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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918화 (885/2,000)

< 901. 단기 알바-11- >

통화를 마친 도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주인님이 업적에 목말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선물이 내려오는군요.]

‘그럼 내일 하루는 여의사 공략, 그리고 러시안 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건가?’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십시오.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하루 만에 눕히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물론 쉽지 않지. 하지만, 스킬에 제한이 없는 업적이라는 것도 알아야 해.’

[그렇군요. 간만에 편히 가겠는데요?]

***

물론 세상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도훈 환자분? 이도훈 환자분 들어가세요. 안 계시나요?"

무려 두 시간의 기다림 끝에 내 순번이 왔다. 잘나가는 재활의학과 의사라더니 대기하는 환자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 여기요."

"이쪽 1 진료실입니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단말 머리에 테가 얇은 안경을 쓴 여의사였다.

‘오, 박지애 말대로군. 전문의치곤 엄청 젊어 보여. 예쁜데 지적이기까지 하다니···.’

가운 구석에는 ‘안소영’이라는 이름이 푸른색 자수로 박혀 있다. 컴퓨터를 보고 있던 그녀가 나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앉으세요."

"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발목이 좀···."

"발목요? 혹시 운동하시나요?"

소영의 목소리는 상냥하긴 했으나, 사무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하긴 내 앞에 대기자만 서른 명이 넘었으니, 못해도 하루 족히 100명 이상의 환자를 상대한다는 뜻이리라. 사람에게 흥미를 보이긴 여간해선 쉽지 않을 것이다.

"배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 발리 볼."

외국 대학을 나왔다더니 곧바로 유창한 발음을 굴렸다. 립스틱 진한 도톰한 입술이 섹시하게 오물거렸다.

미인은 미인이네. 농익은 맛도 있고.

"보통 배구같은 운동은 무릎이나 어깨가 더 위험하지 않나요?"

"네, 거기도 좋진 않습니다. 근데 저번에 착지할 때 다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저런."

"그때 대충 파스만 뿌렸는데, 제대로 조치를 안해서인지 걸을 때마다 복숭아뼈 근처가 불편하네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자를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일단 한 번 보죠. 다친 다리 여기에 올려 볼래요?"

소영이 발 받침대를 가리켰다. 나는 신발을 벗은 뒤 바지 밑단을 걷어 발목이 훤히 드러나게 했다.

"이쪽 발목이 불편하다고 하셨죠?"

"네."

"안쪽으로 한번 꺾어 볼래요?"

"꺾어요?"

"살짝만."

소영의 말에 따라 발목을 안쪽으로 꺾었다.

"이번엔 바깥쪽으로요."

"네."

안팍으로 꺾는데 소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안 아프신가요?"

"네?"

"인대를 다쳤으면 그 정도 꺾일 때 아파야 하는데?"

‘아차.’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연기인 것이 들켰다간 첫인상부터 안 좋게 남을 것이다.

"···아, 아픕니다."

"아파요? 어떻게 아프죠?"

"음, 막 쿡쿡 쑤시듯이. 바늘로 복숭아 뼈 주변을 찌르는 것처럼요."

"흐음. 일단 엑스레이부터 찍어보죠. 엑스레이로 판별이 어려우면 CT나 MRI를 찍어야 할 수도 있어요. 상태를 정확히 진단해야 수술로 갈지 재활치료를 들어갈지 결정할 수 있거든요."

소영은 그렇게 말하더니 컴퓨터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말했다.

"그럼, 다음 환자분 들어오라 하세요."

"아···, 저 끝났나요?"

"네?"

"벌써 진료 끝난 건가요?"

"일단 사진을 봐야 판독이 될 것 같아요. 방사선과 가서 찍고 다시 부를게요."

"네."

여전히 소영은 사무적이었다.

결국 나는 2시간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뒷사람에 밀려 쫓겨나듯 진료실을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밖에 서 있는데 간호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빠르게 말했다.

"이쪽 바닥 파란선 따라가시면 방사선과 나오세요. 거기서 찍고 다시 오세요."

간호사는 안내를 하고는 제 할 일이 바쁜지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복도에 덜렁 혼자 남겨진 나는 벗었던 신발을 구겨 신으며 고민에 빠졌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은데?’

[병원 진료시간에 공략할 대상을 만나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러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네···. 쫓겨나는 데 딱 2분 걸렸네. 아니 아무리 카사노바라도 2분 만에 어떻게 여자를 꼬시냐?’

