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6. 단기 알바-16- >
"회식이라더니 직원들은 다 먼저 가버렸네."
"상관있어? 어차피 술만 있으면 되지. 너도 남았고."
크리스티나가 새로 나온 소주병의 주둥이 잡아 뒤집더니 팔꿈치로 병 밑을 툭툭 때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자세에 도훈도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소주병을 깐 크리스티나는 마개에 남은 철끈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뭐해?"
"심심한데 게임이나 하게."
"둘이서?"
"둘이면 또 어때?"
병따개의 철끈 부분을 꼬아 말자 끝부분이 달랑거리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자, 이거 손가락으로 튕겨서 떨어뜨리면 맞은편 사람이 원샷하는 거야? 나부터 한다?"
크리스티나는 한국 사람처럼 술자리 게임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얍!"
크리스티나가 기합을 외치며 손가락을 튕겼지만, 아슬아슬 철끈이 남아 달랑거렸다. 그녀는 애처럼 속상해했다.
"히잉! 거의 다 떨어졌는데."
"이제 내 차례지?"
"살살해."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
손끝에 힘을 잔뜩 주었다.
중지를 말아 딱밤을 때리듯 정확히 포인트를 겨냥했다.
‘흥.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게임으로 날 이길 생각을 하면 곤란하지.’
빡!
약한 부위를 정확히 강타하자 한방에 병뚜껑 철끈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나가 울상을 지었다.
"와, 진짜! 매너없네, 도훈."
"게임에 매너는 무슨. 약속대로 원샷하는 거지?"
"흥, 두고 봐."
크리스티나가 소주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옆으로 잔을 치우고 맥주잔을 들이밀었다.
"잔 크기는 안 정한 거로 아는데?"
"우웃! 이러기야 진짜?"
"일단 마시기나 해."
콸콸-
소주가 글라스 잔에 물처럼 채워졌다.
제아무리 주당이라도 한 방에 마셨다간 휘청할 양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갑자기 벌주를 거부했다.
"잠깐. 나 그냥 진실게임으로 할래."
"응? 갑자기 뭔 소리야?"
"벌주 안 마시면 진실게임. 몰랐어?"
"아니 규칙을 갑자기 바꾸는 게 어딨어?"
"소주잔을 맥주잔으로 바꾼 사람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결국 피장파장인 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너한테 궁금한 거 별로 없는데?"
"진짜로 없어?"
관심 없는 티를 내자 크리스티나가 갑자기 상체를 기울이며 내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V넥으로 파인 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훤히 보일 만큼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어우씨, 백마 가슴.’
[주인님! 흔들리면 안 됩니다. 얼른 술로 보내셔야죠.]
‘그치만 나도 벌주 규칙을 맘대로 바꿨기 때문에 받아주는 수밖에. 안 그러면 게임이 성립 안 되니까.’
"좋아. 이번엔 받아주지. 대신 연사는 없어."
"연사가 뭐야? 연속으로 싸는 거?"
"뭐, 뭔 소리야? 죽을 사의 연사 말이야. 두 번 연속 벌칙이면 무조건 마시는 거라고."
"좋아. 그건 인정. 자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게."
"흐음. 뭐든지 말이지?"
나는 볼빨 간 크리스티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유난히 밝은 머리칼.
출중한 몸매에 도발적인 매력까지.
엘프라는 종족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어우씨, 가슴골 봤더니 갑자기 성욕 돋네.
"크리스티나는 명우 형이랑 애인 사이랬지?"
"응."
"그럼 둘이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해?"
"뭘?"
"뭐겠어?"
첫 질문부터 수위를 확 높였다. 크리스티나는 나중에야 질문 의도를 깨닫고는 어이없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야, 진짜 이도훈. 안 그런 척 하더니 겁나 야해."
"대답 못 하면 두 잔인 거 알지?"
"대답 못 할 건 뭐야. 우린 안 해."
"안 해?"
"응. 그냥 언젠가부터 안 하고 있어."
"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굳이 그녀의 입으로 꺼내게 한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언제부터 명우씨가 잠자리를 피하게 됐는지. 몇 번 졸라 봤는데 맨날 피곤하대서 요샌 그냥 손만 잡고 자."
"저런···."
"뭐야 진짜? 남의 아픈 곳이나 찌르고."
"난 그런 줄 몰랐지."
"됐어. 도훈이 나빠."
"근데 명우 형님은 화장실 가서 왜 안 오지? 혹시 쓰러진 거 아냐? 가봐야 하나?"
"됐어. 알아서 오겠지. 뭘 그렇게 신경 써?"
"만취한 사람이 화장실 가서 안 돌아오는데 그럼 신경 써야지."
