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4. 여름 방학-6- >
[왜요? 부잣집 외동딸이라니까 갑자기 혹하십니까?]
‘뭔 소리야? 건물주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지만, 재벌집 딸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난데?’
[고은성 양과는 경우가 다르죠. 그쪽은 외동딸도 아닌 데다, 오빠인 고성민이 주인님과 앙숙 사이잖습니까? 애초에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죠. 하지만 강민주 양은 가능성이 충분하니까요.]
‘로시. 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집에 돈 많은 여자, 능력이 좋아서 돈 잘 버는 여자. 그래 뭐, 나쁠 건 없지. 하지만 나에게 금력은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야. 내가 언제 돈 보고 여자 만나는 거 봤어? 얼굴, 몸매, 성격, 궁합.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
요하단 말씀이야.’
[근데 왜 그런 반응이시죠?]
‘아니. 실은 내가 아니라 오늘 맞선 본다는 변호사 그놈이 왠지 조건에 혹했을 것 같아서.’
[변호사요?]
‘내가 한 번 직접 만나 보는 게 좋겠어.’
[설마 훼방을 놓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지?’
[갑자기 무슨 냄새요?]
‘왠지 미심쩍지 않아? 외삼촌은 왜 그 맞선을 주선해 줬을까? 본인이 극구 싫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민주 양 말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친딸처럼 아낀다지 않습니까? 좋은 혼처를 보면 으레 다리를 놓고 싶은 게 어른들 마음 아닐까요?]
‘그래도 이상하잖아! 민주 나이 올해 고작 스물여섯이라고. 나도 사정을 몰랐을 땐 상대가 돈 많은 한량이라 어리고 예쁜 처자 찾나 싶었지. 근데 웬걸? 이건 오히려 민주가 훨씬 조건이 좋네? 건물 몇 채를 가진 알짜 집안의 외동딸. 상대가 변호사가 아니라 법
인 파트너 정돈돼야 급이 맞는단 말씀이야. 근데 그걸 뻔히 아는 집안사람이 억지로 맞선을 밀어붙였다? 이쯤 되면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 않아?’
[의심병 아닙니까? 민주 양이 맞선을 본다니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어서요.]
‘아니야. 분명 뭔가 있어. 설사 내가 헛다리 짚었더라도 확인은 해봐야겠어.’
[거참, 주인님은 가끔 보면 쓸데없는 데 열을 올리시더군요.]
‘쓸데없다니? 민주의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솔직히 내가 민주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곤 장담 못 해. 하지만 적어도 쓰레기 같은 놈은 만나게 하지 말아야지.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니까.’
"음, 도훈 학생. 식사 다한 것 같은데 우리 후식이나 먹으러 갈래?"
"후식이요?"
나는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짧았던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대체 이 시간에 어딜 가겠는 걸까?
"커피 정도는 과사무실에서 마실 시간 나겠네요."
"과 사무실? 한솔 선생님 곧 돌아오잖아."
"그럼요?"
민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 먹고 싶지 않아요?"
"예?"
"내가 후식인데?"
민주로선 최대한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지만, 대낮에 학교 인근 식당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게 되었다.
"조교 선생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나의 지적에 민주가 실수를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원래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그래."
"근데 이제 근무하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늦는다고 연락하면 돼. 한솔이도 30분 일찍 나갔는데, 내가 좀 늦게 들어가는 게 대순가 뭐?"
민주는 조급한 느낌이었다.
근무시간마저 팽개치고 나와 밀회를 즐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까 하다 말아서 몸이 달았구나. 하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섹스는 내 쪽에서 사양이라고.’
지금 모텔을 가면 최소 2시간이다.
아니, 씻는 거 다 생략하고 입구에서 박고 싸자마자 차에 올라도 1시간은 족히 넘는다.
업무 시간 중 자리를 비우게 하는 것도 민폐지만, 점심을 함께 먹으러 나간 상황을 보조 샘이 뻔히 아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의심을 살 여지가 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모든 상황을 고려한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후식은 다음에 먹는 게 좋겠어요."
"아···. 그, 그래?"
민주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학교로 가시죠. 차에서 설명해 드릴게요."
나는 차에 올라 불가능한 사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민주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불편하다며 먼저 선을 그었다.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안전할 때 보자. 이런 식은 나도 싫어."
"그럼 퇴근하고는요? 저 5시면 퇴근하는데···."
"오늘 약속 있다며?"
"안 가도 돼요. 아니, 안 갈래요."
"됐어. 꼭 가."
"싫단 말이에요. 주인님하고 함께 있을 거라고요."
"야, 강민주!"
버럭 소릴 지르자 민주가 움찔 놀랐다.
