사는 법이거든.’
해 질 녘이 되자 태윤이 허름한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게라도 내놨나?’
잠깐 들른 줄 알았던 태윤은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30분을 넘어 1시간에 이르러서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안 나오는데요?]
‘뭔가 수상하지?’
그때 오토바이가 한 대 다가오더니 철가방을 들고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배달부를 향해 차에서 내린 도훈이 다가가 물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누구세요?"
젊은 배달부는 갑자기 말을 거는 도훈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안에 들어가신 어르신 한 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통 안 나오셔서요."
"한참 진행 중이던데?"
"뭐가요?"
"안에 판 벌였잖아요."
"판이요?"
도훈은 곧바로 배달부의 말을 이해했다.
‘아하, 도박판이 벌어졌나 보군.’
[도박요?]
‘어쩐지 나올 생각을 안 하더라니···.’
"저 양반들 한 번 판 벌이면 새벽까지 날 새는 거 일도 아니에요. 지난번 한번은 가게 마감하는데 밤늦게 배달 주문을 넣더라니까요? 아무리 단골이라도 상도가 있어야지."
"아···. 그랬군요."
"거,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나오려면 한참 걸릴 테니 직접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거요."
배달부가 오타바이에 오르는 데 도훈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또 왜요? 나 지금 바빠요."
"그게 아니고, 안에 몇 분이나 계시나요? 빈손으로 가긴 그렇고 음료수라도 사가려고요."
"오늘은 넷이서 치더라고요. 그 뭐야, 약국 양반이 가족들이랑 여름 휴가를 떠났다나 뭐라나?"
"네 분요? 감사합니다."
배달부가 쌩하니 사라지자 도훈이 복덕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그러니까 민주 외삼촌이 소일거리로 도박을 하는 모양이군.’
[그런가 본데요.]
‘도박 좋아하는 사람이면 패가망신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
[이제 어쩌시려고요?]
‘자연스럽게 끼어들 방법을 찾아봐야지.’
도훈은 그대로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배달부 말처럼 4명의 사람이 테이블 위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어찌나 도박에 집중하는 지 사람이 가게에 들어오는 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크흠!"
도훈이 헛기침을 하자 놀란 사람들이 갑자기 바닥에 깔린 지폐와 화투 패를 헐레벌떡 숨겼다.
"어, 무슨 일로···."
주인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도훈에게 물었다.
"가게 좀 알아보러 왔는데 바쁘신 것 같으니 다음에 오겠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소. 나 이판 광 팔고 빠져도 되지?"
"아니 김사장 빠지면 빠지는 거지, 나가는 도중에 광을 파는 법이 어딨어?"
"그래. 나갈거면 그냥 죽으라고."
그들은 도훈이 혹시나 경찰이라도 되는 줄 놀랐다가 평범한 손님이란 걸 알고 다시 게임을 이어갔다.
도훈은 공인중개사와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근데 무슨 가게를 알아보시려고?"
"저 밑에 임대 내놓은 가게 하나 보고 왔습니다."
"아, 컴퓨터 수리점? 젊은 양반도 컴퓨터 가게 하시게?"
"뭐 비슷한 업종입니다."
"잘 됐수다. 건물주 최영감이랑 나랑 막역한 사이니, 바로 전화 걸어 봄세."
"아뇨. 우선 보증금이랑 임대료부터 보고요."
"그려? 가만있자. 최영감이 저 가게를 얼마나 내놨더라···."
복덕방 주인이 장부를 뒤지는 사이 도훈이 도박판이 벌어진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종목은 고스톱. 판돈 깔린 거 보니 점 당 천원은 되어 보이는데···.’
[점 당 천원이 큰 판인가요?]
‘작진 않지. 크게 터지면 한판에 돈백 이상 우습게 깨질 수 있으니까. 물론 자주 나오는 판은 아니지만.’
"어, 그래 여기 있구만. 보증금 3000에 월세 100. 같은 업종으로 들어가면 권리금도 약간 붙을 거고."
"3000에 100이요? 흐음."
"왜? 금액이 마땅치 않은가?"
"혹시 조정도 가능한가요?"
"일단 내놓긴 그리 내놨는데 집주인하고 상의를 해 봐야지. 아마 보증금 줄이고 월세를 올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네만. 얼마나 부족한데?"
"아뇨. 되도록 올 전세로 하고 싶어서요."
"올전세?"
복덕방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월세 100만원짜리 가게를 올전세로 받기 위해선 억 단위는 우습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끽해야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도훈은 생각보다 자금 사정이 넉넉한것 같았다.