"똥이라도 싸나 보지. 그 사람 변비 있거든.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할 거야."
크리스티나는 아예 남자친구가 안 돌아왔으면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두 사람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 참, 코 묻은 아이 과자 뺏어 먹는 수준이네.
"자자, 다시 해. 도훈. 나 승부욕 강해."
"병뚜껑도 없는데 무슨 수로?"
"한 병 더 까면 되지."
"이걸 비워야 새로 시작하지. 무작정 새로 까는 게 어딨어?"
"그래? 그럼 나눠 마실래?"
크리스티나가 벌주로 채운 글라스 잔을 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꿀떡꿀떡-
"아, 아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주량.
"캬~! 쓰다."
"글라스를 한 방에 태워?"
"난 다 마셨으니까 이제 네 차례야."
크리스티나가 글라스 잔에 남을 술을 전부 따랐다. 소주 한 병이 맥주잔 두 잔으로 정확히 나눠진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이건 네가 마셔."
"아니 무슨···."
"못 마시면 벌칙인 거 알지? 난 분명 다 마셨다?"
"참나."
못 이긴 척 술을 받았다.
날 취하게 할 생각인가 본데 어림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술에 있어선 천하무적이기 때문이다.
꿀꺽꿀꺽!
단숨에 글라스를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크리스티나가 참치회에 와사비 푼 간장을 찍어 내 입에 건넸다.
"도훈이, 아~."
"뭔데?"
"안주 하나 드시라고요."
"허, 참."
넙죽 안주를 받아먹는데 참치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봐. 난 안주도 챙겨 주잖아. 너는 깡소주만 먹이고. 못 됐어, 정말."
"흠, 미안. 다음에는 나도 줄게."
"됐고, 바로 시작해. 이번엔 절대 안 져."
명우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두 번째 술이 개봉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쾌속전에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소련여자라도 저렇게 술을 잘 마실 수 있는 건가?’
[보드카의 민족이라 그럴까요? 소주의 도수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죠.]
‘그래도 여자잖아. 난 아이템 먹어서 겨우 버티는데, 진짜 타고난 술꾼이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임자를 잘못 만났다.
오늘만큼은 주당 할애비를 데려와도 나한테 안된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크리스티나는 머리를 썼는지 이번엔 나에게 먼저 병뚜껑을 건넸다. 아까 두 번째에 떨어진 것이, 자신이 먼저 한 번 건드려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림없지.
딱-!
나는 또 다시 한 방에 철끈을 떨어뜨렸고, 크리스티나는 억울함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뭐야 도훈, 진짜! 어디서 수련하고 왔어?"
"몰랐어? 한국에 병뚜껑 철끈 때기 학원이 있다는 거."
"뭐래 정말? 누굴 바본 줄 아나."
"얼른 마시기나 해."
나는 또 다시 술을 콸콸 따랐다.
이쯤 되자 크리스티나도 제법 긴장한 표정이었다.
간의 해독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단숨에 많이 들어간 알코올을 해독해내긴 힘들다. 연거푸 글라스 두 잔이면 장정도 뻗을만한 양이었다.
"으···. 그냥 진실게임 할래."
"글쎄, 궁금한 거 없다니까."
"물어봐 진짜. 아무거나. 다 대답해 줄 수 있어."
"흐음. 정말이지?"
"당연하지."
"그럼···."
뭘 해야 크리스티나가 당황할까?
슬쩍 그녀의 속마음을 읽었다.
{너랑 자고 싶냐고 물어봐. 그럼 바로 ok 해줄 테니까.}
헐!!! 이건 대체···.
[주인님, 바로 콜 하시죠. 기회가 왔을 때 붙잡아야 사내죠.]
‘당연하지!’
하지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갑자기 종업원이 우리 쪽 테이블로 헐레벌떡 뛰어 왔던 것이다.
"크리스티나 혹시 나랑···."
"저, 저기요!"
"네?"
"아까 같이 들어오신 일행분이 화장실에 쓰러지신 거 같은데···. 당장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요?"
나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채, 화장실 변기에 머릴 처박고 기절한 차명우를 부축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과하게 술을 마신 그가 변기 바깥까지 토사물을 흘린 채 인사불성으로 기절해 있었던 것.
"무슨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아이참, 명우씨도···."
결국 나와 크리스티나는 기절한 명우를 양어깨에 부축한 채 쫓겨나듯 가게를 나왔다. 변기를 못 쓰게 만들 정도로 어지럽혀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계산 역시 내 카드로 치러야 했다. 아오, 이게 무슨 꼴이야.
"어떡하지?"
"···3차 가즈아, 3차! 꺼억."
명우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3차를 소리쳤다.
"적당히 좀 해! 술이 떡이 되가지곤!"
