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2. 여름 방학-4- >
***
성수가 여자친구를 호강시켜주던 바로 그 시각.
도훈은 방학 후 모처럼 대학으로 향했다.
어제 성수의 말을 듣고 민주의 집행부 제의를 고사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오늘이 다름 아닌 1학기 성적 발표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도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도훈은 굳이 성적확인을 핑계를 대고 학과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조교인 강민주와 행정보조가 함께 오전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 어, 어머 주, 도훈이니?"
민주가 놀란 표정으로 도훈을 반겼다.
아마도 습관적으로 주인님이라고 말하려다 옆에 있던 보조 때문에 급히 말을 바꾼 것 같았다. 도훈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용건을 말했다.
"오늘 성적 나오는 날이죠? 저희집 컴퓨터가 고장 나서 직접 학점 확인하려고 왔어요."
"그랬구나. 저기 컴퓨터 쓰렴."
"네."
도훈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민주의 눈치를 살폈다.
‘왜 저렇게 놀래지?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민주의 반응이 평소와 다른 것이 신경이 쓰였던 도훈은 슬쩍 스킬을 발휘해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아아, 하필 도훈이가 오늘 같은 날 찾아올 게 뭐람? 오후에 선보기로 했는데···.
‘선? 방금 선이라고 했나?’
[네.]
‘지금 맞선 본다는 소리야, 민주가?’
[분위기상 그래 보이는데요? 옷도 평소보다 훨씬 참하게 차려입었군요.]
도훈이 바탕화면 비번을 물어보는 척 민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교 선생님, 컴퓨터 비번이 뭐예요?"
"어? 응, 그거 한글로 체육이라고 치면 돼."
"넵."
‘진짜네? 엄청 단정하게 입었는데? 호오, 민주가 맞선을 본단 말이지?’
[왜요?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이는 어려도 엄연히 직장인인걸요.]
‘그래도 살짝 배신감 느껴지는데.’
섭섭함 감정을 잠시, 도훈은 곧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해 학점을 확인했다. 과거 이정우 시절엔 과수석을 맡아놓던 그였지만, 머리 나쁜 이도훈으로 환생하고 나서 처음 받는 성적표다 보니 아무리 그라도 떨릴 수밖에 없었다.
‘잘 나와야 할텐데···.’
주변에서 하도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문까지 난터라, 혹시라도 망하게 되면 낯을 들 면목이 없었다.
도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성적을 클릭했다.
화면에 성적이 떠오르자 뒤에서 지켜보던 민주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나왔니?"
"······."
성적을 확인한 도훈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응? 왜 그래 도훈아. 뭐 잘 못 됐어?"
"···하, 자신이 없네요."
기운 빠지는 목소리에 민주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정정 기간이니까 지금이라도 교수님한테 이의신청하면···."
"못할 자신이 없다구요. 올 A+ 나왔어요."
"어어?"
민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있던 보조 선생은 자기 일처럼 축하했다.
"진짜? 와, 그럼 평점 4.5 받았어?"
"네."
"대단하다. 도훈 학생은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공부도 엄청 열심히 했구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민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야, 난 또 잘못된 줄 알았잖아. 축하해 도훈아. 열심히 공부하더니 보답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조교 선생님. 그리고 방금 그거 드립이잖아요."
"드립?"
"네. 질 자신이 없네요, 그거. 무슨 바둑기사가 한 말인데."
"휴, 난 그것도 모르고 놀랬잖니."
성적을 확인한 도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민주에게 물었다.
"성적 만점이면 전액 장학금 나오는 맞죠?"
"응. 근데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올A+을 받았데? 나 학교 다닐 때도 우리과에서 올A+은 한 번도 못 봤었는데."
"진짜 운이 좋았어요. 마지막 기말시험 때 찍어서 맞춘 것도 많았거든요."
"그래도. 공부했으니 잘 찍을 수도 있었겠지. 참, 우리 30분 뒤에 점심 먹으러 갈 건데 같이 나갈래? 성적 잘 받은 기념으로 선생님이 밥 살게."
"아, 조교 선생님."
그때 행정보조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저 오늘 점심 친구랑 선약이 있는데 깜빡 잊고 말을 못 했어요."
"어머, 그래?"
"네, 도훈 학생 와서 잘됐네요. 혼자 드실까 걱정했는데."
"그래요. 난 도훈이랑 먹을 테니까 다녀와요."
"네. 근데 학교 밖에서 먹는 거라 일찍 나가볼 수 있을까요? 왔다 갔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오전에 시키신 건 다 정리했어요."
시간은 어느새 정오에 가까웠다.
