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19화 (886/2,000)

< 902. 단기 알바-12- >

***

"오셨군요, 우선 계약서부터 작성하실까요?"

도훈을 기다리고 있던 차명우는 대뜸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요?"

"네. 단기 알바긴 하지만 아무래도 광고 계약 건이다 보니 이것저것 세부 조항이 많아서요."

"잘 모르는데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겠네요. 잠시만요."

차명우가 양복 안주머니에 만년필을 꺼냈다. 알프스를 연상시키는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이 양반 허세가 좀 있구만?’

뚜껑을 열지 않은 만년필로 계약서 이곳저곳 항목을 짚어가며 명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초상권 관련된 부분입니다. 계약일로부터 2년간 귀하의 초상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번 촬영의 경우엔 특정 부위만 주로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촬영 후 사진에 대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너무 상세하게는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부분만 대략적으로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금액이겠죠?"

명우가 씩 웃더니 계약서를 뒤로 넘겼다.

"이쪽이 계약금 부분입니다. 전문 모델분이 아니라 잘 모르시겠지만, 단기 촬영 치고는 나름 괜찮은 보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얼굴이 안 나오는 걸 감안하면요."

도훈이 속으로 조용히 ‘0’의 개수를 헤아렸다.

‘100만원? 이게 적은 거야 많은 거야?’

보통 대학생에게 100만원이라는 돈은 제법 큰 돈이겠지만 수중에 1억이 있는 도훈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특히 팬티만 입고 찍은 사진이 2년간 무차별적으로 돌아다닐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도훈은 이번엔 돈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괜찮네요."

"계좌 적어주시면 촬영 끝난 후 2~3일 안에 광고 대행사 측에서 입금해 드릴 겁니다. 더 설명해 드릴 부분이 있을까요?"

도훈이 빠르게 계약서 약관을 훑었다. 전생에 많은 계약서를 작성해보고 또 계약을 주체했던 측면에서 봐도, 딱히 문제 될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네. 문제없을 것 같네요."

"아, 외람된 질문이지만 촬영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촬영 신체 부위 주변으로 문신이나 흉터 같은 건 없으시죠? 그러니까 무릎부터 가슴까지요."

"없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사인은 어디다 하면 되나요?"

"이쪽에 이름 쓰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명우가 건넨 만년필을 들고 도훈이 사인했다.

이틀 사이 두 건의 계약을 서명하다 보니, 과거 직장인 이정우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틀에 박혀있던 대학 생활을 벗어나 간만에 사회 활동을 하게 되자 왠지 신이 나까지 했다.

"그럼 바로 촬영에 들어갈까요?"

"네."

"탈의실 들어가시면 속옷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번호를 붙여 놨으니 순서대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가운은 꼭 걸치고 나오시고요. 여자 모델분도 동시 촬영이다 보니."

"동시 촬영요?"

"네. 커플로 찍는 컷이 있거든요. 요샌 커플 속옷이 유행이라나?"

"아···. 그렇군요."

도훈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이쓰. 이러면 더 친해지기 쉽겠군.’

탈의실로 향한 도훈이 옷을 훌훌 벗었다.

전신거울이 바로 앞에 달려 있어 몸매를 훑어보는데 운동을 제법 쉬어서 그런지 어딘지 부족해 보였다.  한창 운동을 할 때만 해도 복근이 선명했는데, 지금은 블러효과를 입힌 사진처럼 흐릿했다.

‘흐음. 볼륨은 봐 줄 만한데, 데피니션이 영 부족하네.’

[아이템으로 보강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이템으로 몸매를 바꿀 수가 있다고? 왜 진작 얘기 안 했어? 그럼 헬스장 다닐 필요도 없었는데?’

[물론 영구적인 변경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좋게 보이게 만드는 거죠.]

‘그게 가능해?’

[체지방을 단기간에 낮춰주는 알약이 있습니다. 효과는 24시간이고요. 한 알에 -5% 정도의 보정 효과가 있습니다.]

‘호오. 가격이 얼만데?’

[마켓에서 검색해 드리겠습니다.]

*마법의 커팅 알약, 700포인트

-24시간 동안 체지방률을 -5% 낮춰줍니다.

도훈이 거울로 몸매를 훑으며 계산했다.

통상 복근이 보이는 수준의 체지방률은 15%내외.

5%이하가 되면 흔히 말하는 껍질만 남을 정도로 근선명도 뚜렷해진다.

‘인바디측정기로 재보진 않았지만, 지금이 대충 10% 정도일 것 같으니 한 알이면 충분하겠지?’

도훈이 마법의 컷팅 알약을 복용했다.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체내의 지방이 쭉 빠지는 가 싶더니, 잠시 후 거울 속에 비친 근선명도가 눈의 띄게 달라져 있었다. 밭고랑처럼 깊이 패인 복근에 빨래판같은 굴곡이 드러났다.