"그건 한 번 얘기를 해봐야 겠구만. 최영감한테 전화 해줘?"
"네, 부탁드립니다."
도훈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던 김사장을 향해, 고스톱을 치고 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
"김사장, 얼른 들어와. 다음 판은 연사라 못 빠져."
"지금 일하고 있잖는가! 거참 사람들 매정하기는."
"누군 돈 꼴고 있는데, 돈 버는 사람이 할 소린 아니지."
통화는 되지 않고 자꾸 주변에서 채근하는 탓에 김사장이 도훈에게 사정했다.
"지금 전화를 안 받으시는구만. 영감님 저녁식사시간 같으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볼 텐가? 아마 부재중 전화를 보면 연락이 올것이네만."
"그러죠 뭐."
"김사장, 지금 패 돌린다?"
"아, 한다고! 해!"
김사장이 부리나케 뛰어가더니 패를 받았다.
혼자 남겨진 도훈이 자연스럽게 도박판 근처를 기웃거렸다.
"기다리기 심심한데 잠시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자네도 화투 좋아하나?"
"에잉,젊은 친구가 무슨 화투를 하겠어?"
자리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도훈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 사람들 신상부터 파악해야겠는데···.’
도훈은 화투판을 구경하며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머리가 훤히 까진 사내는 앞서 얘기했던 복덕방 김사장. 그리고 그 옆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민주 외삼촌이구나.’
번개에게서 사진을 받아 미리 얼굴을 기억하고있던 도훈은 곧바로 노태윤을 알아보았다. 나머지 둘 역시 대화 내용으로보아, 동네에서 카센타를 운영하는 문씨 아재와 금은방 주인 박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의 나이는 제각각이었는데, 환갑이 다 된 노태윤을 비롯 50대인 김사장과 박씨, 심지어 카센터 문아재는 40대 초반이었다.
‘그러니까 인근 상가 사람들 중에서 도박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밤마다 이렇게 판을 벌이는 것이로군? 여기에 아까 배달부가 말한 약사까지 멤버가 총 다섯이고.’
도훈이 멀뚱히 지켜보는데 카센타 문사장이 말했다.
"약사 형님은 여름 휴가 간다더니 어디로 갔다는 겨? 워메, 싸브렀네."
"자뻑아녀? 뭐라더라? 자녀들하고 동남아 갔다고 들었는디."
"나 9짜 흔들었어. 태국인가 그럴걸?"
"아따, 약사 양반이 빠지니까 오늘따라 영 패가 안 붙네."
"원래 고스톱은 다섯이서 해야 광도 팔고 숨도 돌리고 하는 법인디···."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이 그러면서 은근슬쩍 도훈을 쳐다보았다.
"거, 젊은 양반도 고스톱 좀 칠 줄 아쇼?"
"아뇨. 잘못합니다."
"못 할 게 뭐 있어? 하면서 배우면 되지. 이거 그냥 그림맞추기여. 오메, 또 싸브렀네. 니미럴!"
"벌써 투뻑이구만. 자네는 한 번만 더 싸면 되겄네 그려."
"싸고 싶어도 인자 초출도 없구만요."
도훈은 계속 흥미를 보이며 도박에 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본래부터 고정 멤버로 돌아가던 게임이라 그런지, 낯선 도훈이 끼어들기 쉽지 않았다.
"아따,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와야 쓰겄는디."
"지금 빠지면 연사여, 연사. 못 빠져."
"물도 한 번 빼야 된디요."
카센터 사장은 한참 오줌을 참았는지 조급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도훈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나 대신 쳐줄란가?"
"제가요?"
"돈은 잃어도 되니께, 내 대신 한 번만 패 좀 돌려주소."
"아니 정말 그러다 잃으면···. 저 잘 못하는데."
"한 판 가지고 뭔 일이나 있을 라고? 나가 오늘 많이 따서 그랑께, 쬐끔 잃어도 돼."
카센타 사장은 도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졸지에 대신 패를 받게 된 도훈이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딱 한 판만 끼겠습니다."
"그려. 어차피 여기다 가게 얻을 거람서? 앞으로 동네 주민인디 같이 어울리믄 좋제."
"가게? 무슨 가게?"
"이 친구가 컴퓨터 수리점 할 거라는 구만요."
"잘 됐구네. 안 그래도 집에 컴퓨터 고장나서 못 쓰고 있었는데."