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조샘을 먼저 내보냈다.
"그래요 그럼. 내가 12시까지 사무실 지키다 나갈테니 얼른 출발해요."
"앗,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도훈이도 같이 있으니까."
"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행정보조는 짐을 챙겨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둘만 남게 된 학과 사무실.
도훈이 거만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잘 지냈어?"
"네, 주인님. 방학하고는 처음 뵙네요."
민주가 곧바로 태도를 바꾸더니 도훈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쩜 주인님은 못하는 게 없으세요?"
"내가 뭘?"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시고, 또···."
"또 뭐?"
도훈이 냉담한 표정으로 되받자 민주의 표정이 조급해졌다.
"호, 혹시 제가 아까 말 실수 한 거 있나요?"
"아니?"
"근데 어째서···."
도훈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나한테 잘 못한 거 있지 않아?"
"제, 제가요?"
민주가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아, 아뇨?"
"진짜? 한 번만 더 기회 줄 게. 솔직히 말해봐."
도훈이 팔짱을 끼고 쏘아보자 민주가 황망함에 몸둘 바를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실수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설사 있다고 해도 오후에 보기로 한 맞선에 대해 도훈이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선본다는 건 절대 모를 텐데···.’
실은 그녀도 마지못해 나가는 자리였다.
갑자기 외삼촌이 아는 사람 아들이라면서 주선해준 것인데, 싫다고 바득바득 우겨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성사된 선자리였다.
"지, 진짜 모르겠는데요."
"허어. 이것 봐라? 못 본 사이에 굉장히 되바라졌다?"
"제, 제가요?"
참하게 무릎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은 민주로서는 어느 부분이 되바라졌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도훈이 화를 내는 것 같으니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도훈이 말했다.
"어제 성수한테 들었어. 내년 집행부 나 추천했다면서?"
"네? 아··· 그, 그건."
"나한테 의견 물어봤어?"
"죄, 죄송해요. 저는 성수가 주인님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길래···."
"그러니까 너는 아무 잘못 없다?"
"아니 그게··· 저도 내년까지 조교를 연임하니까 되도록 주인님이랑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흐음."
도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민주에게 명령했다.
"가서 학과실 문 잠그고 와."
"지, 지금요?"
"나 두 번 말하게 한다?"
민주는 도훈이 성을 낼까 무서워 쪼르르 달려가 문을 잠그고 왔다.
"벗어."
"무, 무엇을."
"위아래 다."
"아, 주, 주인님."
"벗으라고. 혼나야겠으니까."
민주는 감히 대들지도 못하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여름이라 겉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반 팔 블라우스를 벗고 스커트를 끌어 내리자 순식간에 속옷만 남게 되었다.
도훈은 그녀의 속옷을 쳐다보며 말했다.
"못 보던 속옷이네?"
"이, 이번에 샀어요."
"옷도 예쁘게 입고. 속옷도 새것으로 맞춰 입고. 너 요새 남자 만나니?"
"네, 네?"
캥기는 게 있던 민주가 화들짝 놀랐다.
도훈은 틈을 주지 않고 몰아 붙였다.
"맞네. 그렇지? 남자 만나지?"
"주, 주인님 그게 아니고···."
"넌 어떻게 그러냐? 방학하느라 얼굴 좀 못봤다고 그새 다른 남자를···."
"아니에요!"
기가 죽어 있던 민주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이내 도훈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하지만 주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거 절대 아니에요."
"그럼 뭔데? 납득하게 설명해봐. 나 살짝 기분 나쁠라고 하니까."
"실은···. 오늘 맞선이 있어요."
"맞선? 소개팅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민주가 사정을 설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딸처럼 아껴주신 외삼촌이 있는데, 그 외삼촌이 좋은 혼처가 있다고 막무가내로 의사도 묻지 않고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거절해도 좋으니 면을 봐서 얼굴만 비춰달라고.
"그래?"
"죄송해요. 주인님께 말했어야 했는데 저도 내키지 않은 선자리라···."
"남자는 뭐하는 사람인데."
"그게···."
"괜찮아. 말해봐. 화난 거 아니니까."
"변호사래요."
"변호사? 나이는."
"서른···."
"이야. 나이 서른에 변호사? 엄청 빨리 합격했네? 근데 왜 벌써 선을 볼까?"
"모, 모르겠어요. 그냥 일찍 결혼해서 안정되고 싶다고···. 저, 전 절대 원하지 않았어요, 외삼촌이 막무가내로···."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은근히 기대는 했겠네?"
"아니요!"
