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3. 여름 방학-5- >
***
나는 달려드는 민주에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일단 얘기 좀 해."
"아앙, 주인님에게 오랜만에 안기고 싶단 말이에요."
민주가 떼를 썼다. 나는 강아지처럼 들러붙는 민주를 겨우 진정시켰다.
"울지 말고. 예쁜 화장 다 번지잖아."
"훌쩍-. 주인님한테 버림받는 거 무섭단 말이에요."
"안 버린다고. 내가 널 왜 버리는데?"
한참을 달래자 민주가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우선 옷부터 입어."
"네?"
"밥 먹으러 안 갈 거야? 나 배고프다고."
"오늘은 ···안 하세요?"
"뭘 하더라도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나 아침도 굶었어."
"앗··· 주, 주인님 배고프시겠다. 잠시만요."
민주가 후다닥 옷을 입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는 민주를 향해 말했다.
"화장도 좀 고쳐. 마스카라 다 번졌다."
"죄송해요."
"내가 미안하지. 괜히 널 울려가지고."
민주가 빠르게 화장을 리터칭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민주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흐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을까?’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보니 내가 민주 인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좋은 혼처가 있으면 보내주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고.’
[뺨 맞고 나더니 생각이 바뀌셨나 보죠?]
‘비꼬지 말고. 나라고 민주랑 계속 즐기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민주도 민주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
[끝까지 책임지실 거 아니면 정리하시는 게 맞긴 하죠. 그건 민주양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당연한 거지만요.]
‘솔직히 다른 후배들은 실컷 연애할 나이잖아. 그때야 여러 남자 만나보고, 즐기기만 해도 상관없지. 하지만 민주는 슬슬 혼기가 차고 있으니.’
[그래 봐야 주인님보다 3살 많을 뿐입니다.]
‘남자 나이랑 여자 나이랑 똑같이 보면 안 돼. 남자는 군대 때문에 기본 2년이 추가되잖아. 시집 잘 가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는 게 몸값이 높기도 하고. 스물 여섯이랑 스물 아홉이랑 같은 이십대라고해도 결혼시장에서 보면 절대 같은 값이 아니거든.’
[호오···.]
"주인님. 준비 다 됐어요."
"그래? 나가자."
어느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졌다.
민주와 나는 학과 사무실을 나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시험도 잘 보셨는데 축하 기념으로 비싼 거 사드릴게요."
"학점은 내가 잘 받았는데 왜 민주 네가 사? 장학금도 내가 받는데."
"그래도요. 체육과의 경사잖아요. 단대 장학금까지 받을 정돈데."
"단대 장학금?"
민주의 차를 타고 대학 인근의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방학인 탓에 캠퍼스는 한산했다.
"사범대 자체적으로 주는 장학금이 있어요. 과탑에게 주는 전액 장학금보다 더 많다고 알고 있고요."
"오. 등록금 보다 더?"
"많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장학금 중에선 가장 큰 규모에요. 올 A+ 받으셨으니 충분히 수상 할 수 있으실 거예요. 근데 어쩜 그렇게 성적을 잘 받으셨어요? 제가 알기론···."
민주가 말끝을 흘렸다.
아마도 군 입대 전에는 지금처럼 공부를 못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물음 같았다.
"빡공 했어."
"빡공요?"
"응. 군대 다녀오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고. 어제 성수랑도 얘기했는데, 어차피 임용 볼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내신관리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역시 주인님은 모든 게 계획적이군요. 대단해요. 저는 주인님 나이에 놀 생각만 했는데···."
"민주 너도 공부 잘했잖아. 임용 쳤어도 아마 붙지 않았을까?"
"그거야 모르죠."
"조교로 끝낼 것도 아니고, 기왕 시작한 거 교수까지 달아야지."
"안 그래도 내년부턴 대학원이랑 병행하려고요. 1년 해보니까 많이 적응되기도 했고."
"으음. 조교 생활도 하면서 대학원까지?"
"보통 그렇게도 많이 해요."
"그래서 나를 집행부로 추천했구나? 나한테 일 다 떠맡기려고."
"아앗, 그건···."
"솔직히 그거 물어보려고 한 거였어, 오늘 온 목적은. 진짜 우리 학년에 맡길 사람이 한명도 없는 거야?"
민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우선이가 군대 갈 것 같다고 해서요. 우선이가 딱이었는 데."
"우선이가 싹싹하긴 하지. 형들한테도 잘하고."
"그래서 추려봤는데 도저히 집행부 견적이 안 나오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지금 2학년 애들은 과 행사도 잘 참여 안 하잖아요. 저희과는 유난히 방학 중 캠프도 많은데."
민주 말처머 체육교육과는 유난히 행사가 잦았다.
