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4. 단기 알바-14- >
‘로시. 차명우 정도면 지인이라고 할 수 있나?’
[차명우 사진사요? 흐음. 어제도 같이 작업하고 오늘은 계약서까지 작성했으니 지인의 범주에 간신히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건 왜요?]
‘생각해보니까 크리스티나를 공략하면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업적도 동시 달성일 것 아냐?’
[앗, 그렇군요!]
‘게다가 크리스티나가 명우랑 썩 사이가 좋은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야. 정보창만 봐선 굉장히 소원한 사이로 보이거든.’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으셨군요.]
‘어차피 지인의 여자를 뺏어야 하는 업적이라면, 인연이 거의 없는 차명우 쪽이 낫겠지. 그나마 죄책감이 덜 들 테니까.’
뒷정리가 모두 끝났는지 회식에 참여할 인원들이 스튜디오 1층 밖에서 두런두런 모였다. 오늘 촬영을 마친 모델들을 포함 모두 6명이었다.
명우가 좌중을 보더니 다른 남자스텝에게 물었다.
"경식이는?"
"경식이 오늘 선약이 있다고 해서요. 갑자기 회식 잡힐 줄 몰랐나 봐요."
공교롭게도 여자스텝 둘을 포함 남자 셋, 여자 셋의 황금 밸런스가 맞추어졌다. 차명우의 스튜디오에 소속된 여직원 둘은 딱히 못생기진 않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예쁜 크리스티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고깃집은 예약했지?"
"네, 대표님. 인근 가게로 잡아 놨어요."
차명우가 그새 스텝들에게 지시를 내려놨는지, 여자 스텝 하나가 예약까지 잡아둔 상태였다.
"가시죠. 여기서 도보로 10분 안 걸리는 거립니다."
명우가 앞장서고 나머지 직원들이 뒤따랐다. 나와 크리스는 살짝 뒤처져 걸었는데, 둘 다 모델로 작업했다는 공감대 때문에 자연스럽게 둘이 어울리게 되었다.
"크리스씨, 모델 일은 힘들지 않아요?"
"재밌어."
"재밌어요?"
"응. 처음에는 여기 모델 하려고 온 게 아니었어."
"그럼요?"
"가수 하고 싶어서."
"가수요? 아이돌?"
명우에게 살짝 귀띔으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돌을 화제로 돌렸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부끄럽지만 난 K-pop 동경해서 한국 온 거였어."
"근데요?"
"도전은 해봤는데, 너무 힘들어서. 노래 부르기도 힘들고."
"한국말 잘하시지 않아요? 지금도 엄청 자연스러운데."
"그땐 이렇게 못했어. 그리고 한국 아이돌 되려면 엄청 힘들어. 다들 너무 예쁘고 춤도 잘 춰."
"아."
"오디션 보고 몇 번 떨어져서 풀 죽어 있는데, 면접 본데서 연락이 오러라? 모델 쪽으로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정말요?"
"의류 메이커에서 잡지에 실을 화보 모델을 찾는다고. 이국적인 느낌이면 좋겠대서."
"아, 잘됐네요."
"거기서 명우씨 처음 만난 거야. 그때 사진 작가였거든."
"그랬구나."
명우와의 관계를 좀 더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온 크리스티나에게 당시의 명우는 동앗줄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럼 사귄 지 제법 오래 됐네요?"
"응. 그때부터니까 대충 2년 정도?"
"근데 스튜디오 직원들도 둘이 사귀는지 몰라요?"
"아니, 아는 직원도 있었어. 근데 그 사람 일 그만 뒀어. 지금 직원들은 잘 모를 거야. 명우씨가 소개를 안 해줘서."
크리스티나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 보였다.
나는 둘 사이의 빈틈을 헤집기 위해 더욱 파고들었다.
"왜요? 너무 예뻐서 그런가?"
"응? 내가 예뻐?"
"왜, 남자들은 자기 여자친구가 너무 예쁘면 주변에 감추기도 하거든요."
"왜?"
"혹시나 남들이 채갈까 봐?"
"꺄하하하! 도훈, 웃겨!"
크리스티나가 배를 꺾으며 웃더니 내 등을 팡팡 두들겼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하는 스킨쉽치곤 굉장히 빠르다는 인상이었다.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은 다들 나보고 인형같다고 하긴했어. 난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크리스씨는 엄청 겸손하시네요."
"진짜야. 나 같은 얼굴은 러시아에선 평범해. 더 예쁜 여자들도 많고."
"거긴 김태희가 밭 갈고 그런다면서요? 진짜예요?"
"아니야. 그 정도는. 아무튼 고마워, 도훈. 너도 잘 생겼어."
"제가요? 에이."
"정말로. 난 그래서 처음 봤을 때 되게 유명한 모델인 줄 알았잖아. 근데 대학생이라며?"
"네. 이제 대학교 2학년이에요."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저요?"