"이게 오냐 오냐 하니까 어디서 말대꾸야? 내 말이 우스워?"
"아, 아니 주인님 전 그게 아니라···."
"감히 내 말을 거부해? 진짜 혼나 볼래?"
"죄, 죄송해요."
역시 민주는 큰소리를 쳐야 말을 듣는다.
잔뜩 풀이 죽은 민주는 향해 나는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분명 맞선 보러 나가라고 했어."
"···네."
"내 말 안 들으면 다신 너 안 볼 줄 알아."
"하, 하학! 주, 주인님!"
"무슨 말인지 알지?"
민주가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민주 꼭 맞선 보러 나갈게요. 정말이에요."
민주가 마침내 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나는 굳은 표정을 풀며 민주의 머리를 강아지처럼 쓰다듬었다.
"이제야 말 잘 듣네. 꼭 내가 화를 내야겠어?"
"아, 아니에요. 주인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가까운 친척이 주선한 거잖아. 나는 민주가 집안 어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너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실 것 아니야?"
"주, 주인님···."
민주가 뭔가를 상상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치만 정말로 저는 주인님밖에 없어요."
"알아. 아니까 보내는 거야. 그냥 가볍게 차나 한잔 마시고 와. 별로 어려운 일 아니잖아?"
"네, 그럴게요. 그냥 차만 마시고 헤어질게요."
"그래. 아, 나 여기서 내려줘. 도서관 좀 들르게."
"네, 넵. 주인님! 그, 근데 저희 다음에 언제···."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네. 민주 기다릴게요."
차에서 내린 나는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럼, 점심 잘 먹었습니다. 조교 선생님."
"으, 응. 그래. 도훈 학생."
민주는 미련이 남는지 계속 룸미러로 힐끔거리다 사범대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흡연구역으로 이동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왜 굳이 맞선을 강요하신 겁니까? 민주 양이 저렇게 질색하는데요.]
‘아까 말했잖아. 그 외삼촌이란 사람 신경 쓰인다고.’
[변호사가 아니라요?]
‘만약 그 외삼촌에게 진짜 꿍꿍이속이 있다고 쳐. 그럼 오늘 약속 파토 내봐야 다음에 또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거란 말이지. 확실한 속내를 캐봐야겠어.’
[으으, 정말이지 주인님도 어지간하시군요.]
‘난 원래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 주의라서 말이지. 네 말대로 순전히 나의 과대망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거든.’
[알겠습니다. 그거야 뭐 주인님 마음이니까요. 근데 왜 도서관에 내리신 겁니까? 설마 공부하러 가시게요?]
‘아니? 내가 왜 공부를 해? 방학인데.’
[그럼요?]
‘민주 맞선까지 3시간 넘게 남았잖아. 나도 시간을 때워야 할 것 아니야.’
[설마 독서를 하시려고?]
‘쯧쯧. 눈치가 없긴. 도서관 뒤가 공대 건물이란 걸 잊었어?’
[공대··· 아아, 손은주 교수!]
‘그렇지. 나에게 A+을 안겨 준 손 교수에게 간만에 안부 인사나 드리고 오려고.’
[키야, 주인님은 진짜.]
‘뭐 인마?’
[조금 전까지 민주 양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극진하시더니 고새를 못 참고 또 다른 여자를···. 정말 혀를 내두를 바람기입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
도훈이 간만에 손은주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문패에 재실을 확인한 도훈이 공손히 노크했다.
똑똑-
"교수님, 계십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손은주 교수가 나오면서 말했다.
"내가 분명 성적정정 요청은 이메일로···. 앗, 도훈아!"
도훈을 발견한 은주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를 껴안았다.
"교, 교수님. 여기 복돈데."
"아차. 내 정신 좀 봐."
손 교수는 도훈을 연구실로 불러들이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문패를 부재중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훈아, 이게 얼마 만이니!"
손 교수가 다시 한번 으스러지게 도훈을 껴안았다.
도훈은 풍만한 가슴을 온몸으로 느끼며 속으로 웃었다.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네.’
"내 정신 좀 봐. 차라도 한 잔 줄까?"
손 교수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테이블에는 각종 설계도가 복잡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손에 잡히는 데로 구석으로 밀쳐냈다.
"일하고 계셨어요?"
"으, 응. 외주 받은 게 있어서.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뭐 마실래, 커피? 아님 홍차?"
"교수님.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저 오늘 한가해서 놀러 온 거거든요."
"그, 그래? 너무 티 났니?"
손 교수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멋쩍게 웃었다. 얇은 8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장 바지를 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워커홀릭 커리어 우먼 이었다.
도훈을 소파에 앉힌 손 교수가 티테이블에서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도훈이 커피 좋아하지?"