오티나 엠티는 기본이고, 학년 별 대면식, 겨울에는 스키캠프, 여름에는 수영캠프, 듣자 하니 2학기 되면 단대 체육대회에 축제 때는 주막도 연다고 했다.
"대학 선수에 속한 애들은 연습하느라 바쁘고···. 그렇다고 전통으로 해오던걸, 갑자기 제 임기중에 안 할 수도 없고···."
더구나 체육 전공자가 많았기 때문에, 학교 대표로 배구팀에서 활동 중인 과회장 마유미나 아니면 전국 체전을 준비하는 1학년 강경희처럼 학과 활동보다 훈련에 집중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래저래 결격사유자들을 제하고 나면, 정말 과를 위해 희생할 학생이 손에 꼽는다는 얘기였다.
"음, 그 와중에 너는 대학원 생활까지 병행해야 하니 친화력 좋고 일 잘하는 집행부가 필요하다?"
"···네."
"후-. 이것 참 난감하네. 일단 이쪽에 주차하자. 간단히 비빔밥이나 먹게."
"비빔밥요? 더 비싼 거 드시지."
"난 입이 싸구려라 싼 것도 잘 먹어그리고 민주 너랑 먹는데 뭔들 안 맛있을까?
"앗, 주인님."
"식당에선 다른 사람이 볼지도 모르니까 존댓말로 할게요, 조교 선생님."
"으, 응."
식당에 들어와 음식을 주문한 뒤 계속 민주와 이야기를 재개했다.
"성수 말로는 자기 임기는 이번 여름방학 수영캠프까지라는 데 집행부 임기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 그게. 원래는 올해까지 다 해야 맞는데, 아무래도 사범대는 임용 준비를 해야 하니까 2학기부터 인수인계 체계에 들어가. 그러니까 내년 집행부를 맡을 학생들이 2학기에 있을 큰 행사인 단대 체육대회랑 축제 주막 주도하는 식이야. 현 집부는 서포트만 해
주고."
듣고 보니 집행부 선발을 서두른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으론 3학년 때 과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지만, 실질적인 업무 인수인계는 올해 2학기부터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흐음···. 만약 제가 고사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추려 뽑아야지. 그리고 너무 부담감 느끼지 마. 나랑 성수가 봤을 때 네가 적임자였긴 하지만, 도훈이 네가 싫다면 억지로 떠맡을 필욘 없어. 괜히 자기 시간만 희생할 텐데."
하여간 사정이 그렇게 된 거였다.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는데.’
[왜요? 이번 기회에 차기 회장 직함 하나 파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허울만 좋지. 사실상 마당쇠 역할이잖아. 행사란 행사는 다 신경 써야 하고.’
[주인님이면 충분히 잘 해내실 것 같은데요?]
‘못 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야.’
[그럼요?]
‘학점관리에 여자관리에 과회장까지 다 하면, 업적은 언제 하고 미션은 또 어떡할 건데? 내가 무슨 슈퍼맨이냐.’
[아, 그렇죠. 주인님의 본분은 플레이어니까요.]
‘그렇다고 성수랑 민주가 저렇게 원하는데 무작정 안 한다고 내 뺄수도 없고.’
일단은 대답을 보류하기로 했다.
무작정 거절하자니 학과가 제대로 안 돌아갈 건 불 보듯 뻔했고, 의리에 떠맡자니 당장 2학기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것도 기정사실이었다.
"알겠어요. 일단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도, 도훈아."
"우선 이번 캠프 때 2학년 애들 상태부터 보고요. 집행부를 혼자서 다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도와줄 수 있는 애들이 있는지 봐야죠."
"고마워, 도훈아.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우리끼리 너무 앞서간 것 같아."
"지금 말했잖아요."
"으,응."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돌솥비빔밥이었는데, 대학가다 보니 가격에 비해 양이 푸짐했다.
"많이 먹어. 조촐하지만."
"감사합니다."
아침을 걸러서인지 뜨거운 돌솥밥도 허겁지겁 넘어갔다.
민주가 그런 나를 보더니 안쓰럽게 말했다.
"요새 아침 거르고 다니니?"
"방학이잖아요. 자취하니까 해먹기 귀찮기도 하고."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내가 도시락 싸다줄까?"
"조교 선생님이요?"
"응.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돼. 출근 전에 너네집에 가져다 주고 갈게."
"에이, 무슨 그렇게 까지 해요."
"그래도···. 네가 제대로 식사 못 한다니까 걱정돼서."
"그렇다고 무슨 학생 아침까지 일일이 싸다줘요. 우리 엄마도 안 그렇겠네."
"···엄마가 아니니까 그렇지."
민주의 말에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세상에 저렇게 착한 여자가 다 있을까?
처음엔 순전히 변태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나밖에 모르는 바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내가 하라는데로 뭐든 다 해줄 사람이었다.