"어차피 남의 돈으로 치는 거니까 대충쳐."
"아, 네."
도훈은 패를 받아들고는 이들의 실력을 가늠했다.
‘실화로 한 번 쳐볼까?’
판이 끝났을 때 노태윤이 겨우 3점이 나 이겼다. 도훈은 피박을 맞아 6,000원을 잃고 말았다.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카센타 사장이 돌아왔다. 도훈이 머쓱해 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못 쳐서 돈을 잃고 말았습니다."
"에이, 젊은 사람이 돈 몇 천원 가꼬 신경 쓴당가. 자릿값 했다 치세. 수고했네잉."
도훈이 물러서는데 이번엔 복덕방 김사장이 도훈을 붙잡았다.
"기다리기 심심한디 같이 치지 그래?"
"네? 저도요?"
"박영감 이 양반이 도통 연락이 안 오네. 계속 기다릴 거면 한 판 치소. 다들 괜찮죠?"
"약사 양반 대타라고 생각하고 치면 되겠네."
"그래. 고스톱은 다섯이서 쳐야 제맛이지."
"잘 모르겄음 옆에서 광이라도 팔던가."
"네, 그러면 잠시만 어울리겠습니다."
다들 도훈의 합류를 환영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화투장을 때리는 도훈의 솜씨가 몹시 어설펐으므로 옆에 호구 하나 앉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잘됐군. 이 기회에 약 좀 팔아야지.’
[약이라뇨?]
‘한 번 지켜봐.’
수중에 들고 있던 30만원을 꺼낸 도훈이 패를 받았다. 치기 적당히 좋은 패였지만 도훈은 일부러 엉망으로 패를 내려놓으며 피박에 광박까지 맞았다.
"아이고 제가 오늘은 운이 좀 없네요."
연이은 패배에 도훈의 지페는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도훈이 계속 돈을 잃자 합류를 제안했던 김사장이 민망했던지 도훈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가 괜히 끼라고 했구만···. 쩝."
"괜찮습니다. 운이 안 따라서 그런걸요."
도훈은 일부러 승부욕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실수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가지고 있던 현금 30만원을 모두 털리고 말았다.
돈을 잃은 도훈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차에 가서 현금 좀 더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젊은 친구, 이제 그만하소. 껴들 판이 아니구만. 내가 개평 좀 챙겨 줄라니까."
현재까지 돈을 가장 많이 땄던 금은방 사장이 5만원권 두장을 도훈에게 내밀었다. 30만원을 잃었지만, 10만원 받고 이제 그만두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도훈은 얼굴이 빨개진 채 씩씩거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지갑에 돈을 안 넣고 다녀서 그렇지, 차에 더 있습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도훈이 하도 흥분해서 말하자 누구도 감히 그를 말릴 생각을 못 했다. 오히려 민주외삼촌이란 작자는 호구를 잃는게 두려웠던지 은근슬쩍 부추기기까지했다.
"원래 도박판에선 밑천이 두둑해야 실력이 나오는 법이지."
가게 밖으로 나간 도훈은 차로 향하지 않고 스마트 워치를 들어 귀를 기울였다.
실은 밖으로 나오기 전 테이블 밑에 몰래 음향증폭 스피커를 설치해 둔 것이었다.
-거참, 젊은 사람이 자존심은 세 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같은 빠꼼이들을 어떻게 당해내려고?
-넵 두소. 돈은 많아 보이던데.
-돈이 많아?
-아니, 아까 가게 구하는데 월세 아깝다고 올 전세로 달라지 뭐요? 사업 자금은 충분해 보이더만.
-그랬구만. 우리야 뭐 옆에 호구 앉히면 좋지. 눈먼 돈이나 벌어보세.
-괜히 찝찝한디. 모르는 사람 돈 땄다가 신고라도 당함 우짤라고?
-동네에서 노름 좀 했기로서니 잡혀가기라도 하겄어? 그리고 어차피 이 동네에서 장사할 모양이던디, 그런 짓을 쪽팔려서라도 못하겠지.
-그려. 그냥 일단 지켜보세나. 우리가 무슨 짜고치는 판도 아니고, 자기가 돈잃고 흥분해서 덤빈다는데 무슨 수로 막겠나?
도훈이 듣고보니 마지막 목소리는 민주 외삼촌 노태윤이었다. 아까부터 그를 호구로 여기고 돈 따낼 생각뿐인 그가 가장 얄미웠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어디 한번 두고보자.'
< 922. 여름 방학-1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