크리스티나가 핀잔을 주었지만, 또 다시 기절해버리는 명우를 보고 내가 말했다.
"안 되겠다. 명우 형,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아. 크리스티나, 집 주소 알지?"
"알긴 아는데···."
크리스티나는 무척 속상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진상이 된 남친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파장 때문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때마침 택시가 왔고 나는 명우를 들쳐 엎은 채 택시 뒷좌석에 같이 몸을 실었다. 크리스티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앞 좌석에 타 주소를 말했다.
"음냐, 음냐···."
명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차 때부터 달린다 싶더니 완전히 맛탱이 가버렸다.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집은 여기서 멀어?"
"가까워. 10분이면 도착할 거야."
도착한 곳은 도심 가운데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도저히 제 발로 못 걷는 명우를 나와 크리스티나가 양옆에서 부축해 겨우겨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명우가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크리스티나가 부축하기 힘들어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말했다.
"그냥 내가 업는게 낫겠다. 좀 도와줘."
"괜찮겠어?"
"이 정도는 거뜬해."
크리스티나의 도움으로 명우를 등에 업었다. 술이 만취된 사람을 업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손을 받쳐 들어 올리자 명우가 이상한 소릴 냈다.
"···앙."
"응? 명우씨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마도 위험한 부위를 자극한 것 같았다. 목 뒤로 닿는 숨결이 기분 나쁘게 뜨거웠다.
‘어우 씨발, 이 게이 새끼 같으니! 그냥 확 어디다 던져 버리고 싶네.’
하지만 크리스티나 앞이라 내색할 수 없었다.
"층수 눌러."
"어, 어."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내내 명우가 등 뒤에 올라타 발광을 했다. 몸을 비비면서 자꾸 엉겨 붙는 모습에 살의가 솟구쳤다.
‘확 이 게이 새끼 죽여 버릴까?’
[주, 주인님 참으십시오! 살인은 안 됩니다.]
‘어휴, 진짜. 내가 뭔 꼴이야.’
"악!"
그러나 결국 사단이 벌어졌다.
게이 새끼가 갑자기 내 귀를 빨기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나는 그를 떼어내기 위해 손을 놓았고, 등을 타고 바닥으로 미끌어진 명우가 낙하의 충격으로 구토를 시작했다.
"우에에엑!"
"아, 안 돼!"
"명우씨!"
끝내 내 바지에 토사물을 묻힌 차명우.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게이 새끼를 진짜!’
정말 크리스티나만 옆에 없었더라면 운동화로 얼굴을 짓이겨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남친이라고 걱정하는 그녀 앞에서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어, 어떡하지?"
"후···. 다시 부축해 볼게."
나는 토사물에 적신 바지를 포기하고 명우를 부축해 겨우 집 앞에 이르렀다. 명우는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어우, 진짜 이게 무슨 꼴이야."
"도훈. 집에 남는 바지 있을 거야.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가."
"남의 바지를 어떻게 빌려?""그렇다고 그 꼴로 집에 갈 순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차명우의 오피스텔에 따라 들어간 나는 크리스티나가 챙겨온 츄리닝 바지를 건네받았다.
"미안. 너만 고생하네."
"네가 왜 미안해. 사과는 명우형한테 받아야지."
"그래도···. 내가 남친을 챙겼어야 했는데."
크리스티나가 자책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침실에 처박아 둔 명우에게서 자꾸 잠꼬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3차아! 오늘 쏜다아아!"
"어휴, 진짜 못 봐주겠네."
"원래 저렇게 술이 약해?"
"아니야, 저 정도는. 오늘 따라 많이 마시긴 하더라. 근데 너 씻어야 하는 거 아냐? 안에까지 다 젖은 것 같은데."
크리스티나의 말대로 토사물이 바지를 뚫고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특유의 쉰 냄새까지 올라오는 통에 바지만 갈아입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잠깐 화장실 좀 빌릴게."
"응. 난 명우씨 봐주고 있을게."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를 벗자 팬티 뒤까지 지려 있었다.
"아우 씨발 진짜."
욕이 절로 나왔다.
결국 나는 몽땅 벗을 채 샤워를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닿자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나는 토사물이 묻었던 곳을 비누칠로 빡빡 문질렀다.
그때 화장실문에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아. 나야."
"어? 나 아직 씻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명우씨가 갑자기 또 토를 해서···. 걸레 좀 빨아야 하는데."
"아···. 잠시만. 이리 줘."
내가 문을 살짝 열자 크리스티나가 문틈 사이로 걸레를 들이밀었다.
"여기."
그때 누군가 민것처럼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홀딱 벗고 있는데!
< 906. 단기 알바-1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