"맞잖아. 안 그래? 맞선 상대는 참한 신부감을 원하는 잘나가는 젊은 변호사. 집안 어른이 주선했으니 상대 집안도 괜찮을 테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기약도 없는 조교 생활 때려치우고 확 시집이나···."
짝!
순식간이었다.
민주가 도훈의 뺨을 내친 것은.
"···어랍쇼?"
고개가 돌아간 도훈은 그제야 자신이 민주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 난데없었기 때문에 반사신경이 좋은 도훈도 감히 피할 생각을 못했다.
[주, 주인님!]
‘야, 나 지금 뺨 맞은 거냐?’
온갖 쓰레기 짓을 일삼는 도훈이었지만, 여자에게 얻어맞은 건 환생 나서 처음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자 놀란 민주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주,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미쳤나봐요!"
"아니··· 이게···."
"흑흑, 죄송해요 주인님. 저도 모르게···"
‘아니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음, 제가 볼 땐 맞을 짓을 해서 맞으신 거 같은데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민주가 나를 때렸다고?’
민주는 도훈에게 극도로 순종적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고, 무슨 짓을 시켜도 대들 엄두를 못 냈다. 도훈은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화를 낸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엉엉, 주인님. 민주를 혼내 주세요. 민주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무릎을 꿇은 민주가 소파에 앉은 도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낮에 조교실에서 벌어진 촌극에 도훈 역시 한참을 말을 아꼈다.
‘음···.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네.’
[좀 과하셨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극도의 M이라도 선은 지키셨어야죠. 민주양이 주인님께 얼마나 헌신적이었는데요.]
‘그러게. 야, 이건 진짜 상상도 못했네.’
겨우 멘탈은 잡은 도훈이 울고불고 매달리는 민주를 달랬다.
"미안."
"아니에요, 주인님. 제가 잘못했어요. 민주를 버리지 마세요. 저는 주인님밖에 없어요."
"아니야. 나를 봐 민주야."
도훈이 민주의 두 볼을 감싸더니 자기쪽으로 돌렸다.
"흑, 흑, 주, 주인님···."
"아까 한 말은 취소할게. 내가 과했어."
"제발 민주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안 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흑, 주, 주인님."
"정말로 미안해. 네가 맞선 본다는 말에 질투에 눈이 멀었어. 내 본심은 그게 아니야."
"엉엉, 주인님 민주는 주인님밖에 몰라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고요. 주인님이 저를 버린다고 생각하면··· 정말, 정말 저는 죽어 버릴 거에요!"
민주가 오열하며 도훈에게 달려들었다.
도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토닥였다.
"그런 소리 마. 방금 일은 내가 실언한 거야."
"흑, 흑. 저 안 버리실거죠?"
"당연하지. 내가 널 어떻게 버려. 이렇게 예쁜 민주를."
"주인님!"
민주가 더욱 과격하게 도훈을 껴안았다. 속옷만 입은 처자의 육탄 돌격에 도훈이 속절없이 소파로 쓰러졌다. 민주는 도훈의 마지막 한마디에 목숨이라도 받칠 것처럼 과하게 애정을 표현했다.
립스틱 묻은 입술로 도훈의 입술에 과격한 입맞춤을 시도하는 등 도훈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달려들었다.
‘나참, 이게 아닌데.’
[왠지 오늘은 주인님이 당하는 분위긴데요.]
‘그나저나 민주도 성깔이 있긴 하구나. 와, 아까 뺨맞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거 있지?’
[말씀드렸지만 극도의 M이라고 해서 마음내키는 데로 했다간 큰 코 다치는 법입니다. 이번 건은 확실히 주인님이 선을 넘으셨습니다.]
‘낸들 그럴 줄 알았나.’
[민주양이야 말로 주인님에게 모든 걸 다 바친 일편단심의 표상이니까요.]
‘그러게. 살짝 부담스럽네. 이 정도 반응이라니···.’
키스를 퍼붓던 민주가 도훈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저 그냥 선보러 안 갈게요. 오늘 하루종일 주인님과 같이 있고 싶어요."
"아니야. 굳이 그러지 마. 네가 안나가면 주선하신 외삼촌 얼굴이 뭐가 되겠어."
"상관없어요. 민주가 잘못 생각했어요. 저는 어차피 주인님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걸요."
"알아. 아는데, 그래도 친족의 얼굴에 먹칠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난 괜찮으니까 잠시 얼굴이라도 비춰, 알았지?"
"싫어요. 저는 주인님하고 같이 있을 거예요. 변호사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나참···."
도훈이 민주를 복잡한 감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 철부지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 912. 여름 방학-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