[게다가 의사분은 주인님 발목만 쳐다 보더군요.]

‘그지? 내 얼굴엔 관심도 없었지?’

[사실 진료 보기도 바쁜 와중에 환자가 잘 생기든 예쁘든 감상할 여유나 있겠습니까?]

‘하-. 완전 낭패군. 전략을 잘못 세웠어. 이런 식으로 만나서 될 게 아니었는데.’

[박지애 양을 이용해 병원 사정을 좀 더 알아볼 걸 그랬군요.]

‘이미 늦었어. 일단 X레이부터 찍고 와서 보자. 아직 끝난 게 아니니.’

X레이를 찍고 돌아와 다시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고, 간호사들은 쉴새 없이 차트를 들고 뛰어다녔다. 이곳이 병원인지 도떼기시장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애는 이런 정신없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건가? 흐음, 어제 내 전화를 그렇게 급하게 끊더니 엄청 바빴겠구나.’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내 생각에 이거 단기공략으론 절대 못 끝내.’

[그럼요?]

‘일단 오늘은 첫인상만 강렬하게 남기고 재진 때를 노려야겠어.’

[모처럼 포기가 빠르시군요.]

‘전략적 일보 후퇴라고 해두지.’

"이도훈 님? 들어가세요."

촬영결과가 도착했는지 간호사가 다시 내 이름을 호출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환자 쪽으로 돌아간 모니터 위로 내 발목을 찍은 X레이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던 소영이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집중할 때 콧잔등에 주름이 가는 타입이었는데, 귀엽게 느껴졌다.

"X레이만 봐선 뼈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 확실히 인대 쪽이 의심되긴 하는데···."

"정말로 아픕니다. 이것 때문에 점프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요."

"흐음. 그렇다고 무작정 MRI를 찍을 수도 없고···."

소영이 모나미 팬을 뒤집어 책상을 두드렸다.

고민에 잠긴 모습조차 어딘가 이지적이었다.

"일단 이렇게 하죠. 만약 정말로 인대 손상이라면 최대한 해당 부위를 안 쓰는 게 중요해요."

"네."

"우선 반 깁스라도해서 잡아준다음···."

"기, 깁스요?"

"네, 왜요?"

"아··· 저기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깁스는 좀 곤란한데요."

"음, 환자분.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 치료를 놓치면 영구적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운동기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운동한다지 않았어요?"

"운동은 취미 삼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깁스는 정말로 안 됩니다. 제가 그냥 깁스할 거였음, 정형외과로 바로 가지 뭐하러 재활치료 쪽으로 왔겠어요? 치료를 통해 낫을 방법은 없나요?"

"현재로선 깁스가 최선입니다. 내 말이 못 미더우면 정형외과에서 다시 진단을 받아와도 좋아요."

"아니 그래도···."

"거, 참 젊은 학생이 고집을 부리시네?"

안소영이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슬쩍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거기 나이도 적혀 있을 것이다.

"이도훈 씨. 치료 받고 싶어서 병원에 왔으면 의사 말을 따라주셔야죠."

"아···. 근데 그러면 일을···."

"왜요?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택배 상하차요."

"상하차? 물건 나르는 거요?"

"실은 저 2학기 등록금 벌려고 방학 때 하는 거거든요. 근데 깁스하고 나면 인력사무소에서 절 안 써줄 거라고요. 잘리는 거나 다름없죠."

"저런,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냥 저 치료 받았다고 치고 갈게요."

"아, 아니 저 이도훈 환자분!"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문 쪽을 향해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악!"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발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놀란 소영이 황급히 내 쪽으로 뛰어왔다.

"괘, 괜찮으세요?"

"으윽, 발목이···."

나는 생생한 발목을 붙잡고 연기를 시작했다.

"크흑, 선생님 발목이 너무···."

"바닥을 딛지 말고 있어요. 그렇지. 그냥 바닥에 누워요. 심호흡하고."

소영은 응급상황이라도 되는 것처럼 복숭아뼈 근처를 어루만졌다.

"여기가 아픈가요?"

"네."

"이쪽은요?"

"아, 아픕니다."

소영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쪼그려 앉다 보니 치마 사이가 힐끔 보이려고 했다.

‘좀만 더 짧았으면 팬티도 구경하는 건데···.’

