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6. 단기 알바-6- >
충격적이다.
로시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나의 세계관을 완전히 짓뭉갰다.
-여전히 플레이어가 선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선과 악.
이제껏 이분법적으로 여겨오던 플레이어와 PK단의 관계가 완전한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절대 착한 놈이 아니다.
나처럼 착하지 않은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면, 나쁜 플레이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일수도 있다.
‘···뭐야. 그럼 플레이어는 대체 뭔데?’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사명을 품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특권이라고요.]
‘그 사명이 설사 잘못된 것일지라도?’
[본인은 결코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니까요. 마치 지금의 주인님처럼.]
로시의 말이 뼈를 때렸다.
펙트로 오지게 맞았다.
생각해보면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후에 핵무기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현재까지도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류 최악의 살상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은 정말로 선인인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PK단도 그들 나름의 정의를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는 플레이어가 인류에게 해악이 된다고 믿는다면요.]
‘젠장!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려주는데?’
[주인님이 혼란을 겪을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세상엔 훌륭한 업적을 남긴 플레이어도 많지만, 반면 인류를 위기로 몰고 간 플레이어 역시 존재했습니다. 애초 플레이어는 신의 힘을 빌린 존재일 뿐,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주인님께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법이란 결국 최소한의 도덕이다.
생각해보면 플레이어의 제약이란 것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간통죄가 남아있었다면 나는 진즉 범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불과 몇십 년 전에 번복되었을 뿐이다. 또한 한국에선 불법인 대마초가 합법인 국가도 있다. 성매매는 어떻고?
결국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플레이어가 선인이라는 생각은 내 착각이었던 것이다.
‘난 이제껏 PK단이···.’
[주인님.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플레이어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바로 주인님의 목숨을요.]
‘······.’
로시의 경고가 무섭게 다가왔다.
처음부터 이건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었다.
서로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뿐.
플레이어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PK단은 플레이어가 만에하나 행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하, 씨발. 이거 진짜 골때리게 됐구만."
[네? 혹시 지금 실성하신 건···.]
‘뭔 소리야? 난 아주 멀쩡하다고.’
[갑자기 뜬금없이 웃으셔서.]
‘웃기지, 그럼 이게 안 웃기냐? 결국 답도 없는 싸움이란 거 아냐?’
[흐음.]
‘난 또 플레이어를 죽이고 다닌다니 천하의 개새끼들인 줄로 알았잖아?’
[분명 그건 사실입니다만.]
‘근데 지들도 제 나름대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거라면서?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뭐가 말입니까?]
‘PK단을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 말이야.’
[주인님 지금 정신상태가 살짝 불안한 것은 아닌지···.]
‘아니. 아주 명쾌해졌어. 한마디로 생존경쟁이란 소리잖아?’
[예?]
‘서로 다른 목표가 충돌해서 더 약한 놈이 부러지는 것뿐이라고. 난 또 이 싸움이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네?’
[주, 주인님···.]
‘오케이. 알았어.’
[뭐, 뭘 알겠다는 겁니까, 자꾸?]
‘그러니까 부딪혀서 안 부러지면 되는 거지?’
[네?]
‘그냥 내가 더 강한 존재가 되면 그만인 거잖아. 안 그래? 힘을 키워서 놈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게 만들면 되는 거라고. 결국 놈들도 일종의 플레이어라면 레벨 더 높은 놈이 장땡일테니까.’
[크흠.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만···.]
‘두고봐. 더 강해져 보이겠어. 내가 섹서라 불리하다고? 천만에. 비록 전투계열은 아니지만, 난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어. 그게 내 클레스의 특징이고. 한마디로 레벨로 찍어 눌러버리면 된다는 소리야. 포인트 모아서 템빨로 조져 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아-. 어째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요.]
‘아니. 넌 잘했어, 로시. 내가 지금까지 PK단에 가졌던 두려움은, 놈들이 우릴 해하려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야. 귀신의 경우도 그렇잖아. 모르니까 무서운 거야. 알고 나면 별것 없거든. 이제 PK단의 목적을 알았으니 적절히 대비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말해줘서 고마워, 로시. 덕분에 폭렙을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강하게 되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인거죠?]
‘물론이지.’
목표가 생겼다.
나는 결코 PK단에 사냥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놈들에게 누가 진짜 사냥꾼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겠다.
어차피 이것이 생존경쟁이라면, 살아남는 놈이 결국 정의다.
이긴 놈이 정의다.
***
간만에 본 하린은 더 예뻐져 있었다. 물이 오르고 있달까?