"오오, 대박. 이거 효과 짱인데?"

[주인님의 경우 어느 정도 기초가 탄탄한 편이기 때문에 극적인 변화를 보일 수 있었을 겁니다. 애초부터 근육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턱도 없는 일이죠.]

‘아무튼 이제 좀 자신감 있게 설 수 있겠다.’

겉에 가운을 걸치고 촬영장으로 가자 차명우가 스텝들을 다그치며 촬영 준비에 열심이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재수없는 성격에 비하면 사진 촬영 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상당했다.

"어이 조명! 조도 더 낮춰. 모델들 땀 뺄 일 있어? 그리고 카메라 ISO값 누가 조정했냐? 똑바로 세팅 못 해? 아, 준비되셨나요?"

도훈이 가운을 입고 떨떠름하게 서 있자 차명우가 물었다.

"네. 바로 찍으면 되나요?"

"일단 여성분부터 먼저 촬영 가겠습니다. 그전에 서로 인사부터 나누실래요? 나중에 민망할 수 있으니까요."

"인사를요? 러시아 사람이라지 않았나요? 뭐라 해야 하더라?"

"의사소통은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저도 아까 잠시 얘기 나눴는데 한국말을 되게 잘 하시는 분입니다."

"러시아 사람이 한국말을 잘 한다고요?"

"저도 잘 몰랐는데 모델분이 K-POP에 관심이 많아 한국어를 따로 배웠다고 하더군요. 요새 러시아에서 한국 음악이 인기라 아이돌 데뷔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오, 정말요?"

때맞춰 여성 촬영자가 여성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백발에 가까운 눈부신 금발에 눈동자가 새파란 늘씬한 이국적인 미인이었다.

‘오, 완전 인형인데?’

순혈 슬라브 여성의 놀라운 미모!

김태희가 밭맨다는 러시아 출신 미인의 위압감은 도훈조차 기 죽게 했다.

‘진짜 대박이다. 피부도 너무 하얗고, 코는 왜 저렇게 오뚝한 거지?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안농하세요? 크리스티나에요. 크리스라고 불러주세요."

한국말을 할 줄 안다더니 대뜸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크리스티나였다. 악수를 청한 러시아 미인을 향해 도훈이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도훈입니다."

"또훈?"

"도-훈."

"아, 도훈. 제가 한국어 좀 못해."

"충분히 잘하시는데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도훈과 크리스티나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준비가 끝난 차명우가 사인을 보냈다.

"자 그럼 바로 슛 들어갈게요. 크리스티나."

명우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크리스티나가 곧바로 가운을 벗었다. 너무나 스스럼없는 태도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말았다.

‘어우씨, 아무리 모델이라도 남자 앞에서 저렇게 훅훅 옷을 벗냐?’

도훈은 자신이 부끄러워하면 오히려 상대가 무안해 할 거라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나의 몸매를 구경했다.

‘캬, 몸매도 좋고.’

인형 같은 외모도 대단했지만, 몸매는 더 훌륭했다.

늘씬한 체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다란 가슴, 한 손에 잡힐듯한 홀쭉한 허리, 곧게 쭉 뻗은 다리는 8등신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

‘정말로 비현실적인 몸이군. 설사 양희주라도 옆에 서면 발리겠는데?’

[희주양도 조부모대에 러시안 피가 섞였다지 않았나요?]

‘아무리 그래도 혼혈과 순혈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지. 희주가 쿼터면 이쪽은 토종이니까.’

[침 좀 닦으십시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야.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스텝들 표정을 보라고.’

과연 도훈의 말대로였다. 조명 담당과 보조로 있던 스텝들 역시 크리스티나가 내보이는 환상적인 몸매에 다들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동양인의 유전자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완벽한 8등신 미인이 주는 위압감이 촬영장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후아-. 장난 아니네, 진짜.’

하지만 차명우 감독은 확실히 프로였다. 그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크리스티나를 대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고 피사체로만 상대하는 것 같았다.

"자, 포즈 잡아보세요. 살짝 힙 들고. ok!"

크리스티나 역시 프로.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팬티와 브라만 걸친 고수위 노출 상황에도 낯빛조차 변하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프로 모델이란건.’

[그러니 돈 받고 하겠죠.]

‘난 저 정도는 못 할 것 같은데···.’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자 차명우가 도훈을 호출했다.

"도훈씨, 준비 되셨죠?"

"이제 제 차롄가요?"

"네, 바로 갑시다. 가운 벗어 주시고요."

"네."

스튜디오에는 차명우와 크리스티나를 제외하고도 너뎃명의 스텝들이 더 있었다. 그중에는 여자도 둘 포함되어 있어서 왠지 그들 앞에서 옷을 벗기 민망했다.