"응.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사실 아까는 촬영 중이라 티는 안 냈는데 깜짝 놀랐잖아. 너무 멋있어서."
"너무 띄워주시네"
"진짜로. 특히 여기 근육. 엄청 멋있어."
크리스티나가 갑자기 손을 배 위로 올리더니 복부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고 말았다.
‘어랍쇼? 손이 어디까지 들어오는 거야?’
[외국인이라서 그럴까요? 무척 개방적이군요.]
‘남친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건 좀···.’
나도 모르게 맨 앞서가는 차명우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차명우는 부하 직원들과 대화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크, 크리스씨."
"맞다. 도훈이 몇 살이야? 난 스물 넷."
"전 셋이요."
"그래? 그럼 우리 친구하자."
"제가 한 살 어린데요?"
"무슨 상관? 겨우 한 살 차인데. 존댓말 하지 말고 편하게 불러."
"그, 그래도 되려나?"
"응. 도훈.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크리스가 서슴없이 악수를 청했다.
성격이 좋은 건지, 남자를 밝히는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
악수를 하는데 크리스가 손을 꽉 잡더니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손도 크구나."
"응?"
"아니야. 후후. 도훈이는 다 큰 거 같아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크리스에 당황하는데 앞서가던 차명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가게에요. 들어가실까요?"
다들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남자 스텝 한명과 옆으로 빠져있던 차명우가 나를 불러세웠다.
"도훈씨도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시죠?"
"아, 그럴까요?"
***
"아, 그럴까요?"
"어제 보니 흡연자 시더라고요."
"네."
여자들이 가게에 들어가 자릴 잡는 사이, 남자 셋은 밖에서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우가 물었다.
"아까 보니 크리스티나씨랑 계속 얘기하시던데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신 거예요?"
도훈은 속으로 뜨끔했다. 크리스티나와 애인 사이인 명우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 몰래 봤나 보네.’
"그냥 모델일 관련해서 물었어요. 할 만 하냐고."
"그래요? 관심이 좀 생기셨나요?"
"전문적인 모델까지는 아직 확신은 없지만, 이틀 정도 해보니 은근히 적성이 맞는 것 같아서요."
다행히 차명우의 의심은 그쯤에서 그쳤다.
"제가 볼 땐 도훈씨는 자질이 충분하다니까요."
"제가요?"
"그럼요. 제가 사진작가만 올해 6년 째거든요. 이제껏 많은 모델들을 만나봤지만, 도훈씨는 눈빛이 살아있어요. 그런 친구들이 나중에 꼭 성공하더라고요."
"자꾸 칭찬만 하시니 부담스럽네요. 경력이라곤 학교 화보 촬영에 피팅 모델 한번이 전분걸요."
"이 바닥에 경력은 중요치 않아요. 어차피 모델은 타고나는 거라서, 타고난 자질이 가장 중요하죠. 도훈씬 최고의 자질 갖췄어요."
명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도훈은 왠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뭐라고? 최고의 자질? 이 새끼는 왜케 말 할 때마다 게이스럽지?’
[발음이 조금 그렇긴 하네요.]
‘혹시 정보창 볼 수 있을까?’
[아까 쓰셔서 아직 쿨입니다.]
‘흐음. 왠지 의심스럽단 말이야. 크리스티나랑 사귀는 걸 보면 게이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주인님이 탐나서 그런 걸 수도 있죠.]
‘탐이나? 남자를 왜 탐내?’
[프로 사진가로서 말입니다. 좋은 모델을 보고 흥분할 수도 있죠.]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겠는데.’
"작가님이 너무 띄워주시네요."
"하하. 암튼 제가 한 제안,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넵."
"자, 그럼 우리도 들어갈까요?"
다들 저녁 촬영이라 배를 굶었는지 고기가 나오자마자 다들 군침을 삼켰다. 자기 테이블에 유일한 남자였던 도훈은 집게를 집어 들고 열심히 삼겹살을 구웠다.
촬영할 때부터 계속 도훈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던 여자 스텝이 도훈에게 말했다.
"어쩜, 고기도 잘 구우신다. 근데 고기 드셔도 되는 거예요?"
"네? 왜요?"
"관리하셔야 하는 거 아니세요? 아까 보니까 엄청 운동 많이 하시는 것 같던데."
"아니 뭐 저녁 식사 정도는···."
여자 스텝이 얼굴을 붉혔다. 도훈의 빨래판 같은 복근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도훈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스텝이 싫지는 않으면서도, 괜히 엮이게 될 것이 두려웠다.
‘거참, 인기가 너무 많아도 문제네. 크리스티나 공략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일일이 상대해주기 귀찮은데.’
[얼굴값은 하셔야죠. 원래 잘생긴 사람에겐 세금같은 것입니다.]
‘하긴, 잘만 이용하면 크리스티나의 관심을 유도할지도?’
[관심 유도라뇨?]