확실히 20대 초반의 여자들은 포텐이 있다. 새내기 때 알게 된 젖비린내 나던 동기가, 졸업할 때쯤이면 풋풋한 아가씨가 되는 것이다.
"하린아."
"오빠! 뭐하러 마중까지 나왔어요."
하린이 나에게 푹 안겼다.
빵빵한 가슴은 여전하다.
"뭐야. 누가 보면 남친인 줄 알겠네."
"피-. 하루만 해주면 어디 덧나요?"
내가 슬쩍 밀어내자 하린이 입술을 쭉 내밀고 투정했다.
"그래도 엄연히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인데 어딜 감히."
"됐어요. 그딴 새끼. 아주 사이비 종교에 빠져가지고."
나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장소를 옮겼다.
"밥은 먹었어?"
"아직요. 오빠는요?"
"너 기다리느라 안 먹었지."
"오예, 그럼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응? 왜 니가?"
"저 지난달에 과외 시작했거든요."
"오. 진짜?"
"그럼요. 충주에선 저희 교대가 가장 점수 높거든요. 누군가 그러던데? 한강이남으론 최강일지도 모른다고."
"의대도 있는데?"
"앗, 문과 말이에요."
"아무튼 고생해서 벌었는데 뭘 굳이 사려고 해."
"그래도요. 저도 오빠한테 대접해보고 싶었다고요."
"알았어, 알았어. 그럼 네가 사."
"뭐 드시고 싶어요? 오늘은 비싼 거 드셔도 돼요."
"정말? 그렇다면···."
잠시 후.
"에이, 짬뽕이 뭐야 짬뽕이! 기껏 사준다는데."
우리는 근처 중화요리 집에 왔다.
"왜? 짬뽕이 어때서? 심지어 삼선이야."
"그래도 기분 좀 내게 해주지. 시험도 끝났는데."
"아참, 그래. 시험은 잘봤어?"
"잘 봤죠."
"진짜?"
"아니 시험지만 잘 봤다고요. 헤헤."
나는 재빨리 나온 짬뽕 국물을 떠 먹으며 말했다.
"너 공부 안해?"
"해요."
"초등도 임용 쳐야하는 거 아냐?"
"쳐야죠. 그래도 우린 사범대보단 사정이 낫잖아요. 경쟁률이라고 해봐야 2:1 겨우 넘는데."
"또 어찌 될지 모르지. 늘 변화에 대비해야 해."
"알았어요. 밥 먹는데 잔소리는 진짜. 남친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짜장을 시켜 먹던 하린이, 춘장을 입가에 묻히며 불만을 터뜨렸다. 나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남친이 아니니까 그렇지. 잊었어? 내가 너 과외 선생이라는 거."
"아, 맞다. 오빠 나 과외해주기로 했지? 헤헤."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니에요."
"맨날 응큼한 생각이나 하고."
"왜요? 오빠가 약속했잖아요. 방학하면 저랑 놀아주기로."
"내가 그랬어?"
"그새 까먹었어요? 제가 증거 보여드려요?"
하린이 갑자기 짜장을 먹다 말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나와 깨톡을 주고받은 부분을 찾아 들이밀었다.
"봐요. 저번 달에 나 잠깐 주말 알바하러 서울 올라왔을 때. 그때 새벽에 오빠가 그랬잖아요. 방학해서 서울 올라오면 놀아준다고."
폰을 보자 기억이 떠올랐다.
빻은 얼굴 미션을 수행하느라 텐프로 여름과 함께 맥주를 사러 편의점을 들렀던 때의 일이었다.
‘맞네, 그때 편의점에서 마주쳐서 얼마나 식겁했던지.’
[그나마 주인님이 빻아 있길 다행이었죠. 마주쳤으면 볼만 했을 텐데요.]
‘놀리냐? 내가 다시는 빻나 봐라.’
"그래서 마중도 나왔잖아."
"쳇. 첨에는 튕겼으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아니라니까. 남친 있는 줄 뻔히 아는데 방학하자마자 서울로 튀면 의심할까 봐 그랬지."
"오빠 얘긴 꺼내지도 마요. 하, 진짜 졸졸 쫓아다닐 땐 언제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남친으로 넘어갔다.
나는 홍합을 까서 하린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도 좀 먹어. 여기 해물이 맛있다."
"입에 바로 넣어줘요."
"너도 젓가락 있잖아."
"얼른요. 아~."
하린이 아이처럼 떼를 썼다.
하는 수없이 젓가락에 홍합살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자 하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름 내 젓가락을 쪽 빨았다.
"엇, 뭐 하는 거야?"
"간접키스?"
"어휴, 진짜. 너 남친한테도 이러냐?"
"제가요? 아뇨?"