"네. 진하게요."
"응. 잠시만."
손 교수는 도훈의 예고 없는 방문이 기쁜지 살짝 들뜬 모습이었다. 곧 차를 준비해온 손 교수를 향해 도훈이 말했다.
"교수님. 학점 너무 잘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드리러 왔어요."
"어머, 애는. 나 공정하게 줬어. 네가 잘해서 잘 받은 거지."
"그래도요. 근데 학생들 성적 정정하러 많이 오나 봐요?"
"아니. 가끔. 방학 중에 방문해서 난 정정 요청하러 온 학생인 줄 알았지."
"아하."
"못 보던 사이 더 잘생겨졌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도훈이 수줍게 웃었다. 멀쩡할 때 보면 영락없는 교수였다. 작업할 때 쓰는 도수 높은 검은 뿔테 안경만 봐도 지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방학은 잘 보내고 있어?"
"그냥 그렇죠. 아, 얼마 전엔 지리산도 다녀왔어요."
"지리산? 와, 대단하다."
[처녀 보살 따먹으러 간 것 아닙니까?]
‘설마 등산 가서 여자 따먹는다고 생각이나 하겠어?’
"교수님은 방학 때 더 바쁘신 것 같네요?"
도훈이 데스크 한쪽에 치워진 복잡한 도면을 보고 물었다.
"으응, 아무래도. 학기 중엔 강의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거든. 가끔 외주로 의뢰가 들어오는 건 방학 때 해치우는 편이야. 어머, 나 너무 안 이쁘게 하고 있지?"
손 교수는 그제야 자신이 작업복 차림이란 걸 깨달았는지 민망해했다.
"아니요. 수업할 때 보다 더 예쁜데요? 전 맨날 치마만 입으시는 줄."
"내가 이래. 일할 땐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있거든."
"멋있어요. 전 일에 열중하는 여자가 섹시하더라고요."
"고마워 도훈아."
손 교수가 은근슬쩍 도훈 옆으로 다가왔다.
"근데 오늘 한가하다고?"
"네 뭐. 성적 조회 때문에 잠시 학교 들렀는데, 저녁때까지 할 일이 없네요."
"저녁엔 뭐 하는데?"
"약속 있어요."
"아···. 그럼 그때까진 괜찮은 거야?"
"네. 근데 교수님이 생각보다 바빠 보이셔서···."
"아니야. 하나도 안 바빠. 내가? 전혀."
손 교수가 호들갑을 떨며 손사래를 쳤다.
누가 봐도 오버였지만, 도훈은 그런 속 보이는 모습까지 귀엽게 느껴졌다.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손 교수도.’
[완벽한 골드미스 아닙니까. 솔직히 노처녀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요.]
‘후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래요?"
"응. 간만에 도훈이도 왔는데···. 뭘 하면 좋을까?"
"운동이나 하실래요?"
"운동?"
"네. 교수님 업무 중에 운동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렇지. 틈틈이 시간 날 때다 해야지. 아, 잠시만. 조교한테 전화 좀 하고."
손 교수가 총총 뛰어가 내선전화를 돌렸다.
"어, 난데. 나 급하게 외출할 것 같거든? 혹시 누가 찾으면 연구실에 없다고 해줘. 어, 그래 수고."
다시 소파로 돌아온 손 교수가 말했다.
"됐다. 이제 아무도 훼방 안 놓을 거야."
"그래요? 근데 저랑 무슨 운동 하고 싶으세요?"
"음, 일단 땀부터 빼야 하지 않을까?"
"에어컨 시원한데요?"
"에어컨 아래서도 땀나게 해야지."
"괜찮네요, 그것도."
도훈이 직접 상의를 벗으려는데 손 교수가 손목을 붙들었다.
"잠깐만. 내가 벗기고 싶어."
"네? 직접요?"
"응···. 그래도 돼?"
도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럼."
"고마워."
은주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더니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쳤다. 순식간에 커리어우먼에서 정열적인 여인으로 변신한 은주는 소파 위로 도훈을 지긋이 밀쳤다.
도훈은 손 교수가 밀치는 대로 소파에 쓰러져 팔걸이에 목을 베고 누웠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지?"
"그럼 실수하신 것 같은데요?"
"왜?"
"저를 교수실로 부르시려면 낙제를 주셨어야죠. 그럼 제가 씩씩거리고 연구실로 튀어왔을 거 아니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공과 사는 명확해. 도훈이 넌 에이쁠 받을 만해서 받은 거야. 교수로서 양심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래요? 그럼 여기에 점수를 매긴다면 얼마를 주시고 싶으세요?"
도훈이 살짝 부푼 바지춤을 가리켰다.
< 914. 여름 방학-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