‘아,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니.’

[주인님. 그러지 말고 메쏘드 담배라도 한 대 태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기를 하란 말이야 나보고?’

[주인님이 자신감 넘치게 행동해야 상대도 좋은 인상을 받지 않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상대 쪽은 프로 모델이라는 걸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

옷을 벗으려던 도훈이 다시 가운 끈을 여몄다.

"저, 감독님."

"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수 있을까요?"

"혹시 큰 거?"

"아닙니다."

"네, 그럼 다녀오세요. 잠시 결과물 좀 보고 있겠습니다."

도훈이 양해를 얻어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잠시 후.

도훈은 아까보다 훨씬 당찬 표정으로 스튜디오에 돌아왔다.

"이제 준비 됐습니다."

"ok. 바로 갑시다."

도훈이 가운을 좌우로 벌렸다. 어제는 피팅 모델로서 촬영을 했기 때문에 그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은 대부분 처음.

"우, 우엇!"

"어머나!"

그러나 도훈이 가운을 벗는 순간 남자 스텝들은 말문을 잃었고, 여자 스텝들은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복근을 지나치게 부각했나?’

도훈이 사태파악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는데, 촬영 감독인 차명우가 급히 뛰어오더니 도훈의 가운을 도로 입히며 말했다.

"도, 도훈씨. 저랑 잠시 얘기 좀."

"네? 뭐가 잘못되었나요?"

"일단 남자 탈의실로 가시죠."

도훈을 탈의실로 데려온 차명우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저도 뭐, 도훈씨가 프로 모델이 아닌 건 감안하고, 남자로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아닙니다만···."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 아무리 그래도 촬영 중에 그렇게 흥분해 버리면···."

"네?"

도훈이 뜨악하며 소리쳤다.

"제가 흥분을 했다고요? 지금 무슨 소리에요?"

"그럼 아닙니까?"

명우도 딴청을 피우는 도훈의 태도가 고까웠는지 맞서 언성을 높였다. 도훈도 어이없다는 듯 따졌다.

"제가 어딜 봐서 흥분했다는 건데요?"

남자끼리라 그런지 이번엔 도훈이 과감하게 가운을 벗었다. 삼각팬티 모양의 브리프를 입은 그의 물건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것을 보고 명우가 지적했다.

"직접 거울로 한 번 봐보세요."

도훈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뭐야? 설마 이 상태가 내가 발기한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도훈의 물건은 삼각팬티처럼 압박감이 있는 속옷을 착용한 상태로는 보통사람보다 1.5배 이상 튀어나와 있었다. 원체 대물을 가진 그로서는 노발기 상태에서도 그 크기를 감추기 어려웠던 것. 특히 길이보다는 두께가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모

르는 사람이 보면 충분히 오해를 살만 했다.

"저, 작가님. 오해하시나 본데 이거 커진 거 아닙니다."

"아, 아니라고요?"

"네. 제가 좀···."

도훈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명우는 할 말을 잃고 빤히 팬티를 바라보다 무안했는지 난처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군요."

"아닙니다. 다른 분 반응을 보니 다들 비슷하던데요."

"허참. 이 부분은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팬티 모델은 사실 너무 커도 문젭니다. 그게 너무 강조되면 사람들이 팬티를 보는 게 아니라 물건에 집중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어떡하죠?"

"잠시만요. 스텝들하고 의논해보고 오겠습니다."

명우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도훈은 이 황당한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이씨, 좆이 크다고 퇴짜맞을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대물이 늘 좋기만 한 건 아니군요.]

‘낸 들 알았나? 그래도 사각입으면 별로 티는 안 나는데.’

도훈이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후 명우가 손에 뭔가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왔다.

"저, 도훈씨. 스텝들하고 상의를 해봤는데, 몸매가 너무 좋아서 다른 모델로 대체하긴 아쉽다고 하네요. 도훈씨 잘못이라고 볼 수도 없구요. 그렇다고 물건을 줄일 수도 없으니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명우가 도훈에게 손에 들고 온 유리테이프를 내밀었다.

"뭔가요, 이건?"

"공사라는 말 들어 보셨죠? 성인 배우들 촬영할 때 쓰는 거요."

"서, 설마···."

"네. 다소 불편하시겠지만 원활한 촬영을 위해 당분간 이걸 이용해 감춰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도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서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오늘 촬영을 해야만 러시안 모델 크리스티나를 공략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젠장. 별 지랄을 다 해보네.’

도훈이 테이프를 받아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금방 재정비해서 나갈 테니 잠시 자리좀 비켜주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우도 뻘쭘했는지 곧바로 탈의실을 나갔다.

< 902. 단기 알바-1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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