"왜? 그래도 1학기 내내 사귄 거 아냐?"
"제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좋아서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럼 왜 만나? 좋아하는 사람 사귀면 되지."
"진짜 제가 좋아하는 사람 사귀어도 돼요? 진짜?"
하린이 커다란 눈을 깜찍하게 깜빡였다.
왠지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말을 돌렸다.
"···아니 뭐. 사귀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
"네버."
"왜? 그렇게 사이가 별로야 요새?"
"제가 접때 말했죠? 남친 어차피 제주도 사니까 방학 때 집으로 내려가면 못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시험 끝나면 1박 2일로 부산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어, 부산여행. 그거 캔슬 됐다면서."
"그니까 이 새끼가 갑자기-."
"에이, 그래도 남친보고 새끼가 뭐야?"
"암튼 오빠가 갑자기 호텔 예약도 다 해놨는데 취소시키는 거예요."
"아까 말한 그 사이비 단체?"
"네. 어휴, 요즘 진짜 제정신이 아니라까요? 아주 단단히 돌았어요."
"아니 근데, 어쩌다 거길 가입하게 된 거야?"
"그게 말이에요, 첨에는 그런 단체가 아니었거든요?"
"응?"
하린이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에는 수많은 동아리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동아리는 재학생 위주로 돌아가지만, 몇몇 동아리는 졸업생이나 일반인이 뒤섞이기도 한다.
"아는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 와서 갑자기 클래식 기타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더래요."
"클래식 기타?"
처음 하린의 남자친구가 가입한 동아리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였다. 하지만 재학생은 거의 없고, 졸업해서 현직 초등교사인 선배 한 명과 나머지는 외부인들뿐. 심지어 동아리방도 학교에서 정식 허가가 나지 않아, 학교 밖에 건물을 임대해 쓰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의 권유로 들어온 입장에 바로 거절하기도 뭐해서 한 달 정도 기타를 배우는 마음으로 착실히 다녔다고 한다.
"근데 어느 날부턴가 동아리를 다녀와서 저한테 이상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무슨?"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놈들의 영입방식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음모론 같은 이야기였어요."
"음모론?"
"그 왜 일루미나티라던가 프리메이슨 그런 거 있잖아요."
"비밀결사?"
"네. 거기서 무슨 플레이어 어쩌고 얘기를 했다는데···."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PK단은 정체를 숨기고 캠퍼스에 침투한다.
가령 우리 대학에서는 오타쿠 만화 동아리로, 충주교대에서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동아리같지만, 알고 보면 동아리 활동은 순 위장이다. 실제로는 이를 통해 PK단의 첩보원을 확보하는 양성소라는 말이 정확하다.
"혹시 다른 이야기 더 들은 건 있어?"
"제가 듣다가 하도 수상해서 꼬치꼬치 물어봤거든요.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잠시만요. 앗, 남친 전화."
"남친?"
"오빠 저 잠깐만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하린이 급히 일어섰다.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 가지마."
"네?"
"여기서 통화해."
"아, 아니 그래도···."
"오늘은 내가 니 남친 하라며? 남친 말 안 들을 거야?"
넌지시 손등을 긁으며 시그널을 보냈다.
하린이 갑자기 눈빛이 야시시하게 변하더니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정말로 남친 해주는 거예요?"
"그래. 그니까 내 앞에서 통화해."
"아잉, 오빠가 짓궂은 데가 있네."
되도록 미남계(?)는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남친이라는 작자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스피커 폰으로."
"진짜요?"
"응."
하린이 스피커로 전화하더니 바닥에 폰을 내려놓고 통화를 시작했다.
"어, 오빠. 나 방금 서울 왔어."
-잘 도착했어?
"응. 지금 친구 만나서 점심 먹는 중."
후르르륵-
하린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짜장을 면치기 했다.
-아이고, 늦게 먹는구나. 울 애기 배고팠겠다.
‘울 애기? 어욱, 토할 것 같은데.’
[애칭인가 보죠.]
하린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통화했다.
"근데 왜? 오빠 오늘 동아리 모임 있다며."
-어. 잠깐 시간이 나서···. 하린아. 미안해 오늘 부산 여행 같이 가기로 했는데.
하린이 콧방귀 뀌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야. 그럴수도 있지. 중요한 일있다며. 나도 어차피 서울 와서 친구 만났으니까 괜찮아."
-응. 다음엔 꼭 같이 여행가자.
"그래. 오빠 나 그럼 밥 먹을게."
뚝-.
하린은 더 길게 통화하기 싫었는지 금방 끊어 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데?’
< 896. 단기 알바-6- > 끝
ⓒ 성난불기둥