‘밴드웨건 효과라는 게 있잖아. 1등에게 편승하려는 심리 말이야. 다른 여자들의 관심이 쏠릴수록 크리스티나도 나에게 더 흥미를 보이지 않겠어?’
[호오. 질투심 유발 작전인가요?]
‘바로 그거지. 오늘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스타일로 나가 볼까?’
도훈은 전략을 수정했다. 일부러 크리스의 옆에 앉은 여자 스텝의 공기밥 위에 잘 익은 고기 한점을 올려주며 립서비스를 날렸다.
"잘 익은 거니까 드셔보세요."
"앗, 감사합니다. 친절하시기까지. 도훈씨 여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겠어요."
"별말씀을."
"여자친구 있지 않아요? 어제 같이 온 여자분이랑 애인사이 맞죠?"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림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봤으니, 누구라도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예림이요? 어려서부터 친구예요. 여자친구는 따로 없어요."
"어머, 진짜요? 너무 친해보이셔서 여자친구인줄 알았는데, 그치 승미야."
"그러니까. 그럼 솔로시구나."
"네, 네. 뭐 어쩌다 보니."
도훈이 계속 다른 여자스텝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자 맞은 편에 앉아있던 크리스티나가 갑자기 술잔을 내밀며 흐름을 끊었다.
"자, 우리 건배해요!"
"와, 건배도 알아요?"
"그럼요! 짠!"
건배를 제의한 크리스티나는 한번에 쭉 소주를 들이켰다. 목넘김도 거의 없이 단숨에 잔을 비운 크리스티나가 곧바로 도훈의 빈 잔에 소주를 들이밀었다.
"자, 한 잔 받으시고."
"술 잘 마시네."
"소주는 물이지 물."
콸콸-.
잔을 따른 크리스티나는 곧바로 도훈에게 병을 돌렸다.
"나도 한 잔 줘, 도훈."
도훈도 곧장 술을 따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살짝 자극을 받은 것 같긴 하지?’
[그래 보이는군요. 근데 주인님 괜찮겠습니까? 술도 약하신데.]
‘아직까진 괜찮아. 적당히 얼굴도 빨개졌으니 이제 슬슬 아이템을 써야 할 것 같아. 크리스는 마지막에 남은 남자를 고른다고 했으니까.’
술을 따른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화장실에 간 도훈은 곧바로 알코 해소 아이템을 삼켰다. 술이 약점인 그로서는 주당인 크리스티나를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템을 복용한 도훈이 물을 빼기 위해 소변기 앞에 서는데, 명우가 뒤따라서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는 도훈의 옆에서 지퍼를 내리더니 그를 보고 씩 웃었다. 도훈은 그 웃음이 묘하게 소름 끼쳤다.
‘뭐지? 취했나?’
"도훈씨는 참 부럽네요."
"···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당황하는데 명우가 계속 말했다.
"좋지 않아요? 크면?"
"······."
도훈은 먹었던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한테 대놓고 대물에 대한 칭찬을 받을 줄이야. 도훈이 말없이 지퍼를 올리는데 명우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아, 취했나."
"많이 드셨나 봐요."
"그냥 주는 데로 마셨더니 이렇네요."
비틀거리던 명우가 갑자기 도훈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알콜 냄새를 훅 풍기며 도훈에게 말했다.
"도훈씨 나중에 애들 보내고 저랑 따로 좋은 데 안 갈래요?"
"좋은데요?"
"에이, 남자들끼리 좋은 데가 어디겠어요?"
명우는 계속 휘청거리며 도훈에게 제안했다. 도훈은 괜히 휘말리고 싶지 않아, 그에게서 멀어지며 대답했다.
"작가님 좀 취하신 거 같아요. 세수 좀 하고 나오세요."
도훈이 정중히 거절하고 화장실을 먼저 빠져나가는데 명우가 그의 뒤태를 보며 중얼거렸다.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하는 건지···."
***
‘어우 씨발. 깜짝 놀랐네.’
명우의 제안이 찝찝했던 도훈은 자리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저 새낀 나를 언제 봤다고 저러는 거야?’
[그러게요. 혹시 주인님과 친해지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한마디로 접대 같은.]
‘접대 같은 소리. 아무튼 눈빛이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뭐야? 도훈, 화장실 간다더니 여기 있었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밖으로 나온 크리스가 팔짱을 끼우고 서 있었다.
"아, 크리스."
"아니야. 계속 펴. 나 담배 냄새 신경 안 써. 피우진 않지만."
"그렇구나. 근데 남자친구랑은 전혀 얘길 안 하네?"
"명우씨? 응. 스텝들에게 모르는 척하기로 했으니까. 왜? 신경 쓰여?"
"뭐···.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고."
도훈의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술이 센 편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업 된 태도로 보아, 어느 정도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도훈이도 은근 겁 많네?"
< 904. 단기 알바-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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