"급한데로 냉찜질이라도 시켜 줄게요."

"아···, 아닙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무리 안해도 되요. 그런 걸로 비용을 받고 그렇진 않으니까. 일어설 수 있겠어요?"

"네. 일어나 보겠습니다."

나는 일어나는 척하며 다시 고통이 엄습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으윽."

"자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결국 소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절뚝거리며 병원 베드에 걸터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환자를 돕는 게 제 일인데요. 일단 여기서 조치를 하긴 그렇고 간호사 불러줄 테니 물리치료실로 가세요."

"네, 네."

"그리고 깁스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고요."

"제가 다음에 다시 와서 결정해도 될까요?"

"흠. 아무튼 무리는 절대 금물이에요. 지금 증세를 보니까 신경이 눌리는 걸지도 몰라요."

"네."

나는 간호사를 따라 절뚝거리며 진료실을 나섰다.

물론 그 사이 안소영의 정보창을 미리 따놓기도 했다.

"물리치료실은 이쪽입니다."

간호사가 친절히 안내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했다.

"아니요. 이젠 괜찮아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아깐 갑자기 너무 아팠는데 많이 괜찮아 졌어요. 보세요."

나는 보란 듯이 제 발로 걸어 보였다. 간호사는 바쁜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러시면 뭐. 원무과는 1층입니다. 수납하고 가세요."

"네."

난데없이 생쇼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으니 소영도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1층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안소영의 정보창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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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안소영, (비처녀, 일시 24세 5개월)

나이 : 34 #여의사#알파걸#센 누나

호감도 : 64/100

개방성 : A

성감대 : 엉덩이, 발바닥, 뒷덜미

*애무 포인트 : 펨돔 타입의 여성입니다. 남자를 짓밟거나 괴롭히는데 희열을 느낍니다.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철저한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성욕지수 : 매우 높음. 공략팁

*그녀는 철저하게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국 존스홉킨스의대를 나온 우수한 제원인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실력으로 이름난 여의사입니다.

-어려서부터 완벽주의적 기질이 강했으며 그 강박으로 왜곡된 성욕이 생겼습니다.

-특히 유학 시절 사귄 남자친구의 영향으로 지배적인 성향에 눈을 떴으며, 소프트한 SM플레이를 즐긴 경험이 있습니다.

-1년 전 귀국한 그녀는 바쁜 일정 탓에 솔로로 지낸 기간이 오래되어 욕구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상냥하고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지만, 남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지배적이고 독단적인 성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타입입니다.

-추천행동 : 그녀에게 사인을 보내세요. 그녀는 자신의 단짝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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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을 모두 읽은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핫, 뭐, 뭐야 이 여자?"

[세상에···. 겉보기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내용이군요.]

‘펨돔? 그러니까 여성지배적인 타입이라고? 전혀 티가 안났는데?’

[철저한 이중생활이군요, 정말.]

‘그러게. 체구도 여리고 상냥해서 전혀 눈치 못 챘잖아.’

펨돔 타입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특히 체육과 학과장 마유미는 전형적인 여장부 스타일.

그러나 마유미는 척 봐도 떡대도 크고, 성격이 시원시원한 편이라 어느정도의 남성성이 느껴진다. 왠지 공격적일 것 같고 남자를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란 걸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소영의 경우는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하여간 유학이 문제로구만. 대체 어떤 놈을 만났길래 저런 이상성욕을 갖게 된 거지?’

[그래도 소프트하다고 하니까 유미양처럼 격렬하진 않나 봅니다.]

‘어으, 유미는 생각 만해도 치가 떨리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음에 또 봐야지. 그땐 되도록 진료실에 오래 있어야겠어. 그래야 소영의 취향을 저격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공략 방법을 찾으신 건가요?]

‘상대가 변태라서 차라리 쉽게 됐어. 참나, 그나저나 사람 고치는 의사가 채찍들고 사람 때리는 건 상상도 못했네.’

야한 가죽옷을 입은 안소영의 모습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으···. 일단 스튜디오 쪽으로 움직이자."

저녁 6시부터 촬영이 잡혀 있었다.

오늘의 두 번째 공략인 러시안 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저녁을 혼자 대충 때우고 차명우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1층 데스크의 직원이 나를 알아보는지 곧바로 안내했다.

"오셨어요?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 901. 단기 알바-1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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