"됐어요."
"아니야, 진짜로. 어차피 내가 차려 먹을 것 조금만 더 만들어서 도시락에 싸면 되니까···."
민주는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민주에게 그런 수발을 들게 할 순 없었다. 우렁각시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정말로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제가 해 먹을게요."
"난 도훈이 너한텐 뭐든 다 주고 싶어."
"아이참···."
또다시 부담감이 밀려온다.
어쩌다 저렇게 마음이 커져버렸을까? 솔직히 이제껏 막대한 것에 비하면 황공할 정도로 나에게 푹 빠져있다. 저렇게 헌신적인 여성을 가지고 놀다가 헌신짝처럼 버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하아···. 큰일이네, 정말. 민주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호감도가 무척 높긴 하죠. 아마 주인님이 시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걸요?]
‘그래서 더 걱정이야. 저렇게 좋은 애가 나 같은 난봉꾼에 매달려서.’
[스스로 쓰레기라는 건 아시는 건가요?]
‘인마. 나도 주제 파악은 하고 살 거든? 내가 아무리 내로남불이지만, 좋은 남자친구는 절대 아니지. 남편감은 더더욱 아니고.’
[자아성찰이 대단합니다.]
‘어차피 이번 생은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까.’
그때 깨톡이 울렸다.
‘어? 누가 보낸거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보는데 성수가 보낸 깨톡이었다.
-박성수 : (엄지척)
-이도훈 : ??
-박성수 : 고맙다, 도훈아. 너밖에 없구나.
‘아아, 성수가 파스 효과를 제대로 봤나보네. 근데 이 시간에?’
[설마 대낮부터 한 판 벌인 걸까요? 성수군도 참, 급하군요.]
‘원래 젊을 땐 밥 먹다가도 삘받으면 밥상 뒤집는 게 다반사지.’
"누구?"
"네?"
"메시지 왔어?"
민주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여자일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성수형이에요."
"아··· 성수."
"여잔 줄 알았어요?"
"아, 아니."
"맞네."
"아니 뭐···. 도훈이 너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으니까."
‘질투하는 것도 귀여운데?’
[저런 타입이 집착하면 정말 무섭죠.]
‘그건 아니 될 말이지.’
밥을 다 먹은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과사 들어가 봐야 되죠?"
"으,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아쉽네요. 밥만 먹고 보내려니까."
"퇴, 퇴근하고 시간 되는데."
"맞선 보신다면서요?"
"안 볼거야."
"진짜로?"
"응."
"변호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변호사면 돈 잘벌지."
"난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안 써."
속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진심이었다.
사실 상대가 변호사건 판사건, 의사건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전문직의 메리트가 고수익에 있다면, 나는 그들보다 훨씬 잘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억대 연봉을 찍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가요. 외삼촌 체면을 위해서라도."
"아니야. 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죽어도 안 한다고 했을 거야."
"나가보라고요. 가서 다른 남자는 어떤지,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보고 와요."
"응?"
"그래야 내 진가를 알 거 아니에요."
"뭐래니?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 어차피 잘 돼야 선생인데, 변호사 놓친 거 후회하지 않겠어요?"
"조금도 신경 안 쓰거든? 직업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집 그렇게 못 살지 않아."
"네?"
"전문직 사위가 필요할 만큼 부족한 집은 아니라고."
"오, 조교 샘 잘 살아요?"
생각해보니 민주가 사는 곳은 조교 월급에 비해 굉장히 고급진 오피스텔이었다. 거기다 임용보다 교수를 생각할 만큼 꿈도 남달랐다. 아마도 집안의 든든한 서포트가 가능하다는 뜻일 테고, 이를 근거로 할 때 있는 집 딸자식임은 틀림 없어 보였다.
민주가 제 자랑을 하는 게 민망했던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냥 그럭저럭···. 너한테 말은 안했지만, 아버지가 부동산 임대업을 하시거든."
"부동산?"
"응."
"헐.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셨네."
"아, 아니 그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조그만 빌딩 몇 채."
"몇 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그맣건 뭐건 빌딩주면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걸까?
"조교샘 혹시 외동이에요?"
"응."
헐.
대박!
이건 뭐 민주가 변호사를 잡으려는 게 아니고, 변호사가 민주를 노리는 거였네? 갑자기 민주가 달리 보였다. 건물주의 외동딸이었다니···.
‘왜 이제껏 이 얘기를 안 했지?’
[별로 자기 자랑하는 성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금전적인 걸 자랑할 나이도 아니고요.]
‘아니 그래도···. 이야. 이건 뭐, 다 가졌네. 강민주.’
그리고 다 가진 민주는 바로 내 밥이었다.
< 913. 여름 방학-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